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적인 그녀를 만나고
문이 열리자마자 소파 위에 겹쳐진 두 사람의 몸을 본 한예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오는 길 내내 그녀는 상상했다.
'승민이네 집에 몰래 찾아가 2년의 장거리 연애가 드디어 끝났다고 말하면 분명히 깜짝 놀라면서 기뻐 하겠지?'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눈앞에 펼쳐진 건 끔찍하고 추악한 화면이었다.
한예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소파 위의 두 사람은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녀가 들어온 것도 몰랐다.
그녀는 역겨움을 꾹 참고 휴대폰을 꺼내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들이 자세를 바꿀 때, 여자가 문득 한예진을 보고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승민도 놀라서 급히 담요를 잡아 몸에 두르고 여자를 뒤로 감췄다.
"너 왜 돌아왔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예진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 볼만한 장면을 당연히 찍어서 SNS에 올려야지."
그 말에 하승민은 뒤에 있던 여자가 알몸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요를 빼앗아 두르고 달려와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한 발짝만 더 오면, 바로 단톡방에 보내버릴 거야." 한예진이 경고했다.
하승민은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 한예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한예진은 바로 전송을 눌러버렸다.
순간 하승민은 경악했다.
늘 다정하고 이해심 많던 한예진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상상도 못했다.
"한예진, 너 죽고 싶어?"
하승민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지며 한예진을 죽일 듯 노려봤다.
한예진은 휴대폰을 들어 자신의 화면을 보여줬다. "경찰에 신고했어."
하승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문이 막혔다.
"너...!"
한예진의 냉정하고 무자비한 모습에 하승민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독한 년!"
한예진의 두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찼다.
"너랑 사귄 2년, 그냥 개한테 줬다고 생각할게. 아니, 개한테 준 것보다 못하네."
한편.
하승민의 집에서 나온 한예진은 친구 정하나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머문 5일 동안 정하나는 5일 내내 하승민을 욕했다.
아침, 한예진이 휴대폰을 바라보며 우울해하자 정하나가 다가와 팔로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그딴 쓰레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 없어."
한예진은 고개를 저었다.
"슬프진 않아. 다만 아빠가 정해 준 혼사 때문에 고민이 돼."
"뭐라고?"
한예진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혼사를 주선했다며 빨리 집에 와서 얘기하자고 재촉했다.
남자 쪽은 집안이 좋고 키도 크고 잘생긴 데다 외동아들이라고 했다.
한예진이 결혼만 승낙하면, 남자 쪽에서 억 단위 예물을 주고
두 달 안에 임신하면 200억을 추가로 준다는 조건이었다.
아이만 낳으면, 바로 그 집안의 안주인으로 자리 잡아 무궁무진한 재산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정하나는 듣자마자 손뼉을 치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거 네 새엄마 뜻 아니야? 그렇게 좋은 조건이면 왜 자기 딸을 안 보내겠어? 백 퍼센트 함정이지."
"너, 아는 게 있어?"
"전부 사실이긴 한데. 중요한 걸 빼먹었어."
"응?"
정하나가 말을 이었다.
"그 남자 이름이 서지훈이야.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지. 예전엔 구성 여자들이 전부 서지훈이랑 결혼하겠다고 난리였대. 결혼까진 안 되더라도 하룻밤이라도 같이 보내고 싶다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니까."
"서지훈,,,"
한예진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이름이 왠지 익숙한데."
정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구성 사람이라면 그 이름 모를 리 없지."
그러곤 덧붙였다.
"작년에 서지훈이 불치병에 걸려서 오래 못 산다는 소식이 터졌어. 원래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듣고는 바로 해외로 떠났다고 하더라. 한마디로 말하면, 곧 죽을 사람이지. 그런 사람한테 시집가는 건, 시체랑 결혼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구나, 불쌍하네.'
정하나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새엄마가 생기면 새아버지도 생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네 새엄마는 네가 과부 노릇하길 바라는 거야."
"서지훈이 죽으면 다시 시집가면 돼."
정하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깐, 너 진짜 결혼 할 생각이야? 그 남자 지금 죽게 생겨서 얼굴도 못 생겼을 텐데 이 시점에 결혼할 상대를 찾는 건 죽기 전에 후계자 하나 남기고 싶다는 뜻 아니겠어?" 그런 놈들 일 수록 변태기질이 다분하다고!"
한예진이 낮게 말했다. "하지만... 돈을 많이 주잖아..."
정하나가 말을 잃었다.
"죽으면 난 그 재산을 다 물려받게 돼." 한예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때가 되면 돈도 있고, 자유도 있을 텐데, 누구나 부러워 할 일 아니야?"
정하나는 입을 떡 벌렸다.
