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남자는 이화린을 흘끗 쳐다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 나를 속인 놈은 이미 난도질 당해 죽었지."
"제가 어찌 감히..."
이화린은 탁자 위에 놓인 비수를 흘깃 쳐다보더니 눈을 깔았다.
남자는 그녀의 가련하고 연약한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해독제."
이화린은 탁자 앞으로 다가가 보따리에서 작은 백자병을 꺼냈다.
남자가 받지 않자 그녀는 안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꿀꺽 삼켰다.
그제야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알약을 삼켰다.
어두운 방안, 이화린은 그의 행동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알약을 삼킨 남자는 아무 이상도 없었고, 출혈도 멈췄다.
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곧 누군가 은자를 가져다줄 것이다. 너는 어느 가문의 아가씨냐?"
"소녀의 이름은 오경무입니다." 이화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연주오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입니다."
오경무는 장씨의 딸로 그녀와 나이가 비슷했고 사사건건 그녀를 괴롭혔다.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복수하긴 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사칭한 건 그저 그 동안 당했던 것에 대한 이자라 치부했다.
남자가 그녀의 말을 믿은 건지 아닌 건지는 몰랐다. 남자는 말이 없었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뒤, 남자는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풀썩 침대에 쓰러졌다.
약효가 발휘한 것이다!
‘흥, 나 소문이 자자한 신의곡 무결신의의 제자라고. 사람 하나쯤 쓰러뜨리는 건 식은 죽 먹기지.'
오씨 가문에 있을 때, 오씨 모자가 부렸던 수작들은 그녀의 눈에 차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정신을 잃었던 건 완벽한 연기를 위해 알면서도 마취약을 마셨던 거였다.
잔뜩 경계하고 있던 이화린은 이제야 한 숨 돌렸다.
그녀는 남자를 침상에 눕히고 쉽게 발견되지 않도록 휘장을 내렸다.
방을 정리한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현철 비수를 챙긴 채 방어멈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어멈은 방금 몇몇 놈들이 방을 수색하는 소리에 일찍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 일로 이미 기분이 나빴던 방어멈은 문 밖에 서있는 이화린을 보자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물었다. "아가씨, 한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너무 무섭구나."
이화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감으면 오덕무의 피투성이 모습이 떠올라."
"방금 이상한 소리도 들리지 뭐냐? 방어멈, 이곳은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지금이라도 서둘러 길을 떠나는 게 좋지 않을것 같구나."
복도에 놓인 등불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그녀의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방어멈은 두 눈을 부릅뜬 오덕무의 시체를 떠올렸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고 이화린이 안쓰러워 보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고 심지어 그녀는 남의 집에서 7년이나 살았다. 거기다 시체까지 보았으니 두려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오씨 가문 놈들은 그녀에게 마취약을 먹이고 물건까지 훔쳤다. 아가씨에게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방어멈은 이미 별세한 선 부인을 떠올리며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화린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아가씨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일행은 한밤중에 길에 올랐다.
이화린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여 그 남자가 그녀가 떠나자 마자 눈을 떴다는 걸 몰랐다.
어둠 속, 남자는 혀 밑에 숨긴 알약을 뱉어내고 피에 굶주린 듯 시뻘건 두눈으로 그녀가 떠난 곳을 응시했다. 이내 그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해탕화 모양으로 조각된 백옥이 놓여 있었고, 끝에는 분홍색 술이 달려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백옥에서는 은은한 약초 향이 풍겼고, 이화린의 몸에서 나는 향과 똑같았다.
그녀의 몸에서 훔친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그녀가 오씨 가문에서 사람을 죽이고 뒷수습까지 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그녀의 연약한 모습에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는 다친 척 연기를 했던 것도 그녀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흥미롭군.'
그의 연주행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의 섣부른 행동으로 적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몸을 사렸던 것이다. 하지만 대신 흥미로운 여인을 만났다.
"비류, 모두 죽였느냐?" 남자가 어둠 속을 향해 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주인님, 모두 죽였습니다. 이번에 주인님을 쫓아온 자들은 모두 무사들입니다. 주인님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습니다."
"태사부의 행적을 쫓았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부인은 친정과 왕래가 잦았고 모두 재물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조사를 해 봤으나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단서가 끊긴 것 같습니다."
남자는 손에 쥔 옥패를 꽉 움켜쥐고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단서가 끊겼다고 누가 그러더냐. 이 단서는 아주 길게 이어질 것이다."
"태사부에서 버려진 여식이라... 쯧쯧, 이렇게 좋은 칼을 버리다니."
"그 여인이 연주에서 7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면밀히 조사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