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한바탕 머리가 찢어질 듯한 통증 속에서, 하나영은 갑자기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번쩍 떴다. 두 명의 중년 여성 중 한 명은 그녀의 바지를 벗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다리를 억지로 벌려 손을 사타구니 쪽으로 집어넣으려 하고 있었다.
"죽고 싶어?"
하나영은 아래를 더듬던 뚱뚱한 여자를 발로 걷어찼다. 그 바람에 뚱뚱한 여자는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이고... 죽겠네."
다른 여자는 하나영의 바지를 벗기던 손길을 멈추고 다급히 그 뚱뚱한 여자를 부축했다.
하나영은 벌떡 일어나 그 둘을 붙잡으려 했지만, 자기 손이 굵은 밧줄에 꽁꽁 묶여 있다는 걸 알아챘다.
'빌어먹을. 여긴 대체 어디지? 양어머니 집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훑어보았다. 허름한 창고, 굳게 닫힌 문, 위쪽의 작은 창문 틈으로만 빛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 뚱뚱한 여자가 부축을 받아 일어서더니 하나영에게 침을 뱉으며 쏘아붙였다. "퉤. 감히 나를 걷어차? 죽을래?!"
그 여자가 하나영의 뺨을 때리려 손을 들자,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600만짜리 물건이야. 우린 이 얼굴로 값을 두 배로 받아야 한다고."
뚱뚱한 여자는 그제야 손을 거두며 이를 갈았다. "저만큼 약물의 양이면 소도 못 깨어나는데 저년이 이렇게 빨리 깨다니... 뭐, 깨면 더 좋지. 네가 스스로 우리 검사에 협조해."
하나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무슨 검사?"
"6백만원짜리니까 처녀인지 확인은 해야지?"
'검사하려는 게 나였어? 웃기는 소리. 이것들이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네.'
하나영은 경도의 암시장 보스였다. 경도 전체가 그녀의 손 안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비웃으며 눈빛을 번뜩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밧줄을 풀 궁리를 하며 시간을 끌기 위해 일부러 물었다. "6백만 원이라니? 너희 정체가 뭐야?"
하나영은 이번에 양어머니인 오아람이 중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경도에서 진현으로 날아왔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오미란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았고 그저 감기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튿날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이곳에 묶여있던 것이었다.
그때, 뚱뚱한 여자가 하나영의 발목을 잡으며 비웃었다. "오아람이 너를 우리한테 팔았어. 얌전히 검사만 받으면 조건 괜찮은 집에 시집 보내줄 수도 있어. 아니면 50, 60 먹은 노총각한테 넘길 거야."
"뭐라고? 오아람이 날 팔았다고?" 하나영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했다.
3살 때, 하나영은 오아람에게 길에서 주워져 그녀의 양녀가 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며느릿감으로 들여온 것이었다.
하나영이 철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집안의 온갖 더럽고 고된 일은 전부 그녀 몫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를 악물고 스스로 힘을 길렀다. 12살이 되던 해, 드디어 도망칠 힘을 갖게 되었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영은 자신을 길러준 은혜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매달 1일이면 오아람에게 돈을 송금해 주었다. 그 돈이면 대도시 중심가에 집 서너 채는 사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번에도 오아람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에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려 돌아온 건데… 오아람이 예전보다 더 독해져, 고작 6백만 원에 그녀를 이들에게 팔아 넘길 줄이야.
'어쩐지 이번에 나에게 유달리 잘해준다 했더니...'
하나영은 그저 오아람이 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부하들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역시 강씨 가문 사람들 중엔 제대로 된 인간은 하나도 없다니까. 애초에 이곳에 오면 안 됐어.'
하나영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기 시작했고, 뒤로 묶인 손가락은 여전히 쉼 없이 줄을 풀고 있었다.
하나영은 숨을 고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헛소리 그만 지껄여! 난 그 집의 며느릿감이야. 나중에 강택호에게 시집갈 사람이라고!"
"강택호에게 시집 간다고?" 여자는 코웃음을 쳤다. "너 수년간 집에 안 돌아왔다더니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강택호는 곧 대기업 회장 딸과 결혼해. 그 집은 이제 생활이 피게 생겼는데 왜 너 같은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겠어?"
