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일어나시오, 빨리 일어나란 말이에요!"

누군가 몸을 잡고 흔드는 느낌과 함께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에 운여정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녀의 팔을 잡고 흔들던 계집년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오늘 노부인의 생신 잔치인데, 눈을 떴으면 빨리 일어날 것이지. 아가씨 때문에 또 꾸중 듣게 생겼잖아요!"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운여정은 죽기 전 순간의 모습과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겹쳐 환영처럼 느껴졌다.

쇠사슬이 뼈를 꿰뚫고, 채찍이 살갗을 파고들며 맹독에 창자를 찢었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고문에 감옥 바닥이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

온갖 수모와 고문 뒤에 목숨을 잃은 그녀는 시신조차 온전하지 않았다.

짙은 피 냄새가 여전히 코끝을 찌르는 듯 했고, 몸 곳곳에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운여정이 천천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몇번 심호흡을 했다. 그제서야 고통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는 은방울 꽃을 수놓은 휘장이 드리워져 희미한 촛불에 일렁이며 겹쳐 보였다. 그것은 그녀가 혼례를 올리기 전, 그녀의 처소에서만 볼 수 있었던 독특한 자수의 휘장이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운여정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자 계집종의 다소 풋풋한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계집종은 그녀의 시중을 들던 향단이자, 전생에 그녀를 괴롭혀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만든 놈들 중 하나였다.

멍한 그녀의 표정을 흘겨본 향단의 얼굴에 뚜렷한 혐오감이 번지더니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연화 못 물도 그리 깊지 않은 것 같으니 힘든 척은 하지 마십시오."

"귀한 몸인 큰 아가씨가 빠져도 괜찮았는데, 시골에서 올라와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아가씨의 몸에 무슨..."

계집종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운여정이 향단의 뺨을 내리치는 것이다.

손바닥이 저려오는 느낌을 받은 운여정은 그제야 자신이 환생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오늘이 바로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날이라는 것도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뺨을 감싸 쥔 향단이는 완전히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둘째 아가씨는 시골에서 상경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았는데, 겁이 많고 소심한 그녀는 벌써 웃음거리가 되었다.

후부인, 즉 둘째 아가씨의 생모 주문숙은 그녀의 소심한 성격은 물론이고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종놈들 앞에서 꾸짖는 건 물론이고 마주치는 것조차 꺼렸다.

생모가 그러하니 후부의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이젠 종놈들조차 그녀의 머리 위에 기어오르려고 했다.

이전의 운여정이었다면 반항은 물론이고 계집종에게 손을 대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볼에서 전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든 향단이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런 천한 것이. 감히 네가 후부인의 사람인 내 뺨을 때려?"

계집종을 내려다보는 운여정의 싸늘하게 식은 두 눈에 어떤 감정도 보아낼 수 없었다.

계집종과 입씨름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다시 손을 번쩍 들어 향단의 얼굴을 내리쳤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계집종이 다시 날뛰지 못하게 하려면 매운맛을 보여줘야 한다.

향단은 머리가 어지럽고 양쪽 뺨은 마치 벌에 쏘인 듯 쓰리고 아팠다.

그녀는 운여정이 미쳤다고 확신하며 모진 욕설을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나를 때렸다는 건 부인의 낯을 때렸다는 것과 같다. 부인께서 너를 얼마나 증오하는데, 이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향단이 후부인을 언급하자 높게 치켜든 운여정의 손이 허공에 잠시 멈칫했다.

전생에 떠돌이 생활을 했었던 그녀는 가족의 온정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이후 후부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굴욕까지 참아가며 버티고 또 버텼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어머니와 후부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환상을 한 지금. 그들의 추한 민낯을 이미 똑똑히 본 그녀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운여정이 자리에 멈칫한 것을 본 향단은 역시 그녀가 후부인을 무서워 한다고 생각하며 의기양양해하기도 전에, 전보다 더 강한 통증이 얼굴에서 전해졌다.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향단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자 운여정의 차갑게 식은 눈빛이 희미한 촛불 아래 더욱 싸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전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눈빛 한 번에 온몸이 굳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향단이 용서를 구하려 할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늦었고, 두 볼이 퉁퉁 부어 눈도 뜰 수 없는 상태였다.

