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주나라. 선덕 5년, 새 황제가 등극하자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동시에 떠올랐고, 태양이 작열하며 온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뜨거운 바람이 대지를 휩쓸었고 시들시들 생기를 잃은 꽃과 풀새들은 허리가 꺾였다.
대지는 바싹 말라 갈라터졌고, 백성들은 단 한 톨의 곡식도 거두지 못했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매일 조회 때마다 오직 한 가지 일만 상소했다. 그건 바로 황제가 죄기조(罪己诏) 내리는 것과 동시에 현명한 자에게 황위를 선양하여 나라와 백성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라는 요구였다.
이러한 난세에 번왕(藩王)들은 서서히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주위 나라들도 호시탐탐 주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내우외환 속에서 주나라는 점차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머님! 어머님! 청하를 파시면 안 됩니다. 황대인에게 팔다니요! 우리 청하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제발, 우리 청하를 살려주세요. 제가 앞으로 일도 더 많이 하고, 식량도 더 많이 구해오겠습니다!"
절망적인 울음 소리와 함께 끊임 없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소리가 청수촌에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듯 담장에 매달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떠오른지도 4일이 지났고 온 천하가 가뭄에 시달린 지도 3년이 넘었다. 소씨 가문의 청하는 마침 하늘에 이변이 있을 때 태어난 바람에 소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줄곧 미움을 받았다. 그러니 식량을 위해 그녀를 팔아 넘기는 건 마을 사람들이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누구도 청하를 도울 수 없었고, 도우려 하지도 않았다. 운명이 기구한 청하를 구했다가 자신의 집에 나쁜 일이 일어 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여 모두들 그저 구경이나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큰형수! 우리가 저 재앙 덩어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키웠는데, 이제 집안이 어려워졌으니 마땅히 큰형님이 나서서 우리 집이 어려움을 헤쳐나가도록 도와야않겠습니까. 게다가 청하를 파는 건 오히려 청하에겐 좋은 일입니다."
소씨 가문의 둘째 소금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소씨 가문 셋째네 부부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어머님 앞에 무릎 꿇고 빌고 또 비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시끄럽게 소란까지 피우다니요. 우리 소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려고 작정한 겁니까? 사람들이 우리 집을 비웃게 만들려는 거냔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형수가 저 태생부터 모자라고 팔자 사납게 태어난 애를 여태 키웠기에 저희 가문이 집에 쌀 하톨 남지 않을 지경에 이른 게 틀림 없습니다."
둘째 소금휘가 곁에 있는 아내에게 눈짓하자, 여인은 즉시 알아차리고 노부인에게 다가갔다.
"어머님, 더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이러다 황대인이 다른 사람을 찾겠어요."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야박한 인상의 둘째 며느리 주옥란이, 환갑을 넘긴 소 노부인을 향해 은근히 암시하며 일깨웠다.
'절대 황대인이 마음을 바꾸게 해서는 안 돼.'
청하의 어머니 오영설에게 다리를 붙들린 주씨 노부인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고 그대로 청하 어미의 명치를 힘껏 걷어찼다.
"시국이 이러하니, 집집마다 아들딸을 내다 파는데, 남들은 되고 우리는 안 된다는 말이냐? 청하는 그냥 바보천치다, 지금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야지, 그 애를 안 팔면 누굴 팔겠느냐? 오씨! 한 번만 더 방해를 하면 큰 애더러 널 내 쫓으라고 할 테니 그렇게 알거라! 둘째 며느리, 청하를 곳간에 끌고 가거라."
주씨 노부인이 이를 악물고 명령했다.
주옥란은 그녀의 친정 조카였기에, 평소 중요한 일은 주옥란에게 맡기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 네." 시어머니의 분부에, 주옥란은 쪽 걸상에 앉아 있던 얼굴이 꾀죄죄하고 하늘 높이 머리를 묶어 올린 묶은 여자아이를 거칠게 잡아 끌며 곳간으로 향했다.
황대인이 말하길, 그가 어린 여자아이를 사는 건 역병으로 죽은 아들에게 저승에서 함께 놀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러니 청하처럼 팔자가 사나운 아이가 딱 제격이었다. 죽어서 원귀가 되면 즉시 부적으로 황대인의 아들의 곁에 가둘 것이고 그러면 황대인의 아들을 위해 잡귀들을 물리칠 테니 말이다.