다른 여자는 하나영의 발목을 더 힘주어 잡아당겼다. "다리 벌려. 처녀가 아니면 절반은 환불해줘야 하니까. 괜히 발버둥치다 잘못돼서 찢어지면 고통은 니 몫이야."
그 말에 하나영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럼, 누가 고통을 맛보게 될지 한번 볼까?"
바로 그때, 줄이 퍽하고 끊기며 풀려버렸다. 그러더니 하나영은 뚱뚱한 여자의 목을 낚아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윽." 여자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하나영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호흡이 막히자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고 입술은 푸르게 변해갔다.
다른 여자가 황급히 달려들었지만, 하나영은 그녀를 발로 차 벽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때, 그녀의 등이 벽에 강하게 부딪히며 "푸흡!" 소리와 함께 피가 튀어져 나갔다.
그 여자는 통증도 잊은 채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곧이어 건장한 남자 둘이 곤봉을 들고 뛰어들어와서 곧장 곤봉을 휘둘러 하나영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하나영은 뚱뚱한 여자를 내팽개치며 두 손으로 곤봉을 정확히 붙잡았다.
두 남자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속도가 이렇게 빠르다니...'
그렇게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들은 하나영의 발길질에 하나 둘씩 쓰러지고 말았다.
바로 그때, 조금 전에 하나영에 의해 내던져졌던 뚱뚱한 여자가 몰래 뒤에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하나영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곤봉을 휘둘러 그대로 여자를 실신시켜버렸다.
10분 후, 하나영은 창고에서 걸어 나왔고 눈부신 햇살이 눈을 톡 쏘듯 자극했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때, 창고 안에서 들려오는 구조 요청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하나영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느새 빛에 익숙해지자 그녀는 곧장 강씨 가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인신매매범들, 죽어 마땅해.'
그들 다음에 죽음을 맞이할 건, 바로 강씨 가문 사람들이다.
하나영이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불이야! 불이 났어! 빨리 불을 꺼야 돼!"
마을 사람들은 물통을 들고 불이 난 쪽으로 달려갔다.
하나영은 중년 여자의 외투를 걸치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간 탓에 누구도 그녀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불 끄러 가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마침내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하나영은 발을 들어 문을 걷어찼다. 그러자 나무문이 그대로 쓰러지며 먼지가 솟구쳤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영은 그제야 집이 이미 텅 비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 명도 남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참 빨리도 도망갔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하늘 끝까지 도망친다 해도, 하나영은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양육의 은혜 따윈 이미 다 갚았기에 이젠 복수를 해야 했다. '오아람, 강택호,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나영은 싸늘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은 창고를 개조한 것으로, 좁고 통풍도 안 되고 눅눅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그녀가 들고 온 작은 가방과 베개 밑에 숨겨둔 휴대폰은 사라져 있었다. 가방엔 딱히 값나가는 건 없었고 그저 신분증이 하나 있을 따름이었다.
이제 돌아가려면 조금 번거로워지겠지만 상관없었다. 읍내에만 나가면 휴대폰 하나를 빌려 부하들에게 데리러 오라고 명령하면 되니까.
그녀가 나서려던 순간, 밖에서 다급한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나영은 눈썹을 찌푸리다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발로 죽으려 왔나 보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문 뒤에 있던 낫을 들고, 살기 어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문 밖에서 안을 몰래 들여다보던 건 강씨 일가가 아니라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낯선 젊은이였다.
그의 얼굴은 흙이 말라붙어 얼룩져 있었고, 머리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양복을 입고 있었다. 물론 그 양복도 이미 너덜너덜했고, 뒤에는 녹슨 삼륜차 한 대가 있었다.
잠시 후, 하나영은 낫을 뒤로 숨기며 물었다. "누굴 찾으시죠?"
아마도 하나영이 소리 없이 조용히 다가온 탓에 청년은 그제서야 그녀를 발견했다.
어머니와 닮은 하나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남자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막내야. 정말 너야? 막내야!" 그는 미친 듯이 다급하게 하나영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코앞의 반 발짝만한 위치에서 갑자기 동작을 멈추었다. 하나영이 낫을 그의 목에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단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갔다면 낫에 목이 찔려버렸을 것이다.
회차 2
"막내야..."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격한 감정 때문이었다.
