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오랫동안 고생 많았어. 보스, 집으로 돌아오신 걸 환영해."

축하연에서 고급 맞춤 슈트를 입은 젊은 남자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임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서현은 화려한 이목구비에 차갑고도 아름다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맑고 고운 눈동자 속에는 털끝만큼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목소리마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래. 난 먼저 가볼게."

"보스,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게."

도정문이 곧바로 말을 건넸다.

임서현은 거절하지 않았다.

차 안, 도정문이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다.

"보스, 이번에 집에 돌아가면 언제쯤 회사로 다시 나오실 생각이야? 요즘 우리 회사는 실적이 꽤 좋거든."

두 사람은 한 프로젝트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때문에 도정문은 고작 19살 밖에 안 된 임서현이 얼마나 무서운 능력을 지닌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끌어들여 함께 회사를 세웠고, 그렇게 세운 회사는 지금 이미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임서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이 정리되면 말해줄게. 지금은 그저 집에 가고 싶어."

"그래, 알겠어. 동생이 많이 보고 싶겠지. 걱정하지마, 보스. 동생은 아마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몇년 전부터 난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보스의 고모부한테 넘겨줬거든."

도정문은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서현과 그녀의 여동생인 임서윤은 6살 때 부모님을 잃은 후 고모인 임수연의 손에서 길러졌었다.

임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벚꽃 무늬가 새겨진 팬던트를 열었고 안에는 그녀와 여동생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임서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반면 임서윤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고 있던 임서현도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와 임서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왔고 그녀의 동생 임서윤은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마치 따스한 햇살 같은 존재였다.

열두 살 때, 임서현은 나라의 눈에 들어 기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7년을 보냈고, 프로젝트가 드디어 마무리 된 지금, 그녀는 그제서야 집에 돌아와 여동생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가에서 받은 돈 대부분을 서윤이한테 보냈으니 지금쯤 서윤이는 분명히 잘 지내고 있겠지?'

한편, 임서현의 입술이 그려낸 곡선을 발견한 도정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세상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차도녀가 웃고 있다니.'

도정문도 덩달아 임서윤을 만나보고 싶었다.

차는 마침내 단지 입구에 도착했다. 집집마다 정원이 딸려 있는 꽤 고급스러운 단지였다.

이 저택은 임서현의 부모님이 남겨준 유산으로, 지금은 고모와 여동생이 살고 있다.

사전에 등기되지 않은 차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임서현은 굳이 경비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단지 안으로 걸어갔다.

한편, 집 대문 앞은 불빛이 환한데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군.'

이런 생각에 임서현은 미소를 지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서던 그때, 마당 한쪽에 있는 개 집이 눈에 들어왔다.

예리한 눈초리로 임서현은 그 안에 사람이 들어 있음을 발견했다.

어두운 나머지 비록 그 사람의 얼굴은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개 집에 있는 사람이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 쯤은 알아 차릴 수 있었다.

'사람이 어째서 개집에 있는 거지?'

임서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상대방은 깜짝 놀란 듯 다급히 개 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임서현은 더욱 의아해졌다.

바로 그 순간, 안에서 가늘고 나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발 더는 때리지 마세요. 저, 다시는 실수 안 할게요. 더 조심할게요…"

'이 목소린... 설마, 임서윤?!'

임서현은 두 눈이 휘둥그래져 마치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곧바로 안에 있는 사람을 끌어냈다. 가까이서 보니, 어두운 불빛 속에서도 소녀의 얼굴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임서현의 동생, 임서윤이었다.

"어..."

임서윤 역시 눈앞의 사람이 어쩐지 익숙하다고 느꼈는지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감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윤아, 너 맞지."

임서현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베어 갔다.

임서윤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임서현의 눈에는 차디 찬 기운이 가득 차 있었고 그 눈빛에 담긴 살기는 마치 도시 전체를 초토화 시킬 것만 같았다.

"언니..."

임서윤은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 정말 돌아온 거야?"

임서윤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임서윤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챈 임서현은 걱정스레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동생의 이마에서 전해지는 고열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그때, 임서윤이 그녀의 품에 풀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마가 끔찍할 정도로 뜨거운데 비해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순간, 임서현의 마음도 함께 얼어붙고 말았다.

바로 그때, 저택의 문이 열렸다.

"임서윤, 이 느려터진 년아! 몇 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못 먹었어? 어서 들어와서 설거지 안 해?"

밖으로 나온 이는 바로 그녀의 고모인 임수연이었다.

그녀는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그 소리에 임서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임수연을 바라보았다.

고작 몇 년 사이, 예전에는 초라하고 수척했던 고모가 눈부시게 달라져 있었다.

값비싼 외투를 걸치고, 비취 장신구를 두른 모습은 아주 우아하고 화려해 보였다.