바로 그 이유로, 황대인이 바보 천치인 청하를 위해 잡곡 200근을 선뜻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전제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청하의 죽음이었다. 아니면 그녀는 그만큼의 값어치가 없었다.
주옥란은 어차피 청하는 바보 천치이니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여태 소씨 가문에서 늘 기가 죽은 채로 지내던 오영설과 노부인의 첫째 아들 소진호는 감히 노부인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어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건 불효를 저지르는 일이니 말이다.
"어머님, 안 됩니다, 안 돼요! 우리 소씨 가문에 여자아이라고는 청하 하나뿐입니다. 어머님, 제발 청하를 팔지 말아 주세요! 파시려거든 차라리 저를 파십시오. 저를 기생집에 파셔도 괜찮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오영설은 주옥란을 쫓아가려 했지만, 동서들과 시댁 식구들에게 가로막혔고 어떻게 해도 그들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하여 그녀는 다시 소씨 노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을힘을 다해 머리를 조아렸다.
청하가 천치로 태어났을 지라도 그녀에겐 열 달을 품어 목숨 걸고 낳은 둘도 없는 딸이었다. 그녀는 청하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고 시어머니가 그저 딸을 가엾게 여겨 그녀에게 살길을 열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를 토할 지경으로 애원을 해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한심하고 가소롭게 보여질 뿐이었다.
'어리석은 년, 정말 자기 목숨으로 청하의 안녕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청하를 팔고 나서 집에 쌀이 떨어지면, 그땐 다른 사람을 팔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장 먼저 팔려 갈 건 바로 첫째네 두 아들이고 나중에는 오영설도 팔려 갈 것이다. 소진호가 어디에서 오영설 같은 여자를 데리고 왔는지, 그녀는 피부가 희고 아름다워 조금만 치장을 시켜도 남정네들이 군침을 질질 흘릴 정도였다. 그러니 꽤 많은 돈과 식량을 바꿀 수 있을 터였다.
"이 나쁜 사람! 내 동생 놔!"
오영설이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청하를 살려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할 때, 숯 검댕이 보다 더 검고 마른 남자아이가 어른들이 한눈파는 틈을 타 주옥란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들어 여인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
"아야!"
너무 아팠던 주옥란은 손에 들고 있던 청하를 놓치고 말았고, 남자아이의 배를 사정 없이 걷어찼다. 그러자 남매는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자 아이는 청하의 큰 오라버니 소청운이었다. 그는 너무나 작고 말랐기에 이제 7살이 된 그가 아무리 온힘을 다해 덤볐어도 여전히 동생을 지켜 낼 순 없었다.
청하의 머리가 땅에 세게 부딪쳤고 머리에 대추알 만한 상처가 났다. 이내, 새빨간 선혈이 마치 수문을 열어 젖힌 듯 콸콸 흘러 내렸다. 하지만 아무도 피로 범벅된 어린 청하의 눈에서 갑자기 찬란한 빛이 스쳐지나 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엥? 여기가 어디지? 아야! 머리가 너무 아파. 대체 누구야?! 감히 천제의 유일한 딸인 나를 때려? 천계의 제 999번째 공주인 내 체면이 뭐가 되겠어. 나 화낼 거야!'
청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주옥란은 소청운에게 물린 손등의 상처를 보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녀는 버럭 화를 내며 바닥에 있던 몽둥이를 집어 들더니 소청운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이 위아래도 없는 놈이 감히 날 물어!? 너까지 함께 팔아 버릴 테다!"
주옥란이 휘두른 몽둥이를 정통으로 맞은 소청운은 동공이 수축되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큰형아! 동생아!"
또 다른 사내아이가 청하와 소청운 곁으로 달려와, 마찬가지로 가냘픈 몸으로 형과 동생을 감쌌다.
그는 청하의 둘째 오라버니 소청양이었고 소씨 노부인 일행을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서려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용기를 내어 위협의 말을 내뱉었다. "저, 전 이미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마을 사람에게 부탁을 했어요. 아버지는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아버지는 동생을 팔게 두지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둘째 숙모가 큰형을 때려서 기절시킨 것도 아버지, 아버지한테……"
"네 아버지? 칵 퉤! 그저 우리 소씨 가문이 주워다 키운 불쌍한 놈일 뿐이야. 우리 소씨 가문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어디서 죽었을지도 모를 놈이지. 네 아비를 불러와 봐라. 내가 똑똑히 봐야겠다, 감히 어른의 뜻을 거역할 수 있을지!"
