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나와 내 남편, 강태준은 서울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황금 같은 커플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완벽한 결혼은 거짓이었다. 남편은 희귀한 유전병을 앓고 있었고, 그의 아이를 가진 여자는 누구든 죽게 될 거라 주장했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이가 없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시아버지께서 후계자를 요구하셨을 때, 태준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바로 대리모였다.
그가 선택한 여자, 윤아라는 나보다 젊고 생기 넘치는,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듯한 여자였다. 갑자기 태준은 늘 바빠졌다. ‘힘든 시험관 시술 과정’을 겪는 그녀를 돌봐야 한다는 핑계였다. 그는 내 생일을 놓쳤고, 우리의 결혼기념일도 잊었다.
나는 그를 믿으려 애썼다. 어느 파티에서 그의 목소리를 엿듣기 전까지는. 그는 친구들에게 나에 대한 사랑은 ‘깊은 유대감’이지만, 아라와의 관계는 ‘불꽃’같고 ‘짜릿하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는 아라와 이탈리아 꼬모 호수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결혼기념일에 가자고 내게 약속했던 바로 그 빌라에서.
그는 그녀에게 결혼식과 가족, 그리고 삶을 통째로 선물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유전병이라는 거짓말을 방패 삼아 내게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배신감은 너무나 완전해서, 마치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그날 밤, 출장을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집에 돌아온 그에게 나는 다정한 아내를 연기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내가 모든 것을 엿들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는 동안, 내가 이미 나의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내가 방금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사람을 완벽하게 사라지게 만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서비스에.
제1화
서혜진과 강태준. 서울의 사교계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커플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서울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 어떤 문이든 열 수 있는 이름값, 그리고 명문 사립고 시절부터 시작된 동화 같은 러브스토리까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미니멀리즘과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찬 그들의 집, 그 닫힌 문 뒤에는 텅 빈 공허함과 침묵만이 존재했다. 아이가 없었다.
혜진이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태준이 거부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희귀한 유전병, 그는 그렇게 불렀다. 그가 몸에 지니고 있다는 시한폭탄.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임신을 사형 선고로 만들어버리는 저주.
“당신을 잃을 수는 없어, 혜진아.”
그는 목이 멘 목소리로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하곤 했다.
“절대로.”
몇 년 동안, 혜진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가족을 갖고 싶다는 깊은 열망을 희생할 만큼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모성애를 아트 큐레이터라는 자신의 일에 쏟아부었다.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키워내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태강 그룹의 막강한 총수인 태준의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었다. 소독약 냄새와 오래된 돈 냄새가 진동하는 병실 침대에서, 그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후계자가 필요하다, 태준아. 강씨 가문의 대는 너에게서 끝나선 안 돼. 해내지 못하면, 회사는 네 사촌에게 넘어갈 거다.”
그 압박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날 밤, 태준은 혜진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들고 왔다.
“대리모.”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오랫동안 희망을 포기했던 혜진의 마음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대리모? 정말?”
“응. 철저히 의학적인 절차로 진행될 거야. 우리의 배아, 그녀의 자궁. 중요한 건 당신이 모든 면에서 엄마라는 사실이야. 당신에게 닥칠 위험만 피하는 거지.”
그는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장담했다. 일주일 후, 그는 윤아라라는 여자를 소개했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불안할 정도의 닮은꼴이었다. 아라는 혜진과 같은 검고 물결치는 머리카락, 비슷한 높은 광대뼈, 그리고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혜진보다 십 년은 젊어 보였고, 그녀의 세련된 우아함과는 대조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완벽하지, 안 그래?”
태준이 이상한 빛을 띤 눈으로 말했다.
“업체에서 프로필이 아주 잘 맞는다고 하더라고.”
아라는 조용하고 소심해 보였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의 아파트가 주는 위압감과 그들 자체에 압도된 듯했다.
“이건 순전히 비즈니스 관계야, 혜진아.”
그날 밤, 태준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 여자는 그냥 그릇이야.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부모는 당신과 나, 우리야. 이건 우리를 위한 거야.”
혜진은 반평생을 사랑해온 남편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그녀가 꿈에 그리던 가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거짓말은 거의 즉시 시작되었다.
