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악!"
악몽에서 깨어난 소혜월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꿈이었나?'
이때, 몸종 언년이 기쁜 얼굴로 달려오며 외쳤다.
"아가씨! 드디어 깨셨군요!"
소혜월은 언년을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안의 장식들이 너무 눈에 익었다.
'이곳은 저승인가? 아니면…'
'나... 이미 죽은 게 아니었나?'
"아가씨께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인님께서 충격을 받고 기절하셨습니다. 부인님께서는 깨어나신 후 매일 아가씨 곁을 지키시다가 오늘은 대법사에 기도를 올리려 떠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무사히 깨어나신 걸 보면 부인님의 정성이 부처님을 감동시키신게 분명합니다."
소혜월의 시선은 언년에게 계속 머물렀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의문이 피어 올랐다.
'나... 환생한 건가?'
그녀는 팔다리가 잘린 채 옥에 갇히지 않았고 외할아버지 일가도 연좌제로 몰살을 당하지 않았다.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어!'
그리고 언년…
언년을 바라보는 소혜월은 코끝이 시큰해졌지만 애써 눈물을 참았다.
전생에 언년은 그녀를 구하려다 소효정에게 잡혀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번 생엔 반드시 널 지켜주마!'
"아가씨, 괜찮으세요?"
언년은 소혜월이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눈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며 말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의원님께서 말하시길 깨어나기만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언년의 말에 소혜월은 정신을 차렸다.
'물에 빠졌다라... 그래! 소효정의 짓이야!'
전생에 소효정은 일부러 소혜월을 불러 내 함께 배를 타며 꽃놀이를 즐겼다.
소혜월을 물에 빠뜨려 외할아버지의 생신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게 바로 소효정의 목적이었다.
그러면 소효정은 소혜월의 시와 서예솜씨로 잔치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으니까.
반면 소효정의 계략에 놀아 난 소혜월은 사랑에 눈이 멀어 강에 몸을 던진 여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다.
'아마 지금쯤, 소혜정은 운지원과 몰래 손을 잡았겠지.'
그게 아니라면 소효정이 그녀 앞에서 자꾸만 운지원을 입에 올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소효정은 기회만 생기면 운지원의 칭찬을 늘어 놓았다. 그 결과, 호랑이를 집안에 들이는 꼴이 되었고 외할아버지 일가와 그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하늘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그녀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었다.
'소효정, 이 번 생엔 절대 네 맘대로 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게 속한 모든 것들, 전부 빼앗아 올 거야!'
언년은 아무 말 없이 침상에 앉아 생각에 잠긴 소혜월을 보며, 그녀의 걱정을 달래주고자 말을 건넸다.
"아가씨, 너무 걱정 마세요. 부인님게서 말하시길 아가씨께서 깨어나시면 두 번 다시 지원세자 저하와 연을 끊으라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소혜월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입을 열려던 그때,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아, 내 동생 소월아. 몸은 괜찮느냐?"
소혜월은 온 몸이 굳었고 심지어 가볍게 떨리기 까지 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흥분이라고 말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죽어 서도 잊지 못할 목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
바로 소효정의 목소리였다.
안에서 응하지도 않았는데 소효정이 다짜고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소혜월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극에 달한 원한에 소혜월은 마치 바늘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그녀는 혀끝을 깨물며 마음속의 증오를 눅잦혔다.
소효정은 달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혜월아, 이제 좀 괜찮아 보이는구나. 네가 호수에 빠졌을 땐 정말 많이 걱정했어."
소혜월은 말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소효정을 응시했다.
현재, 소효정은 소씨 가문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소혜월의 친부 소진섭은 소효정이 본가 쪽의 먼 친척이라 둘러댔다. 소싯적 과거 공부를 할 때, 소효정의 아버지에게 많은 신세를 졌으니 소효정의 아버지가 별세를 한 지금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소효정 모녀를 경성으로 불러 온 거라 했다.
소혜월이 물에 빠졌을 당시, 소효정은 그녀를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세심히 보살피며 곁을 지켰다. 그런 소효정의 모습에 소혜월의 친모는 크게 감동한 나머지 그녀를 양녀로 삼겠다는 소진섭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 뒤로 소효정은 의식주 모든 면에서 소혜월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은 그녀가 소부의 적녀인 줄 알 정도였다.
전생에 소혜월은 소효정을 진심으로 대했고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외할아버지 일가는 모조리 몰살당하고 말았고 그녀는 사지가 잘려 나간 채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겠어.'
소혜월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소효정의 손을 떼어내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효정은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이내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
"혜월아, 다 내 탓이다. 난 아버님이 너와 지원 저하의 관계를 반대 하시는 걸 뻔히 알면서도 중간에서 서신을 전해 주고 심지어 지원 저하를 불러내 너와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었지. 이번에 네가 호수에 빠진 것도 결국은 내가 초래한 거나 다름없다. 만약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라면..."
"찰싹!"
소효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혜월이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고 찰진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든 소효정의 얼굴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혜월아... 이게 무슨...?"
