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그랜드 호텔.
의료 학술 회의를 마친 소영미가 호텔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몸을 스쳤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남편 육경민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의 시선은 휴대폰 화면에 갑자기 뜬 한 기사에 사로잡혔다.
<육씨 그룹, 신형 표적 항암제 개발 성공. 그랜드 호텔에서 축하연 개최>
소영미는 자신이 기사를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했다.
표적 항암제는 그녀가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남편 육경민의 회사를 위해 연구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축하연을 개최하면서 왜 자신에게는 단 한마디도 알리지 않은 것일까?
잠시 망설이던 소영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호텔 안으로 향했다. 3번 연회장 입구에는 육씨 그룹 축하연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연회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육경민과 도희설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소영미의 눈에 들어왔다.
도희설은 소영미가 근무하는 병원의 동료이자 육경민의 소꿉친구였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의 거리와 분위기는 결코 소꿉친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 보였다.
육경민은 도희설의 가느다란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육경민...'
그는 단 한 번도 소영미를 그런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소영미는 힘이 쭉 빠지는 듯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움과 배신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그때, 육경민의 친구들이 두 사람을 놀리는 소리가 소영미의 귀에 들려왔다.
"경민아, 너랑 도희설 정말 잘 어울린다. 도희설을 언제쯤 집으로 데려갈 생각이야?"
"그래 경민아, 도희설은 예쁘고 능력도 좋잖아. 네가 한 번도 데리고 나온 적 없는 그 아줌마보다는 훨씬 낫지 않냐? 이혼하고 도희설이랑 결혼하는 게 어때?"
그러자 그 중 한 명이 약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근데 육씨 그룹의 표적 항암제는 경민이 아내가 연구 개발한 거 아니야? 경민이도 그걸 개발해준 아내와 이혼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소영미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영미는 육경민을 희망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쩌면 육경민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를 이토록 모욕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경민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도희설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그 아줌마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래? 이번 표적 항암제는 모두 희설이가 연구 개발한 거야. 희설이야말로 우리 육씨 그룹의 일등 공신이지!"
그 말에 소영미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육경민... 육경민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는 그녀가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피와 땀으로 개발한 표적 항암제를, 단 한순간에 다른 여자의 공으로 돌리고 있었다.
소영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육경민을 줄곧 한결같이 사랑해왔고, 육씨 그룹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그 순간, 소영미는 이번 결혼에서 자신이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호텔 화장실로 향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린 소영미가 화장실에서 나오려 할 때, 복도 쪽에서 한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민아, 대체 소영미를 언제 쫓아낼 거야? 결혼 증명서는 분명 우리 둘이 같이 발급받았는데, 소영미 그 년이 몇 년 동안이나 육씨 가문의 사모님 행세를 하고 있잖아."
소영미가 몸을 숨기고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자 육경민과 도희설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도희설이 육경민과 같이 혼인 신고를 했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육경민은 도희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희설아, 조금만 더 참아."
"소영미가 1기 표적 항암제를 개발해준 덕분에 우리 육씨 그룹이 2천억을 벌었어. 2기, 3기 표적 항암제까지 연구 개발해 주면 앞으로 육씨 그룹이 벌어들일 돈은 최소한 조 단위가 될 수도 있어. 내가 소영미와 가짜 결혼 증명서를 발급받은 건 그녀의 연구 개발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야."
"희설아, 너무 조급해하지 마. 앞으로 소영미가 육씨 그룹을 위해 벌어들인 돈은 모두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거고 소영미는 쫓겨난 후 한 푼도 받지 못할 거야."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소영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까 봐 입을 꼭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시울은 피눈물이 맺힌 듯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온몸은 격한 감정에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의 결혼 생활이, 그녀가 바친 사랑과 헌신이, 모두 한낱 거짓말과 속임수 속에서 살아온 것이었다.
남편은 그녀를 이용했을 뿐, 단 한순간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법적으로 육경민의 아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결혼 증명서마저, 처음부터 가짜였다.
육경민의 말을 들은 도희설은 기쁨에 얼굴이 환해져 육경민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애교를 부렸다.
"경민아, 너 정말 최고야..."
두 사람이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소영미의 눈빛이, 극심한 고통과 배신감에서 서서히 타오르는 증오로 변해갔다.
"육경민, 지금 뭐 하는 거야!"
"영... 영미야,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소영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육경민의 차가운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영미는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을 억누르고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내 남편이 자신의 소꿉친구와 입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급격하게 당황한 육경민은 재빨리 도희설을 밀어내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영미야,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에게 소영미는 여전히 이용 가치가 있는 돈줄이었기에, 그녀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육경민이 소영미의 손을 잡으려 할 때, 소영미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육경민, 그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지 마!"