"나야, 네 여섯 째 오빠. 나 기억 안 나? 네가 세 살 때 우리랑 헤어졌잖아. 그 후로 줄곧 널 찾고 있었는데, 끝내 못 찾았어. 다행히 며칠 전에 화국 정보 데이터베이스가 업그레이드되면서 그걸 통해 드디어 널 찾게 됐어... 근데 혹시 헛걸음할까 봐 다른 가족들은 안 오고 나만 왔어."
남자는 잔뜩 흥분해서 말을 쏟아냈지만, 하나영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녀의 눈에 서린 경계심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방금 전만 해도 팔릴 뻔했는데, 이곳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누가 널 보냈든 난 관심 없어. 내가 손 쓰기 전에 당장 꺼져."
다른 사람이 먼저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녀도 절대 손을 쓰지 않는다. 그게 하나영의 원칙이다. 때문에 상대가 위협적인 행동을 하기 전까지, 그녀 역시 함부로 먼저 다른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한편, 하규철은 하나영이 믿지 않자 더 초조해졌다.
"막내야. 나 진짜 네 여섯째 오빠야. 우리 하씨 가문은 노성 제일의 재벌가라고. 그때 연말 행사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너를 잃어버렸던 거야. 우리 모두 너를 계속 찾고 있었다고."
하나영은 위아래로 하규철을 훑어봤다. "재벌가? 자전거를 타는 재벌가가 어디 있어?"
하규철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다급히 해명했다. "그게 아니고, 차가 오다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이 동네 사람한테 자전거를 빌린 거야.. 우리 가문이 진짜 재벌가 맞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꺼져."
그 말에 하규철은 마치 뜨거운 솥뚜껑 위의 개미처럼 초조해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주머니에서 물고기 모양의 옥패 하나를 꺼냈다. "이거 봐, 아버지가 너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쌍어 옥패야. 우리랑 헤어졌을 때 네 목에도 이 옥패의 반쪽이 걸려 있었어."
하나영은 그 물고기 옥패를 발견한 순간, 눈빛이 스치듯 흔들렸다. 그렇게 그녀는 결국 낫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하나영은 목에서 옥패를 꺼내 확인해보니 정말로 그가 들고 있는 것과 한 쌍이었다.
하나영이 꺼낸 옥패를 발견한 순간, 하규철은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녀가 정말로 막내라는 것을 말이다.
원래는 그저 어머니와 닮은 얼굴만 보고 추측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네 옥패 뒤쪽에, 하나영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지?"
하나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영' 이라는 글자는 아주 은밀한 위치에 새겨져 있어 오아람조차 알아채지 못했었다. '이 남자... 정말 내 친 오빠인가?'
어느덧 그녀의 경계심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차는 어디에 있어?"
"옆 마을 입구에 있어."
"그곳으로 나를 안내해. 대신 헛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마. 날 속인 게 들통난다면 네 목숨은 오늘까지야."
"알았어, 알았어." 남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러곤 어설프게 삼륜차에 올라타 그녀를 불렀다.
하나영은 거절하려다 다시 어지러움이 훅 밀려와 잠시 고민한 끝에, 삼륜차를 짚고 올라탔다.
그 모습에 하규철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막내야. 너 몸놀림이 보통 아닌데?"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그 마을로 가."
"그래, 그래."
'막내는... 내가 상상했던 연약하고 손 하나 까딱 못할 그런 동생이 전혀 아니야. 완전 영웅호걸 같은 기세라니까.'
잠시 후, 하규철은 가슴에 힘을 주며 더욱 힘차게 옆 마을로 달려갔다.
가는 길 내내 하나영이 길을 안내한 덕분에 마을 사람들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약 30분 후, 자전거로 겨우 옆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방금 전 자전거에서 하나영은 이미 자신의 혈 자리를 봉해 몸 속 약효를 잠시 억눌러 놓았다.
그녀가 몸을 날려 차에서 내리자 정말 한 대의 검은색 고급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그 차의 앞 바퀴는 박살 나 있었고, 차체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막내야. 걱정하지 마. 내가 방금 가까운 수리센터에 연락했어. 어림잡아 두 시간 정도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나영은 이미 트렁크로 가서 숙련된 손놀림으로 예비 타이어와 공구를 꺼내 망가진 타이어 쪽으로 향했다.
"막내야. 너 뭐 하는 거야?"
"차를 수리하는 중이야."
