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갑작스러운 두통에 이화린이 눈을 떴다.

비계가 잔뜩 낀 얼굴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놈은 주둥이를 잔뜩 내밀고 있었다.

"예쁜아! 그 동안 날 유혹하느라 수고 많았어. 이제 내가 제대로 품어 주마."

그는 이화린의 계모 오여설의 사촌인 오덕무다.

7년 전, 태사부에서 지내던 그녀는 연주에 있는 우선사로 보내졌다. 병조리와 더불어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우선사에서 불경을 베끼고, 기도를 하는 동안 그녀는 오씨 가문에서 지냈고 오덕무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음흉한 눈빛을 번뜩거렸다.

그때 그녀는 불과 8살에 불과했지만 아릿다운 모습은 가려지지 않았다.

이화린이 하도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하며 지낸 탓에 오덕무는 이제서야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는지 모른다.

이화린이 눈을 뜨자, 오덕무는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고 흐릿하고 누런 눈가에 음탕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주둥이를 잔뜩 내밀고 이화린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나는 더러운 악취에 술 냄새까지 더해져 살짝 맡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녀는 역겨워 참을 수 없었다.

이화린는 즉시 숨을 멈췄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으려던 순간! 그녀는 다급히 베개 아래 감춰두었던 뾰족한 돌멩이를 꺼내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 찍었다.

오덕무는 짧은 신음소리를 토해 내더니 사람을 부를 새도 없이 그대로 픽 쓰려졌다.

커다랗게 부릅뜬 놈의 두 눈에는 실핏줄이 가득했다. 자신의 죽음이 꽤나 원통한 모양이었다.

평소, 별처럼 밝게 빛나던 그녀의 두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았다. 이 순간, 그녀의 눈빛에 약간의 꺼림직한 빛만 살짝 스쳤을 뿐, 당황함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그저 개미새끼 한 마리를 밟아 죽인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때, 문 밖에서 대화소리가 들렸다.

"배어멈, 오신 때가 적절하지 않군요. 화린이는 저녁을 들고나서 삼촌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 간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말을 한 사람은 오여설의 큰어머니 장씨로 오덕무의 친모이기도 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방어멈이 확실했다. 방어멈은 태사부 노부인이 곁에 두는 하인으로 노부인의 명을 받고 이화린을 태사부로 데려가기 위해 이곳에 왔다.

"장씨 부인님, 여태 말썽쟁이인 저희 아가씨를 돌봐 주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부중에 요긴한 일이 있어 아가씨를 모셔 돌아가야 합니다. 사례는 나중에 섭섭지 않게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태사부는 씀씀이가 컸던 탓다. 이화린이 7년동안 연주에서 '요양' 하는 동안 오씨 가문은 큰 돈을 벌었다.

장씨의 목소리에 실린 웃음기는 숨길래야 숨겨지지 않았다. "어머, 방어멈, 무슨 말씀을... 태사부와 저희는 가족이지 않습니까?"

이내, 장씨는 방을 흘끗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바둑을 둔다고 했는데? 방안이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그 말에, 오래 전 일이 떠오른 방어멈은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다.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장씨는 하녀에게 문을 열라 시켰다.

문이 열렸고 안에서 피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장씨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녀는 하녀의 손에서 등불을 낚아 채더니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 섰다. 이내 안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얼른 눈을 뜨거라! 어미를 놀래키지 말란 말이다!"

다급히 방에 들어 선 방어멈은 관자놀이에 피 구멍이 뚫린 남자를 목격했다. 상처에선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흘러 내린 피가 남자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어둑한 등불 아래, 크게 부릅뜬 그의 두 눈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보아하니 이미 숨이 끊긴 것 같았다.

방어멈은 고개를 돌려 침상에 누워 편히 눈을 감고 있는 이화린을 바라 보았다. 마치 잠에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둑? 이게 어딜 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이란 말인가?

