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이혼하자."

단 한 장의 얇은 종이로 4년간의 결혼 생활이 끝났다.

진유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서류에 적힌 남편의 이름에 닿았다. 시선을 올려 려욱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 정말 끝인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이 섞여 있었고, 방금 끝낸 집안일에 고르지 못한 숨소리는 약간 흔들렸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혀 두꺼운 검은색 안경테에 달라붙어 그녀를 더욱 평범하고 둔해 보이게 만들었다.

오늘 밤 그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미래에 대해 얘기할 생각에 들뜬 그녀는 일찍 일어나 신선한 농산물을 손수 고르고 요리를 하고 집안을 정리했다.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의 노력은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결혼은 본질적으로 사업 상의 계약이었어." 려욱성이 담배의 재를 손으로 튕기며 말했다. "게다가 슬기가 곧 올 거야."

그게 다였다.

송슬기, 려욱성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자리 잡은 여자.

진유림이 혀를 입천장에 대자 익숙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곧 머릿속이 약간 흐려졌다. 송슬기가 나타날 때마다 려욱성은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가 가진 원칙마저 무시했다.

그들의 결혼은 그녀의 강박으로 시작되었고 함께 지내는 4년동안 려욱성은 송슬기를 위해 자신의 순결을 지켰다.

끝없는 침묵이 흐른 후 려욱성은 자신의 눈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진유림을 바라보았다.

진유림은 매끈한 피부와 높은 콧날, 장미 꽃잎 같은 입술을 가진 미인이었다. 두꺼운 뿔 테 안경 뒤에서도 그녀의 눈은 가끔 빛을 받아 반짝였다.

하지만 너무 지루했다. 여자로서의 매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심하고 얌전했다.

항상 온화한 태도에 오랫동안 유지해 온 성실한 아내 역할은 예쁜 겉모습과 다르게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려욱성의 부인 역할에는 잘 맞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여자가 될 수는 없었다.

담배를 손에 든 려욱성은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꽂고 말했다. "당신이 한때..."

잠시 멈춘 그가 진유림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불만과 아첨을 동시에 품고 있는 약한 모습은 려욱성의 마음 한 구석을 슬쩍 흔들었다.

그는 태도를 바꿔 냉정하면서도 지루한 말투로 이어갔다. "당신의 경력을 고려할 때, 앞으로 일자리 찾는 게 어려울 수 있어. 그래서 토지 계약 건 외에 빌라 세 채를 더 줄게. 한정판 자동차도 가져도 되고, 내가 개인적으로 100억도 줄 거야."

송슬기가 해외로 이주했을 때, 려욱성은 사랑 때문에 그녀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려 씨 집안의 어르신들은 그 사실에 분노해 려욱성과 거의 연을 끊을 뻔했다. 결국은 어머니가 극적으로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해서 그를 다시 집으로 끌어왔던 것이다.

려씨 가문에서의 위신과 지위를 되찾기 위해 그는 막 출소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진유림과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그는 진유림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지만, 수년간의 봉사와 려욱성 집안과 문제가 없이 잘 지내 온 관계를 인정해 기꺼이 넉넉한 합의금을 제시했다.

려욱성은 말을 키우는 취미가 있었다. 말이 가져다 주는 성취감과 즐거움에 돈이 필요하듯 진유림의 헌신에도 대가를 들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려욱성은 긴 검지 손가락으로 계약서에 손짓을 했고, 그 손가락에는 4년 동안 그래도 의미가 있었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진유림의 눈이 순간적으로 따끔거렸다.

"사흘 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겠어. 하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는 마.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진유림은 옆에 있던 검은색 펜을 집어 들고 지정된 곳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나도 질질 끄는 스타일이 아니야. 오늘 나갈 것이니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어."

"그래, 좋아." 려욱성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인정해야 할 것은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진유림은 여전히 침착하고 현명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항상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은 운명의 반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려욱성의 부인으로서 그녀는 사회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려욱성이 더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려욱성의 여동생인 려보라가 갑자기 들어와 말했다. "오빠, 오늘 그 전과자와 헤어진다고 들었어. 내가 그 한정판 자동차 가져도 돼?"

방금 고개를 돌려 바라보던 진유림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진유림을 무시하듯 눈을 흘겼다.