‘시험관 시술’ 때문에 태준은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는 저녁 식사에 빠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저녁 내내 자리를 비웠다.
“그냥 아라 씨 좀 챙겨주는 거야.”
그는 밤늦게까지 문자를 보내며 말했다.
“호르몬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하대. 의사들이 대리모가 안정감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고.”
혜진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음식을 만들어 태준 편에 보냈다. 아라를 위해 부드러운 담요와 편안한 옷을 사주며, 이 차가운 계약 관계의 간극을 메우려 애썼다.
그녀의 생일이 다가왔다. 태준은 단둘이 제주도에서 주말을 보내자고 약속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약속을 취소했다.
“아라 씨가 약물에 부작용을 보이고 있어.”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 너머에서 말했다.
“내가 여기 있어야 해. 정말 미안해, 혜진아. 꼭 보상할게.”
그녀는 혼자 생일을 보냈다. 빵집에서 사 온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며, 펜트하우스의 정적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결혼기념일은 더 최악이었다. 그는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을 뿐이다.
‘병원에 급한 일 생겼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혜진은 친구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의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 아기를 위해서야. 스트레스가 많은 과정이잖아.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간절한 거야.’ 그녀는 완벽했던 삶의 가장자리를 해지게 만드는 진실을 외면하며, 그 설명들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은 비가 차갑게 내리던 어느 화요일이었다. 신호를 위반한 택시가 그녀의 차 옆면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충격은 폭력적이었고, 온몸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어지럽고 떨렸다. 그녀의 첫 번째 본능은 태준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다.
전화는 계속 울리다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태준 씨, 나 사고 났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괜찮은 것 같아, 근데 차가 완전히 망가졌어. 혹시… 와줄 수 있어?”
그녀는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두 시간. 친절한 경찰관이 견인차를 부르는 것을 도와주고, 검사를 받도록 그녀를 응급실로 데려다주었다. 팔은 삐었고, 몸은 시퍼렇게 피어나는 멍들로 뒤덮였다.
그녀는 차갑고 소독약 냄새 나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손에 쥔 전화기는 조용했다. 다시 전화했다. 음성 사서함. 또다시. 음성 사서함.
결국 그녀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팔의 둔한 통증은 가슴속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파트는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불을 켜자 커피 테이블 위에 반쯤 비워진 와인잔이 보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합리화하려 애썼다. 그의 친구가 들렀을 수도 있다. 회의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심어진 의심의 씨앗은 이제 가시 돋친 덩굴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휘감고 있었다.
그 주 후반, 태준은 강남의 한 프라이빗 클럽에서 사업 파트너와 친구들을 위한 작은 모임을 주최했다. 삔 팔과 희미해져 가는 멍들을 안고 있는 혜진은 떨쳐낼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갤러리 미팅 때문에 늦게 도착한 그녀는 프라이빗 룸으로 다가갔다.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들어가려고 문밖에서 잠시 멈췄다.
바로 그때, 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명확하고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진짜야,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태준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볍고, 그녀가 몇 년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혜진이랑은… 깊은 사랑, 영혼의 교감 같은 거지. 근데 아라랑은… 불꽃이야. 짜릿하다고.”
혜진은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을 허공에 멈춘 채 얼어붙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의 친구 중 한 명인 민혁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짜 이게 좋은 생각이라고 확신해, 태준아? 둘 다 만나는 거? 언젠가 크게 터질 일이야.”
“안 터져.”
태준의 목소리는 혜진의 속을 뒤집어 놓는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혜진이는 아기를 갖게 될 거고, 행복해할 거야. 그리고 내겐 아라가 있겠지. 난 두 사람 모두에게 원하는 모든 걸 줄 수 있어.”
혜진은 발밑의 바닥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벽에 기댔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달아오르는 피부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그리고 마지막, 치명적인 일격이 날아왔다.
“아기가 태어나면 유럽에서 아라를 위한 결혼식을 계획 중이야.”
태준은 공모자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고백했다.
“비밀 결혼식. 우리랑 아라 친구 몇 명만. 이미 꼬모 호수에 있는 빌라에 계약금도 걸었어. 수십억짜리. 그럴 자격이 있어. 아라는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있는 여자야.”
그가 15주년 결혼기념일에 혜진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 빌라였다.