남녀가 어두운 방안에 단둘이 있다니... 이화린은 태사부의 적장녀다. 그녀의 명예에 흠이 생기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방어멈이 질책했다. "장씨 부인!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냐니? 장씨도 알고 싶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 쯤 아들과 이화린은 정을 나누고 있어야 했다!

시기는 완벽했다. 태사부에서 온 사람이 두 눈으로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슬쩍 소문을 까지 퍼뜨린다면 아마 동네방네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처녀의 몸을 잃은 이화린은 어쩔 수 없이 오씨 가문의 며느리로 살아야 될 터인데...

계획을 위해 장씨는 마당에 있는 사람을 전부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런데 눈 깜박할 사이에 아들이 죽어버리다니!

장씨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고 아들을 극히 아꼈다. 그런 아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죽다니, 그녀는 절대 넘어 갈 수 없었다.

장씨는 불을 밝히라 명하고는 침상을 향해 죽일 듯이 달려 들었다. "이화린! 이 천한 년! 아직도 자는 척을 해!?"

"더러운 년이 삼촌을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하다니! 8살 때, 계모와 여동생을 죽인 년이 아니랄 까봐! ..."

장씨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고 높게 치켜 올린 손도 방어멈이 데리고 온 사람에게 잡히고 말았다.

"장씨 부인." 방어멈이 눈살을 찌푸린 채, 불쾌함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희 아가씨가 아무리 나쁜 분이라 해도 태사부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심지어 태사부에서 두번 다시 꺼내지 말라고 명확히 금지한 일까지 언급하시다니요. 대체 무슨 뜻인 겁니까?"

완전히 제압당한 장씨는 급기야 목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죽었어요! 방에는 둘 밖에 없었다고요!"

"보면 몰라요? 이 어린 년... 이화린이 제 아들을 죽인게 확실 합니다!"

방어멈은 가문 내부의 세력다툼에 익숙했다. 일이 심창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 아가씨는 아직 혼미 중입니다. 그런데 살인자라는 무거운 죄명을 저희 아가씨한테 뒤집어 씌우려 하는군요."

"그럼 관아에 고합시다!" 장씨는 감히 방어멈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화를 참으며 말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당연히 관아에 고해야지요."

"제 아들이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감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

방어멈이 장씨를 흘끗 바라보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전에 보여줬던 자애로움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일은 저희 아가씨의 명성만 걸려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데려온 하녀 중에 의술에 능통한 애가 있습니다. 일단 아가씨 상태부터 진찰하는 게 좋겠습니다. 나머지 일은 아가씨가 깨어난 뒤에 얘기하시지요."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장씨는 방어멈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방에는 둘 밖에 없었어! 아무리 태사부라고 해도 저딴 년을 위해 진실을 뒤집진 못할 거야!'

맥을 짚던 연소민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녀는 방어멈의 곁에 다가가 고개를 숙인 채, 귓속말을 했고 장씨는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이내, 방어멈의 얼굴 색이 심하게 어두워지더니 급기야 그녀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장씨는 태사부에서 새로 들인 부인의 형수다. 하여 방어멈은 지나친 행동은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아가씨부터 정신 차리게 하거라."

소란스러운 와중에 이화린이 드디어 눈을 떴다.

어렴풋한 불빛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었다. 너무나 창백하고 애처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촉촉히 젖은 두 눈은 마치 비 오는 날 버려진 새끼 고양이 같아 보였고 방안에서 일어 난 일은 그녀와 전혀 상관없는 것 같았다.

방어멈은 7년만에 아가씨와 재회했다. 어려서부터 아름답던 이화린은 7년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졌고 그녀의 모습에서 전 부인이 겹쳐 보였다.

방어멈은 마음이 뭉클했고 목소리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가씨, 노부인을 모시던 늙은 하녀입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시나요?"

"방어멈?" 이화린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고 어린 시절 집에서 쫓겨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과거 생각에 방어멈은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회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방어멈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나서 물었다. "아가씨, 오덕무가 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 되었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죽었다고?"

이화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고 땅만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바닥에 있는 주검을 흘끗 보더니 목을 잔뜩 움츠린 채 몸을 떨었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난 방에 돌아 와서 잠을 잤을 뿐이야..."