방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오는 것을 들은 진어멈은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어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향단의 얼굴이 퉁퉁 부어 오른 것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외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진어멈은 노부인이 그녀의 시중을 들도록 보내온 사람이다.

전생에 향단은 후부인 주문숙의 권위를 앞세워 갖은 수단으로 운여정을 괴롭혔지만, 그녀는 친모에 대한 헛된 친정에 빠져 진상을 파헤치지 못했다.

유독 진어멈만 그녀를 진심으로 위해주고 생각해 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향단의 이간질로 인해 운여정은 진어멈을 멀리하게 되었고, 결국 진어멈과 할머니의 마음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다시 진어멈을 만나게 된 지금, 운여정은 심란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어멈, 마침 잘 왔네.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는 계집종을 더 이상 곁에 둘 수 없다. 어멈은 어서 이년을 팔아버리거라. "

진어멈은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운여정을 쳐다봤다.

이전에 향단이 아무리 무례를 범하고 분수를 몰라도 둘째 아가씨는 여전히 향단 계집을 제일 신뢰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향단의 무례가 정도를 벗어났다고 판단한 진어멈이 향단이를 꾸짖자 운여정이 중재에 나섰고 결과, 곁에 향단이 계집만 남겨두었다.

자리에 멈춰선 진어멈은 바닥에서 힘겹게 숨을 몰아 쉬고 있는 향단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운여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진어멈?"

급기야 정신을 차린 진어멈은 바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종놈을 향해 명했다. "여봐라, 이 무례한 계집년을 끌고 가서 가두어 내일 아침 일찍 노부인께 아뢴 후 팔아 버리거라."

진어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집이 우람진 어멈 몇 명이 향단의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향단은 그제야 운여정이 진짜로 자신을 내치려는 걸 알아차렸다.

예전엔 그저 '후부인' 이라는 말만 꺼내도 반항도 없이 고분고분 따랐었던 그녀였다.

향단이 당장에 무릎을 꿇고 구걸하고 싶었지만, 입에는 이미 더러운 걸레게 물려진 바람에 끙끙 대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돌아선 운여정은 향단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진어멈에게 분부했다.

"오늘은 할머니 생신이시니 즐거운 날 어떤 소란도 피우면 안 되니, 바로 뒷문으로 끌고 나가 팔아버리는 게 좋겠다."

향단이 모진 고통을 참아내며 버둥거렸지만, 몸집이 우람진 어멈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곧바로 별원에서 더이상 그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진어멈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운여정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둘째 아가씨, 부인께 향단 계집을 내쳤다는 말을 어떻게 전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택에 예의도 모르는 계집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머니께서 종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는 오해를 받지 않겠나. 내가 어머니를 대신해 처리했으니, 결국 어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운여정은 말을 하면서 진어멈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멈은 내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시게. 더 지체했다간

생신 잔치에 늦을지도 모르니."

회차 2

자리에 멈춰선 진어멈은 낯선 윤여정에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운여정은 최대한 태연한 척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전해지는 불안감은 멈출 줄 몰랐다

전생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진정한 회안후부의 아가씨는 그녀였으나, 유모가 아기를 바꾸는 바람에 수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회안후부로 돌아온 후, 후부의 가짜 딸이자 저택의 큰 아가씨라고 불리는 운선영은 사사건건 이간질하고 방해를 일삼았다. 결국 후부의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사게 된 그녀는 모진 수난을 겪다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로 운선영은 꽃을 보내온다는 핑계를 대며 운여정을 끌고 함께 연못에 빠뜨렸다.

