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임하늘, 아직도 방송국이야? 새로운 투자자들이 딥블루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 몰라? 강서은은 이미 30분 전에 장 팀장과 함께 출발했어. 너도 빨리 서둘러. 늦으면 강서은 그 낙하산이 계약을 따낼 수도 있어. 만약 네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앵커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어."
10분 전에 친구가 보낸 음성 메시지를 확인한 임하늘은 머리를 묶어 올리리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그녀는 금방 강성 방송국에서 경제뉴스를 마쳤다.
원래 뉴스를 진행해야 할 사람은 강서은이었다. 하지만 팀장이 갑자기 뉴스를 덜컥 그녀에게 맡기고는 저녁 약속을 한 시간 앞당겨 버렸다.
'내가 투자자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강서은이 수작을 부린 게 틀림 없어.'
강서은이 이렇게 수작을 부리는 건 아마도 투자자들의 환심을 사서 그녀의 메인 앵커 자리를 빼앗기 위함일 것이다.
옷을 갈아 입을 시간도 없었던 임하늘은 뉴스를 진행 할 때 입었던 정장 차림 그대로 곧장 가방을 챙겨 딥블루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여 문들 들고 안에 들어서려던 임하늘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강서은이 투자자 중 한 명인 정성훈의 무릎 위에 앉아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달콤하게 웃으며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간단한 저녁 식사 자리였지만, 강서은은 정성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정 대표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임하늘은 테이블에 다가가 와인 잔을 집어 들더니 단숨에 비워버렸다.
정성훈은 여전히 강서은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임하늘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임하늘씨?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임하늘은 그가 그저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손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정성훈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기억났어. 내 친구의 전 여자친구와 많이 닮았네."
정성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임하늘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금테 안경을 쓴 남자는 검은색 정장에 셔츠와 넥타이를 완벽하게 매치해 입고 있었고 그의 몸에서 풍기는 절제된 분위기는 마치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위치한 고귀한 사람처럼 느껴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날카로웠으며,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임하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법조계와 정계에서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인 이서준은 5년 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강성시 검찰청에 들어갔다.
25세의 나이에 강성시 사법계 최연소 검사가 된 그는 총명하고 끈기가 있어 이미 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당시,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와의 3년 동안의 연애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단칼에 끝내 버린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임하늘은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서준은 차분한 눈빛으로 임하늘을 바라 보고 있었고 무심한 그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임하늘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얼굴에 스친 당황함을 감추기 위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오늘 식사자리는 그녀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온전히 강서은을 위해 준비 된 무대였다.
과거, 이서준은 그녀에게 1억 원의 수표를 건네며 다시는 자신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다.
그렇게 이별을 겪은 임하늘은 해외에 나가 2년동안 유학생활을 했고 3년전에 조용히 귀국했다.
두 사람은 같은 강성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이별 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임하늘은 그가 있는 곳에 나타나지 말라던 그의 말을 떠올리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정성훈이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하늘씨, 이렇게 가려고?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지 않아?"
임하늘은 발걸음을 멈추고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정성훈을 돌아봤다.
"정 대표님, 이미 예쁜 아가씨가 대표님 곁에 있지 않나요? 굳이 방해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정성훈은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 곁에는 예쁜 아가씨가 있지만, 서준이 옆에는 없잖아. 오늘 네가, 서준이를 만족시켜 준다면 네가 진행하는 방송을 1년 동안 후원해 줄게. 어때?"
정성훈은 이서준을 돌아보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친구를 위해 억지로 임하늘을 잡아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두운 눈동자는 임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룸에 들어 설 때부터 그의 시선은 단 한번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임하늘은 그 자리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강서은은 정성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니 정성훈이 임하늘의 프로그램에 투자를 하는 꼴은 죽어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정성훈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 대표님, 하늘 언니를 너무 난처하게 만들지 마세요. 언니는 이미 약혼한 사람이 있어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평판에 큰 타격을 입을 거에요. 그리고 하늘 언니와 언니의 약혼자는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거든요."
정성훈은 눈을 반짝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이서준은 고개를 숙여 얼굴에 스친 불쾌한 감정을 숨겼다. 그가 다시 임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결혼해?"
임하늘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약혼은 가족들이 하도 결혼하라 닥달하기에 그들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하여 둘은 필요 할 때마다 가족들 앞에서 다정한 모습으로 연기를 하며 얼굴을 비추는 게 전부였고 평소에는 각자의 삶을 살았다.