'이년이 미쳤나? 감히 나를 때려?'
회차 2
그 따귀는 참을래야 참을 수 없었던 소혜월의 분노에서 비롯된 거였다.
지난 생에 그녀는 소효진에게 속아 운지원과 혼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번 뱃놀이 역시 소효진이 꾸민 짓이었고 소혜월은 자칫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다.
'소효진의 어두운 속내를 왜 전에는 알아 채지 못했을까.'
소효진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생각을 마친 소혜월은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손을 거뒀다.
"효정 언니.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 언니를 때린 건 언니를 위한 일이니까요."
소혜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는 시골 출신이니 경성의 예법을 모르실 수밖에 없지요. 저는 소씨 가문의 적녀라, 이번에 언니에게 속아 외간 남자를 만난 일이 밖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소부의 여식들 전부가 구설수에 휘말리게 될 겁니다."
소효정은 얼굴을 움켜쥔 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지원 오라버니와 네 사이엔 혼약이 있잖느냐..."
"혼약이 있더라도 혼인 전엔 만나선 안되지요. 언니는 시골 출신이시니 이런 예법을 모르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소혜월이 말끝마다 '시골 출신'이라며 자신을 낮추자, 소효정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날 모욕하다니!'
소혜월은 소효정의 불만 어린 눈빛을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오늘 제가 언니를 때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언니가 저를 꼬드겨 외간 남자를 만나게 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언니가 염치도 모르는 여자라는 소문이 온 세상에 퍼지겠지요. 훗날 좋은 혼처를 찾기도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혜월이 넌 저하를 사모하고 있지 않더냐? 서신으로..."
"쉿."
소혜월이 소효정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언니, 그 서신 정말 제가 쓴 게 맞습니까? 정녕 언니가 대필하여 세자에게 전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그건 필적으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니가 저를 대신해 세자 저하와 만났다는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사람들은 언니와 제가 같은 낭군을 모시려 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언니는 첩으로 살고 싶은 겁니까?"
'첩? 절대 안돼!'
소효정은 절대 첩실로 살 생각이 없었다.
'소혜월의 말에 일리가 있어. 내가 성급했나 보군, 계획에 허점이 이렇게 많았다니...'
소효정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래는 소혜월에게 외간남자와 밀회했다는 누명을 씌워 경성 제일 재녀라고 불리는 소혜월에게 굴욕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소혜월의 말을 들으니 그렇게 했다가는 자신이야 말로 남의 첩으로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여자로 비쳐질게 뻔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됐다.
비록 그녀는 명문 세가 출신은 아니지만 외할아버지가 현령이니 어쨌든 사대부 집안인 건 확실했다. 그러니 절대 첩으로 살 수는 없었다.
소효정이 사색에 잠긴 모습을 보며 소혜월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제가 언니를 때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언니가 저를 부추겼다는 걸 알게 되면... 언니와 언니의 친모는 경성에 발 붙일 곳이 없을 뿐더러, 목숨도 부지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소혜월의 외할아버지는 이 나라의 국공이다. 성질머리가 고약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고 수단이 매우 잔인했다. 경성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소효정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소혜월을 마주하고 있는 소효정은 아직은 소녀였다. 야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은 젊은 탓에 속이 깊지 못했다.
게다가 소혜월은 집안의 적녀인 만큼 신분이 높았으니 소효정을 누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소효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혜월아, 네 말이 옳다...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소혜월은 그녀의 애써 화를 참는 모습에 마음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전생에도 소혜월은 가련한 연기로 운지원의 마음을 얻었지. 그 바람에 난 항상 낭패를 봤고...'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전생과는 완전히 달랐다.
"언년아, 어서 내 연지 곤지를 가져와 언니 얼굴에 발라드리거라. 손자국을 가려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들이 보면 수군댈게 분명하다."
소혜월이 언년에게 분부했다.
마음을 졸이고 있던 차에 소혜월이 다시 자신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자 소효진은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여전히 멍청하군. 괜히 걱정했어.'
이어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혜월아, 굳이 언년이를 시킬 필요 없다. 여긴 나도 잘 알지 않느냐. 내가 직접 연지를 찾아 바르겠다."
소혜월은 그 말을 듣고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효정은 얼굴에서 전해 지는 따끔따끔한 통증을 참으며 안방에 있는 화장대로 향했다.
그녀가 떠나자 언년이 불쾌한 얼굴로 소혜월에게 속삭였다.
"아가씨, 어째서 또 효정 아가씨가 직접 물건을 고르게 하십니까? 그분은 항상 비싼 것만 골라 가시고, 빌려가신 물건을 제대로 돌려주지도 않으시잖습니까. 지난번에 없어진 그 비녀도, 효정 아가씨가 다녀가신 뒤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혜월은 언년에게 입을 다물라 눈치를 줬다.
잠시 후, 소효진이 안방에서 나왔다. 화장을 마친 얼굴이었고 여전히 빨갛게 부어 있었지만 좀 전 보다는 많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혜월아, 연지 고맙다. 난 다른 볼일이 있어 먼저 가야겠구나."