짜증이 난 려욱성이 말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해? 서재에서 얘기할 때는 노크하라고. 아가씨답지 않게 왜 그래?"

테이블에 기대어 려보라는 응석을 부리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이제 차키나 줘. 친구랑 드라이브 가기로 했거든."

고집 센 여동생에게 늘 관대했던 려욱성은 진유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에게 차키를 줘."

진유림이 눈을 낮췄고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해졌다. "그건 내 차라고 했잖아."

말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지만 려욱성은 낯선 한기를 느꼈다.

분노한 려보라는 진유림에게 달려들어 힘껏 밀쳤다. "무슨 소리야?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내 오빠 거야.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차키나 줘!"

려욱성 가족의 일원으로 지내는 동안 진유림은 항상 려보라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려보라는 문제가 생기면 항상 엄마에게 달려가는 사고뭉치였다.

한 번은 려보라가 김 씨 집안의 막내딸을 도발해 가문의 셋째 아들이자 수장인 김서준에게 잡혀 탑 꼭대기에 갇힌 적이 있었다. 진유림의 개입이 없었다면 려보라는 그 높이에서 떨어져 평생 불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려보라는 전과자라는 말 한 마디로 그녀의 친절에 보답했다.

"싫어."

진유림은 단호했고, 려욱성과 눈이 마주쳤다. "이 차는 내 꺼야. 려욱성. 약속했잖아. 나한테 이 차 준다고."

그 순간 려욱성은 눈앞에 있는 여자가 지금까지 괴롭힘을 당하던 진유림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멈칫하던 려욱성은 냉정하게 려보라에게 말했다. "집에 차가 많잖아. 내 차고로 가서 직접 골라봐."

하지만 려보라는 고집불통에 애지중지 큰 소녀였다. 김서준을 건드렸던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도발하지 못했고, 특히 진유림처럼 전과가 있는 자는 더욱 그렇다.

려보라는 진유림을 비난하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답해. 차키 줄 거야, 말 거야?"

"안 줘."

'찰싹!'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진유림이 오른쪽 뺨을 맞았다.

"배짱이 대단하네. 어디서 말대꾸야! 네가 뭔데? 넌 날 섬길 자격도 없어!"

려욱성의 눈이 잠시 깜빡였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려보라, 말 조심해."

진유림은 따귀를 맞은 뺨을 감싸 안으며 려보라를 옆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가정 교육 제대로 안 됐구나,너."

려보라의 오만함이 커져 턱을 치켜들며 그녀가 반항했다.

"그래서 뭐... 아!"

진유림은 꽃병을 들어 려보라의 머리 위에서 쏟아 부었다. 꽃병에 꽂혀있던 꽃이 더러운 흙물과 함께 려보라의 볼에 붙어 있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 주지."

회차 2

"야, 진유림, 이 미친 년아!"

려보라의 날카로운 말투에 진유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를 나섰다.

그녀가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핸드폰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인 심지은에게서 온 문자였다. "유림아, 진짜로 오늘 밤 크림슨 바에 안 갈 거야? 결혼은 명상 수련회가 아니잖아. 그 바보 같은 려욱성 때문에 친구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고! 제발! 잘 들어. 지훈 말로는 네가 안 오면 내 핸드폰을 물에 담근다고 했단 말이야."

진유림은 대답했다. "지은아, 네 말이 맞아."

심지은이 말했다. "무슨 뜻이야?"

진유림이 말했다. "나 이혼했어. 오늘부터 나도 빛이 나는 솔로거든."

잠시 멈칫한 후 채팅 창에는 느낌표가 가득 해졌다. 진유림은 심지은이 너무나 기뻐하며 흥분한 걸 느낄 수 있었다.

"10분! 10분만 시간을 줘! 네 영광스러운 복귀를 축하하기 위해 내가 직접 문 앞까지 갈게!"

서재 문이 쾅 닫힌 후에도 려보라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려욱성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저 여자가 기어오르게 그냥 내버려 둘 거야? 뒤로 끌고 가서 본때를 보여 주라고! 얼굴에 물이라도 뿌려야지!"