뜻밖의 따귀를 맞은 육경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고 더 이상 온화한 척 연기할 수 없었다. "소영미, 너 미쳤어?"
도희설은 이를 악물고 소영미를 추궁했다. "소영미, 경민이는 네 남편이야. 어떻게 남편을 때릴 수 있어?"
소영미는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쓰레기 같은 년놈들은 맞아야 마땅하지."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눈빛은 확고한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육경민, 우리 이혼해."
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나섰다.
소영미가 호텔을 나서자마자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물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녀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칼로 베인 것처럼 아팠다.
그때, Y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소영미가 눈물과 빗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미 맞니? 나는 네 아버지, 화국의 제일 부자인 고창석이다."
회차 2
육경민의 배신과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전화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소영미는 남자가 다시 한번 말을 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이에 고창석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어머니인 소명월은 그의 첫사랑이었지만, 고성덕 어르신이 두 사람의 관계를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고창석은 당시 소명월과 헤어질 때, 그녀가 이미 자신의 아이인 소영미를 배 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시간이 흘러 고성덕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자 고창석이 소명월과 소영미를 고씨 가문에 데려오려 했지만, 이미 소명월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고창석의 목소리에는 셀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이 묻어 있었다
"영미야, 아빠가 그 동안 해외에서 사업을 확장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국내에 있는 재산은 제대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국내에 있는 자산만 해도 조 단위에 달하는데, 넌 내 유일한 딸이니 이 자산은 네가 상속받는 게 맞아. 이건 아빠가 너희 모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다."
고창석이 전화를 끊은 후에도 소영미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내가 화국 재벌의 딸이라고?'
어쩐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더 좋은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소영미의 혼란스러웠던 눈빛이 한 순간에 맑고 단단하게 굳어졌다.
'맞아, 난 엄마의 말대로 더 좋은 삶을 살아야지, 육경민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의 배신에 빠져 허우적거려서는 안 돼.'
다음 날 아침, 소영미는 신분증을 챙겨 고창석이 말한 변호사 사무실로 가 자산 이전을 처리했다.
그녀가 신분증을 변호사에게 건네자, 변호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영미 씨, 저희가 확인한 결과 소영미 씨는 이미 결혼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지금 자산 이전을 처리하면, 모든 자산은 법적으로 부부 공동 재산으로 간주됩니다. 만약 이 부분에 대해 걱정된다면, 남편 분께 재산 포기 각서에 서명하게 해야 합니다."
변호사의 말에 소영미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육경민과 그녀는 가짜 혼인 신고를 했는데, 어떻게 이미 결혼한 상태로 표시될 수 있는 거지?
목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낀 소영미는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주 변호사님, 혹시 제 남편이 정확히 누구로 등록되어 있는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변호사는 소영미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그래도 의뢰인의 요청이니 하는 수 없이 확인해 주었다.
"소영미 씨, 제가 확인한 결과 소영미 씨의 남편 이름은 안성재입니다."
'안성재... 꽤 익숙한 이름인데?'
'근데 내가 대체 언제 이런 낯선 사람과 혼인 신고를 했다는 거야?'
소영미는 우선 안성재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그에게 재산 포기 각서에 서명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내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일을 마친 소영미가 사무실을 나서려 할 때, 휴대폰 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니 원장 심만철의 전화였다.
"소 의사, 빨리 병원으로 돌아와. 하급 병원에서 중요한 환자를 우리 병원으로 이송했어. 뇌간 해면상 혈관종인데, 소 의사의 다중 펩타이드 융합술만이 환자를 살릴 수 있어!"
그 말에 소영미는 깜짝 놀랐다.
병원 전체에서 원장만이 그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 야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중 펩타이드 융합술은 야매의 독점적인 비법이다.
그 동안 원장은 소영미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 병원 내에서 직접 수술을 집도하게 하지 않았지만, 오늘 이렇게 다급하게 그녀를 부른 것을 보니 아주 중요한 환자임이 틀림없었다.
소영미는 서둘러 택시를 타고 화청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원장은 그녀를 붙잡고 다급하게 설명했다. "소 의사, 이번 환자는 해외에서 돌아온 중요한 인물이야. 아시아 재벌로 알려진 안씨 가문의 손자이니, 어떻게 해서든 꼭 살려내야 해!"
소영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뒤, 소독을 마치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젊은 남자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영미는 수술대 곁으로 다가서다가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켰다.
수술실의 창백한 조명이 남자의 얼굴을 비추자, 묘한 매력이 흘러넘쳤다.
남자의 얼굴은 마치 신이 정교하게 빚은 작품 같았다. 의식을 잃고 수술을 위해 머리카락을 모두 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하지만 소영미는 곧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나는 의사이고,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그녀는 숙련된 손놀림으로 메스를 들고 남자의 머리를 절개했다.
