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문이 열리자마자 소파 위에 겹쳐진 두 사람의 몸을 본 한예진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오는 길 내내 그녀는 상상했다.
'승민이네 집에 몰래 찾아가 2년의 장거리 연애가 드디어 끝났다고 말하면 분명히 깜짝 놀라면서 기뻐 하겠지?'
하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눈앞에 펼쳐진 건 끔찍하고 추악한 화면이었다.
한예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소파 위의 두 사람은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녀가 들어온 것도 몰랐다.
그녀는 역겨움을 꾹 참고 휴대폰을 꺼내 녹화 버튼을 눌렀다.
그들이 자세를 바꿀 때, 여자가 문득 한예진을 보고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승민도 놀라서 급히 담요를 잡아 몸에 두르고 여자를 뒤로 감췄다.
"너 왜 돌아왔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예진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 볼만한 장면을 당연히 찍어서 SNS에 올려야지."
그 말에 하승민은 뒤에 있던 여자가 알몸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요를 빼앗아 두르고 달려와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
"한 발짝만 더 오면, 바로 단톡방에 보내버릴 거야." 한예진이 경고했다.
하승민은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 한예진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한예진은 바로 전송을 눌러버렸다.
순간 하승민은 경악했다.
늘 다정하고 이해심 많던 한예진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상상도 못했다.
"한예진, 너 죽고 싶어?"
하승민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지며 한예진을 죽일 듯 노려봤다.
한예진은 휴대폰을 들어 자신의 화면을 보여줬다. "경찰에 신고했어."
하승민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문이 막혔다.
"너...!"
한예진의 냉정하고 무자비한 모습에 하승민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독한 년!"
한예진의 두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찼다.
"너랑 사귄 2년, 그냥 개한테 줬다고 생각할게. 아니, 개한테 준 것보다 못하네."
한편.
하승민의 집에서 나온 한예진은 친구 정하나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머문 5일 동안 정하나는 5일 내내 하승민을 욕했다.
아침, 한예진이 휴대폰을 바라보며 우울해하자 정하나가 다가와 팔로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그딴 쓰레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 없어."
한예진은 고개를 저었다.
"슬프진 않아. 다만 아빠가 정해 준 혼사 때문에 고민이 돼."
"뭐라고?"
한예진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혼사를 주선했다며 빨리 집에 와서 얘기하자고 재촉했다.
남자 쪽은 집안이 좋고 키도 크고 잘생긴 데다 외동아들이라고 했다.
한예진이 결혼만 승낙하면, 남자 쪽에서 억 단위 예물을 주고
두 달 안에 임신하면 200억을 추가로 준다는 조건이었다.
아이만 낳으면, 바로 그 집안의 안주인으로 자리 잡아 무궁무진한 재산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정하나는 듣자마자 손뼉을 치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거 네 새엄마 뜻 아니야? 그렇게 좋은 조건이면 왜 자기 딸을 안 보내겠어? 백 퍼센트 함정이지."
"너, 아는 게 있어?"
"전부 사실이긴 한데. 중요한 걸 빼먹었어."
"응?"
정하나가 말을 이었다.
"그 남자 이름이 서지훈이야.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지. 예전엔 구성 여자들이 전부 서지훈이랑 결혼하겠다고 난리였대. 결혼까진 안 되더라도 하룻밤이라도 같이 보내고 싶다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니까."
"서지훈,,,"
한예진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이름이 왠지 익숙한데."
정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구성 사람이라면 그 이름 모를 리 없지."
그러곤 덧붙였다.
"작년에 서지훈이 불치병에 걸려서 오래 못 산다는 소식이 터졌어. 원래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듣고는 바로 해외로 떠났다고 하더라. 한마디로 말하면, 곧 죽을 사람이지. 그런 사람한테 시집가는 건, 시체랑 결혼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구나, 불쌍하네.'
정하나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새엄마가 생기면 새아버지도 생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네 새엄마는 네가 과부 노릇하길 바라는 거야."
"서지훈이 죽으면 다시 시집가면 돼."
정하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잠깐, 너 진짜 결혼 할 생각이야? 그 남자 지금 죽게 생겨서 얼굴도 못 생겼을 텐데 이 시점에 결혼할 상대를 찾는 건 죽기 전에 후계자 하나 남기고 싶다는 뜻 아니겠어?" 그런 놈들 일 수록 변태기질이 다분하다고!"
한예진이 낮게 말했다. "하지만... 돈을 많이 주잖아..."