운선영의 수단이 어찌나 치밀하고 교묘했는지, 사람들 눈에는 운여정이 그녀를 연못에 밀어 넣은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오해의 시작은 운여정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즉 나락으로 떨어지는 첫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운선영,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운여정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발견한 어멈은 그녀가 후부인을 두려워한다고 오해하고는 조용히 타일렀다. "아가씨, 이미 결정하신 일이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노비도 향단 계집이 하극상을 저질렀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노부인은 아가씨의 편에 설 것이옵니다, 하면 부인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증오를 억누르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운여정은 진어멈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어멈, 고맙네."

그리고 빠르게 재촉했다. "잔치에 참석해야 하니, 어멈이 날 위해 옷을 골라 줄 수 있겠는가?"

진어멈은 난처한 얼굴로 장롱을 돌아봤다.

운여정은 진어멈이 난처해할 줄 미리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다음을 위해 일부러 진어멈에게 던져준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후부에 돌아온 지 달포도 지나지 않은 데다, 저택에 있는 사람 모두가 운선영의 기분을 살폈기에 아무도 그녀를 위해 적당한 옷을 준비해 주지 않았다.

며칠 전에 급하게 맞춘 옷도 방금 연못에 빠져 흙이 묻은 바람에 더는 입을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장롱에 남은 옷가지는 전부 운선영이 버린 옷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차라리..." 진어멈은 난처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는 건 어떠합니까? 아가씨가 연못에 빠지는 모습을 노비들도 지켜봤으니 이해할 겁니다."

"오늘은 할머니 생신 잔치인 데다, 내가 후부의 가족 신분으로 처음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일세." 운여정은 태연한 얼굴로 장롱 앞에 서서 옷을 뒤적거렸다.

"만약 내가 참석하지 않으면 불효녀라고 손가락질을 받겠지."

처음 얼굴을 알리는 자리는 아주 중요하다.

전생에 연못에 빠져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엄청난 오해를 받아 결국 후부에서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줄곧 운여정의 곁에서 시중을 든 진어멈은 그녀의 장롱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운여정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진어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처소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노비 새 옷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창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은 운여정은 진어멈이 빠른 걸음으로 별원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생각을 끝마칠 때쯤, 별원 뒤편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고요한 별원에서는 유독 섬뜩하게 들렸다.

유수각에 향단 계집과 진어멈을 제외하고 어린 종놈은 대청에 불려 가 일손을 돕고 있기에, 요란한 소리는 분명 심상치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운여정은 탁자 위에 올려둔 주전자를 무기로 삼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병풍을 돌기도 전에 싸늘한 기운이 스치더니, 그녀가 반응할 새도 없이 목덜미에 날카로운 비수가 겨눠졌다.

"움직이지 마." 운여정의 뒤에서 들려오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분명한 살기가 느껴졌다.

목덜미에서 전해지는 싸늘한 감촉에 몸을 흠칫 떤 운여정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그녀의 뒤에 선 사람은 대답 대신 비수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실었다.

남자의 숨결이 운여정의 귀에 닿을 때마다, 시리도록 차가운 공기와 더불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열기가 동시에 전해졌다.

전생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운여정은 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하려던 순간, 코끝에 비릿한 피 냄새가 전해졌다.

어렴풋이 짐작한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다친 것도 모자라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운여정의 등에 몸을 기대고 선 남자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고 뜨겁고 단단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찍이 시골에서 지내는 동안 운여정은 스승을 따라 의술을 배운 적 있다. 두 사람의 몸이 점점 더 가까이 붙을수록 보이는 남자의 반응에서 그녀는 바로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오싹한 느낌이 발 밑에서부터 전해졌다.

유수각에는 그녀 혼자만 남게 되었고, 그녀의 뒤에는 미약에 취한 데다 무공이 뛰어난 남자가 있다.

