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강은지는 사직서를 인사팀장님 책상 위에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사직서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쓸어 내리며 주름이 지지 않도록 했다.
인사팀장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입을 뗐다. "강은지 씨가 그만 두겠다고 하니 너무 아쉽네요. 정말 확실히 결정한 건가요?"
"네." 강은지는 미소 지으며 입가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회사 건물을 나서며 눈부신 햇살에 눈을 찡그린 그녀는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며 부동산 중개인 임한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강은지 씨께서 관심 있으셨던 그 별장, 집주인이 가격을 낮추기로 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집 구경 가능하실까요?]
기쁜 소식에 강은지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그 작은 별장을, 강은지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이면, 남편 박민섭과의 위태로운 관계가 한결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의 손가락이 무심코 자신의 아랫배에 닿았다. 결혼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박민섭은 그녀와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바쁜 업무 일정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점차 자신에게 매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결국, 지난달 건강검진 때, 의사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결혼 생활이 화목한지 묻는 순간, 비로소 그녀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날 오후, 강은지는 별장을 보러 갔다. 별장은 사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별장의 전 주인은 오래된 부부였다. 정원에는 장미가 만발하여 공기 중에 달콤한 꽃향기가 감돌았다.
햇살이 가득한 거실 한가운데에 선 강은지는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여기로 할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의심할 여지 없는 굳건함이 담겨 있었다.
중개인 임한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네, 바로 계약서를 준비하겠습니다. 혹시 박 도련님도 함께 계약서에 서명합니까?"
강은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남편은 업무 때문에 바빠서 제가 대신 계약할게요."
"네, 그럼 내일 신분증과 혼인관계증명서 복사본을 가져오세요. 몇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해서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은지는 박민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회사를 그만뒀어. 마음에 드는 별장을 찾았는데, 계약하려고 해.]
그의 답장이 곧바로 왔다. [갑자기? 하지만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 저녁에 일찍 들어갈 테니 같이 축하하자.]
강은지는 화면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함을 느꼈다.
남들이 뭐라든 박민섭은 항상 그녀를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줬다.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잘 기억했고, 생리 기간에는 항상 핫팩과 생강차를 준비해주곤 했으며, 기념일을 잊지 않고 늘 선물을 챙겨줬다.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는 것만 빼고는, 박민섭은 거의 완벽한 남편이었다.
다음 날 아침, 강은지는 특별히 신경 써서 옷을 차려 입고 부동산 중개소로 향했다.
그녀는 박민섭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던 연분홍색 원피스를 선택했다.
"박 사모님, 어서 앉으세요." 임한결은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말했다. "계약서를 가져오겠습니다."
강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서류를 건넸다. "박민섭 씨와 저의 혼인관계증명서 사본입니다."
임한결은 서류를 받아 컴퓨터에 입력하더니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네요. 시스템에서 사모님의 혼인등록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강은지의 웃음이 순간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아마 시스템 오류인 것 같습니다." 임한결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빠르게 말했다. "직접 시청에 가서 확인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강은지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가슴 깊은 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피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네, 지금 바로 시청에 가볼게요."
회차 2
시청 직원은 안경을 고쳐 쓰며 혼인관계증명서 복사본을 몇 번이나 확인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여사님, 제출하신 이 서류는 위조된 것입니다. 저희 시스템에는 여사님과 박민섭 씨의 혼인 등록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은지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귓가에서는 윙윙 소리가 울렸다.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입술만 헛되이 떨릴 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저희 2년 전에 이곳에서 혼인 신고를 했어요."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직원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료실에 가셔서 다시 확인해 보실 수 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만약 속았다고 생각하신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은지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반환된 위조 결혼증명서를 건네 받았다.
손끝으로 서류의 가장자리를 스치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지난 2년간 그녀가 소중히 간직했던 결혼증명서가 이제는 낯설고 일그러진 물건으로 보였고 위에 찍힌 사진과 인장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시청 밖으로 나온 강은지는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계단에 멈춰 섰다.
그녀는 지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간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쓴맛은 그녀의 마음을 할퀴는 쓴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며 박민섭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은지야, 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 퇴근할 때 사갈게.]
화면에 뜬 메시지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그녀는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떨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은지는 답장을 입력했다. [아니야. 내가 저녁 준비할게.]
박민섭의 답장은 거의 바로 도착했다. [알겠어. 퇴근하고 바로 집에 갈게.]
강은지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고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3시 30분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말도 없이 회사에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박민섭의 회사는 도시 동쪽에 위치한 현대적인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강은지는 예전에 그에게 자주 점심을 가져다 주곤 했기에, 프런트 직원들도 그녀를 알아보고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여보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8층에 도착한 그녀는 익숙한 길을 따라 남편의 사무실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자, 익숙한 목소리가 휴게실에서 들려왔다. "나도 고민이 많아.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소월이를 포기할 수 없어."