정하나가 말을 잃었다.
"죽으면 난 그 재산을 다 물려받게 돼." 한예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때가 되면 돈도 있고, 자유도 있을 텐데, 누구나 부러워 할 일 아니야?"
정하나는 입을 떡 벌렸다.
"너 지금 충격 받아서 그런 거지?"
"진짜 아니야."
한예진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봤어. 사랑이란 건 귀신 같아. 듣기만 했지, 본 적은 없거든. 그런 걸 애써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게다가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뭐야? 결국 돈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얻으려는 거잖아. 지금 내 앞에 지름길이 있는데, 왜 돌아가야 해?"
정하나는 멍해졌다.
"이상하게 말이 되네?"
한예진이 미소 지었다.
"현실이 원래 그래."
그날 밤.
하승민이 낯선 번호로 전화를 걸어와서는 그녀를 겉만 번지르르한 쓰레기라며 욕했다.
한예진은 전화를 끊었지만 그는 번호를 바꿔가며 쉴새 없이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 몇 개나 차단을 했지만 전화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다음 날 아침.
휴대폰을 켜자마자 메시지가 폭주했다. 대부분 하승민이 보낸 거였다. 그 안에는 별의별 막말이 다 담겨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단톡방까지 들끓었다. 정작 자기가 바람을 핀 주제에, 하승민은 한예진은 가슴을 성형했다느니 야하게 생겨놓고 청순한 척한다느니 터무니 없는 루머를 퍼뜨렸다. 아무튼 한마디 한마디가 더없이 듣기 거북했다.
한예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늘이 일부러 쓰레기 같은 남자의 진짜 면모를 알라고 일찍 그녀에게 그 장면을 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한예진은 한정호에게 전화를 걸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부녀는 함께 서씨 저택으로 향했다.
정작 서지훈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의 부모님만 나와 있었다.
한예진이 결혼을 승낙했다는 소식에 서씨 부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예진의 조건은 단 하나였다. 바로 먼저 혼인신고부터 하는 것.
왜냐면 합법적이어야 하니까.
결혼식은 필요 없다고 했다.
서씨 부부는 당연히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결혼을 취소할까 봐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결국 양쪽은 손쉽게 합의에 이르렀고, 서택근은 즉시 구청 직원을 집으로 불러 그 자리에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그때, 한예진은 처음으로 서지훈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사진 속 남자는 정하나의 말대로였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 그 중에서도 특히 깊고 강렬한 눈빛이 사람을 단숨에 끌어당겼다.
이런 완벽한 남자라면 죽을 병만 아니었다면, 평범한 그녀에게는 결코 차례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혼인신고서가 한예진의 손에 건네지자 그녀는 자세히 둘의 사진을 바라봤다. 비록 합성으로 만든 사진이었지만, 나름 괜찮았다.
강은영은 곧장 은행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결혼식은 하지 않더라도, 예물은 약속대로 줬다.
거기에다 생활비까지 덧붙였다.
아무튼 통이 컸다. 너무 큰 금액이라, 카드가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받아 들었다.
한예진은 혼인신고서를 다시 바라봤다. 서지훈이라는 세 글자 위로 시선이 멈췄다.
'서지훈은 과연 부모님이 자신을 팔아 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걸 알면 어떤 기분일까?'
서씨 저택을 나서며 한정호의 얼굴엔 기분 좋은 웃음이 가득했다.
"서씨 가문에서 좋은 거 많이 챙겨줬죠?" 한정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모르는 척 할 필요 없어요."
한예진이 멈춰서 한정호를 보며 말했다.
"좋은 조건 없었으면 내 생각도 안 했을 거면서."
한정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예진아..."
한예진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녀는 더 이상 한정호의 입에 발린 말을 듣기 싫었다.
한예진은 앞장서 걸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한편.
한예진이 정말로 서지훈과 결혼했다는 말을 들은 정하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라 후회해도 늦었다.
"너희 아빠 진짜 너무 한다! 그게 불구덩이란 걸 알면서도 널 밀어 넣다니! 그리고 너는 또 왜 바보같이 그걸 덥석 받아들여? 심지어 혼인신고부터 하다니! 그 남자가 널 괴롭히면 도망도 못 치잖아! 증서까지 있으면 넌 그 집에 묶여버린 거라고!"
정하나는 분노와 걱정이 뒤섞여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친구의 모습이 오히려 한예진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정하나를 달랬다.