"너 지금 충격 받아서 그런 거지?"
"진짜 아니야."
한예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봤어. 사랑이란 건 귀신 같아. 듣기만 했지, 본 적은 없거든. 그런 걸 애써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게다가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뭐야? 결국 돈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얻으려는 거잖아. 지금 내 앞에 지름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야 해?"
정하나는 멍해졌다.
"이상하게 말이 되네?"
한예진이 미소 지었다.
"현실이 원래 그래."
그날 밤.
하승민이 낯선 번호로 전화를 걸어와서는 그녀를 겉만 번지르르한 쓰레기라며 욕했다.
한예진은 전화를 끊었지만 그는 번호를 바꿔가며 쉴새 없이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 몇 개나 차단을 했지만 전화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다음 날 아침.
휴대폰을 켜자마자 메시지가 폭주했다. 대부분 하승민이 보낸 거였다. 그 안에는 별의별 막말이 다 담겨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단톡방까지 들끓었다. 정작 자기가 바람을 핀 주제에, 하승민은 한예진은 가슴을 성형했다느니 야하게 생겨놓고 청순한 척한다느니 터무니 없는 루머를 퍼뜨렸다. 아무튼 한마디 한마디가 더없이 듣기 거북했다.
한예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늘이 일부러 쓰레기 같은 남자의 진짜 면모를 알라고 일찍 그녀에게 그 장면을 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한예진은 한정호에게 전화를 걸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부녀는 함께 서씨 저택으로 향했다.
정작 서지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의 부모님만 나와 있었다.
한예진이 결혼을 승낙했다는 소식에 서씨 부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예진의 조건은 단 하나였다. 바로 먼저 혼인신고부터 하는 것.
왜냐면 합법적이어야 하니까.
결혼식은 필요 없다고 했다.
서씨 부부는 당연히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결혼을 취소할까 봐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결국 양쪽은 손쉽게 합의에 이르렀고, 서택근은 즉시 구청 직원을 집으로 불러 그 자리에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그때, 한예진은 처음으로 서지훈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사진 속 남자는 정하나의 말대로였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 그 중에서도 특히 깊고 강렬한 눈빛이 사람을 단숨에 끌어당겼다.
이런 완벽한 남자라면 죽을 병만 아니었다면, 평범한 그녀에게는 결코 차례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혼인신고서가 한예진의 손에 건네지자 그녀는 자세히 둘의 사진을 바라봤다. 비록 합성으로 만든 사진이었지만, 나름 괜찮았다.
강은영은 곧장 은행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결혼식은 하지 않더라도, 예물은 약속대로 줬다.
거기에다 생활비까지 덧붙였다.
아무튼 통이 컸다. 너무 큰 금액이라, 카드가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받아 들었다.
한예진은 혼인신고서를 다시 바라봤다. 서지훈이라는 세 글자 위로 시선이 멈췄다.
'서지훈은 과연 부모님이 자신을 팔아 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걸 알면 어떤 기분일까?'
서씨 저택을 나서며 한정호의 얼굴엔 기분 좋은 웃음이 가득했다.
"서씨 가문에서 좋은 거 많이 챙겨줬죠?" 한정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 할 필요 없어요."
한예진이 멈춰서 한정호를 보며 말했다.
"좋은 조건 없었으면 내 생각도 안 했을 거면서."
한정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예진아..."
한예진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녀는 더 이상 한정호의 입에 발린 말을 듣기 싫었다.
한예진은 앞장서 걸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한편.
한예진이 정말로 서지훈과 결혼했다는 말을 들은 정하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라 후회해도 늦었다.
"너희 아빠 진짜 너무 한다! 그게 불구덩이란 걸 알면서도 널 밀어 넣다니! 그리고 너는 또 왜 바보같이 그걸 덥석 받아들여? 심지어 혼인신고부터 하다니! 그 남자가 널 괴롭히면 도망도 못 치잖아! 증서까지 있으면 넌 그 집에 묶여버린 거라고!"
정하나는 분노와 걱정이 뒤섞여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친구의 모습이 오히려 한예진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정하나를 달랬다.
"걱정 마. 혼인신고는 했지만, 내가 꼭 그 사람 앞에 나타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정하나는 한예진을 빤히 쳐다봤다.
한예진의 눈빛엔 교활함이 섞여 있었다. 비록 너무 악독한 생각이긴 하지만 사실이었다.
"네가 그랬잖아, 그 사람 내년 2월까지밖에 못 산다고. 그럼 석 달도 안 남았어. 조용히 숨어 있다가 몸져누우면 그때 얼굴 비추면 되잖아."
한예진은 그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잔혹했다.
그 말을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찾아왔다.
"서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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