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소씨 가문의 친아들이 아닌 소진호는 당연히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노부인이 쓰러지고 말았으니, 자연스레 소금휘가 소씨 가문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소금휘는 가슴을 활짝 펴거소리쳤다. "너, 지금 날 노려보는 것이냐? 잘하면 한대 때릴 기세로구나! 지난 몇 년간 너희 부부가 이 바보의 병을 고치려고 얼마나 많은 은자를 썼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심지어 어머니는 오씨의 저주에 당해 벼락을 맞으셨다! 어서 어머니를 돌보지 못할 망정 우리를 향해 눈을 부라리다니!"
"퉤!"
주옥란도 남편의 말에 얼른 맞장구 쳤다. "맞아요, 어머니께서 오씨와 이 재수 없는 바보 천치 때문에 이 꼴이 되셨는데, 아주버님께서는 어떻게 우릴 향해 눈을 부라릴 수 있단 말입니까? 저라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었을 겁니다."
소진호는 그들의 말에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청하가 갓 태어났을 때, 내가 지난 몇 년간 사냥으로 번 은자를 모두 너희에게 주었다. 너희는 청하를 맡아 잘 키우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지금, 어찌된 게냐? 약조는 벌써 잊은 것이냐? 게다가 그 동안 청하의 병을 고치는 데 쓴 돈은 전부 내가 산에서 사냥으로 번 돈과 영설이가 수놓이로 번 돈이다.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소금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자 주옥란이 바로 그의 팔을 부축하며 반박했다. "아주버님과 오영설도 이 집안의 식구이니, 번 돈은 당연히 가문을 위해 써야지요. 왜 네 돈, 내 돈을 따지는 겁니까!"
"맞아!" 소금휘는 다시 허리를 꼿꼿이 폈다. "한마디로 끝내겠다. 저 바보를 우리에게 넘기든지, 아니면 너희 모두 소씨 가문에서 나가거라. 가문에서 나간다면 족보에서 바로 이름을 지워 버릴 테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라!"
소금휘는 소진호가 감히 소씨 가문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가문을 떠나면 소진호네 가족은 호적도 없는 신세가 될 터였다. 고작 바보 천치 딸 하나 때문에 그럴 가치가 있을까?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알 것이다.
그러나 소금휘는 딸 청하가 소진호의 마음속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짚신 한쪽은 이미 어디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고 땀으로 흠뻑 젖은 소진호가 아내와 아이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이어 그는 소위 동생과 제수씨라는 자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깨끗하게 관계를 끊자꾸나! 이제 우리는 남이다. 더 이상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야!"
소진호는 소씨네 본가 사람들이 없어도 살림살이가 나빠 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사내다. 설령 제 살을 떼다 팔고 피를 팔아서라도 아내와 아이들을 반드시 먹여 살릴 것이다. 그러니 소씨 가문의 동정 따윈 필요 하지 않았다.
호적이 없으면 또 어떠한가?
흉년이 들어 세상이 어수선한 지금, 호적이 있는 사람들도 배도 채우기 어려운 이 시국에 호적이고 뭐고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소금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이 불효 막심한 놈! 어머니께서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분가할 궁리를 하는 것이냐?"
"아이고, 어머니! 빨리 일어나서 좀 보세요." 주옥란은 바닥에 쓰러진 '숯덩이'를 흔들며 가짜 눈물 두어 방울을 흘렸다. "저 근본도 없는 놈이 이제 뼈가 자랐다고 아주 어머니더러 돌아가시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어요!"
하지만 시커먼 숯덩이가 된 노부인은 미동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소진호는 더 이상 그들과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촌장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는 게 보였고, 그는 즉시 촌장과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을 향해 예를 올리고는 선언했다.
"마을의 어르신들, 그리고 형제 자매 여러분. 저와 제 아내 오영설은 자식을 파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 집안과 다툼이 생겼습니다. 하여 저희는 소씨 가문을 떠나기로 결정 하였으니 오늘 부로 더 이상 소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알립니다!" 촌장이 우물쭈물 입을 열려고 할 때, 소진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희 다섯 식구는 빈손으로 나가겠습니다. 소씨 가문의 집과 밭은 일절 원치 않습니다. 노부인은 제가 수십 년 동안 어머니라 부른 분이니, 앞으로도 자식 된 도리는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휘, 소은휘, 소옥휘, 이 형제들까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고하는 바이니 여러분들, 부디 저희 부부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진호야, 정말 사소한 일 때문에 이렇게 까지 해야겠느냐?"