주옥란이 소씨 노부인을 부축하며, 증오와 아첨이 뒤섞인 목소리로 부추겼다. "어머님, 제 말이 맞지요?"
"맞고 말고."
소씨 노부인의 주름이 가득한 늙은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첫째네 어린 녀석들이 너무 버릇이 없군. 아이도 내 마음대로 못 팔아?'
옛날에 그녀가 아니었다면 큰아들 소진호는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장가도 들고 아이도 낳고 살 수 있는 건 전부 그녀의 덕분이었다.
회차 2
젊었을 적 아이를 갖지 못했던 소씨 노부인은 길가에 버려진 소진호를 주워 키웠다.
나중에 소씨 노부인은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소진호를 내치지 않고 계속해서 키워주었다.
소진호는 소씨 노부인의 은혜를 마음 속에 새겨두었고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따랐다. 그런 그가 노부인의 결정을 거스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소진호는 절대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씨 노부인의 말을 들은 주옥란은 더욱 재촉했다. "어머니, 이 녀석이 제 손을 너무 세게 물어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어머님이 수고 좀 해주시겠어요? 황대인께서 길시(吉时)를 정하셨으니, 빨리 저년을 황대인 댁에 보내야 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둘째, 셋째, 넷째. 너희들은 소청양과 오씨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잘 지키고 있어라. 만약 여전히 발버둥질 친다면 고분고분 말을 들을 때까지 때려도 좋다."
소씨 노부인은 이런 나쁜 업보를 쌓고 싶지 않았지만 황대인이 약속한 잡곡 200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지팡이를 내던지고 소청양의 품에서 소청하를 낚아채더니 두 손으로 소청하의 목을 졸랐다.
그 모습을 본 오영설은 더욱 미친 듯이 발악했다. "안 돼! 내 아이를 해치지 마세요! 청하는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손녀라고요! 어머님, 정녕 잡곡 200근 때문에 청하를 죽이려는 겁니까? 어머님, 만약 청하를 해치면 천벌을 받을 거예요!"
오영설은 소씨 노부인을 향해 저주를 퍼붓더니 그녀를 막아선 시댁 식구들 얼굴에 입안 가득 고여있던 피를 내뿜었다.
소씨 가문의 남자들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오영설을 밀쳐냈고,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쳐진 오영설은 온 몸에 힘이 빠져 일어설 힘도 없었고 도저히 딸을 구할 수 없었다.
"내 동생을 놓아주세요!" 정신을 차린 소청양이 소씨 노부인을 물어뜯으려 달려갔지만, 남정네 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소금휘, 소은휘, 소옥휘 세 형제는 소청양을 제압하고 나서 냉담한 눈빛으로 소청하를 내려다봤다.
팔자가 사나운 바보 천치 계집은 진작 죽었어야 했다. 소청양의 입으로 들어가는 식량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 왔던 그들이니 말이다.
소씨 노부인은 시간을 지체하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깡 마른 두 손으로 소청하의 목을 더욱 세게 졸랐다.
하지만 그때, 소청하가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소청하가 피식 웃음을 지었고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소씨 노부인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한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소름이 돋았고 마치 독사가 그녀의 등 뒤로 천천히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할머니, 저를 죽이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소청하가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씨 노부인이 소청하가 정상으로 돌아온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전에,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서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고 소씨 노부인은 본능적으로 눈이 부시게 맑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 우르릉 쾅!
번개가 하늘을 가로질렀고 푸르른 하늘을 단숨에 두 동강 내버렸다.
소씨 노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도망치려 했지만, 발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마냥 움직일 수 없었다.
벼락은 정확히 소씨 할머니의 머리 위에 떨어졌고 거대한 천둥 소리와 함께 소씨 노부인을 순식간에 검은 숯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벼락에 맞은 그녀는 허공을 가르며 반장(1장은 3미터) 밖에 나가 떨어 지더니 벌려진 입 속에서는 검게 탄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엥?"
소씨 노부인이 손을 놓았던 탓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은 소청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자신의 조그만 손가락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픽 내쉬었다.
범인(凡人)의 몸은 아직 너무 약했다.
신뢰(神雷)를 불러오긴 했지만 머리카락만큼 가늘었던 신뢰는 나쁜 할머니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소청하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계의 하루는 지상의 일년이다.
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이제 막 3살 반이 된 꼬마였다. 그런데 아버지인 천제(天帝)가 글쎄 그녀를 인간계에 보내 겁(劫)을 겪게 했다.