"걱정 마. 혼인신고는 했지만, 내가 꼭 그 사람 앞에 나타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정하나는 한예진을 빤히 쳐다봤다.
한예진의 눈빛엔 교활함이 섞여 있었다. 비록 너무 악독한 생각이긴 하지만 사실이었다.
"네가 그랬잖아, 그 사람 내년 2월까지밖에 못 산다고. 그럼 석 달도 안 남았어. 조용히 숨어 있다가 몸져누우면 그때 얼굴 비추면 되잖아."
한예진은 그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잔혹했다.
그 말을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찾아왔다.
"서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회차 2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벤 안의 히터조차 한예진의 마음속 냉기를 녹이지 못했다.
그녀는 사실 약간 두려웠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인생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마당에, 그가 또 무슨 수를 쓴다 한들 대수인가?
한예진은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뒤, 정하나에게 침착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차는 구성에서 가장 큰 클럽 앞에 멈췄다.
운전기사는 공손하게 차문을 열어줬지만, 태도에는 일말의 존중도 묻어나지 않았다.
한예진이 차에서 내리자 남자가 앞서 걸었다.
눈이 부신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의 문 앞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자 남자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서 대표님, 사람 데려왔습니다."
부하는 그렇게 말하며 한예진에게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한예진은 이제 와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미 왔는데 어쩌겠냐는 마음으로 천천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밀폐된 공간에 긴장감이 퍼졌다. 공기가 묘하게 희박해지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두근거렸다.
시선이 닿은 곳 가죽 소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몸을 뒤로 기대 앉은 그의 모습은 멀리 떨어져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번지는 담배 불빛이 간헐적으로 그의 존재를 드러냈다. 공기 중에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한예진은 심호흡을 하고 다가가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진 빨을 잘 받는 타입은 아니었어.'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잘생겼다. 단지 사진 속보다 피부가 더 창백했을 뿐이다.
까만 셔츠의 단추가 위쪽으로 살짝 풀려 드러난 목선과 쇄골이 유난히 섹시했다.
병색이 도는 듯한 창백함은 오히려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를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병색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정도 얼굴이라면 수많은 여자가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달려들 법했다.
한예진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손에 들린 혼인신고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랬다. 그의 어머니가 가져갔던 바로 그 증서였다.
아들을 대신해 혼인신고서를 받았는데, 그 사실을 아들에게 숨길 리가 없었다.
그를 피하려 했던 건 역시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인간이 재물 때문에 죽는다는 말... 못 들어봤나?"
서지훈의 시선이 차갑게 그녀를 꿰뚫었다.
이런 시점에 그와 결혼한 여자라면, 무조건 돈 때문일 것이다.
한예진은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은 곧 돈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하여 아예 자포자기 식으로 오히려 입꼬리를 살짝 올려, 도발적이게 웃었다.
"그렇게 단정할 건 없죠. 혹시 제가 예전부터 대표님을 좋아해서 결혼을 노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잖아요?"
서지훈의 손끝에서 담배가 힘없이 찌그러졌다.
'예전부터 좋아했다?'
이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입만 벌리면 튀어나오는 거짓말과 가식적인 웃음을 서지훈은 한눈에 간파했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겨 끄고 그녀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한예진은 마른 침을 삼키며 가까이 다가갔다.
서지훈은 다리를 내리고 상체를 곧게 세우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자신의 품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한예진은 중심을 잃고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가, 이내 그가 밀어 올려 앉히는 바람에 소파 위에 앉게 되었다.
허리가 당겨지며 그의 손이 감겨왔다.
두꺼운 외투를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그에게 눌린 곳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는 그녀에게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혼인신고서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비웃듯 물었다.
"날 좋아한다고?"
한예진은 심장이 미친 듯 뛰었지만,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혼인신고서의 모서리에 턱이 긁혀 불편했지만, 겁없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구성의 미혼 여성이라면, 아마 다 대표님을 사모하지 않을까요?"
"허." 서지훈의 목에서 냉소가 새어 나왔다.
"죽는 게 두렵지도 않아?"
"두렵죠."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한예진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죽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의 아내가 됐다면, 그걸로 여한이 없어요."
서지훈의 머릿속에 네 글자가 스쳤다. '허튼소리.'
서지훈은 한예진을 세게 밀쳐내고 그녀가 앉았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털어내며 대놓고 혐오를 드러냈다.
"이혼해."