강은지는 마치 번개를 맞은 듯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녀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야?"
강은지는 바로 그 목소리가 박민섭의 절친인 주태웅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강은지와 결혼한 상태에서 유소월과 계속 엮일 생각이야? 민섭아,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강은지는 그 말을 듣고 마치 가슴에 칼이 꽂힌 듯한 고통을 느꼈다. 벽에 손을 짚어야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유소월과 엮이다니?'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날카로운 칼날처럼 강은지의 심장을 정확히 후벼 파고 있었다.
"나도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 박민섭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당시 소월이는 일 때문에 나와 헤어진 후 해외로 간 거였어. 그때 난 진짜 미칠 것 같았어. 그러다 강은지를 만났고... 강은지는 소월과 너무나 닮았어. 걔와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상처받았던 마음이 치유되었고 다시 살아나는 기분을 느꼈어."
강은지는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내가 유소월과 닮았다고? 그럼 난 단지 대체품에 불과했던 것인가?'
회차 3
"하지만 은지를 만나고 나서야 소월이와 은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은지는 소월이보다 훨씬 다정하고, 나를 더 의지하며… 소월이에게선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줬어."
주태웅은 박민섭의 뻔뻔한 말에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은지를 속이는 게 맞다고 생각하냐?"
"난 은지를 속인 게 아니야!" 박민섭이 욱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가, 이내 주위를 의식한 듯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난 은지를 진심으로 사랑해. 하지만…"
"하지만 뭐?" 주태웅이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소월이를… 완전히 잊을 수가 없어. 걘 내 첫사랑이었잖아. 소월이가 해외에서 돌아와 날 찾아왔을 때,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은지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은지를 속이고 가짜 혼인신고서까지 만들었어? 은지는 너와 법적인 부부라고 믿고 있을 텐데?" 주태웅의 목소리에는 경멸함이 가득했다. "박민섭, 넌 진짜 쓰레기보다도 못한 놈이야."
박민섭은 잠시 침묵하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 쓰레기 맞아. 소월이의 열정과 은지의 다정함을 모두 갖고 싶어. 두 사람 다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했어."
"너 미쳤어?" 주태웅이 박민섭의 말을 가로막았다 "은지가 네가 양다리 걸친 걸 알게 되면, 널 용서할 것 같아?"
"은지는 절대 모를 거야." 박민섭은 주태웅의 말을 가로채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은지는 날 철석같이 믿고 있어. 내가 소월이와 뒹굴고 있을 때 전화가 와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어."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강은지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강은지는 소리 없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무거운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졌다.
정말 아이러니했다.
자신이 2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이토록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에 불과하다니.
강은지는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멍하니 현관문을 열고 주방으로 향한 강은지는 기계적으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6시 30분,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박민섭은 평소처럼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고, 손에는 신선한 백합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나 왔어."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강은지에게 다가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강은지는 꽃다발을 받아들이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박민섭은 그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재킷을 벗으며 킁킁거렸다.
"뭐 맛있는 거 했어? 좋은 냄새가 나는데."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갈비찜이야." 강은지는 차갑게 굳어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꽃을 화병에 꽂으러 돌아섰다.
식사 내내, 강은지는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박민섭은 휴대폰을 뒤집어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마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힐끔거렸다.
"머리가 조금 아파." 식사를 마친 후 강은지가 갑자기 말했다. "침대 옆 서랍에 있는 약 좀 가져다줄 수 있어?"
"그래." 박민섭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쉬고 있어."
그가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강은지는 재빨리 식탁 위에 놓인 그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자 잠금 화면이 나타났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과 두 사람의 기념일을 차례로 입력해 보았지만, 휴대폰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시도하려던 찰나, 화면에 한 통의 메시지가 떴다. [민섭 씨, 좋은 소식이 있어. 나 임신했어!]
강은지의 손끝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화면에 떠오른 글자들은 그녀의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 메시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가 박민섭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휴대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박민섭은 약과 물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 "너 안색이 안 좋은데 오늘은 일찍 쉬는 게 좋겠어."
강은지는 약을 받아 삼키는 척하며 말했다.
"괜찮아. 그런데 당신 회사에 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계속 휴대폰을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박민섭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프로젝트에 좀 문제가 생겨서. 다시 회사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럼 가봐, 일이 먼저지." 은지는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박민섭은 재빨리 코트를 걸치고 그녀의 볼에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강은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억지로 삼켜냈다.
오랫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후, 강은지는 떨리는 손으로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저 결정했어요. 아빠 말씀대로… 그 정략결혼,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