사명신군(司命神君)은 여러 선택지 중에서 결국 그녀를 청수촌 소씨 가문의 오영설의 뱃속에 태어나게 했고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누군가 욕지거리를 해대는 걸 들었다. 글쎄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여자 아이를 낳았다고 오영설을 나무라며 얼른 갖다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천계의 999번째 공주인 소청하는 그런 비난을 받아 들일 리 없었다. 하여 그녀의 원신(元神)은 천계로 돌아갔고, 이 범인의 몸만 소씨 가문에 남겨 두어 겁을 겪게 했다.
어차피 그녀의 본체는 태초영천(鸿蒙灵泉, 태초부터 존재한 신비한 샘물)이다. 그러니 모든 강줄기가 나중에는 다 바다에 흘러 들 듯 그녀의 분신의 모든 것은 나중에 그녀의 본체로 흘러 들어 들 테니 본체가 겁을 겪든 분신이 겁을 겪든, 모두 그녀의 공덕(功德)이니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소청하의 원신이 막 천계에 도착했을 때, 마침 천계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난리를 치던 돼지 신선에게 당해 다시 인간 세상에 떨어지고 말았고 겁을 겪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범인의 몸 속에 갇혀 도망을 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흥. 됐어. 이 나쁜 놈들을 신뢰로 죽이지 못한대도 상관 없어.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좀 전에 신뢰를 사용한 소청하는 몸이 텅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의 몸은 놀기 기 좋아하고 잠을 자기 좋아하는 3살 꼬마인지라 이내 피곤을 느끼고 소청양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소청하는 자신이 소환해 낸 신뢰의 위력이 너무 작다고 생각했지만, 청수촌 주민들의 눈에는 천벌의 상징과 다름 없었다.
"이럴 수가! 오씨의 저주가 현실이 된 거야! 소씨 노부인이 벼락을 맞았어!"
"천벌을 받은 거야! 천벌을 받은 거라고! 소씨 가문이 청하를 잡곡과 바꾸려 한다는 사실에 하늘도 참지 못한 거야! 앞으로 소씨네를 멀리 해야겠어."
방금 떨어진 보랏빛 번개에 놀란 사람들의 비명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사람들은 허겁지겁 촌장을 찾아 공정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 어머니, 괜찮으세요?" 둘째 아들 소금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많이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효자라는 죄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뢰에 맞은 소씨 노부인은 온몸에 온전한 곳이 없었고 시커먼 모습은 마치 숯 검댕이 같았다. 만약 눈알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소금휘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문의 가장인 노부인이 맥없이 쓰러지자 소금휘는 즉시 황대인과 약속했던 잡곡 200근을 떠올리며 발을 구르며 명령했다. "셋째야, 넷째야. 저 계집을 당장 빼앗아 죽여서 황대인에게 보내라. 잡곡 200근을 받으면 우리 세집에서 각자 50근씩 나누고 나머지 50근은 고기로 바꿔 먹자꾸나!"
바닥에 쓰러진 채 힘이 다 빠져버린 오영설은 소씨 노부인이 벼락을 맞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통쾌했던 만큼 지금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필사적으로 몸을 가누며 바닥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철푸덕 다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소씨네 삼형제가 딸을 향해 다가가는 걸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쾅!'
그때, 큰 소리와 함께 누군가 소씨 가문의 대문을 걷어차며 마당에 들어섰고 담벼락에 매달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소진호가 돌아왔어!"
"휴, 오씨도 드디어 버팀목을 찾았네. 소진호가 평소에 청하를 지극히 아끼지 않았던가? 청하가 팔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거야."
"그건 모르는 일이지. 소진호는 소씨 노부인이 주워와 키운 아이야. 은혜를 갚아야 할 처지라고. 지금 온 가족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소진호도 어쩔 방도가 없을 거네."
구경꾼 중 한 남자가 담벼락에 기대어 목소리를 높이며 비아냥거렸다. "설마, 소씨 가문의 식량으로 바보 천치인 딸을 키우려는 건 아니지?"
"입 닥쳐!" 눈이 시뻘개진 소진호가 손에 든 괭이를 그를 향해 던졌고 담벼락에 기대어 비아냥거리던 사람들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이어 그는 오영설과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괜찮소?"