비틀거리던 몸을 바로잡은 한예진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혼인신고서를 보며 말했다. "이혼하려면 숙려기간 한 달 필요해요."
서지훈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게 나한테도 해당할 것 같아?"
한예진은 입술을 다물었다. 하긴, 그한테는 이혼 숙려기간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서지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곧은 다리가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바짓자락이 그녀의 옷자락을 스쳤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한예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경고에 한예진은, 방금 전까지 감상하던 마음을 순식간에 거두었다.
"이혼 못해요."
서지훈은 멈춰서 차가운 눈빛으로 한예진을 바라봤다.
한예진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 장난으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서지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에요."
한예진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가득했다.
"서 대표님의 와이프가 되어야만 정당하게 대표님을 돌볼 수 있고, 대표님의 아이를 낳을 수 있어요."
"대표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됐든, 저 후회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제 욕심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대표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
말을 하면서 한예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 자신조차 놀랄 만큼 감정이 자연스레 밀려왔다.
서지훈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존재감은 숨 막히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한예진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서지훈이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얕은 웃음 하나만으로도 한예진은 소름이 돋았다.
서지훈은 천천히 소파에 앉아 다리를 살짝 벌리며 말했다.
"꿇어."
한예진은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벌여진 다리, 음산한 눈빛, 차가운 얼굴은 그녀가 잘 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
"왜? 이 정도도 못 하겠어?"
한예진은 그제야 정하나가 말했던 변태의 의미를 실감했다.
서지훈의 눈동자에 깃든 경멸을 느끼며 한예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외투를 벗어 소파 위에 던졌다. 그리고 흩어진 머리를 하나로 묶고, 그의 몸 위에 다리를 벌리고 양측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러면 되나요?"
이 동작으로 인해 한예진의 시선이 서지훈의 위에 가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낮춰 서지훈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스친 놀라움이 보였다.
몸에 달라붙은 짙은 검은색 니트가 그녀의 바디 라인을 서진훈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냈다. 청바지가 그녀의 엉덩이를 감싸고, 곧게 뻗은 허리는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 보였다.
그녀의 호흡과 그의 숨결이 섞이며 공기가 묘하게 뜨거워졌다.
두 사람의 자세는 위험할 만큼 가깝고 섹시하여, 당장이라도 못 볼 장면을 연출할 것만 같았다,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인 한예진은 혼인신고서 사진보다 훨씬 더 요염했다.
한예진은 매력적인 여우 눈으로 서지훈을 바라보며 얕은 미소로 사람의 마음을 유혹했다.
서지훈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얹은 채, 차갑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를 바라봤다.
"벗어."
한예진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어 하얀 손끝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하얀 손이 검은 단추에 닿자, 흑백 바둑이 부딪히는 듯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한예진은 검은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풀어냈다. 단추가 구멍을 빠져 나오자,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웜톤이 아니라 쿨톤만의 유혹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한 개.
두 개.
점점 더 많이 드러나는 그의 피부.
한예진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점점 미소를 잃어갔다,
그녀가 조심스레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자, 서지훈도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군림하는 왕 같았고, 그녀는 그 시선 아래 그저 재미를 위한 장난감으로 느껴졌다.
한예진이 꾹 참고 계속 손을 움직여 단추를 풀던 중, 손끝이 그의 단단한 복부를 스쳤다. 순간, 서지훈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서지훈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동자에, 한예진은 순간 긴장감이 몰려왔다.
"이 속도로 언제 애를 낳겠어?"
서지훈은 그녀의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예진의 숨이 흐트러졌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으려 애쓰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억지로는 안 되잖아요. 듣기로는 좋아하는 감정이 생길 때 생긴 아이가 더 예쁘고 더 똑똑하다던 데요."
서지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래?"
"네."
한예진은 모아둔 용기를 다 쥐어짜며 다른 손으로 그의 셔츠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서지훈의 손이 그녀보다 빨랐다. 그는 그녀의 손을 낚아채며 낮게 말했다.
"나만 벗는 건 불공평하지."
회차 3
그의 시선이 한예진의 굴곡진 몸매를 훑었다. 의미는 너무도 분명했다.
한예진의 표정이 약간 굳었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설마 이 자리에서 정말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한예진은 옷자락을 움켜쥐고 위로 걷어 올렸다.
매끄럽고 하얀 허리가 드러나고, 검은 니트 사이로 하얀 속옷의 가장자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 순간, 서지훈이 혐오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그대로 밀쳐냈다.
