

왕자가 목숨처럼 아끼는 그녀
갑작스러운 두통에 이화린이 눈을 떴다.
비계가 잔뜩 낀 얼굴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놈은 주둥이를 잔뜩 내밀고 있었다.
"예쁜아! 그 동안 날 유혹하느라 수고 많았어. 이제 내가 제대로 품어 주마."
그는 이화린의 계모 오여설의 사촌인 오덕무다.
7년 전, 태사부에서 지내던 그녀는 연주에 있는 우선사로 보내졌다. 병조리와 더불어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우선사에서 불경을 베끼고, 기도를 하는 동안 그녀는 오씨 가문에서 지냈고 오덕무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음흉한 눈빛을 번뜩거렸다.
그때 그녀는 불과 8살에 불과했지만 아릿다운 모습은 가려지지 않았다.
이화린이 하도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하며 지낸 탓에 오덕무는 이제서야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모른다.
이화린이 눈을 뜨자, 오덕무는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고 흐릿하고 누런 눈가에 음탕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주둥이를 잔뜩 내밀고 이화린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나는 더러운 악취에 술 냄새까지 더해져 살짝 맡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녀는 역겨워 참을 수 없었다.
이화린는 즉시 숨을 멈췄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으려던 순간! 그녀는 다급히 베개 아래 감춰두었던 뾰족한 돌멩이를 꺼내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 찍었다.
오덕무는 짧은 신음소리를 토해 내더니 사람을 부를 새도 없이 그대로 픽 쓰려졌다.
커다랗게 부릅뜬 놈의 두 눈에는 실핏줄이 가득했다. 자신의 죽음이 꽤나 원통한 모양이었다.
평소, 별처럼 밝게 빛나던 그녀의 두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았다. 이 순간, 그녀의 눈빛에 약간의 꺼림직한 빛만 살짝 스쳤을 뿐, 당황함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그저 개미새끼 한 마리를 밟아 죽인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때, 문 밖에서 대화소리가 들렸다.
"배어멈, 오신 때가 적절하지 않군요. 화린이는 저녁을 들고나서 삼촌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 간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말을 한 사람은 오여설의 큰어머니 장씨로 오덕무의 친모이기도 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방어멈이 확실했다. 방어멈은 태사부 노부인이 곁에 두는 하인으로 노부인의 명을 받고 이화린을 태사부로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
"장씨 부인님, 여태 말썽쟁이인 저희 아가씨를 돌봐 주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부중에 요긴한 일이 있어 아가씨를 모셔 돌아가야 합니다. 사례는 나중에 섭섭지 않게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태사부는 씀씀이가 컸던 탓다. 이화린이 7년동안 연주에서 '요양' 하는 동안 오씨 가문은 큰 돈을 벌었다.
장씨의 목소리에 실린 웃음기는 숨길래야 숨겨지지 않았다. "어머, 방어멈, 무슨 말씀을... 태사부와 저희는 가족이지 않습니까?"
이내, 장씨는 방을 흘끗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바둑을 둔다고 했는데? 방안이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그 말에, 오래 전 일이 떠오른 방어멈은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다.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장씨는 하녀에게 문을 열라 시켰다.
문이 열렸고 안에서 피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장씨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녀는 하녀의 손에서 등불을 낚아 채더니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 섰다. 이내 안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얼른 눈을 뜨거라! 어미를 놀래키지 말란 말이다!"
다급히 방에 들어 선 방어멈은 관자놀이에 피 구멍이 뚫린 남자를 목격했다. 상처에선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흘러 내린 피가 남자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어둑한 등불 아래, 크게 부릅뜬 그의 두 눈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보아하니 이미 숨이 끊긴 것 같았다.
방어멈은 고개를 돌려 침상에 누워 편히 눈을 감고 있는 이화린을 바라 보았다. 마치 잠에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둑? 이게 어딜 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이란 말인가?
남녀가 어두운 방안에 단둘이 있다니... 이화린은 태사부의 적장녀다. 그녀의 명예에 흠이 생기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방어멈이 질책했다. "장씨 부인!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냐니? 장씨도 알고 싶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 쯤 아들과 이화린은 정을 나누고 있어야 했다!
시기는 완벽했다. 태사부에서 온 사람이 두 눈으로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슬쩍 소문을 까지 퍼뜨린다면 아마 동네방네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처녀의 몸을 잃은 이화린은 어쩔 수 없이 오씨 가문의 며느리로 살아야 될 터인데...
계획을 위해 장씨는 마당에 있는 사람을 전부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런데 눈 깜박할 사이에 아들이 죽어버리다니!