"그만해!" 려욱성은 차갑게 말했다. "너 좀 봐. 자존심은 어디 둔 거야? 넌 려 씨 집안의 일원이지 깡패가 아니라고!"

려욱성이 려보라를 그런 식으로 꾸짖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려보라는 깜짝 놀랐다.

일에 몰두하던 려욱성을 본 려보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차는 못 가져가니까, 오늘 밤 환영 만찬에 오빠랑 같이 가도 돼? 슬기 언니를 못 본지도 오래 됐고, 너무 보고 싶거든."

려욱성은 짜증난듯 손을 흔들었다. "알았으니까 방해하지 마."

이를 승낙한 것으로 받아들인 려보라는 유쾌하게 방을 나갔다.

이제 고요해진 서재에서 컴퓨터 화면의 불빛만이 려욱성의 멍한 시선을 비췄다.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진유림이 려보라의 머리 위로 물을 붓는 장면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낯설고 짜릿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신속하고 결단력 있는 성격의 심지은은 10분 안에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8분 만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진유림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내 절친의 자유를 위하여!"

진유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심지은이 이미 샴페인 한 병을 터뜨렸고, 거품이 가득한 샴페인은 진유림의 옷을 흠뻑 적셨다.

"파티용 폭죽을 살 시간이 없어서 샴페인으로 했는데 괜찮지?"

진유림은 한숨을 쉬며 가방을 뒷좌석에 던졌다. 그때 그녀의 눈앞에 차키가 보였다. "개조해 봤는데, 어때? 몸이 간지럽지 않아? 네가 운전대를 잡은 지 4년이나 지났잖아!"

진유림은 심지은의 손을 옆으로 밀어내고 조수석에 앉았다. "별로."

심지은은 웃으며 엑셀을 밟았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알았어, 그럼. 사랑에 빠져 있던 사람이 어쩌다가 돌아온 거야?"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진유림은 지난 세월에 작별을 고하며 아득하게 몽상에 빠졌다.

"송슬기가 돌아왔어."

진유림의 말을 듣자 심지은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너랑 려욱성 말이야, 고집 하나는 똑같이 세다니까. 가끔 둘이 친척은 아닌지 친자 확인 검사를 받아야 되나 싶어. 왜 그렇게 쓰레기 수집에 집착하는 거야?"

심지은이 계속 떠드는 동안에도 진유림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송슬기에 대한 진유림의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송슬기는 온화하고 냉정하며 사려 깊었다. 이런 송슬기의 특성을 진유림이 모방하기 위해 4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려욱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송슬기의 검정색 생머리, 드레스 스타일, 친절한 말투 등 모든 것을 모방했다.

하지만 가짜는 언제나 가짜일 뿐...

진유림은 가볍게 하품을 하며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아마 전과가 있는 여자한테 반하는 남자는 없기 때문이겠지."

심지은이 눈동자를 굴렸다. "아,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의 그 정신 나간 이복 동생이 네가 섬머델에서 비밀리에 훈련 받는 일을 감옥에 갔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않았어도 려욱성은 너와 말을 섞을 자격도 없었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제 넌 자유고 이혼도 했으니, 곧 있을 자동차 경주에 관심은 없어?"

"없어."

진유림은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몸을 기대었다. "밖에 나갈 기분이 아니야."

회의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심지은이 물었다. "진짜 가슴앓이를 하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진유림은 침묵을 지켰지만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로 심지은은 모든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짜증이 나면서도 호기심이 생긴 심지은의 눈이 반짝였다. "라이언이 거기 있을 거야! 그 사람이 너랑 겨룰 수 있는 유일한 레이서였던 거 기억해? 가면 뒤 그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아?"

이스트코스트 레이싱 경주는 스릴을 추구하는 부유층과 특권을 누리는 아드레날린 중독자들이 모이는 고액 레이스를 위한 안식처였다. 모든 드라이버는 맞춤 개조한 자동차를 트랙에 가져왔고, 경쟁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치열했다.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레이스 주최측은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오직 승패가 경주의 목표였고 누가 운전대를 잡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는 있었다. 레이서는 다른 레이서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고 이긴 자는 그 자리에서 상대방더러 가면을 벗게 할 수 있었다. 가면을 벗는 다는 건 경주에서 나간다는 뜻이다.