임수연은 임서현의 싸늘한 눈빛에 지레 겁을 먹은 나머지 몸을 떨었다.

"너... 서현이야? 너 언제 돌아온 거야?"

"당신들, 서윤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임서현은 임수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임수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녀는 임서현의 눈빛 속의 서늘한 살기에 깜짝 놀라 겁을 먹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해 봐야 고작 열 몇 살 짜리 꼬맹이일 뿐이잖아?'

임수연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 년이 그릇을 깨뜨려서 내가 벌을 준 거야. 네가 집에 없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그래도 난 서윤이 밥은 굶기지 않았어. 따뜻한 곳에서 재워주기도 했지. 네가 내 오빠 딸이 아니었으면 난 너희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거야."

바로 그때, 임서현은 임수연의 목을 거칠게 꽉 움켜쥐었다.

이내 차갑고도 얼음장 같은 얼굴이 눈앞에 다가오자 임수연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너... 이거 놔..."

임서현은 살얼음 같은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살기가 터져 나올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내 집이야. 그런데 당신이 감히 내 동생에게 설거지를 시켜? 그것도 모자라서 내 동생을 개 집에서 재우다니? 정말 죽고 싶은 거지?"

열린 문틈으로 흘러 나온 불빛으로 임서현은 동생이 먹고 있던 음식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확인 할 수 있었다.

사람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는 비주얼, 개에게 주어도 먹지 않을 그런 음식인 것이다.

게다가 임서현의 품에 안긴 임서윤은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얼굴은 초췌하고 핏기 없이 수척했다.

그 순간, 임서현의 심장은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보물처럼 아끼던 여동생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었다니...

"임수연. 당시 널 저택에 들일 때, 넌 분명히 약속했었지. 내 동생을 잘 돌보겠다고 말이야."

임서현의 눈빛에선 여전히 살기가 어른거렸다.

하지만 임수연은 어린 년이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반말을 지껄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이내 서슬퍼런 임서현의 눈빛을 마주하자 이내 주눅이 들어버렸다.

임서현은 어릴 적부터 성격이 괴팍하고 차가웠으며 사리분별이 확실했다.

하여 그녀가 집에 있던 그 몇년 간, 임수연은 잠자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내며 그나마 고모로서의 책임을 이행했다.

그런데 갑자기 임서현이 집을 떠나고 나자 집에는 성격이 유한 임서윤만 남게 되었고 임수연은 점차 이 저택의 자신의 집이라 여기며 임서윤을 밖에 내 쫓은 것이다.

그런데 임서현이 이렇게 다시 돌아올 줄이야?

"난 분명히 잘 돌봤어.

서윤이가 잘못을 저질렀길래 벌을 좀 준 게 뭐가 잘못됐다고 그래? 윽."

임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숨이 막혀왔다. 임서현이 손에 힘을 준 것이다. 그 순간, 임수연은 마치 저승사자가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임서현?"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문 밖의 소란 소리를 듣게 되었고 모두 문 어구로 시선을 돌렸다.

으리으리하게 인테리어 되어있는 저택,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 식탁, 그리고 하나 같이 값비싼 명품을 몸에 두르고 있는 사람들이 임서현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동생 임서윤은 개 밥 보다도 못한 쓰레기를 먹고 있다니!

그 생각이 스치자 임서현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회차 2

"임서현, 너 뭐 하는 거야? 빨리 우리 엄마를 놓지 못해?"

조영아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너희를 착한 마음으로 보살펴주지 않았다면, 너희는 벌써 죽었을 거야. 게다가 넌 밖에서 몇 년 동안 일하느라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잖아. 혹시 밖에서 임신해서 아이까지 낳은 거 아니야? 더러워 죽겠어...."

조영아는 그녀를 비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임서현이 돌아왔으니 앞으로 자기들을 돌볼 사람이 둘이나 생겼다고 생각하니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다음 순간, 임서현이 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힘껏 식탁을 걷어 찼다.

쾅.

임서현의 발차기에 식탁 위의 음식들이 바닥에 쏟아져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임서현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꽃병을 집어 들더니 조영아와 고모부의 머리에 휘둘렀다.

"으악!"

둔 탁한 파열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둘은 피를 철철 흘리며 몸을 떨었다.

"하루 시간 줄 테니까 당장 내 집에서 꺼져."

마치 차가운 서리가 내린 듯한 임서현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들려 오는 메아리 같았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임서윤을 안아 들고 집을 뛰쳐나가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저택은 울음 소리, 비명소리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엄마, 그 미친 년이 감히 날 때렸어. 나 얼굴이 베었다고, 설마 못난이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니지?"

조영아는 거울을 보며 울며 화를 내며 소리쳤다.