손에 쥔 주전자를 더욱 세게 움켜쥔 운여정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쳤다. 이판사판 목숨을 걸고 싸우려던 그때, 목에 겨눠졌던 비수가 사라졌다.

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바로 뒤돌아선 운여정은 잔뜩 경계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검은색 장포에 얼굴도 검은 복면으로 감싸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밖에 드러난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을 옮겨 담은 것처럼 빛났지만, 빨갛게 물든 눈동자와 눈언저리에 몽롱한 안개가 깔린 듯한 눈빛은 욕망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운여정은 귀찮은 일에 간섭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더욱이 처소에 낯선 남자가 나타난 것도 모자라 미약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녀가 조용히 자리를 떠나려 할 때, 남자의 소매에 붉은빛이 감도는 까마귀 깃털 모양이 수놓아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자수 무늬는 그녀가 전생에도 본 적 있는 무늬다. 바로 황실의 황손 목세곤 특유의 문양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운여정은 당장에 앞으로 다가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남자의 얼굴을 덮고 있는 두건을 확 아래로 잡아당겼다.

맑고 깨끗한 얼굴에 날렵한 미간과 우뚝 솟은 콧날. 가만히 누워있는 모습에서도 압도적인 기세가 흘러나왔다.

눈꼬리에 약간 묻어난 욕정에 날카로움이 다소 무뎌지긴 했지만 여전히 인상적인 이목구비였다.

약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인지, 입술을 꽉 깨문 그의 얼굴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윤여정이 자신의 복면을 벗겨 자신의 정체가 들어 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짜 목세곤이잖아!'

회차 3

잠깐의 충격에서 벗어난 운여정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웠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목세곤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태자 목충현의 유일한 자식이다. 태자가 세상을 떠난 지 여섯 해가 되었지만, 황제가 다른 황자를 태자로 책봉하지 않았기에 황손의 신분은 여전히 존귀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손 목세곤은 젊고 유능할 뿐만 아니라 무예도 뛰어나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성격이 차갑고 오만해,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

운여정의 복수 상대에는 운선영과 후부 사람들 외에, 황실의 사람들도 몇 있었다.

황손 목세곤과 가까워진다면, 복수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사람부터 구하기로 결심했다. "독에 중독된 것 같으니, 제가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세곤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쉰 목소리로 차갑게 대꾸했다. "필요 없다."

그는 가차 없는 거절했다.

그러나 이미 그를 살리려고 마음을 먹은 이상 그의 거절은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목세곤이 미약뿐만 아니라 다른 독에도 중독되어 온몸에 힘이 빠져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기에 그가 무공으로 자신을 제압할 걱정을 덜었다.

운여정은 그의 대답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바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평소 산을 타고 약초를 캐며 힘을 키웠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 몸집이 두 배나 되는 목세곤을 혼자의 힘으로 옮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살결이 닿았을 뿐인데 목세곤의 입술을 비집고 참기 힘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하얗게 질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난처한 기색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돌린 그가 숨을 급하게 몰아 쉬며 손길을 거부했다. "떨어져!"

미약에 중독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낯선 여자를 품에 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싸늘하게 식은 눈빛과 어색하게 돌린 얼굴에서 바로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운여정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미약은 참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약을 풀지 않으면 한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근맥이 터질 것입니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긴장 푸십시오."

그녀의 수중에는 마땅한 해독제가 없었지만 시골에서 챙겨온 은침이 있었다.

침술에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목세곤이 욕정을 억누르지 못하면 큰일이다.

연못에 빠진 그녀가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몸을 씻었기에, 목욕통에 남은 찬물은 그의 욕정을 잠시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보다 키가 훨씬 큰 목세곤은 몸 전체의 무게를 그녀에게 지탱했으며, 숨을 내쉴 때마다 뿜어내는 열기가 그녀의 잔버리를 건드려 간지러웠다.