"여보, 저는 괜찮아요. 빨리 청하를 구해야 해요. 주옥란과 어머님이 청하의 목을 졸랐어요. 오영설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자 소진호는 즉시 다가가 소청하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다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청하는 그저 잠이 들었을 뿐이요. 괜찮소. 걱정하지 마오. 내가 있으니 당신과 아이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을 거요."
말을 마친 그는 소금휘, 소은휘, 소옥휘 세 형제를 향해 눈을 부라렸고 그들은 겁에 질려 흠칫 몸을 떨었다.
회차 3
소씨 가문의 친아들이 아닌 소진호는 당연히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노부인이 쓰러지고 말았으니, 자연스레 소금휘가 소씨 가문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소금휘는 가슴을 활짝 펴거소리쳤다. "너, 지금 날 노려보는 것이냐? 잘하면 한대 때릴 기세로구나! 지난 몇 년간 너희 부부가 이 바보의 병을 고치려고 얼마나 많은 은자를 썼는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심지어 어머니는 오씨의 저주에 당해 벼락을 맞으셨다! 어서 어머니를 돌보지 못할 망정 우리를 향해 눈을 부라리다니!"
"퉤!"
주옥란도 남편의 말에 얼른 맞장구 쳤다. "맞아요, 어머니께서 오씨와 이 재수 없는 바보 천치 때문에 이 꼴이 되셨는데, 아주버님께서는 어떻게 우릴 향해 눈을 부라릴 수 있단 말입니까? 저라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었을 겁니다."
소진호는 그들의 말에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청하가 갓 태어났을 때, 내가 지난 몇 년간 사냥으로 번 은자를 모두 너희에게 주었다. 너희는 청하를 맡아 잘 키우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지금, 어찌된 게냐? 약조는 벌써 잊은 것이냐? 게다가 그 동안 청하의 병을 고치는 데 쓴 돈은 전부 내가 산에서 사냥으로 번 돈과 영설이가 수놓이로 번 돈이다.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소금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자 주옥란이 바로 그의 팔을 부축하며 반박했다. "아주버님과 오영설도 이 집안의 식구이니, 번 돈은 당연히 가문을 위해 써야지요. 왜 네 돈, 내 돈을 따지는 겁니까!"
"맞아!" 소금휘는 다시 허리를 꼿꼿이 폈다. "한마디로 끝내겠다. 저 바보를 우리에게 넘기든지, 아니면 너희 모두 소씨 가문에서 나가거라. 가문에서 나간다면 족보에서 바로 이름을 지워 버릴 테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라!"
소금휘는 소진호가 감히 소씨 가문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가문을 떠나면 소진호네 가족은 호적도 없는 신세가 될 터였다. 고작 바보 천치 딸 하나 때문에 그럴 가치가 있을까? 머리가 조금이라도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알 것이다.
그러나 소금휘는 딸 청하가 소진호의 마음속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짚신 한쪽은 이미 어디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고 땀으로 흠뻑 젖은 소진호가 아내와 아이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이어 그는 소위 동생과 제수씨라는 자들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깨끗하게 관계를 끊자꾸나! 이제 우리는 남이다. 더 이상 아무 상관도 없는 사이야!"
소진호는 소씨네 본가 사람들이 없어도 살림살이가 나빠 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사내다. 설령 제 살을 떼다 팔고 피를 팔아서라도 아내와 아이들을 반드시 먹여 살릴 것이다. 그러니 소씨 가문의 동정 따윈 필요 하지 않았다.
호적이 없으면 또 어떠한가?
흉년이 들어 세상이 어수선한 지금, 호적이 있는 사람들도 배도 채우기 어려운 이 시국에 호적이고 뭐고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소금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이 불효 막심한 놈! 어머니께서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분가할 궁리를 하는 것이냐?"
"아이고, 어머니! 빨리 일어나서 좀 보세요." 주옥란은 바닥에 쓰러진 '숯덩이'를 흔들며 가짜 눈물 두어 방울을 흘렸다. "저 근본도 없는 놈이 이제 뼈가 자랐다고 아주 어머니더러 돌아가시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어요!"
하지만 시커먼 숯덩이가 된 노부인은 미동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소진호는 더 이상 그들과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촌장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는 게 보였고, 그는 즉시 촌장과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을 향해 예를 올리고는 선언했다.