메스꺼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 복도에 있던 장식용 화병을 넘어뜨렸다. 화병은 대리석 바닥 위에서 귀가 먹먹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안에서의 대화가 멈췄다. 문이 벌컥 열리고, 태준이 서 있었다. 그녀를 본 그의 얼굴은 공포로 굳어졌다.
“혜진아! 여기서 뭐 해?”
그의 친구들이 그의 주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동정과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혜진은 몸을 바로 세웠다. 충격은 그녀가 가진 줄도 몰랐던 얼음 같은 평정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대리모와 비밀 결혼식을 계획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방금 도착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태준의 친구들은 주식 시장에 대해 크고 부자연스러운 대화를 시작하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태준은 그녀 곁으로 달려와 팔을 잡았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그의 손길이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팔을 뿌리쳤다.
“그냥 피곤해서.”
그녀는 텅 빈 눈으로 말했다.
“힘든 하루였어.”
그녀는 그의 너머,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오늘 밤 아라 씨도 왔어?”
그 질문은 시험이었다. 한 조각의 정직함이라도 바라는 마지막, 절박한 애원이었다.
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라? 당연히 아니지. 그 여자가 왜 여기 있겠어? 그냥 대리모일 뿐이야, 혜진아. 도구라고. 기억하지?”
그는 ‘도구’라는 단어를 너무나 경멸적으로, 쉽게 내뱉어서 그녀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의 사랑이었다. 이것이 그의 불꽃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도구.”
그녀는 그의 친구들의 충격받은 얼굴이나 그의 광적인 걱정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몸이 안 좋아서.”
그녀는 어깨너머로 말했다.
“집에 가봐야겠어.”
그녀는 클럽을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침착하고 단호했다. 얼음 같은 평정심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며 고통을 얼리고, 그것을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언가로 바꾸고 있었다.
청담동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태준이 뒷좌석에 두고 간 태블릿 화면이 켜졌다. 아라에게서 온 문자였다.
‘방금 도착했어, 자기야. 스위트룸 장난 아니다. 자기가 빨리 와서 이 옷 좀 벗겨줬으면 좋겠네. 쇼핑 진짜 미쳤어… 나한테 이렇게나 많이 쓴 거야?’
태준은 이틀간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고 했었다.
혜진은 메시지를 쏘아보았다.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눈물 너머로 글자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그는 부산에 없었다. 그는 아라에게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택시 기사에게 다른 주소를 말했다. 강남에 있는 세련되고 눈에 띄지 않는 오피스 빌딩. 문에 붙은 간판은 간단했다. ‘블랙쉴드 컨설팅.’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확고한 결심을 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알던 인생은 끝났다. 이제 그것을 지워버릴 시간이었다.
회차 2
일주일 후, 블랙쉴드 컨설팅으로부터 확인 이메일이 도착했다. ‘1단계 완료. 새로운 신분 서류 처리 중. 예상 완료 기간: 4-6주.’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너무나 강렬해서 마치 육체적인 해방감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탈출을 설계하는 건축가였다.
파리. 그 단어가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태준과 함께 알던 5성급 호텔과 미슐랭 레스토랑의 파리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녀의 파리가 될 것이다. 마레 지구의 작은 아파트, 조용한 삶, 작고 독립적인 아트 갤러리에서의 일. 아무도 ‘강태준의 아내’를 모르는 삶.
그녀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자신의 삶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유령처럼 펜트하우스를 배회하며 15년간의 공유된 기억들을 정리했다. 옷장 뒤편 벨벳 상자 안에는 태준이 결혼식 날 주었던 강씨 가문의 가보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 유품이야.”
그는 진심 어린 눈으로 말했었다.
“우리 가문의 미래를 상징하지. 이제 영원히 당신 거야.”
영원히. 그 단어는 씁쓸한 농담이었다. 그녀는 차갑고 반짝이는 돌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것들은 미래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녀의 침묵에 대한 대가였고, 그녀 자신의 심장이 부서지는 것을 방조한 대가였다.
그녀는 근처 자선 경매장으로 가서 익명으로 기부했다. 기부 확인서는 목걸이 자체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다른 것들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거짓된 미소로 가득 찬 사진 앨범들. 그들의 초기, 더 행복했던 여행에서 온 어리석은 기념품들. 그가 그녀의 베개 위에 남기곤 했던 손편지들.