임수연 역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저 망할 년이. 몇 년 밖에 있다 오더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이제 감히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제대로 혼내줄 거야. 우린 이제 예전의 우리가 아니야. 지금 우리 회사는 노스 그룹과도 협력하고 있는데, 어떻게 저 딴 계집애 하나를 무서워하겠어?"

말을 마치고, 임수연은 딸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영아야, 걱정하지 마.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가자."

병원.

"다리는 부러진 지 오래됐고, 온몸에 성한 곳이 없어요, 이도 몇 개 빠져 있고요. 도대체 그 동안 언니 노릇을 어떻게 한 겁니까?"

그동안 별별 환자를 다 본 의사였지만, 그는 임서윤의 모습에 여전히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때, 임서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잘못입니다."

앞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녀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의사는 예의 바르고 철이 든 듯한 임서현의 모습에 더 이상 심하게 나무랄 수 없었다.

"상처는 이미 제가 붕대로 감아 두었어요. 만약 누군가가 당신들을 괴롭혔던 거라면 반드시 경찰에 신고해야 합니다."

그 말에 임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임서윤의 병상으로 다가갔다.

열아홉 살의 소녀라기엔 몸집이 너무 왜소했다.

게다가 손목은 어찌나 가는지 마치 조금만 비틀어도 부러질 듯 했고 단발머리는 잡초처럼 메말라 있었고,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머리카락은 보기가 흉했다.

임서현은 천천히 이불을 젖혔다.

소녀의 피부에는 채찍 자국과 상처가 가득했고,

심지어 담뱃불로 지진 걸로 보이는 흉터까지 남아 있었다.

그 모습에 임서현은 더 이상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살기를 누를 수 없었고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언니..."

그때, 침대 위에 누워있던 임서윤이 낮게 중얼거렸다.

임서현은 곧장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언니 여기 있어."

"언니, 나... 너무 보고 싶었어."

임서윤은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임서현은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미안해, 서윤아. 난 내가 열심히 일하면 네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언니가 잘못했어. 이제 다시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

임서현의 따스함을 느낀 듯, 임서윤의 찡그렸던 미간이 점차 풀어졌다.

잠시 후, 임서윤이 안정을 되찾자 임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 데스크로 향했다.

"비용은 이미 납부되었습니다."

데스크 직원의 말에 임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지? 혹시 도정문? 아니야. 그가 아직 이 일을 알 리가 없어.'

"혹시 누가 낸 지불 한 건지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임서현이 물었다.

"죄송하지만 저희에겐 그럴 권한이 없어요. 아마도 가족 분이 아닐까요? 가족 분한테 물어보세요."

가족이라는 두 글자에 임서현의 얼굴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병원 복도, 임수연은 막 치료를 끝낸 조영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난 절때 그년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조영아는 이를 갈며 분노했다.

"걱정하지 마. 임서현이 편하게 살 날도 얼마 안 남았어. 그리고 너도 좀 진정해. 얼굴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안 되잖아."

임수연은 딸을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너도 네 언니에게서 좀 배워. 너무 욱하지 말고."

머릿속에 언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조영아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비쳤다.

"엄마, 언니만 잘나가면 되는 거야. 언니는 지금 강성 무용단의 가장 어린 무용수잖아. 임서윤 그 멍청한 년이 감히 언니랑 경쟁을 하다니, 다리가 부러진 건 자업자득인 거지. 언니는 내가 괴롭힘 당한 걸 알면 분명히 속상해 할 걸?"

"지금은 네 언니한테 있어서 중요한 시기니까, 언니한테는 당분간 말하지 마."

임수연은 조영아의 코 끝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자 임서현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영아 역시 그녀를 발견했고

순간, 얼굴의 상처가 떠오른 조영아는 손에 쥔 백을 힘껏 임서현을 향해 휘둘렀다.

징이 가득 박혀있는 백이었고 그녀가 있는 힘껏 휘두른 바람에 스치기만 해도 상처가 날게 분명했다.

잠자코 복도를 걷던 임서현은 뒤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즉시 반격을 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리던 그 순간, 눈앞에 훤칠한 몸매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큰 키, 넓은 어깨, 떡 벌어진 등판. 그는 손을 뻗어 가방 끈을 낚아 채더니 힘껏 끌어 당겼다.

"으악."

그탓에 조영아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회차 3

"영아야!"

임수연은 가슴 아파 어쩔 줄 몰라 하며 급히 조영아를 부축했다. 그러더니 불쑥 나타난 남자를 향해 분노에 찬 눈빛을 보냈다.

"너 누구야? 설마 임서현의 남자 친구야?"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깊고 날카로운 그의 눈매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심해처럼, 죽은 듯 고요하고 위험한 기색을 내뿜을 뿐이었다.