두 시간이라니,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별로 좋은 사람들은 아니어서, 이쪽을 찾아오기라도 하면 또 골치가 아파질 것이었다.
"너 차도 수리할 줄 알아?"
하나영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잭을 이용해 차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그녀는 10분도 안 되어 타이어 교체에 성공했다. 잠시 후, 하나영은 발로 타이어를 툭툭 차더니 이내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밖에서 멍하니 서 있는 하규철의 모습에 그녀는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뭘 멍하니 있어? 타."
"... 어, 알았어." 하규철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더니 허둥지둥 조수석에 올라탔다.
"막내야. 너 정말 대단해. 타이어도 갈 줄 안다니... 그건 네 오빠인 나도 못 하는 건데. 아 맞다, 아까 낫 들고 있었잖아. 그건 뭐 하려고 갖고 온 거야?"
하나영은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풀을 베서 돼지 먹이 주려고."
그 순간, 하규철은 괜히 가슴이 시큰해졌다. "막내야. 네가 이렇게 고생할 줄은 미처 몰랐어... 이제 걱정 마. 오빠랑 집에 돌아가면 다시는 이런 거 안 해도... 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는 활시위에서 튕겨나간 화살처럼 치고 나갔다. 그 바람에 하규철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 천천히. 막내야. 오빠 무서워. 천천히 좀 가."
"시끄러." 하규철의 목소리는 하나영의 귀를 지끈거리게 했다.
잠시 후, 그가 또다시 비명을 질러대려는 순간 하나영은 말 없이 오른손을 들어 그의 목덜미를 "쿵" 하고 쳐버렸다. 그렇게 주변은 즉시 고요해졌고 차는 다시 속도를 올렸다.
도로 위를 좌우로 자유자재로 달리는 바람에 경적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한편,
막 이륙시키려던 기내에서 오아람은 시커멓게 굳은 얼굴로 전화를 끊고 강제로 강택호의 안대를 벗겨버렸다. "문제가 생겼어."
강택호는 귀찮다는 듯 눈을 떴다. "무슨 일인데요?"
"강춘화 일행이 사는 집에 불이 났어. 사람들이 전부 타 죽었대."
그 말에 강택호는 그제야 몸을 곧게 세웠다. "그럼 하나영은요?"
"그걸 말해야 알아? 당연히 같이 타 죽었겠지." 오아람의 눈동자에는 슬픔은커녕 짜증뿐이었다. "너는 하나영을 몇 년 동안 못 봤으니까 모르겠지만, 걔 지금 진짜 예뻐졌거든. 6백만 원에 파는 것도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약속대로라면 몸을 확인하고 나서, 걔네가 나한테 300만 원을 더 주기로 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제 다 물거품이 됐어."
하지만 강택호는 오히려 안도하듯 숨을 내쉬었다. "300만 원이 뭐가 대수예요? 제가 도해월이랑 결혼하고 나면 300만 원은 그냥 일상 지출이에요."
게다가 어릴 때 그 누렇게 말라 빠진 계집애가 아무리 예뻐졌다 해도,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도해월보다 더 예쁠 수 있을까?
"그래도 300만 원이 적지 않은 돈이잖아..." 오아람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강택호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참 머리카락만 길고 견문은 짧다니까요. 제 말은, 하나영이 살아 있으면 제가 마음이 불편하다는 거예요. 도해월이 저한테 신붓감으로 삼았던 여자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화낼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죽었으니, 해월이는 평생 하나영이라는 애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겠죠."
그 말을 듣고 오아람의 가슴 속의 울컥함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네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구나. 나중에 호성에 가면, 나영이한테 종이돈이라도 좀 태워줘야겠다. 그래야 덜 미안하지."
강택호는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도해월이네 집은 기독교이니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싫어해요.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 종이를 태우든 말든 무슨 소용이에요? 게다가 하나영이 죽지 않았다면, 촌장 집에 팔려가서 꽤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걔가 죽은 건 우리 탓이 아니라 걔 팔자가 사나운 탓이죠."
오아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집에서 가져온 전이 떠올라 황급히 가방을 뒤지다가 카드 한 장이 바닥에 똑 떨어졌다.
"뭐 떨어뜨렸어요." 강택호가 눈치 빠르게 발견하고는 오아람에게 일러주었다.