임하늘은 차분하게 이서준을 바라보더니 차갑지만 예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이서준의 눈빛보다도 차가웠고 마치 서이준을 낯선 사람처럼 대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성훈은 친구의 눈빛을 보고는 장난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준아, 하늘씨 결혼 소식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야? 설마 결혼 식장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리려는 건 아니지?"
이서준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어두운 눈빛으로 임하늘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임하늘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회차 2
"이대표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인생은 와인을 음미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어떤 와인은 한번 맛을 본 걸로 충분하기에 다시 맛을 볼 필요가 없죠. 그리고 중요한 건, 전 지금 마시는 와인에 만족하고 있어요."
임하늘은 잔을 들어 올리며 공손하게 미소 지었지만, 차분한 눈빛 뒤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서준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다.
그는 임하늘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와인잔을 집어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5년 전, 그녀가 그가 건넨 1억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단호하게 떠났던 날처럼 그녀의 '이대표님' 이라는 호칭은 그 어떤 욕설보다도 그의 심장을 더욱 아프게 찔렀다.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고, 공기가 차갑게 식어갔다.
한 켠에 앉아 있던 장팀장은 이서준과 정성훈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임하늘 씨,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와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요. 이대표님과 이야기도 좀 나누고."
장팀장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서준의 옆자리로 이끌었다.
"그냥 가볍게 식사하고 담소만 나누는 자리예요. 약혼자가 그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방송국에서 어떻게 일할 수 있겠어요? 자, 이대표님과 술 한 잔 마셔요. 술 한 잔 마시고 가요."
장팀장은 그녀의 잔에 독한 양주를 가득 따랐다.
임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올리더니 그를 향해 내밀었다.
"이대표님, 제 술을 한잔 받아 주시죠."
그녀가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단숨에 들이켰다.
손끝이 스치는 순간, 임하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감정이 꿈틀거렸고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였다. 그녀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경연에 참가하여 매일 같이 연구에 매진했던 터라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끝내 위병으로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고 그 뒤로 서이준은 직접 그녀의 하루 세끼를 챙겼다. 매운 음식은 물론이고 술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난 지금. 그는 그녀의 잔을 빼앗아 안에 든 술을 단번에 마셔 버린 것이다.
임하늘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길고 마디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이 와인 잔을 감싸고 있었고, 차분한 얼굴에 진지한 기색이 비쳤다.
눈빛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의 절제된 동작 하나하나에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듯한 매력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지만 마치 독약마냥 치명적이었고 사람 마음을 홀렸다.
그녀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어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따르고는 대범하게 입을 열었다.
"이대표님, 그럼 이 잔은 제가 마실게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젖히더니 술을 단번에 마셔버렸고 술잔을 빼앗으려고 내 뻗은 이서준의 팔은 허공에 멈췄다.
임하늘은 그의 손을 보지 못한 척했다.
그와 다시 얽히는 것은 그녀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고,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왠지 빚을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품었던 애틋한 감정은 5년 전에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그의 습관적인 동작 하나에 마음이 흔들릴 만큼 그녀는 여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서준이 그녀 따위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권력과 특권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5년 전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강서은과 정성훈은 서로에게 키스하고 애무하며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행동했다.
임하늘은 남들이 이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게 눈치가 보였다. 마치 자신이 남들의 애정행각을 방해하는 사람 같았던 것이다.
이서준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임하늘은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장팀장은 이번에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계약을 성사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계약만 성사된다면 그 계약을 따낸 사람이 강서은이든 임하늘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막 술집에서 나왔을 때, 휴대폰이 울렸고 그녀는 멈춰 서서 문자를 확인했다.
[1년치 후원을 원한다면, 문 앞에서 기다려.]
오만하고 독단적인 말투는 딱 봐도 이서준이었다. 아니면 그냥 스팸 문자라고 생각하고 지워버렸을 것이다.
초여름 날씨는 그리 덥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변덕이 심했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임하늘은 급히 건물 밑에 들어가 소나기를 피했다. 고개를 숙여 비에 젖은 하이힐과 스타킹을 바라보던 임하늘은 갑자기 아까 이서준과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고급 세단 한대가 멀지 않은 곳에 정차하더니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이어 눈부실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나타났고 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타."
짧고 차가운 명령, 역시나 이서준 다웠다.