"마을의 어르신들, 그리고 형제 자매 여러분. 저와 제 아내 오영설은 자식을 파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 집안과 다툼이 생겼습니다. 하여 저희는 소씨 가문을 떠나기로 결정 하였으니 오늘 부로 더 이상 소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알립니다!" 촌장이 우물쭈물 입을 열려고 할 때, 소진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희 다섯 식구는 빈손으로 나가겠습니다. 소씨 가문의 집과 밭은 일절 원치 않습니다. 노부인은 제가 수십 년 동안 어머니라 부른 분이니, 앞으로도 자식 된 도리는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휘, 소은휘, 소옥휘, 이 형제들까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고하는 바이니 여러분들, 부디 저희 부부의 증인이 되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진호야, 정말 사소한 일 때문에 이렇게 까지 해야겠느냐?"
늙은 촌장은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는 소진호가 자라는 것을 지켜봐 왔다. 비록 소씨 가문의 핏줄은 아니었지만, 소진호는 여태 소씨 가문을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며 헌신해 왔다.
그 말을 들은 소진호가 촌장을 돌아보았다. "제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 하고, 제 딸을 팔아 넘기려 하는데, 이것이 사소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도대체 무엇이 큰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할 말을 다 했습니다. 촌장 어른, 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머물 곳을 찾아봐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떠나기 전 소진호는 소씨 가문 삼 형제를 흘긋 쳐다 보았다. "이제 나는 너희의 큰형이 아니다. 각자 알아서 잘 살거라. 만약 다시 내 식구들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가는,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소진호는 한 손으로 청하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오영설을 부축했다. 소청양 더러 의식을 잃은 소청운을 업으라 하고, 그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소씨 가문의 대문을 나섰다.
"진호 오라버니, 이제 우리는 어떡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공공연이 자신으 딸을 죽이려 했다는 생각에 오영설은 온몸이 떨렸다. '가엾은 내 딸 청하, 죄 없는 내딸에게 하늘은 이리도 가혹하단 말인가?' 소진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머물 곳부터 찾아보세. 내게 사냥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께서 슬하에 자식이 없던 터라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집 한 채를 남겨주셨소.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으니 무너졌을지 어떨지 모르겠군. 마을에서 좀 멀긴 하지만, 적어도 비바람을 피할 지붕은 달려 있을 거요. 여보, 못난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이 많소."
오영설은 품에 안겨 잠든 청하를 내려다보고, 뒤따라오는 두 아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와 혼인한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오라버니, 그런 말씀 마세요. 비바람 피할 지붕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 합니다."
소진호는 말없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스승님이 남겨준 집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랜 세월 비바람 속에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집은 불 품 없이 낡아 있었고 언제 쓰러진다 해도 놀랍지 않은 상태였다. 벽은 이미 다 쓰러져 있었고 지붕은 거의 절반이 내려 앉아 있었다. 사람이 지낼 만한 방은 겨우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본 소진호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고, 오영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정녕 하늘이 우리 일가족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걸까?'
오영설은 감히 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일가족은 그 낡은 집으로 들어 섰다. 일단 아이들을 그늘 진 곳에서 쉬라고 하고는 찢어진 낡은 천 조각을 걸레 삼아,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방의 안팎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사람이 머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소진호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아내의 뒷모습과, 문짝 위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소청운, 그리고 쌔근쌔근 코까지 골며 깊이 잠든 청하를 번갈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청양아, 집에서 형이랑 막내 동생을 잘 보고 있어라."
소진호는 말을 마치고 오영설의 곁으로 다가가 당부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오. 나는 잠시 나갔다 오리다."
오영설은 남편이 뜨거운 햇볕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 물었다. "오라버니,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식량을 빌리러 가는 거요."
본가와 관계를 끊고 빈손으로 나온 다섯 식구의 손에는 돈 한 푼, 쌀 한 톨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두 손을 내밀고 식량을 빌리는 것 뿐이었다.
식구들이 이 낡은 집에 자리를 잡고 나면,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구사일생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칼 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들 지라도, 사냥감을 찾아 빚을 갚고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릴 작정이었다.
소진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오영설의 마음이 저렸다. 이런 흉년에 식량은 금보다 귀하다. 그런데 누가 식량을 빌려 준단 말인가...
그녀는 남편이 빈손으로 돌아 올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영설은 관자 놀이를 지그시 누르더니 이내 다시 걸레를 집어 들고 집 청소에 매진했다. 이따가 돌아 올 남편에게 여전히 먼지 투성이인 집을 보여 주긴 싫었다.
이곳은 앞으로 다섯 식구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터전이다. 하여 그녀는 집안일을 착실히 해내 집안 일로 소진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