"삼촌이 왜 굳이 내 방에 들어 와 자결했는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방어멈은 미간을 찌푸렸다. 장씨와 이화린의 말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장씨가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년아! 내 아들이 네 방에 찾아 와 자결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죽였잖아, 감히 모른 척 해?…"

방어멈이 싸늘한 눈빛으로 장씨를 바라 보았다.

장씨는 마치 목 졸린 닭마냥 얼굴이 시뻘개졌고 죽일 듯이 이화린을 쏘아 보았다.

이화린는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딱 봐도 잔뜩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방어멈이 시선을 거두고 다시 물었다. "아가씨. 오덕무와 바둑을 두지 않으셨습니까?"

이화린이 고개를 저었다. "삼촌은 바둑을 둘 줄 몰라."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들은 말이긴 한데... 삼촌이 도박장에서 돈을 많이 잃었다고 들었어. 어제도 그 일로 큰 어머니와 대판 싸웠지."

"설마 슬그머니 내 방에 들어 온 게... 도둑질을 하기 위함은 아니겠지?"

회차 2

이화린의 말을 들은 방어멈은 그제야 멀지 않은 곳에 백옥관음이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관음상의 머리에는 선명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붉은 자국을 따라 시선을 내리니 장롱 아래에 금은보화가 흩어져 있는 게 보였다.

심지어 장롱 서랍도 반쯤 열려 있었다. 누군가 뒤진 것 같이 보였다.

이쯤 되면 오덕무가 도둑질을 하려다 운이 나빠 넘어지는 관음상에 머리가 깨져 죽은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방어멈은 생각은 그리했지만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장씨를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이화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화린은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넘실대는 촛불이 그녀의 얼굴에 비쳤고 그녀의 긴 속눈썹이 그녀의 표정을 전부 가렸다.

'완벽하게 준비했으니 누구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할 거야.'

방어멈은 자신이 쓸데 없는 생각을 한 게 틀림 없다 생각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가씨는 연주에 온 뒤부터 성격이 많이 온순해 졌고 착하고 말도 잘 듣는 다고 했다.

게다가 태사부의 명성을 고려하면, 이번 사건의 진실이 어떻든 간에 오씨 가문의 잘못으로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방어멈은 장씨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간덩이가 부었군요! 아가씨의 거처에 침입해 재물을 훔치려 하다니요!"

"그것도 모자라 장씨 부인은 저희 아가씨한테 누명까지 씌우셨지요? 노부인이 자꾸만 꿈자리가 뒤숭숭하시다고 하시며 아가씨를 찾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네요!"

장씨는 억울함을 토했다. "방어멈, 억울합니다. 덕무는 태사부의 오부인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어찌 물건을 훔친단 말입니까?"

"덕무는 그저 이화..."

장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화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씨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씨 부인님, 방금 뭐라 하셨나요? 삼촌이 절 어떻게 하시려 했다고요?"

장씨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덕무를 유혹한 거잖느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겠어?! 그러다 일이 들통나려 하자 넌..."

"그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방어멈이 장씨의 말을 가로챘다. "연소민이 큰 아가씨의 몸에서 마취약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장씨 부인, 부인과 오부인이 친자매이시기에 아까는 부인 체면을 고려해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부인 말 대로라면 저희 아가씨가 본인 절로 마취약을 드셨다는 겁니까?"

"이번 일은 노부인과 태사께 사실대로 보고할 것이니, 알아서들 하십시오."

장씨는 완전히 혼비백산했다. "아닙니다. 어멈,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 사람들을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감시해라! 태사부의 명령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방어멈은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저녁에 먹은 음식도 모두 찾아 내서 마취약이 들어 있는건 아닌지 확인해 봐라."

원래 오씨 가문에서 하룻밤을 묵으려 했으나,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일행은 짐을 챙겨 객잔으로 향했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바쁜 하루였다. 이화린은 객잔의 부드러운 이불 위에 누웠고 오늘 얻은 성과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편한 자세를 찾으며 잠을 청했다.