임하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5년만에 만나는 그였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하인을 다루듯 그녀에게 명령했다.
임하늘이 우산 대신 핸드백을 머리 위에 올리고 차로 뛰어가려던 그때, 우산을 든 기사가 차에서 내려 그녀를 차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서준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임하늘을 바라 봤다.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빗물에 젖은 긴 다리와 하이힐에 향했고 살색 스타킹 너머 그녀의 피부가 얼핏 보였다.
그는 말없이 수건을 꺼내 그녀의 다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갑작스런 그의 스킨십에 임하늘은 깜짝 놀라 온몸이 굳었다.
그녀는 다급히 그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들고는 예의 바르게 감사를 전했다.
그녀가 일부러 그와 거리를 두는 모습은 마치 그에게 둘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창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창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이윽고 그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 날짜는 정했어?"
임하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차가 많이 막혔다. 기사는 천천히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 이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너한테 잘해줘?"
임하늘이 잠시 갈등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얼마나 잘해주는데?"
"이대표님, 그 사람 눈엔 저밖에 없어요. 변함없이 저를 사랑하고 아껴줘요, 날 버리고 떠난 적도 없고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기에는 약혼자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그를 향한 비난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차문을 두드리던 손을 거두고 주먹을 쥐었다.
이어 차 안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고 어느새 비가 그쳤다.
임하늘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과 건물을 바라봤다.
그의 상황은 아예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5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대단한 집안의 귀한 도련님이었고 월급이 500만원 남짓한 그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고급 세단은 임하늘이 힘들게 돈을 모아 겨우 장만한 작은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전화 번호와 주소를 알아냈는지 묻지 않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에겐 그냥 사소한 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문을 열려던 그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IT업계를 그만두고 방송국에 취직한 거야?"
그녀가 수석으로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했음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임하늘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이대표님, 저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IT업계가 저를 버렸으니 저는 미련 없이 포기하고 적성에 맞는 일을 다시 찾은 거죠."
그녀의 말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이서준은 급히 그녀를 불렀다. 임하늘이 멈춰섰으나 정작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하늘은 몸을 살짝 숙이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 대표님, 대표님 말대로 저희는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녀는 이서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문을 닫더니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떠났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에 꽉 쥐어져 있던 이서준의 주먹이 힘없이 풀렸다.
그녀는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차갑고 단호하게 그를 떠났다.
회차 3
다음날 새벽 5시, 임하늘은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러닝화 끈을 묶은 그녀는 강변을 따라 달렸다.
조깅을 마쳤을 무렵 도시는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방송국으로 향해 8시 경제 뉴스를 진행했다.
방송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던 그녀는 강서은과 마주쳤다.
강서은은 품에 한 가득 붉은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하늘 언니."
강서은이 밝게 인사하자 임하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꽃다발을 힐끗 바라보았다.
"꽃이 예쁘네."
주위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강서은은 우월감에 젖어 턱을 치켜들고 미소 지었다.
"성훈이가 보내줬어요."
동료들 사이에서 경멸 섞인 비웃음과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갔다.
어제 저녁에 만난 투자자를 그녀는 바로 '성훈'이라 불렀다. 회사 동료들에게 대단한 스폰서를 낚았다고 선언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녀를 차갑게 무시해 버렸다.
다들 강서은의 유치한 자랑질에 맞장구를 쳐줄 시간이 없었을 뿐더러 그 스폰서가 언제 돌아 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임하늘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한마디 대꾸했다.
"축하해."
"언니, 언니에 비하면 이 꽃은 아무 것도 아니죠."
강서은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가짜 웃음을 지었다.
"언니는 하룻밤 새로 이대표님을 구슬려서 2년치 광고계약을 따냈다면 서요? 역시 언니는 대단해요. 대체 어떻게 한 거에요?
이어 그녀는 임하늘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하지만 동작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전혀 작지 않았다.
"어젯밤 이 대표님을 확실하게 만족시켜 드렸나 봐요?"
임하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적 없어."
강서은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언니. 내숭 좀 그만 떨어요. 오늘 아침 일찍 팀장님이 알려 주던데요? 이 대표님이 광고 계약을 하셨다고요."
임하늘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했다. 바로 그때, 장 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하늘 씨, 준비해요. 10분 후에 이 대표님을 만나러 갈 거니까."
