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김백로!"

도지섭은 김백로를 빤히 쳐다 보았다. 평소 차분하던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옳은 선택이라고? 난 아이의 아빠야! 그런데 감히 한 마디 말도 없이 잔인하게 지워버려?"

"신경 쓰긴 해?" 김백로는 그의 말을 자르고 고개를 들어 도지섭을 평온한 표정으로 마주했다. "몇 번이나 말하려 했어. 두 시간 전에도 전화했잖아. 그땐 넌 어디에 있었지? 수술 전에도 여러 번 문자를 보냈는데 확인했었어?"

도지섭의 표정이 다시 한 번 구겨졌다.

두 시간 전이라... 원나름이 이제 막 공항에 도착한 참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내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그 순간 김백로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카톡과 문자를 확인하는 도지섭의 미간에 더욱 주름이 깊어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고, 김백로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공항이 너무 시끄러워서 네 전화를 놓친 줄 알았어. 그런데 아무 기록도 없는데?"

그는 자신의 휴대폰을 화면을 보여주며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계속 연락했었다고?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꼴이군!"

김백로는 차가운 표정으로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거짓말은 과연 내가 한 것일까? 일부러 기록 다 삭제하고 나한테 따지러 온 거는 아니고?"

김백로는 말하면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증거라면 나한테도 있어.

"아악!"

바로 그때, 근처에서 여자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 배야..."

"나름아!"

고통스러워하는 원나름의 신음 소리에 도지섭이 벌떡 일어나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왜 그래? 또 배 아파?"

원나름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너무 아파..."

"일단 의사 선생님 찾으로 가자. 방금 접수 서류 줘봐."

원나름은 순순히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도지섭에게 건넸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함께 자리를 떠났고 누가 봐도 무척 친밀해 보였다.

김백로는 한 손에 휴대폰을 쥔 채 수술이 끝나자마자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산부인과에 들어가는 장면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휴대폰의 최근 통화 기록을 스크롤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지섭이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해서 바뀔 건 없었다.

그저 이 남자가 얼마나 무심하고 이기적인지만 보여줄 뿐이다.

자신이 보낸 긴급 호출에 도지섭이 병원에 왔다고 생각하다니.

어리석기는...

원나름을 위해 병원에 왔다가 배신감에 그녀에게 아이 일을 따지러 온 것이다.

김백로, 참 바보야.

김백로는 약을 받고 병원을 떠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복부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고 속이 울렁거렸다.

곧장 휴지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간 그녀는 피가 섞인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변기를 잡고 엎드린 채 줄곧 토하던 김백로는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뭉이에 의해 깨어났을 때는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김백로는 고양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힘없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계속 비틀거리던 그녀는 결국 몇 발짝 못 가서 쿵 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멍한 시야 사이로 수제 고급 가죽 구두가 현관 쪽에서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어 위에서 자신을 비웃는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백로, 아이를 포기한 것도 모자라 피해자 행세야? 불쌍한 척하지 마. 너한테 속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회차 3

김백로는 목구멍에서 치솟는 피비린내를 삼키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도지섭은 지금 사랑하는 원나름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경멸로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던 도지섭은 소파에 살짝 몸을 기댔다. "나름이는 겨우 적응하기 시작했어. 오늘 산부인과 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언론이 시끄러워질 게 뻔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김백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유산한 본처의 몸으로 당신 애인의 명예는 지켜줘야 한다는 건가?"

그제서야 도지섭이 집으로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폭로해 아끼는 원나름의 미래에 악영향을 미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무슨 헛소리야?" "애인"이라는 소리에 도지섭의 목소리가 부쩍 차가워졌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김백로는 일부러 더 악의적인 말을 내뱉었다. "원나름이 진짜 자신의 명예를 신경 썼다면 유부남한테 꼬리를 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아 산부인과에 검진까지 받아야 할 상황이면 사립병원이나 찾지 그래?"

화난 도지섭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위험 가득한 시선으로 김백로를 바라봤다. "나랑 결혼할 때 내가 나름이을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 할아버지를 설득해 결혼을 하도록 했잖아. 네가 뭐라고 나름이를 불륜녀 취급 하는 거야?"

김백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래, 내가 잘못했지."

3년 전, 도지섭이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원나름은 몰래 해외 유학을 떠났다.

원나름이 도지섭을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한 그녀는 할아버지 도국동에게 결혼을 주선해 달라고 간청했다. 김백로는 남은 평생 도지섭만 보고 살 거라고 약속했다.

그녀가 거의 반년 동안 정성껏 보살핀 덕분에 도지섭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지금 위암에 걸린 것도 그를 돌보며 불규칙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진심 어린 애정이 그의 마음을 녹일 것이라고 믿었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젠 몸까지 망가져서 아이까지 포기해야 했다.

도지섭의 법적 배우자임에도 불구하고, 원나름을 불륜녀라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꼈다.

아무리 뜨거운 마음이라도 도지섭이라는 얼음을 녹일 수 없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김백로는 체념한 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게 그 여자라면 내가 도와줄게."

내가... 널... 놔줄게.

진작 파탄 나고도 남았을 결혼을 여기까지 필사적으로 끌고 온 건 바로 김백로였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절망과 무력감에 도지섭은 약간 짜증이 나는 듯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간지럽고 답답한 마음이었다.

"도지섭 씨."

그녀의 마음이 순간 서늘해졌다.

5년 간의 결혼 생활이 끝나는 데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스스로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 이혼해."

"이혼?"

도지섭은 잠시 멈칫하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김백로, 너 또 무슨 속셈이야? 애를 지우더니 이제 이혼 요구까지? 내가 동의하면 할아버지께는 내가 이혼을 강제로 요구한 것처럼 말할 거잖아?"

"난 한 번도 할아버지께 불평한 적 없어. 그런 적도 없고, 앞으로 그럴 일도 없어."

쪼그리고 앉아 커피 테이블 서랍에서 이혼 서류를 꺼내면서 김백로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바로 그때, 침묵을 깨고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나름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도지섭의 목소리는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알았어. 바로 갈게!"

그는 재빨리 통화를 마치고 소파에서 재킷을 집어 들고 문으로 향했다.

김백로는 이혼 서류를 움켜쥔 채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향해 말했다. "가기 전에 이것만 서명해! 1초면 되니까."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남자의 뒷모습 뒤로 현관문이 쾅 닫혔다.

김백로는 잠시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눈을 뜬 그녀는 이혼 합의서 마지막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던진 뒤, 뭉이를 안고 짐을 챙기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짐을 챙기는 동안 해운시에 있는 베프 연수정에게 전화해 데리러 올 것을 부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도지섭의 우선순위에 그녀는 없었다.

원나름의 전화 한 통에 도지섭의 안중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남자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 위암말기인 그녀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3개월 뿐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미래가 없는 결혼 생활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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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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