그날 밤, 그녀는 그것들을 거실의 커다란 벽난로로 가져갔다. 하나씩,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거짓된 행복의 순간에 포착된 그들의 얼굴이 오그라들고, 검게 변하고,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불은 그들의 과거를 삼켰다. 거짓이었던 사랑을 위한 장작더미였다.
태준은 다음 날 ‘출장’에서 돌아왔다. 그녀가 모르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그는 벽난로 선반 위, 그들의 결혼사진이 있던 빈자리를 발견했다.
“우리 사진 어디 갔어, 혜진아?”
그가 약간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액자 새로 하려고 보냈어.”
그녀는 매끄럽게 거짓말했다.
“유리에 금이 갔더라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설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너무 정신이 없었고, 그의 비밀스러운 삶에 너무나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것이 아닌, 희미한 꽃향수 냄새. 그의 캐시미어 코트 깃에서 길고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을 보았다. 증거는 도처에 널려 있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속이고 있다고 믿는 남자의 행복한 무지 속에서 집안을 활보했다.
“당신을 위한 서프라이즈가 있어.”
며칠 후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발표했다.
“파티야. 내가 없었던 동안의 당신 생일을 보상하기 위해서. 모두를 초대했어.”
그녀의 진짜 생일은 몇 주 전, 그녀가 혼자 보냈던 그날이었다. 이 파티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사교계를 위한 공연, 완벽한 커플이라는 가면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참… 사려 깊네.”
그녀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심플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다른 여자들의 반짝이는 드레스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처형식에 참석한 구경꾼 같았다. 펜트하우스는 꽃으로 가득 찼고, 샴페인은 자유롭게 흘렀으며, 구석에서는 현악 4중주단이 연주하고 있었다. 화려함과 행복의 완벽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그 여자를 보았다.
윤아라. 그랜드 피아노 근처에 서서, 한 사이즈 작은 듯한 강렬한 빨간 드레스를 입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나이 든 여자가 혜진 옆을 지나갔다.
“어머, 오늘 정말 멋지네.”
여자는 아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 빨간색, 당신한테는 좀 과감한 선택인데!”
여자는 혜진의 팔을 툭 치고는 지나갔다. 혜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아라를 그녀로 착각하고 있었다. 대체품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명백해서, 사람들이 복제품을 원본으로 혼동하고 있었다.
아라는 겁에 질려 보였다. 그녀는 작은 지갑을 방패처럼 가슴에 꼭 껴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 안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 같았다.
태준은 그녀의 불안을 보고 즉시 대화를 끊고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보호하듯 손을 얹고,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녀의 뺨에 희미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혜진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태준 씨.”
그녀는 낮고 고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는 거죠?”
태준은 움찔했지만, 재빨리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혜진아, 자기야! 아라 씨를 제대로 소개해주고 싶었어. 우리 아이를 품고 있는 사람이니까, 가족의 일원처럼 느끼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는 작은 소동을 눈치채기 시작한 군중을 향해 돌아섰다.
“여러분.”
그는 거짓된 환대로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윤아라 씨입니다. 혜진이와 제가 가족을 이루는 데 기꺼이 도움을 주기로 한, 가족의 소중한 친구입니다. 혜진이의… 여동생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여동생. 그 말은 공개적인 강등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내가 아니었다. 권력 있는 커플의 반쪽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젊고 더 임신 잘하는 여자를 그들의 삶에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비로운 언니일 뿐이었다. 굴욕감은 육체적인 것이었다. 가슴에서 얼굴로 퍼져나가는 뜨거운 열기였다.
태준의 관심은 이미 아라에게 돌아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군중 속으로 이끌며, 그의 권력 있는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손은 결코 그녀의 등에서 떠나지 않았다. 혜진은 그들을 지켜보았다. 자신들만의 태양 주위를 맴도는 한 쌍, 그녀를 차가운 바깥 어둠 속에 남겨둔 채.
그녀는 그가 웃는 것을 보았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진심에서 우러나온 꾸밈없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그가 아라의 귀 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너무나 친밀하고 부드러운 그 몸짓에 그녀 자신의 심장이 움켜쥐어졌다.