임하늘은 멈칫하더니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서은은 팔짱을 끼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임하늘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잠자코 장팀장의 차에 올라 타 함께 강성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향했다.
장팀장은 환하게 웃으며 데스크 직원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이대표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미리 약속을 잡았으니 확인 부탁드려요."
임하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대표님? 이 검사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그가 절차를 밟는 동안, 임하늘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벽에 높이 걸린 <LM글로벌 테크놀로지> 로고를 올려다보았다.
LY 두 글자가 그녀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 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이니셜은 그녀가 대학2학년 때, 자습시간에 이서준과 함께 미래를 그리며 LY 두 글자를 공책에 휘갈겨 적었다. 그리고 나중에 시작 자금을 모으는 대로 함께 기술 스타트업 회사를 차리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3개월 후, 이서준은 사법고시를 통과해 강성시 검찰에 합격했고 즉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를 했다.
그녀는 그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꿈이 무너져 내렸고 배신의 쓰라림이 그녀를 갉아 먹었지만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 들였다.
그때,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장 팀장과 임하늘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곧 비서님이 두 분을 대표님 사무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이어 둘은 비서를 따라 이서준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창가에 서서 정통 런던식 영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임하늘은 대학 3년차 때, 학교의 지원을 받아 해외로 유학을 갈 기회를 얻었고 그녀가 선택한 나라는 바로 영국이었다.
매끄러운 검은색 가죽 소파에 앉은 임하늘은 주위를 둘러봤다.
인테리어는 심플하면서 세련됐고, 깔끔한 선과 차가운 색조 등 모든 디테일이 이서준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서준은 몸에 딱 맞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최고급 양모가 빛을 받아 자연스런 광택을 뿜어냈고 우아한 기품이 흘러 넘쳤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임하늘에게 닿았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통화를 끝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는 자연스레 말하며 사무실을 가로질러 장 팀장과 임하늘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장 팀장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 대표님. 먼저 일 보십시오, 저희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려 100억짜리 계약이 아닙니까? 하루 종일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이서준은 무심하게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커피포트로 손을 뻗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우유만 넣어?"
임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가 이미 집어 든 우유팩에 머물렀다. 그의 자연스럽고 익숙한 행동에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미 결정해 놓고 왜 물어 보는 거지?'
장 팀장은 그 팽팽한 침묵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급히 끼어들었다.
"뭐든 괜찮습니다. 저희는 까다롭지 않습니다."
갓 내린 커피 특유의 향기와 이서준이 애용하는 우드계열의 향수 냄새가 어우러져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익숙하고도 매혹적인 향기였다.
한때, 그녀는 그 향기에 취해 그의 곁에 3년간 머물렀다. 그 향기는 마치 마약처럼 그녀를 끌어 들였고 벗어 날 수 없었다.
이서준이 긴 손가락으로 커피 잔을 잡아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러자 임하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이 대표님."
하지만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이어 얘기는 계약 위주로 흘러갔고 이서준이 조건을 제시했다.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방송국에서 앞으로 3일 동안 황금 시간대에 최근 TSL 전기차 화재 사건을 보도해 주십시오. 아직 미숙한 기술을 사용한 탓에 생긴 사고라는 점을 강조해 주시고 비슷한 사건들을 끌어 모아 같이 보도해 주시죠. 이 사건을 위해 코너를 하나 새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절대 거절 하지 못할 위압감이 담겨있었다.
기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임하늘은 AI 산업에도 흥미가 있었던 터라 TSL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전기차 브랜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금테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대표님, 그 TSL 전기차의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미성숙한 탓에 화재가 일어 났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요. 그런데 아직 검증도 되지 않은 보도를 함부로 했다가는 여론 조작의 혐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서준은 왼손을 소파 팔걸이에 느긋하게 걸친 채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
"2년 짜리 광고 계약과 사고사건 보도. 어느 쪽이 더 무게가 있는지 한번 제대로 생각해보지 그래?"
임하늘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LY글로벌 테크놀로지에서 당장 3일 뒤에 전기차를 출시 할거라는 건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LY의 회장이 이서준일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5년이 지났지만 전략가 다운 그의 면모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계획이 뒤따랐다.
이서준을 바라보는 임하늘의 눈빛이 싸늘해 졌다.
"이 대표님, 경제 채널은 당신이 이득을 취하기 위해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도구가 아닙니다."
이서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임하늘, 지금 나를 거절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