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시월 씨, 전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미안하지만 그 별장은 안되겠어요. 욱이 오빠와 함께 그 곳을 새 보금자리로 만들 생각이거든요." 신채희는 차욱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오래 전부터 바라던 소원이었어요."
그는 왠지 모를 향수를 느꼈다.
민시월은 뜬금없이 웃음을 살짝 터뜨렸다.
"뭐가 웃겨?" 차욱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녀의 웃음은 뭔가 수상했다.
신채희는 여전히 그에게 꼭 안겨 있었다. 자신의 매력을 확인 받고 싶다는 듯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차욱이 그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민시월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이제야 깨달은 게 우스워서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바로 테이블 위의 물컵을 들어 두 사람 머리 위로 부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차욱과 신채희는 화들짝 놀랐다.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
"차욱 씨, 난 적어도 당신이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한테 한 약속을 지키던지 아니면 약속 하나도 못 지키는 형편없는 인간이란 걸 인정하던지 둘 중 선택해요."
그녀의 말을 들은 신채희가 발끈하고 나섰다. 성격이 불 같은 신채희는 평소 사랑 받기 위해 연약한 척 내숭을 떨었었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민시월을 세게 밀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당신이 뭔데 우리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요?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 차욱 오빠랑 날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요!"
그리고는 다시 차욱의 품에 안겼다. "오빠, 이번에는 시월 씨가 선 넘었어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그녀는 불쌍한 척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것 봐요. 전부 다 젖었잖아요."
젖은 흰색 셔츠가 신채희의 몸에 달라붙어 몸매를 드러냈다.
그런 두 사람을 말 없이 지켜보던 민시월이 입을 뗐다.
"집이 욕심나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차씨 가문은 돈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작은 거 하나에 손이 떨리는 모양이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그 정도도 나한테 주기 아깝다는 거네요."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차욱은 눈 앞의 여자가 갑자기 완전 다른 사람으로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얼굴에 남은 물기를 털어낸 뒤 신채희를 향해 돌아섰다. "내 명의로 된 빌라가 많아. 그냥 다른 거 골라."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차욱 말고는 없었다. 애인의 전처가 자신을 막 대하는 건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화가 난 신채희는 손가락으로 민시월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서 별장을 준다는 거에요, 안 준다는 거에요?"
민시월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 "안줘요."
짝! 뺨을 때리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염치 없어. 당신이 뭔데! 차욱 오빠에게 버림 받으면 집으로 돌아가도 미움 받을 걸. 감히 어디서 나대?" 신채희가 민시월의 뺨을 때리고는 발악하기 시작했다.
차욱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흥분하지 마."
민시월은 붉어진 뺨을 어루만졌다. 입 안에서 피 비린 맛이 살짝 느껴졌다. "하...싸가지..."
신채희는 계속 지껄였다. "나한텐 차욱씨가 있다고요! 그러는 당신은? 이혼 받고 버려진 신세... 아악! 이게 진짜!"
날아오는 꽃병에 그녀의 말이 끊기고 말았다. 민시월이 던진 꽃병은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제멋대로 짖고 싶으면 먼저 예의부터 갖추셔야죠." 민시월은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있는 힘껏 뺨을 때렸다.
신채희의 비명이 거실에 울려퍼졌다. "차욱 씨!"
아무래도 오늘은 민시월이 선을 넘은 듯 했다. 하지만 차욱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민시월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둘이 잘 살아봐요. 애도 낳고 행복하게 살아봐요."
흐느끼는 신채희를 뒤로 제친 채 그녀는 바로 집을 나갔다.
두 사람만 남은 거실에는 여자의 흐느낌 소리만 가득했다. "저런 여자를 믿는 거에요? 물 세례도 모자라서 꽃병을 던지다니!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어요..."
"그만해!" 차욱이 외쳤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어차피 이혼할 사이야. 더 얽히고 싶지 않아. 채희야, 네가 원하는 거 뭐든 얘기해.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좀 진정해."
신채희는 차욱의 품에 안긴 채 짜증을 부렸다. "민시월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요. 지금까지 말 잘 들었다면서요. 오늘 보니까 전혀 안 그렇던데요? 너무 공격적이에요."
순간 그의 머리 속에 방금 전 민시월이 물을 뿌리고 신채희를 차갑게 바라보던 눈빛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냉혹하고 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마도 민시월의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 지 몰랐을 수도 있었다. 차욱 기억속의 민시월은 늘 순종적이었으니까.