그녀는 억지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미소 짓고, ‘삔 팔’에 대한 위로와 ‘멋진 파티’에 대한 칭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그들에게로 향했다.
미술관 이사회에서 만난 그녀의 친구 두 명이 샴페인 잔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저 뻔뻔함 좀 봐, 믿을 수 있어?”
한 명이 말했다.
“아내 생일 파티에 내연녀를 데려오다니.”
“내가 봤어.”
다른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속삭였다.
“지난주에, 차병원 산부인과에서. 대기실에서 손잡고 있더라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었어.”
차병원. 서울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비싼, 태준이 ‘예약 잡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산부인과였다.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너무나 거대하고 정교해서 숨이 막힐 정도의 배신의 그림을 완성했다. 이것은 단순한 최근의 불륜이 아니었다. 이것은 장기적이고 계산된 기만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이중생활이었다. 그녀의 완벽한 결혼은 금이 간 정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텅 빈 껍데기였다.
회차 3
혜진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가장자리부터 금이 가는 석고 가면 같았다. 이마에 차가운 땀이 맺혔고, 파티 손님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둔탁한 굉음으로 멀어졌다. 벗어나야 했다.
그녀는 변명을 중얼거리며 파우더룸으로 도망쳤다. 금박 벽지가 그녀를 옥죄는 듯했다. 화려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공허했다. 모두가 아는 자신감 넘치고 침착한 서혜진이 아니었다. 슬픔으로 속이 텅 비어버린 낯선 여자였다.
그녀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으며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메스꺼움을 억누르려 애썼다. 가슴의 통증은 숨쉬기 힘들게 짓누르는 물리적인 무게였다. 심장이 말 그대로 부서지는 것 같았다.
얼굴을 닦고 있을 때, 파티 중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옆 응접실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 그리고 뒤이은 낮은 속삭임.
심장이 멎었다. 그녀는 그 속삭임을 알았다.
그녀는 문을 살짝 밀어 열었다. 응접실은 어둑했지만, 그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태준이 아라를 책장에 밀어붙이고, 그녀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탐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었다. 굶주리고 소유욕에 가득 찬 키스였다.
아라의 부드러운 신음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태준 씨.”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엉클며 숨을 내쉬었다.
“누가 볼 거예요.”
“보라고 해.”
그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가 빨간 실크 드레스 위로 엉덩이를 감쌌다.
“난 당신을 자랑하고 싶어.”
그는 살짝 물러서며, 혜진에게는 몇 년 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욕망으로 어둡게 물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혜진이랑은 전부 정신적인 거, 영혼의 교감 같은 거야. 근데 당신이랑은… 이거지.”
그는 서로 밀착된 그들의 몸을 가리켰다.
“이게 진짜야.”
그 말들은 혜진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녀의 가장 깊은 두려움에 대한 마지막, 잔인한 확인 사살이었다. 그녀는 단순히 대체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사랑과 동반자 관계는 이성적이고 열정 없는 것으로 폄하되며, 그 가치가 깎여나가고 있었다.
“오늘 밤 나한테 착하게 굴면.”
태준이 그녀의 턱선을 따라 입술을 움직이며 속삭였다.
“당신이 원하던 그 까르띠에 팔찌 사줄게.”
“네, 태준 씨.”
아라가 복종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거친 키스를 퍼붓고는 문 쪽으로 움직였다. 혜진은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파우더룸으로 허둥지둥 물러났다. 그녀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팔이 아라의 허리를 소유하듯 감싸고 있었다. 너무나 깊어서 육체적인 고통의 파도가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그들 자신의 관계를 떠올렸다. 항상 조심스럽고, 절제되고, 거의 경건하기까지 했던 그들의 잠자리. 그는 항상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그녀를 죽일 수도 있는 임신으로 이어질 열정이 두려워서 그런다고 주장했었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열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에게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는 그것을 다른 누군가를 위해 아껴두고 있었다. 그녀와 충분히 닮아서 환상이 될 수 있지만, 탈출구가 될 만큼 다른, 젊고 유순한 소녀를 위해.