한예진은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비록 가슴속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안도감이 터져 나왔지만, 겉으로는 순진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서지훈은 가식적인 그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돈 앞에선 정말 뭐든 할 수 있는 여자네.'
'지금은 돈을 탐하지만 내가 죽은 후엔 과부라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한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나가!"
서지훈은 이런 위선적인 여자가 질색이었다.
한예진은 구원의 손길이라도 잡은 듯 내심 기뻤지만, 얼굴에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보..."
서지훈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한예진은 단 1초도 머뭇거림도 없이 니트를 내리고 외투를 움켜쥐고 바로 나왔다.
클럽을 빠져 나온 뒤에야 한예진은 거세게 숨을 내쉬었다.
외투를 입지 않았는데도 전혀 춥지 않았고 심장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
과정은 아찔하고 위험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빠져 나왔다.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다음 날, 한예진은 정하나를 불러 근사한 식사를 함께했다.
"너 진짜 대담해." 정하나는 혀를 내둘렀다.
한예진은 그녀의 팔에 팔짱을 끼며 웃었다.
"위험 속에 기회가 있는 법이지."
정하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남자가 진짜 너 건드렸으면 어쩔 뻔했어?"
"얼굴이랑 몸매, 집안까지 완벽해. 그런 남자한테 마음이 안 움직이겠어?"
"응?"
정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런 남자랑 아이 하나 낳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한예진은 덧붙였다. "우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애는 분명 예쁠 거야."
정하나는 말문이 막혔다.
한예진이 계속 장난스레 웃자, 정하나는 진지하게 당부했다.
"장난 적당히 해. 그 남자가 다시 이혼 얘기 꺼내면, 바로 순순히 응해. 억지로 버티다 폭력이라도 당하면 그건 부부 문제로 취급돼서, 제대로 처벌도 못 받아."
"알았어."
한예진은 진심으로 그녀의 걱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친 후 정하나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둘은 웃으며 쇼핑몰을 거닐다가, 갑자기 한예진이 걸음을 멈췄다.
정하나도 얼굴이 굳었다.
"저 쓰레기!"
한예진은 하승민을 보자 본능적으로 불쾌함이 치밀어 올랐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몸이 먼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가자." 한예진은 정하나의 팔을 잡고 다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정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무서워? 아직 그 놈한테 한 마디도 못했는데!" 정하나는 손을 뿌리치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싸울 기세를 보였다.
한예진이 그녀를 붙잡았다.
"무서운 게 아니라 더러운 거랑 접촉하고 싶지 않은 거야."
정하나는 그 말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맞아. 역겨운 놈."
둘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한예진."
하승민이 따라와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정하나는 본능적으로 한예진을 감싸며 맞설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한예진은 정하나를 옆으로 당겨 세우고, 정면으로 하승민을 바라봤다.
"뭐 하려는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잠도 못 자! 내가 뭐 할 것 같은데?"
한예진 때문에 체면이 다 깎였으니 제대로 혼내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듯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승민이 손을 뻗어 한예진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잽싸게 몸을 피하는 바람에 잡지 못했다.
하승민은 더 격분해,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덤벼들었다.
그 순간 한예진이 손을 들어 하승민의 뺨을 세게 때렸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도 아파왔다.
하승민은 고개를 돌린 채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눈빛으로 한예진을 노려봤다.
"한예진, 감히 나를 때려?"
"칼이 없는 걸 다행인 줄 알아." 한예진의 눈빛에는 혐오가 가득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날 건드리면 너희 집까지 찾아가서 너 죽여버릴 거야."
그녀는 본래 강자 앞에서는 더 강해지는 성격이라 한번 자극 받으면, 목숨 걸고라도 맞붙는 사람이었다.
사실 하승민과 한예진은 연애라고 부를 만큼의 관계도 아니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고, 대부분은 전화나 메시지로만 연락했다.
그때마다 한예진은 늘 다정하고 순한 얼굴을 보여줬다.
그래서 하승민은 그녀를 요염하게 생긴 착한 여자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 여자는 성질이 불 같았다.
'이런 여자는 길들여야 해.'
주변에 구경꾼이 몰려들자, 정하나는 재빨리 한예진의 손을 붙잡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럴 때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언제나 여자에게 향했다.
하승민은 맞은 뺨을 문지르며 한예진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꼭 후회하게 해 줄게!"
멀지 않은 곳에서 서지훈이 그 장면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한예진이 하승민의 뺨을 때리는 그 순간까지도.