한편 집을 나선 민시월은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검은색 세단을 발견했다. 운전사는 정중하게 말했다. "사모님, 노부인께서 부르셨습니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차에 탔다.
차는 어느 대형 빌라 앞에 서서히 멈췄다. 차욱의 조부모님이 거주하고 있는 차씨 가문 저택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집사는 넋을 잃은 듯 생각에 잠긴 민시월을 안으로 안내했다.
집사는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침묵을 선택했다. "노부인께서 사모님을 한동안 보지 못했다고 하시더군요. 저녁 식사는 준비 중입니다. 그전에 먼저 인사 드리시겠어요?"
민시월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지 않았다. 왠지 최순옥이 이혼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최순옥이 나타나 그녀를 따뜻하게 반겼다. "아가, 여기 와서 앉으렴." 조용하기만 했던 저택이 새로운 손님의 등장으로 조금 활기를 띈 듯 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최순옥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왔구나. 우리 욱이는 잘 지내니?"
자신을 떠보는 게 분명하다고 민시월은 생각했다. 혹시 신채희가 돌아온 걸 아직 모르시는 건가?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할머님, 그이가 저와 이혼하겠대요. 금방 서류에 서명하고 왔어요. 차욱은 지금 신채희와 둘이 있고요."
최순옥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신채희? 걔 때문에 욱이가 교통 사고 당한 것 아니냐? 어떻게 감히 다시 나타날 수가 있어? 걱정하지 마. 그런 여자보단 난 네가 훨씬 좋단다. 이혼은 다시 생각해 볼 수 없겠니?"
조심스러워 하는 최순옥을 본 민시월은 기분이 울적해졌다. 2년 동안 무진 애를 썼지만 차욱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이혼이라고요? 잘 됐네요!" 두 사람 옆으로 차욱의 어머니 김미자가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예의 없는 태도에 최순옥이 호통을 쳤다. "걸음걸이가 그게 뭐냐? 제대로 걸어라! 매너하고는..."
꾸짖는 소리에 허를 찔린 김미자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민시월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둘이 이혼했다니 다행이네. 원래 내 아들은 민씨 가문 첫째 딸 민소라와 결혼할 예정이었거든. 그런데 웬걸? 다른 남자와 임신을 해 버렸네?
수도에 오랫동안 살았지만 민씨 가문에 딸이 하나 더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어. 넌 대체 정체가 뭐니? 2년 동안 그만큼 호강했으면 충분하잖아?"
회차 3
최순옥의 손을 꼭 잡은 민시월의 표정은 김미자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밝았다. "할머니, 기침 좀 하시네요. 제가 이모님에게 배숙 레시피 알려 드릴게요. 끓여 드시면 좀 나으실 거예요."
최순옥은 말 잘 듣고 사려 깊은 손주 며느리를 제일 좋아했다. "아가, 어쩜 이리 마음씨가 고울까? 글쎄... 난 이제 나이가 꽤 들어서 건강이 좋지 않아. 늙은 할미를 관심하는 건 너뿐이구나."
무시 당한 김미자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어머, 너 대체 뭐 하는 거니? 이미 이혼한 마당에 손주 며느리 노릇이라니? 일부러 어머님에게 잘 보여서 우리 집안 돈 떼먹을 속셈 아니니?"
최순옥이 끼어들었다. "시월이는 우리 집안 사람이 된 이후부터 늘 성실하고 부지런했어. 욱이가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게 누군지 잊은 게냐? 나나 어미한테나 늘 얼마나 깍듯하게 대했는데. 2년 동안 고생한 걸 생각해서라도 예쁘게 봐줘야지, 어미는 왜 이리 심술궂은 게냐?"
"어머님! 쟤는 별볼일 없는 민씨 가문 여자예요. 왜 계속 감싸주시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김미자는 속상한 듯 발을 굴렀다.
그리고는 민시월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 말 틀렸어요? 쟤처럼 막돼먹은 애가 어떻게 우리 아들과 결혼할 수 있어요? 어머님 아버님만 아니었어도 절대 전 이 결혼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게다가 결혼한 이후로는 우리 집안에서 호강했잖아요. 우릴 존중하는 건 당연하죠.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 게다가 2년이 되도록 애도 안 생겼어요. 증손주 보고 싶으시죠? 아마 그거 때문에 이혼하는 걸 수도 있어요."