그는 임수연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가죽 구두가 바닥을 밟을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임수연은 마치 누군가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저 남자, 절대 만만치 않아.'

"임서현, 집에 돌아오고 싶으면 당장 우리한테 사과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집은 너희 같은 고아를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거니까."

임수연은 날 선 말을 남긴 채 조영아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흥. 그 저택은 애초부터 내 집이었어.'

불현듯, 남자의 허리춤에서 언뜻 보이는 권총을 발견한 임서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 남자, 대체 정체가 뭘까?'

그때, 남자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고 임서현은 마침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 날렵한 턱선과 이목구비, 차가운 분위기가 인상적이었고 그의 차가운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 감도는 기운은, 그녀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와 위험 그 자체였다.

'어쩐지 임수연이 그렇게 줄행랑을 치더라니.'

"임서현."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움이 서려 있었다.

임서현은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제 동생의 병원비를 대신 내준 건가요?"

"똑똑하군." 남자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짐 챙겨. 우리 집으로 가자."

그 말에 임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소리야?'

바로 그때,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와 설명하기 시작했다. "임서현 씨. 반갑습니다. 이분은 저희 주시우 도련님이십니다. 도련님의 아버지와 아가씨 아버지는 전우 사이셨습니다. 주 어른께서 돌아가시기 전, 도련님에게 꼭 아가씨 자매를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얼마 전까지 군대에 계셨다가 이제야 민간인으로 돌아 온 거라 드디어 두 분을 찾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던 거구나.'

임서현은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는 차갑고 냉혹하지만, 자신에게 악의는 없음을 말이다.

임서현이 담담하게 물었다.

"당신 아버지랑 제 아버지가 전우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나요?"

주시우는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진은 전장에서 찍힌 듯 배경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임서현의 아버지 옆에는 낯선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낯선 남자의 눈매가 눈앞의 남자와 많이 닮아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임서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좋아. 그럼 연락처부터 교환하지."

주시우는 말을 아꼈다.

임서현은 그의 연락처를 추가하고 보니 주시우의 프로필 사진은 그저 새까만 색으로만 되어 있었다.

마침 임서현의 프로필 사진과 꼭 같았다.

순간, 왠지 모르게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잠시 후, 주시우의 비서인 이민준도 임서현의 연락처를 추가했다.

"임서현 씨. 저는 도련님의 비서 이민준이라고 합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 저를 찾으셔도 좋습니다."

"네."

임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멀어져 가자 임서현은 그제야 임서윤의 병실로 돌아왔다.

잠시 후, 병실 문 앞에 건장한 두 명의 경호원들 서 있는 걸 발견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남자가 보낸 이들임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임서현은 직접 동생의 옷을 갈아 입히고 머리를 감겨 주었다.

그러자 거칠고 메마른 머리카락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임서윤의 몸 곳곳에 남은 상처 자국과 담뱃불로 지진 흔적을 보는 순간, 임서현의 눈가가 또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감정을 억누른 다음 임서윤에게 자신이 개발한 약을 발라주고, 곧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자신이 떠난 이 몇 년 동안, 동생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녀는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임서현은 저택 구역의 감시 카메라에 접속했다. 화면 속 장면이 눈에 들어오자, 임서현의 몸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서윤은 방에서 쫓겨나 마당에 있는 개 집에서 지내는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한때 햇살처럼 밝던 동생의 얼굴에선, 더 이상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알바를 시작했을 땐,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했었고

열심히 공부를 해 명문대학에 입학했지만 첫 학기가 시작되기 바쁘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무용수였던 임서윤은 골절상을 입은 바람에 더 이상 제대로 춤을 출 수 없었다.

조영아에겐 조이현이라는 이름의 언니가 있었다. 그리고 조이현과 임서윤은 같은 반이었기에 임서현은 동생이 사고를 당한 게 조이현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후, 홀로 집에 남아 있던 임서윤은 매일 하녀처럼 허드렛일을 해야 했고, 개 집에서 지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거의 짐승 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임서윤은 매번 그녀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내곤 했다.

'언니, 걱정 마. 나 잘 지내. 언니도 거기서 잘 지내야 해.'

그 순간, 임서현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임서윤은 그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는 반면 고모인 임수연은 MK 그룹과의 협력으로 회사를 점점 키워갔었다.

중학교를 중퇴했던 사촌여동생은 인기 인플루언서가 되었고 조이현은 무용학원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게다가 임수연은 상류층 모임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고모부 역시 재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쾅!'

임서현은 있는 힘껏 책상을 내리쳤다. 통증은 없었지만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 왔다.

'내가 서윤이에게 조금만 신경을 더 썼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내가 그 동안 피땀을 쏟으며 쌓아온 모든 노력들이 그저 고모를 위한 것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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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가면을 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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