도영훈이 한예진의 담대함이 의외인 듯 말했다.
"저 남자가 하승민입니다. 명성이 더럽기로 유명한 재벌 2세죠. 며칠 전, 그 무리 안에서 하승민에 대한 영상이 퍼졌었어요. 지금 보니 그 영상을 찍고 유포한 사람이 바로 사모님인 듯합니다."
그 영상은 이미 하승민이 사람을 시켜 지워버렸지만, 도영훈이 따로 복사본을 확보해 두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휴대폰을 서지훈에게 내밀었다.
서지훈은 화면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영훈은 입술을 다물고 휴대폰을 거두며 말했다.
"저 하승민이라는 사람,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사모님이 저렇게 굴었으니, 분명 보복하려 들 겁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결과를 감당할 각오는 해야지."
서지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보복을 당해도 지가 자초한 일이야."
도영훈은 잠시 말을 잃었다. '한예진이 대표님의 법적 아내라는 걸 상기시켜야 하나...'
도영훈이 뒤를 따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이혼은 예정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서지훈은 한예진의 가식적인 표정이 떠오르자 본능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날 밤.
한예진은 정하나의 집에서 늦게까지 머물렀다. 정하나는 하승민을 향해 욕을 퍼붓더니 그가 보복할까 걱정했다.
하지만 한예진은 담담했다.
"아니면... 네 남편한테 좀 부탁해 봐. 어쨌든 넌 그 사람 아내잖아. 하승민 좀 혼내달라고 해."
서지훈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치자 한예진은 순간 몸이 굳었다.
'그 남자, 엄청 사악해.'
"너 설마, 내가 정말 그 사람을 남편으로 생각하는 줄 알아?"
"그럼 어떡해? 아니면... 차라리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살아."
"하승민 감히 나한테 어쩌지 못할 거야."
한예진이 몇 번이나 자신을 잘 지킬 거라고 장담하자, 정하나는 그제야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집은 한정호가 재혼 전에 한예진에게 사준 투룸 아파트였다. 크진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충분했다.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기대 앉아 영상을 보고 있는데 화면에 낯선 번호가 떴다.
낯선 번호인 지라, 한예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죠?"
"내일 오전 여덟 시. 구청에서 이혼 절차 밟자." 서지훈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예진은 화면의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서지훈이 어떻게 내 번호를 알지?'
잠시 의문이 스쳤지만 곧 스스로 답을 내렸다.
'서지훈 같은 재벌은 내 번호쯤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겠지.'
'집요한 자식.'
한예진은 자세를 바로 하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목소리도 살짝 나긋하게 바꿨다.
"저는 평생을 함께할 마음으로 결혼했어요. 결혼한 이상, 절대 이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이혼 안 하면? 과부로 살겠다는 거야?"
그 말에 한예진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처음엔 그 생각으로 결혼하긴 했지만, 막상 당사자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기분이 달랐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요즘 의술이 얼마나 발달했는데요. 적극적으로 치료받고, 마음만 긍정적으로 가지면 반드시 나을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지훈은 거대한 통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무심한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너무 난처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처신하는 게 좋을 거야." 서지훈이 담담하게 한예진을 일깨웠다.
한예진은 그가 이 결혼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그 일은 동의할 수 없어요. 대표님이 부모님께 직접 말씀 드리고, 부모님이 동의하신다면 그땐 저도 뜻 따를게요."
결혼이 충동적이긴 했지만, 누구를 만나도 결과는 비슷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와의 결혼은 오히려 더 단순했다.
서지훈의 눈빛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영리하군.'
그의 부모님이 이 결혼을 얼마나 반기고 있는데, 그들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서지훈은 그녀의 계략적인 모습에 더욱 혐오감을 느꼈다.
"나랑 맞서는 게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해?"
낮고 깊은 목소리엔 불쾌함이 묻어 있었다. 그 모습에 한예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간 늦었어요. 몸도 안 좋은데 일찍 쉬어요. 생각을 정리하거나, 부모님을 설득하면 그때 다시 연락해요. 잘 자요."
그녀는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화면에 떠 있는 번호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이름을 저장했다. [서지훈]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자, 머릿속에는 서지훈의 창백하면서도 잘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분노로 얼굴이 굳어 있겠지.
어쨌든 될 수 있으면 피하자.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야.'
그런데 다음 날, 서씨 가문의 사모님인 강은영이 한예진을 서씨 가문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