그때, 창문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바람에 창문이 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피 비린내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이화린은 번쩍 눈을 뜨고 베개 옆에 놓인 비녀를 움켜쥐었다.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의 목소리는 찬 바람보다 더욱 차가웠다. "움직이지 마."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목에 닿았다.

이화린은 흠칫 놀라며 촉촉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방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복도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 줄기만이 방을 비췄다.

남자가 빛을 등지고 서있던 터라, 그녀는 그의 싸늘하고 날카로운 눈빛만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순간, 그녀는 맹수의 먹잇감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아 볼 수 없었다.

이화린은 피 비린내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남자는 부상을 당한게 분명했고 아마도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화린이 사람을 부르려 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남자는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기 할래? 네 목소리가 먼저 나올지, 아니면 내 비수가 먼저 네 목을 자를지?"

서슬 퍼런 빛으로 번쩍이는 비수가 분위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고 이화린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남자는 갑자기 그녀의 이불을 들추더니 그녀를 잡아 끌고 이불 속에 누웠다.

바로 다음 순간, 몇몇 검은 그림자가 문가에 나타나더니 기척을 죽여 방 안을 수색했고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자 즉시 사라졌다.

바짝 긴장해 있던 남자의 몸이 스스르 풀렸다. 하지만 이화린의 목을 겨누고 있는 비수는 여전히 거두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거 말인데요... 이제는 치워도 되지 않나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애써 침착한 척 하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가녀린 고관대작 가문의 금지옥엽이 따로 없었다.

남자는 경계를 조금 풀고 그녀에 게 처방을 건넸다. "이 처방대로 약을 지어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화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옷부터 입어야겠습니다."

남자가 급작스럽게 방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이화린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제압하고 있는 자세였고 그녀는 몸 절반쯤이 그에게 깔려 있는 상태였다.

희미한 빛을 빌려 남자는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15, 16 살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얼굴은 경국지색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요사스러운 느낌 없이 하얗고 청초했고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은 밤하늘의 별과 같았으며 하얀 속옷 아래에 숨겨진 가녀린 몸매는 막 피어난 연꽃을 연상케 했다.

보아하니 방금 전 일로 적잖이 놀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옷을 입은 이화린은 처방을 건네 받았지만 방을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할 말이 남은 거냐?"

이화린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방금 당신 몸에서 절명초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절명초에 중독되면 피가 멈추지 않아요. 제때에 해독하지 않으면 당신의 처방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어깨의 상처를 만졌고 손에 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상처에선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검은 옷이 상처를 가려 여태 발견하지 못했다.

이정도 상처는 이미 피가 멎었어야 정상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말이 맞다는 건데...

남자는 이화린을 자세히 살폈다.

가녀린 몸매, 하얗고 청초한 얼굴, 정교한 이목구비까지, 마치 칼로 빚은 듯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이화린의 눈빛에 경계심과 망설임이 비쳤다. "얼마 전에, 실수로 절명초를 먹었습니다."

"아직 완벽하게 해독하지 못했던 터라 아직 해독제를 가지고 있어요."

남자는 절명초에 중독되었고, 이화린은 해독제를 가지고 있다.

우연?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공교로웠다.

회차 3

남자는 이화린을 흘끗 쳐다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 나를 속인 놈은 이미 난도질 당해 죽었지."

"제가 어찌 감히..."

이화린은 탁자 위에 놓인 비수를 흘깃 쳐다보더니 눈을 깔았다.

남자는 그녀의 가련하고 연약한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해독제."

이화린은 탁자 앞으로 다가가 보따리에서 작은 백자병을 꺼냈다.

남자가 받지 않자 그녀는 안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꿀꺽 삼켰다.

그제야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알약을 삼켰다.

어두운 방안, 이화린은 그의 행동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알약을 삼킨 남자는 아무 이상도 없었고, 출혈도 멈췄다.