복잡하고 정교한 수술이 진행되는 내내, 소영미의 이마에서 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세 시간이 흐른 뒤, 수술실의 빨간 불이 마침내 꺼졌다.
수술실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원장이 바로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소 의사, 수술은 어떻게 됐어?"
소영미는 다소 지친 기색으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환자는 곧 의식을 되찾을 겁니다."
원장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만약 안씨 가문의 손자 분이 우리 병원에서 사고라도 나면, 안 회장님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순간 소영미는 '안씨 가문'이라는 단어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원장님, 혹시 환자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원장은 소영미의 물음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안성재야. 아시아 재벌인 안씨 가문의 후계자인데, 못 들어봤어?"
순간 소영미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성재! 그러니까 내가 구한 사람이 바로 내 법적 남편이라는 거야?!'
회차 3
두 시간 후.
안성재가 드디어 깊은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병실 침대 곁에 서 있는 한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이었다. 여자는 공격적인 느낌이 전혀 없이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소영미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성재 씨, 저와 함께 이혼 수속을 하러 갈까요?"
그 순간, 안성재의 평소 차갑고 오만하기 그지없던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그는 막 수술을 마친 피곤한 몸을 지탱하며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혹시 선생님의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여자친구도 없는 그에게 아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소영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이며 변호사 사무실에서 받아온 증명서를 안성재의 앞에 내밀었다.
"안성재 씨, 솔직히 말해 저도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아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제 법적인 남편이라는 사실을요. 하지만 시스템상 우리는 부부로 등록되어 있어요."
안성재는 소영미가 내민 증명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려다봤다.
증명서에는 그가 소영미의 남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안성재는 2년 전, 그의 할아버지인 안기석 어르신이 갑자기 그의 신분증을 요구했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할아버지가...'
소영미는 안성재의 표정 변화를 읽으며 다시 한번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안성재 씨, 그쪽이 아시아 최고 재벌의 손자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어요. 아마 안성재 씨도 법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아내를 원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오늘 제가 안성재 씨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쪽을 살려준 대가로 이혼을 요구하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니죠?"
그녀의 말이 끝나자 안성재의 차갑고 오만한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번졌다.
'참 재미있는 여자네. 어떻게 봐도 손해를 보는 사람은 나인데, 왜 이 여자는 내가 자신의 재산을 탐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지?'
침대에 기대어 앉은 안성재는 고개를 들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소영미의 명찰을 바라봤다.
"소영미 씨 맞죠? 만약 제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영미는 얼굴이 빨개진 채 그를 가리켰다.
"당신..."
소영미가 다급하게 몇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바닥에 놓인 안성재의 신발에 걸려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자 부드러운 입술이 안성재의 얇은 입술에 그대로 닿고 말았다.
순간, 소영미는 온몸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안성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했다. "소영미 씨, 아내의 권리를 행사하고 싶으면 말로 하면 되지, 굳이 이렇게 몸을 던질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여자의 몸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가 안성재의 코끝을 간질이며 온 신경을 자극했다.
그 순간, 안성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소영미가 충격에 빠져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안성재가 한 층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당장 내 몸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병실 침대를 우리의 신혼 침대로 만들 거예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소영미는 고개를 돌려 안성재를 바라봤다. "수술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합방 타령이에요! 절대 안 돼요!"
소영미는 서둘러 안성재의 몸에서 내려와 수치심을 억누르고 그녀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우리의 혼인 증명서는 분명 시스템 오류일 거예요. 그러니 반드시 이혼해야 해요."
안성재는 차가운 얼굴로 소영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만약 제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소영미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온 서류와 볼펜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혼하지 않겠다면, 이 재산 포기 각서에 서명하세요."
안성재는 서류를 받아 들고 복잡한 눈빛으로 서류를 훑어봤다. "고창석의 딸이었어요?"
안성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깊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조용히 조건을 내걸었다. "이 서류에 서명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소영미 씨는 안 부인 역할을 제대로 연기해야 해요. 안씨 가문의 친척들을 상대하는 것을 도와줘야 하고, 제 병을 완전히 치료해 줘야 해요."
소영미는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어쨌든 안성재가 각서에 서명하면 그만이다.'
안성재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각서에 서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영미는 드디어 한숨을 돌렸다. '각서에 서명했으니 고씨 가문의 재산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소영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밖에 있던 간호사가 급히 뛰어 들어와 말했다.
"소 선생님! 빨리 응급실로 가보세요, 소 선생님의 남편 분께서 뇌출혈 증상을 보이는 육순희 노부인을 모시고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