이어 소효정은 수혜월의 눈빛을 피하며 서둘러 떠나려 했다.
"잠깐만요."
깜짝 놀란 소효진이 고개를 돌렸다.
"혜월아,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이냐?"
"언년아, 내가 가장 아끼는 연지를 언니께 가져다 드리거라. 그리고 진주 연고도 챙겨드리거라. 고운 얼굴에 흉터가 남으면 안되지 않느냐."
언년은 내키지 않았지만, 소혜월이 시키는 일이니 마지못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선물을 한 아름 받아 든 소혜월은 기분 좋게 떠났다.
"아가씨, 화장대에 있던 산호 목걸이가 사라졌습니다. 아마..."
소혜월은 또다시 입을 다물라 눈치를 줬다.
유희는 이제 시작을 한 셈이다. 그러니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괜찮다. 소효정이 얼마를 가져가든 열 배로 갚게 할 터이니."
회차 3
성국공부(成國公府).
오늘은 성국공(成國公)의 생신잔치로, 경성의 명문 세가 대다수가 참석했고 소효정을 태운 마차도 성공국부에 도착했다.
소혜월이 호수에 빠져 감기에 걸린 탓에 장공주가 주최하는 시회에 참석 할 수 다는 게 거의 확실해졌다. 때문에 소효정은 이번이야말로 자신이 주목을 받을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하여 그녀는 평소와 달리 소혜월과 동행하지 않고, 홀로 생신 잔치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소효정은 붉은 의복을 차려 입고 성국공부 정문 앞에 서 있었고 옅게 화장을 한 그녀는 화사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목에는 소혜월의 거처에서 '챙겨 온' 산호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백옥 같은 피부에 눈부신 목걸이가 더해지니 한층 우아한 기품을 자아냈다.
소혜월의 산호 목걸이를 특별히 착용한 건 경성의 높으신 분들에게 자신이 소혜월과 동등한 지위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소부의 진정한 적장녀가 바로 자신임을 은연중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현재,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먼 친척이라는 신분으로 소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것들을 전부 되찾을 것이라 다짐했다.
소효정은 고개를 숙여 목에 걸린 값비싼 산호 목걸이를 응시했다.
'소혜월 그 멍청한 년이 무슨 자격으로 이 귀한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거지? 이건 내 거란 말이야!'
그 생각에 소효정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 환해졌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소혜월이 성공국부에 와있다는 사실을.
외조부가 대청에서 조정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기에 소혜월은 방해 하지 않고 외조모를 찾아 갔다.
"부인님,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소혜월이 외조모인 진씨의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하인들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인들이 이토록 열성적인 것도 당연했다. 소혜월이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자랐으니 말이다.
성국공부의 후손들이 모두 남자였기에, 외손녀인 소혜월은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소혜월도 자주 찾아와 외조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때문에 성공국부인은 손자들보다도 소혜월을 더 귀여워하고 각별히 아꼈다.
하인들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소혜월이 성국공 부인의 방으로 들어섰다. 외조모를 마주하자 참았던 감정이 터져 나와, 그대로 그녀의 품에 안겨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월아, 무슨 일이냐? 승상부에서 누가 너를 괴롭혔느냐?"
성국공 부인은 소혜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진섭 그 놈이 감히 내 외손녀를 함부로 대하다니, 승상 자리를 그만두고 싶은 모양이구나."
성국공 부인의 눈가에 노기가 스쳤다.
성국공부는 삼대를 이어온 공신 가문으로 그 권세가 황실 다음이었다. 일개 서민 출신의 승상인 소진섭은 본래 성공국부의 눈에 들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딸이 좋다니 어쩌겠는가. 하여 성공국 부인은 딸의 뜻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소진섭 그 놈이 감히 그녀의 손녀를 건드린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그저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소혜월이 눈물을 닦아 내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월아. 이제 혼사를 치를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애 같구나."
성국공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소혜월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소혜월이 참 사랑스러웠다.
마음을 진정시킨 소혜월은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지난 생, 외조부의 생신 잔치가 있은 뒤, 외조모가 바로 병으로 앓아 누웠고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소혜월은 오늘 반드시 외조모의 곁을 지켜 누구도 그녀를 해칠 수 없게 막으려 했다.
"할머니, 요즘 국공부에 별일이 없었나요?"
자기가 환생을 했다고 털어 놓을 순 없었다. 누구도 믿기 어려울 테니까. 하여 그녀는 빙 돌려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별 일?"
성국공 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별 일이라... 딱히 떠오르는 게 없구나."
소예월이 침묵에 잠겼다.
'그렇다면 오늘 잔치에서 소효정이 수작을 부린 건가? 그녀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잠시 고민하던 소혜월은 외조모를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할머니, 사실 간밤에 악몽을 꾸었는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일단은 꿈이라고 둘러대며 외조모한테 조심하라고 귀띔하기로 했다.
성국공 부인은 한동안 말없이 듣더니 손수건을 꺼내 소혜월의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할머니는 괜찮아. 이 정도면 몸도 정정하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