차갑고 씁쓸한 깨달음이 밀려왔다. 그가 아라에게 집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혜진이 될 수 없는 단 한 가지, 젊고, 부담 없고,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는 임신이 가능한 존재였다. 강씨 가문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운, 그가 자신의 미래를 써 내려갈 수 있는 백지였다.
고통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녀 안에서 내장을 할퀴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을 추슬러, 완벽한 안주인의 가면을 다시 쓰고 반짝이는 파티장으로 걸어 나갔다.
방 건너편에 있는 아라를 보았다. 그녀의 뺨에는 승리감에 찬 홍조가 어려 있었다. 드레스 깃 바로 위에는 작고 검붉은 자국, 키스 마크가 보였다. 그 광경은 새로운 고문이었다.
아라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혜진이 충격받게도,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샴페인 잔을 든 채 불안해 보였다.
“사모님.”
그녀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했다.
“샴페인이… 저한테는 좀 독하네요. 혹시… 물 좀 갖다주실 수 있을까요?”
그 대담함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남편과 비밀스러운 밀회를 막 끝낸 내연녀가 아내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혜진의 속은 단단하고 분노에 찬 매듭으로 꼬였다. 삔 팔을 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그때, 재앙이 닥쳤다.
아라는 아마도 혜진의 태도 변화를 감지하고, 불안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파티의 중심 장식이었던, 높게 쌓인 샴페인 잔 탑에 부딪혔다. 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끔찍한 순간, 그것은 공중에 떠 있는 듯하더니, 이내 귀가 먹먹할 정도의 유리 깨지는 소리와 거품 이는 샴페인의 폭포수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혜진은 바로 그 경로에 있었다. 그녀는 멀쩡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그녀의 팔과 어깨를 베었다. 커다란 조각 하나가 그녀의 이마를 쳤고, 따뜻한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틀거리다 대리석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윙윙거리는 귓속에서, 그녀는 태준을 보았다. 그는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공포의 가면이었다. 찰나의, 어리석은 순간,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 달려갔다.
그는 샴페인에 젖었을 뿐 다치지 않은 아라에게로 갔다. 그는 마치 그녀가 위험에 처한 사람인 양,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
“아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아기는!”
그는 미친 듯이 그녀의 몸을 살피며 외쳤다.
그는 혜진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녀는 피를 흘리며 부서진 채 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차갑고 짜증스러웠다. 마치 그녀가 단지 불편한 존재, 치워야 할 난장판인 것처럼.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그의 모든 관심은 아라에게 쏠려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안심의 말을 속삭였다.
혜진은 차갑고 샴페인에 젖은 대리석 바닥에 누워 있었다. 유리 조각들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샴페인 타워의 잔해를 보았다. 그녀의 산산조각 난 삶에 대한 완벽한 은유였다. 베인 상처의 통증은 날카로웠지만, 그렇게 철저하고 완전하게 버려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켰다. 피로 얼룩진 검은 드레스. 그녀는 파티장을 걸어 나왔다. 깨끗한 흰색 대리석 바닥에 피 묻은 발자국을 남기며. 아무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가 떠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응급실로 택시를 탔다. 불과 일주일 전에 왔던 바로 그곳이었다.
“혼자 오셨어요, 부인?”
분류 간호사가 혜진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며 직업적인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네.”
혜진은 텅 빈 속삭임으로 말했다.
“혼자 괜찮아요.”
커튼으로 가려진 그녀의 자리에서, 그들이 보였다. 태준은 아라를 같은 병원, 복도 끝 개인실로 데려왔다. 그는 그녀 주위를 맴돌며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 그의 얼굴은 다정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아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존재하지도 않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아무 걱정 마.”
그의 목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타고 들려왔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그것은 그가 한때 그녀에게 했던 말의 고통스러운 메아리였다. 병동의 간호사들은 그가 얼마나 헌신적인지, 얼마나 사랑스러운 파트너처럼 보이는지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혜진은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것이었어야 할 삶의 관객이 되어. 그녀는 이제 그의 진짜 모습을 보았다. 단순히 대체품을 원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그녀를 대체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의 삶 속에서, 그녀는 이미 사라진 존재였다.
그리고 그 차갑고 소독약 냄새 나는 병실에서, 혜진은 그것을 공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사라져야 했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