장씨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고 아들을 극히 아꼈다. 그런 아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다니, 그녀는 절대 넘어 갈 수 없었다.
장씨는 불을 밝히라 명하고는 침상을 향해 죽일 듯이 달려 들었다. "이화린! 이 천한 년! 아직도 자는 척을 해!?"
"더러운 년이 삼촌을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하다니! 8살 때, 계모와 여동생을 죽인 년이 아니랄 까봐! ..."
장씨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고 높게 치켜 올린 손도 방어멈이 데리고 온 사람에게 잡히고 말았다.
"장씨 부인." 방어멈이 눈살을 찌푸린 채, 불쾌함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희 아가씨가 아무리 나쁜 분이라 해도 태사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심지어 태사부에서 두번 다시 꺼내지 말라고 명확히 금지한 일까지 언급하시다니요. 대체 무슨 뜻인 겁니까?"
완전히 제압당한 장씨는 급기야 목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죽었어요! 방에는 둘 밖에 없었다고요!"
"보면 몰라요? 이 어린 년... 이화린이 제 아들을 죽인게 확실 합니다!"
방어멈은 가문 내부의 세력다툼에 익숙했다. 일이 심창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 아가씨는 아직 혼미 중입니다. 그런데 살인자라는 무거운 죄명을 저희 아가씨한테 뒤집어 씌우려 하는군요."
"그럼 관아에 고합시다!" 장씨는 감히 방어멈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화를 참으며 말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연히 관아에 고해야지요."
"제 아들이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감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
방어멈이 장씨를 흘끗 바라보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전에 보여줬던 자애로움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일은 저희 아가씨의 명성만 걸려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데려온 하녀 중에 의술에 능통한 애가 있습니다. 일단 아가씨 상태부터 진찰하는 게 좋겠습니다. 나머지 일은 아가씨가 깨어난 뒤에 얘기하시지요."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장씨는 방어멈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방에는 둘 밖에 없었어! 아무리 태사부라고 해도 저딴 년을 위해 진실을 뒤집진 못할 거야!'
맥을 짚던 연소민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녀는 방어멈의 곁에 다가가 고개를 숙인 채, 귓속말을 했고 장씨는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이내, 방어멈의 얼굴 색이 심하게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그녀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장씨는 태사부에서 새로 들인 부인의 형수다. 하여 방어멈은 지나친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아가씨부터 정신 차리게 하거라."
소란스러운 와중에 이화린이 드디어 눈을 떴다.
어렴풋한 불빛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었다. 너무나 창백하고 애처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촉촉히 젖은 두 눈은 마치 비 오는 날 버려진 새끼 고양이 같아 보였고 방안에서 일어 난 일은 그녀와 전혀 상관없는 것 같았다.
방어멈은 7년만에 아가씨와 재회했다. 어려서부터 아름답던 이화린은 7년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졌고 그녀의 모습에서 전 부인이 겹쳐 보였다.
방어멈은 마음이 뭉클했고 목소리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가씨, 노부인을 모시던 늙은 하녀입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방어멈?" 이화린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고 어린 시절 집에서 쫓겨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과거 생각에 방어멈은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회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방어멈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나서 물었다. "아가씨, 오덕무가 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 되었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죽었다고?"
이화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고 땅만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바닥에 있는 주검을 흘끗 보더니 목을 잔뜩 움츠린 채 몸을 떨었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난 방에 돌아 와서 잠을 잤을 뿐이야..."
"삼촌이 왜 굳이 내 방에 들어 와 자결했는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방어멈은 미간을 찌푸렸다. 장씨와 이화린의 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장씨가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년아! 내 아들이 네 방에 찾아 와 자결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죽였잖아, 감히 모른 척 해?…"
방어멈이 싸늘한 눈빛으로 장씨를 바라 보았다.
장씨는 마치 목 졸린 닭마냥 얼굴이 시뻘개졌고 죽일 듯이 이화린을 쏘아 보았다.
이화린는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딱 봐도 잔뜩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방어멈이 시선을 거두고 다시 물었다. "아가씨. 오덕무와 바둑을 두지 않으셨습니까?"
이화린이 고개를 저었다. "삼촌은 바둑을 둘 줄 몰라."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들은 말이긴 한데... 삼촌이 도박장에서 돈을 많이 잃었다고 들었어. 어제도 그 일로 큰 어머니와 대판 싸웠지."
"설마 슬그머니 내 방에 들어 온 게... 도둑질을 하기 위함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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