비틀거리는 목세곤을 겨우 부축해 간신히 병풍을 피해 목욕통 옆으로 다가간 운여정은 눈을 꼭 감고 목세곤의 옷을 막무가내로 풀어 헤쳤다.

눈을 감은 그녀가 막무가내로 그의 몸을 건드리는 바람에 목세곤은 온 몸이 달아 올라 참기 힘들었고 마치 고문을 당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무례하구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전해지는 뚜렷한 떨림에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찌 감히..."

목세곤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말도 잇지 못했다.

"저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빠른 손놀림으로 그의 장포를 벗긴 운여정이 허리띠를 풀며 말했다. "해독제가 없으니 은침으로 독을 빼내야 합니다. 옷을 입고 있으면 어떻게 침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옷을 완전히 벗기지 못하고 속곳만 남기고 나서야 그녀는 눈을 반쯤 뜨고 그를 목욕통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목세곤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물에 빠지는 순간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고 잡아당기는 것이다.

운여정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차가운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의 손에 이끌려 목욕통에 빠지고 말았다.

온몸이 흠뻑 젖은 그녀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그녀는 감히 눈을 뜰 수 없었다, 하여 손이 닿는 곳마다 그의 단단한 몸이 만져졌다.

목세곤의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던 열기가 차가운 물에 닿는 것과 동시에 정신이 맑아지자 다시 그녀의 손을 낚아채고 가장자리로 몰아붙였다. "움직이지 마."

운여정은 감히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욕통에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면서 얇은 옷 치마 사이로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허벅지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세곤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나며 굳었던 몸이 통제를 벗어나 본능적으로 더 부드러운 살결을 헤집고 싶은 충동이 간절했다.

초점 없이 흐릿해진 두 눈과 미세하게 떨리는 몸을 살짝 아래로 숙인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당장이라도 가녀린 목에 닿을 것 같았다.

그는 온 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고 찬물에 겨우 차렸던 정신도 점점 욕망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때, 힘겹게 손을 빼낸 운여정은 손에 든 은침을 망설임 없이 그의 풍부혈에 꽂았다.

목세곤은 바로 자리에 얼어붙었고, 당장이라도 껴안을 것 같은 자세로 굳어 있는 두 사람의 호흡이 얽혔지만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문밖에서 점점 뚜렷하게 들리는 진어멈의 목소리가 긴장감으로 가득 찬 공기를 가로 질러 들려왔다.

"둘째 아가씨, 종놈들이 대청에서 일손을 돕고 있어 창고 열쇠를 찾지 못했습니다. 우선 아무 옷이나 입고 참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어멈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해진 운여정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알겠네. 내 바로 씻고 나갈 테니, 어멈은 밖에서 기다리게나."

운여정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느낀 진어멈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병풍 뒤의 사정을 알 수 없기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조금 전에 씻지 않으셨습니까?"

"땀이 나서 다시 씻어야 하네." 운여정은 아무 핑계나 대고 다급하게 외쳤다. "바로 나갈 테니 기다리게나."

그녀가 후부에 돌아온 후, 목욕할 때 몸종의 시중을 받지 않았기에 진어멈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네, 노비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운여정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스치면서 전해지는 저릿한 감각에 목세곤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빠르게 그의 입을 틀어막은 운여정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한 시진 안에 돌아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세요."

가녀린 손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에 목세곤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운여정은 목욕통에서 나와 옷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다 목세곤이 아직 자리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손수건으로 그의 눈을 가리며 매듭을 지었다.

시야가 가려지자 청각이 더욱 예민해진 목세곤은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작은 소리에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은침이 아직 혈 자리에 꽂혀 있어 충동을 막을 수 있었다.

운여정은 장롱에서 운선영이 버린 옷을 아무렇게나 챙겨 입고 문을 열고 나갔다.

목욕통 안에 있던 사람이 천천히 손을 들어 손수건을 아래로 벗어 던지는 모습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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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운명을 바로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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