최순옥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미야, 말 조심 하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김미자는 주춤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사실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다행이죠, 뭐. 애라도 있었으면 이혼하는 게 더 어려웠을 테니까. 어차피 그렇게 낳은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최순옥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녀는 민시월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무시하렴, 아가. 원래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잖니. 할미가 부탁한다. 이혼 다시 생각해 봐. 내가 살아있는 한 너 말고 다른 손주 며느리를 들일 생각은 없다. 우리 부부가 네게 얼마나 고마운 지 몰라. 욱이 태도는 너무 신경 쓰지 말아.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최순옥의 말에 김미자는 어이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머님, 대체 왜 그러세요? 왜 두 분은 항상 민시월을 감싸주는 거냐고요! 젠장! 민시월, 이혼한 거 잊지 마. 너희 두 사람은 미래가 없어."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민시월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최순옥은 여전히 침착했다. "어미야, 이제 그만해. 애들 결혼 생활에 네가 뭐라 할 자격은 없어. 간섭하지 마. 며느리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계속 그렇게 할 거면 나가. 지금 당장!"
민망함과 분노로 얼굴이 벌개진 김미자는 이를 악물며 입을 다물었다.
최순옥은 다시 민시월을 향해 물었다. "아가, 네 생각은 어떠니?"
그 순간, 민시월의 뺨 위로 두 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님...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차욱이 신채희와 한 침대에 있는 걸 봤어요. 둘이... 그러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욱이의 태도도... 너무 차갑고 무심했어요. 더 이상 이 결혼을 유지할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놀란 듯 얼굴이 창백해진 최순옥이 대답했다. "이 모든 건 욱이 잘못이야."
그녀는 민시월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2년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김미자가 큰 소리로 정적을 깼다. "아니, 신채희 그 더러운 계집애가 돌아왔다고? 말도 안 돼! 어머님, 제가 가서 그 여자를 만나야겠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는 재빨리 가방을 집어들고는 거실을 뛰쳐나갔다.
민시월은 눈물을 닦으며 안도했다.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아가, 이제 이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으마. 시간되면 꼭 할미 보러 와. 그걸로 이 할미는 충분하단다."
최순옥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차욱이 회복할 수 있었던 건 민시월의 공이 컸다. 그녀의 헌신과 희생을 옆에서 지켜보고는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민시월은 최순옥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럼요. 또 올게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잊지 말고 꼭 제가 알려드린 레시피로 드셔보세요."
뭔가 결심을 내린 듯한 최순옥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떠났다.
한편 최순옥은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집사에게 지시했다. "차욱하고 다른 애들 내일 12시까지 오라고 해."
"네, 노부인."
저택 현관을 나서자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사모님, 어디로 모실까요?"
그는 민시월을 여전히 이 집안의 여주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었다.
휴대폰을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친구 임연수였다. "시월아, 오늘 밤에 글래머 클럽 갈래? 차욱이 오늘 신채희 환영 파티 연다는데? 꽤 큰 파티일 거야. 가서 한바탕 혼쭐 좀 내주자."
민시월은 빠른 회답을 했다. "그래."
곧바로 임연수의 답장이 도착했다. 물음표 달랑 한 개였다. 생각보다 빠른 동의에 놀란 모양이었다.
"나 이혼했어. 이제 싱글이야."
잠시 아무 말 없던 채팅 창에 온갖 흥분을 나타내는 이모티콘이 가득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딱 기다려!"
흥분한 친구의 모습이 재미있었던 그녀는 스프랜더 빌딩 위치를 전송한 뒤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스프랜더 빌딩으로 가주세요."
이 빌딩은 수도에서 가장 하이엔드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럭셔리 쇼핑몰이었다.
민시월이 도착하자마자 직원들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M, 오랜만이야. 디자인 스케치를 전달하러 온 거야?"
호화로운 드레싱 룸에 장식된 다이아몬드는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어 더욱 화려해 보였다.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엘바는 그녀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다 아파. 왜 예쁜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 거야? 피어나면 누구보다 화사할 꽃봉오리인데."
민시월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그럼 오늘, 엘바님의 매직 체인지 부탁해요~"
그녀의 반박을 예상했지만 의외의 대답에 엘바는 깜짝 놀랐다. "어...? 혹시... 진짜 마음 먹고 온 거 맞아? 어머! 나한테 오길 잘했어!"
엘바는 디자인 초안 건을 제쳐두고 그녀를 서둘러 의자로 안내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 오늘 넌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될 거야."
그녀는 메이크업 브러시를 손에 들고 작업에 들어갔다.
한창 메이크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 임연수가 도착했다.
그녀 역시 엘바를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고개 인사를 한 뒤 바로 민시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월의 여신이 돌아온 걸 축하해. 너의 1번 사신 임연수가 왔으니 말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