진유림의 눈에서 불꽃이 일며 갑자기 기운을 차렸다. "좋아, 가서 확인해 보자."

그녀는 앞으로 몸을 숙여 의복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 해."

심지은은 진유림의 옷차림을 훑어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뭐야, 다른 평상복으로 갈아입겠다고? 그런 차림으로 바에 가면 사람들이 내가 웬 주부를 납치한 줄 알겠어!"

진유림은 눈썹을 찡그렸다. "누가 평상복이라고 그랬어?"

약 30분 후, 그들은 크림슨 바에 도착했다.

위층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관심은 구석진 부스에 앉아 있는 한 여성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는 고전 영화에 나오는 매혹적인 여배우를 연상시켰고 강렬한 빨간색 프린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렇게 밝은 톤을 네 몸에서 참 오랜만이다." 심지은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데 항상 칙한 오피스 룩이나 심플한 드레스만 입고 다녔잖아. 마치 네가 려 씨 집안에 항상 출근해 있는 것 같았어."

진유림은 대답하지 않고 부드럽게 미소만 지었다.

결혼 초기에 그녀는 화려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려욱성의 어머니로부터 너무 화려하면 여성의 미덕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았고, 려욱성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런 시절이 지났다. 이제 려 씨 집안의 구속에서 벗어나 원하는 대로 마음껏 꾸밀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심지은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고 진유림에게 핸드폰을 보여줬다. "전화 받아야 해. 나갔다가 올게."

심지은이 떠나자마자 진유림은 손등에 묻은 와인 얼룩을 닦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안녕, 예쁜이. 혼자 왔어? 이 오빠가 같이 놀아 줄까?"

회차 3

려욱성과 려보라가 크림슨 바에 들어섰을 때, 송슬기와 그녀의 친구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부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슬기 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

려보라는 연극을 하듯, 송슬기를 팔로 감싸 안고 그녀에게 매달린 채 귀여운 척 연기를 했다.

려보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송슬기는 말했다. "왜 아직도 5살 아이처럼 행동하는 거야?"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은 근엄한 표정의 남자에게 시선을 옮기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날 생각하는 건 너뿐이구나."

거의 정신을 차린 려보라가 말했다. "언니, 그럴 리가. 우리 오빠가 언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다고. 언니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빠가 그 여자를 걷어차 버렸다고!"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부스 안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송슬기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밤낮으로 려욱성의 머릿속을 점령했던 여자가 이제 그의 앞에 앉아 그와 따뜻하게 눈을 맞추고 있었지만 무언가 묘한 불안감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친구 중 한 명이 욕설을 퍼부었다.

"젠장! 욱성아, 저 사람 네 와이프 아니야?"

고개를 돌리자 려욱성의 눈앞에 펼쳐진 진유림의 눈부신 웨이브 머리와 매혹적인 화장, 잘록한 허리에 길고 완벽한 다리가 돋보이는 빨간색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그녀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지금 그녀는 과체중에 느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성과 비실비실한 양아치들에 둘러싸여 험오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 이민용 아니야? 이 씨 집안의 그 유명한 양아치 도련님 이잖아. 진유림이 저 사람한테 걸려들다니, 완전 끝장이네!"

"그렇게 말할 수도 없지.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보통 여자들은 저런 옷을 입고 바에 오지 않지. 다 남자 꼬실려고 그러는 거잖아."

"이런, 욱성의 와이프가 저렇게 섹시할 줄 몰랐어. 항상 촌스러워 보였거든. 저렇게 몸매가 좋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어?"

려보라가 끼어들었다. "저 여자 좀 봐. 확실히 남자를 끌어들이려고 여기 온 거야. 우리 오빠가 저 여자를 버렸거든. 속임수를 안 쓰면 누가 저 여자를 원하겠어?"

그 조잡한 농담에도 친구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려욱성은 설명할 수 없는 짜증이 솟아올랐다. "시끄러워!"

그가 폭발하자 즉시 조용해졌다.

그는 려보라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정신 못 차릴 거면 이런 부적응자들이랑 여기서 시간 낭비 하지 말고 학교로 돌아가서 예의란 걸 좀 배워."