오아람은 바닥의 카드를 주워 몇 번 바라보고 나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문득 생각이 났다. "그 계집애가 밖에 나가서 일한 뒤로, 매달 돈을 송금했거든. 읍내 은행까지 가려면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데, 일부러 나 귀찮게 하려고 현금을 안 보내고 이런 걸 보냈지. 노성에 가면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강택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12살에 학교도 그만두고 나가 일했다면서요? 벌면 얼마나 벌었겠어요? 괜히 눈앞의 이익만 보지 마세요. 도씨 가문 사람들이 이 카드를 발견하기 전에 어서 버리세요."
강택호는 그렇게 말하며, 오아람의 손에서 카드를 낚아채 그대로 밖으로 던져버렸다.
"에이, 버리지 마." 오아람은 황급히 뛰어나가 카드를 주워들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야. 시간이 이렇게 오래 됐는데, 매달 20만 원만 보냈다 쳐도 지금쯤 몇 천만 원은 됐을 거라고."
강택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안대를 쓰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노성에 도착해 도해월을 만난다면 그녀를 또 한참을 달래줘야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강택호가 오아람을 데려온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한편, 하나영에게 맞고 기절했던 남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느덧 이미 노성에 도착해 있었다.
회차 3
후두부에 통증이 스쳤다. 하규철은 한쪽 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그의 차 안에 있었다. 다만 바깥에는 익숙한 고층빌딩들과, 저 멀리 탑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노성으로 돌아온 거야?'
그는 자신이 막 시골 마을에서 나왔다는 것까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왜인지 모르게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맞다, 막내. 막내는 어디 있지?'
하규철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고, 그제서야 차 밖에 있는 하나영을 발견했다.
하나영은 한창 한 파마머리 청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스,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 어떤데?"
파마머리 청년이 유전자 검사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이 들었다.
그녀는 보고서를 받아 바로 결론 부분을 펼쳤다. [갑과 을의 DNA 샘플 분석한 결과, 갑과 을은 남매 관계가 성립합니다.]
"팍." 하나영은 복잡한 기색을 내비치며 보고서를 닫았다.
그녀는 자신이 고아라고 굳게 믿어 왔었다. 고아가 아니라 해도, 부모에게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뒤흔들 능력을 갖게 되었음에도 부모님을 찾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을 버린 사람은, 찾아갈 가치도 없다고 여겼으니까.
그런데 지금 자신의 신분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만, 하나영은 아직 가족들과 함께 지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 오랜 세월, 그녀는 이미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파마머리 청년은 하나영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하씨 가문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하씨 가문에는 대장 외에도 아들 여섯에 양녀 하나가 있는데 가정 환경이 조금 복잡합니다."
하나영은 유전자 검사 보고서를 파마머리 청년 손에 다시 쑤셔 넣었다. "어찌 됐든, 가서 한 번 봐야겠어."
파마머리 청년은 바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저희도 올해 본부를 노성으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보스께서 정식으로 노성 시민이라는 신분을 가지게 되시면, 일하기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하나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나더러 하씨 가문으로 돌아가게 만들 생각이었구나?"
파마머리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수였죠. 경도 쪽 시장이 다른 무리에게 공격 당해 난리가 났습니다... 상대는 숨어있고, 우리는 드러나 있는데다가, 정보조차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으니 저희는 반드시 근거지를 옮겨야 합니다."
"가서 애들한테 전해. 언제든지 전이할 준비를 하라고."
"네." 파마머리 청년은 대답을 하고 막 돌아서려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보스, 어제 어떤 사람이 저희한테 큰 금액의 의뢰를 하나 넣고 갔습니다. 노성의 어떤 사람을 치료해달라는 건데, 마침 보스께서 노성에 계시니, 이 일을 맡으시겠습니까?"
"얼마를 불렀는데?"
"상대방이 말하길, 병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저희가 얼마를 부르든 상관없다고 합니다."
하나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아, 그럼 그 주문 건으로 노성에서 이름을 알려야겠어."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쪽 차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하나영이 손을 한번 젓자, 파마머리 청년은 즉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바로 그때, 하규철이 다가와 조금 전의 파마머리 청년이 떠난 방향을 힐끔거리며 살폈다.
"막내야. 저 사람은 누구야?"
"운전기사를 고용했어. 저 사람이 차를 몰아 노성까지 온 거야."