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곧 누군가 은자를 가져다줄 것이다. 너는 어느 가문의 아가씨냐?"

"소녀의 이름은 오경무입니다." 이화린은 미간을 찌푸린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연주오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입니다."

오경무는 장씨의 딸로 그녀와 나이가 비슷했고 사사건건 그녀를 괴롭혔다.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복수하긴 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사칭한 건 그저 그 동안 당했던 것에 대한 이자라 치부했다.

남자가 그녀의 말을 믿은 건지 아닌 건지는 몰랐다. 남자는 말이 없었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뒤, 남자는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풀썩 침대에 쓰러졌다.

약효가 발휘한 것이다!

‘흥, 나 소문이 자자한 신의곡 무결신의의 제자라고. 사람 하나쯤 쓰러뜨리는 건 식은 죽 먹기지.'

오씨 가문에 있을 때, 오씨 모자가 부렸던 수작들은 그녀의 눈에 차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정신을 잃었던 건 완벽한 연기를 위해 알면서도 마취약을 마셨던 거였다.

잔뜩 경계하고 있던 이화린은 이제야 한 숨 돌렸다.

그녀는 남자를 침상에 눕히고 쉽게 발견되지 않도록 휘장을 내렸다.

방을 정리한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현철 비수를 챙긴 채 방어멈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어멈은 방금 몇몇 놈들이 방을 수색하는 소리에 일찍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 일로 이미 기분이 나빴던 방어멈은 문 밖에 서있는 이화린을 보자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물었다. "아가씨, 한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너무 무섭구나."

이화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감으면 오덕무의 피투성이 모습이 떠올라."

"방금 이상한 소리도 들리지 뭐냐? 방어멈, 이곳은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지금이라도 서둘러 길을 떠나는 게 좋지 않을것 같구나."

복도에 놓인 등불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그녀의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방어멈은 두 눈을 부릅뜬 오덕무의 시체를 떠올렸다.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고 이화린이 안쓰러워 보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었고 심지어 그녀는 남의 집에서 7년이나 살았다. 거기다 시체까지 보았으니 두려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오씨 가문 놈들은 그녀에게 마취약을 먹이고 물건까지 훔쳤다. 아가씨에게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방어멈은 이미 별세한 선 부인을 떠올리며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화린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아가씨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일행은 한밤중에 길에 올랐다.

이화린은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여 그 남자가 그녀가 떠나자 마자 눈을 떴다는 걸 몰랐다.

어둠 속, 남자는 혀 밑에 숨긴 알약을 뱉어내고 피에 굶주린 듯 시뻘건 두눈으로 그녀가 떠난 곳을 응시했다. 이내 그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해탕화 모양으로 조각된 백옥이 놓여 있었고, 끝에는 분홍색 술이 달려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된 백옥에서는 은은한 약초 향이 풍겼고, 이화린의 몸에서 나는 향과 똑같았다.

그녀의 몸에서 훔친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그녀가 오씨 가문에서 사람을 죽이고 뒷수습까지 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그녀의 연약한 모습에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는 다친 척 연기를 했던 것도 그녀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흥미롭군.'

그의 연주행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의 섣부른 행동으로 적들이 경각심을 가지고 몸을 사렸던 것이다. 하지만 대신 흥미로운 여인을 만났다.

"비류, 모두 죽였느냐?" 남자가 어둠 속을 향해 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주인님, 모두 죽였습니다. 이번에 주인님을 쫓아온 자들은 모두 무사들입니다. 주인님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습니다."

"태사부의 행적을 쫓았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부인은 친정과 왕래가 잦았고 모두 재물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조사를 해 봤으나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단서가 끊긴 것 같습니다."

남자는 손에 쥔 옥패를 꽉 움켜쥐고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단서가 끊겼다고 누가 그러더냐. 이 단서는 아주 길게 이어질 것이다."

"태사부에서 버려진 여식이라... 쯧쯧, 이렇게 좋은 칼을 버리다니."

"그 여인이 연주에서 7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면밀히 조사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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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목숨처럼 아끼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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