깜짝 놀란 려보라는 눈물이 날 뻔했다. 송슬기는 손을 뻗어 려욱성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려욱성은 따뜻함을 느끼고 송슬기의 시선에 맞췄다. 려욱성을 바라보며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보라는 아직 어려.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리고는 잠시 멈칫하고 멀리 있는 진유림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분명 내 탓이야. 내가 다시 나타나서 유림 씨의 자리를 뺏지만 않았어도 저렇게 절망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겠지."

려욱성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거고, 결국 이렇게 된 거야. 아무도 강요한 적 없어."

그리고 한편, 참을 수 없이 짜증이 난 진유림은 이민용의 반갑지 않은 손을 뿌리치며 냉정하게 말했다. "꺼져!"

친구들 앞에서 체면이 깎인 이민용은 진유림의 반격에 더욱 흥분되었다. 그는 진유림의 가느다란 허리를 팔로 감고 가까이 다가가 보라빛이 띄는 더러운 입술로 입맞춤을 할 준비를 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오빠는 네 같은 스타일이 딱 좋아!"

이민용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입술을 오므렸고, 진유림은 조롱하는 미소로 바뀌었다.

'퍽!'

그녀는 재빨리 근처 테이블에 있던 맥주병을 집어 이민용의 머리를 내리쳤다.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바의 흥겨운 음악 소리를 뚫고 나왔다. 이민용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유리가 흩뿌려진 머리를 움켜쥐며 쓰러졌다.

"빌어먹을! 이 년이! 감히 나를 때려?"

진유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깨진 병의 뾰족한 목 부분을 이민용을 향해 겨누며 차갑게 웃었다. "한 번만 더 나한테 손대면 여기서 더 이상 남자구실 못하게 해주지."

이민용은 턱을 괴고 반박했다. "내가 누군지나 알아? 우리 형은 이 씨 그룹 사장이야. 내 말 한 마디면 널 이 도시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어!"

진유림은 그를 무시하고 조용히 자신의 명품백을 뒤적였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의 위신에 놀란 줄 알고 있던 이민용을 득의양양했다. 그의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야. 이런 상처는 당신을 가난과 파멸 속으로 밀어 넣을 거라고. 건강검진을 받아볼 거야. 내 삼촌이 경찰과 연줄이 있어. 전화 한 번만 하면 넌 2주 동안 갇혀 있을 거라고."

"오빠, 뭐 하려고?" 려욱성이 일어나자마자 려보라는 그의 소매를 붙잡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를 보호하려는 건 아니지?"

려욱성은 동요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이혼 절차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 법적으로 내 아내야. 그녀가 모욕을 당하는 것은 우리 집안이 모욕 당하는 것과 같은 거야."

려보라는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아무도 저 여자가 우리 집안 사람이라는 걸 몰라. 그냥 신경 끄면 저 여자한테 무슨 일이 생기던 저 여자 탓인 거라고."

하지만 려욱성의 눈을 가로지른 그림자가 그녀를 순식간에 침묵시켰다.

송슬기가 끼어들었다. "내가 가서 얘기해 볼게. 전에도 이민용의 형과 만난 적이 있어. 날 봐서라도 유림 씨한테 그렇게 막 대하진 않을 거야."

그녀는 려욱성의 거절을 막으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욱성아, 나도 역시 걱정이 돼."

그 순간 진유림은 가방에서 원화 지폐 다발을 꺼내 이민용의 얼굴에 던졌다.

'찰싹!'

2층에서 돈다발이 쏟아져 내리자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유림은 금방이라도 2층에서 떨어질 것 같은 자세로 낮은 난간에 팔을 기댔다. 떠다니는 원화 지폐들 사이에서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흐트러진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보상이 되나?"

분노가 끓어오르던 이민용은 일행을 향해 독기 어린 눈빛을 쏘며 포효했다. "저 여자 잡아! 저 여자 인생을 끝내 주겠어! 저 오만함을 부셔 버리겠다고!"

그의 일행이 돌진하려는 순간, 활기찬 목소리의 여성이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누구 인생을 끝내? 내 친구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

심지은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진유림에게 다가가자 이민용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조롱하듯 미소를 지었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네 형도 내 앞에서 빌빌대는데 대체 무슨 용기로 내 친구한테 소리를 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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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는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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