"그래?" 하규철은 아무 의심 없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목이 너무 아파..."
"차 타고 가다가 잠들었잖아. 아마 너무 오래 자서 담에 걸린 걸 거야."
"정말 그런가?"
"그럼."
하규철은 어째선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기억을 더듬으려 하면 목이 더 아파져서, 아예 신경 끄기로 했다.
막내가 돌아온 것이 아무래도 하규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말이다.
"막내야, 나랑 같이 집에 가자. 아마 아버지랑 어머니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실 거야."
"그래, 가자." 이번에 하나영은 흔쾌히 동의하며 운전석에 앉지 않고 하규철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하규철은 그제야 비로소 남자로서의 자신감을 조금 찾은 듯, 차를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몰았다.
그는 하나영 앞에서 운전 실력을 뽐내고 싶었지만, 노성의 교통은 열 걸음마다 정체, 백 걸음마다 신호등이라 아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이 지나서야 차는 어느 저택으로 들어섰다.
하나영은 이렇게 호화로운 저택을 둘러보며, 하규철이 하씨 가문은 노성의 최고 재벌가라고 했던 말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최고 재벌가의 딸이라는 신분이 있다면, 오닉스를 노성으로 옮기기도 아마 훨씬 쉬워질 것이다.
잠시 후, 하나영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많은 하인들이 짐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규철은 한 하인을 붙잡고 물었다. "인걸아, 다들 어디로 가는 거야?"
진인걸은 하규철을 발견하자 잽싸게 그를 부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이틀 동안 댁에 안 계신 사이에 집안에 큰일이 났습니다..."
그의 설명을 통해 하나영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버지인 하운현은 원래 노성의 최고 부자였는데, 어떠한 경제 사건에 연루되어 공식 기관에 끌려갔다고 했다.
지금은 하씨 가문의 장남과 둘째 아들이 함께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 여파로 하씨 그룹도 큰 타격을 입었고, 심지어 하인들마저 모두 해고가 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방금 급여를 정산 받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규철은 정신이 멍해져 한동안 이 충격적인 소식을 소화하지 못했다.
결국 하나영이 그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일단 들어가 보자."
하규철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하나영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막 거실에 들어섰을 때, 한 날씬한 소녀가 화려하게 차려 입은 여성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죄송해요,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아버지랑 오빠들이 모두 사고를 당한 상태라, 제가 하씨 가문과 연을 끊지 않으면 도씨 가문에서 절 며느리로 받아주지 않겠대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건 그냥 보여주기 식의 절연이에요. 제가 도씨 가문에 시집가면, 집안에 뭐가 부족하든 도울 수 있어요..."
안미향은 눈을 꼭 감았고 얼굴에는 깊은 실망감이 어려 있었다.
이번의 집안 사고는 이유 있는 행동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번 일을 통해 잠시 힘을 숨기고 재정비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일을 통해 몇몇 자식들의 처세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무 해 넘게 정성 들여 키운 양녀가 하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하자 바로 집안을 버리겠다고 나설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방금 전에 해고된 하인들조차도 나중에 필요하면 언제든 돌아오겠다며 미련을 보이고 떠났는데 딸인 하유리는...
안미향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하규철이 갑자기 발걸음을 내디디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번쩍 들어 뺨을 세게 후려쳤다.
하유리는 반사적으로 볼을 감싸며 놀란 눈으로 하규철을 바라보았다. "오빠, 지금 날 때렸어?"
하규철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유리를 노려보았다. "내가 널 때린 게 뭐가 어때서?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그냥 하씨 가문이 망한 것 같으니, 우리랑 엮이고 싶지 않은 거잖아."
"너..."
"닥쳐. 너는 너대로 도씨 가문의 며느리나 해. 앞으로 우리 하씨 가문이랑 넌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거야. 이제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
하유리는 하규철과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안미향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갑자기 비웃으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좋아, 이건 당신들이 직접 한 말이야. 당신들이 먼저 나랑 인연을 끊은 거야."
하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보였다. "서명해. 앞으로 당신들이 죽든 살든, 난 신경 안 쓸 거야."
하규철은 안미향이 손을 대기도 전에, 그 서류를 냉큼 낚아채더니 빠르게 자신의 이름을 써 넣었다. "됐어. 이제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