늙은 촌장은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는 소진호가 자라는 것을 지켜봐 왔다. 비록 소씨 가문의 핏줄은 아니었지만, 소진호는 여태 소씨 가문을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며 헌신해 왔다.
그 말을 들은 소진호가 촌장을 돌아보았다. "제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 하고, 제 딸을 팔아 넘기려 하는데, 이것이 사소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도대체 무엇이 큰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할 말을 다 했습니다. 촌장 어른,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머물 곳을 찾아봐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떠나기 전 소진호는 소씨 가문 삼 형제를 흘긋 쳐다 보았다. "이제 나는 너희의 큰형이 아니다. 각자 알아서 잘 살거라. 만약 다시 내 식구들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가는,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소진호는 한 손으로 청하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오영설을 부축했다. 소청양 더러 의식을 잃은 소청운을 업으라 하고,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소씨 가문의 대문을 나섰다.
"진호 오라버니, 이제 우리는 어떡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공공연이 자신으 딸을 죽이려 했다는 생각에 오영설은 온몸이 떨렸다. '가엾은 내 딸 청하, 죄 없는 내딸에게 하늘은 이리도 가혹하단 말인가?' 소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머물 곳부터 찾아보세. 내게 사냥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께서 슬하에 자식이 없던 터라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집 한 채를 남겨주셨소.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무너졌을지 어떨지 모르겠군. 마을에서 좀 멀긴 하지만, 적어도 비바람을 피할 지붕은 달려 있을 거요. 여보, 못난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이 많소."
오영설은 품에 안겨 잠든 청하를 내려다보고, 뒤따라오는 두 아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와 혼인한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오라버니, 그런 말씀 마세요. 비바람 피할 지붕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 합니다."
소진호는 말없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스승님이 남겨준 집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랜 세월 비바람 속에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집은 불 품 없이 낡아 있었고 언제 쓰러진다 해도 놀랍지 않은 상태였다. 벽은 이미 다 쓰러져 있었고 지붕은 거의 절반이 내려 앉아 있었다. 사람이 지낼 만한 방은 겨우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본 소진호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오영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정녕 하늘이 우리 일가족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걸까?'
오영설은 감히 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일가족은 그 낡은 집으로 들어 섰다. 일단 아이들을 그늘 진 곳에서 쉬라고 하고는 찢어진 낡은 천 조각을 걸레 삼아,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방의 안팎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사람이 머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소진호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아내의 뒷모습과, 문짝 위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소청운, 그리고 쌔근쌔근 코까지 골며 깊이 잠든 청하를 번갈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청양아, 집에서 형이랑 막내 동생을 잘 보고 있어라."
소진호는 말을 마치고 오영설의 곁으로 다가가 당부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오. 나는 잠시 나갔다 오리다."
오영설은 남편이 뜨거운 햇볕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 물었다. "오라버니,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식량을 빌리러 가는 거요."
본가와 관계를 끊고 빈손으로 나온 다섯 식구의 손에는 돈 한 푼, 쌀 한 톨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손을 내밀고 식량을 빌리는 것 뿐이었다.
식구들이 이 낡은 집에 자리를 잡고 나면,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구사일생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칼 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들 지라도, 사냥감을 찾아 빚을 갚고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릴 작정이었다.
소진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오영설의 마음이 저렸다. 이런 흉년에 식량은 금보다 귀하다. 그런데 누가 식량을 빌려 준단 말인가...
그녀는 남편이 빈손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영설은 관자 놀이를 지그시 누르더니 이내 다시 걸레를 집어 들고 집 청소에 매진했다. 이따가 돌아 올 남편에게 여전히 먼지 투성이인 집을 보여 주긴 싫었다.
이곳은 앞으로 다섯 식구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터전이다. 하여 그녀는 집안일을 착실히 해내 집안 일로 소진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