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와?"
등 뒤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정신을 차린 간서아는 급히 눈물을 훔쳤다.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를 맹미선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의 새어머니인 맹미선은 이제 막 마흔이 되었지만 관리를 잘한 탓에 서른 초반처럼 보였다. 유행에 민감한 그녀는 늘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녔다. 간명준과 결혼할 당시, 그녀는 스무 살의 한창 꽃다운 나이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당시 간씨 집안에서 일하던 맹미선은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그 아이는 바로 그녀 아버지의 아이였다.
"눈물 질질 짜면서 쇼하지 마. 역겨우니까." 맹미선은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간서아를 밀치고 병실로 들어갔다.
간신히 몸을 가눈 간서아는 맹미선의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갔다.
간서아를 발견한 간시아의 어두웠던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친근하게 그녀를 불렀다.
간서아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간시아의 손을 잡았다. "언니가 보고 싶었다고 들었어." 간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를 못 본 지 벌써 3개월이나 됐어. 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단 말이야."
순수하고 착하기만 한 간시아를 마주할 때마다 간서아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연적은 다름 아닌, 어릴 때부터 자신이 아끼고 예뻐했던 동생이었다. 동생이 병에 걸렸을 때, 그녀는 동생이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아 그 기회를 빌미로 부씨 가문의 사모님 자리를 차지했다. 간서아는 간시아가 자신을 미워할 거라 짐작했다.
연적을 만나면 머리채라도 잡고 싸우는 상상을 수없이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간시아는 여전히 자신을 언니로서 의지했고, 그 사실이 간서아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찔렀다.
간시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동생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더없이 비열한 악인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침 휴가라 너와 함께할 시간이 많을 것 같아." 그녀는 눈시울이 빨개진 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간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무 좋아! 퇴원할 때까지 매일 날 보러 와줄 수 있어?"
"물론이지."
곁에 서 있던 맹미선은 간서아를 노려보며 눈을 흘겼다.
간시아 앞이라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지만, 맹미선은 간서아를 볼 때마다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부성준이 간서아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딸이 하루 종일 넋을 잃고 있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간시아에 대한 증오를 억누른 맹미선은 간시아를 달래 잠들게 한 후, 간서아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부성준이 곧 올 거야. 어색해지기 싫으면 가."
간서아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든 간시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병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병실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맹미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앞으로 간시아 보러 오지 마. 시아한테 상처만 주는 주제에, 여길 또 오겠다고? 넌 올 자격 없어."
간서아는 아무 대꾸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이런 취급에는 이제 익숙했다.
병실 문을 살며시 닫은 그녀는 복도 의자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고개를 숙인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부성준이 간서아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하더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어릴 때부터 부성준의 뒤만 쫓아다녔던 탓에, 간서아는 그의 발소리에 익숙했다. 익숙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는 황급히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훔쳐냈다.
"시아 보러 왔구나." 그녀는 고개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성준을 바라봤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그녀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화장이 번진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부성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 시아는 봤어?"
"응, 봤어."
그녀의 모습이 너무 가여웠던 걸까? 부성준은 웬일로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 안 해도 돼. 시아 곧 골수 이식받을 수 있어.
좋아질 거야." "알아."
부성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간서아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시아... 잘 부탁해요."
어차피 가질 수 없는 남자라면, 원래 주인인 간시아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았다.
부성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해. 주제넘게 굴지 마."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분노가 담겨 있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날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혼 서류에 서명했고, 부성준은 드디어 그녀에게서 벗어나 간시아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부성준이 꿈에 그리던 날일 텐데, 왜 그녀에게 화를 내는 걸까?
그녀가 그렇게도 싫은 걸까?
그녀를 그렇게도 미워하는 걸까?
부성준이 병실로 들어간 후에도 간서아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 병실 문만 바라봤다.
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병원에 간시아를 보러 갔다.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병실에 들어가지 않고, 병실 문 유리창을 통해 간시아를 훔쳐볼 뿐이었다.
때로는 부성준이 간시아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산책을 나갈 때도 있었는데, 그녀는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
부성준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차갑고 무관심하면서, 간시아에게는 얼마나 다정하고 세심한지. 그 극명한 차이를 두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미어졌다.
한 달 후, 간시아는 골수 이식을 받았고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 거부 반응과 합병증이 나타나지 않았고 회복도 순조로웠다.
간서아는 드디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동안 부성준은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는 그녀와 함께 구청에 가서 이혼 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부성준이 간시아를 애지중지하는 모습은 지켜볼 만큼 지켜봤다. 그녀는 모든 것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날, 그녀는 먼저 부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신호음이 울린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왜?"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차가웠다.
"이혼 서류, 언제 정리할 거야?"
부성준은 한참이나 침묵하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직 도장 안 찍었어."
"뭐?"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데, 아직 이혼 서류에 서명도 하지 않았다고?
회차 3
간서아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부성준은 왜 아직도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은 걸까?
혹시 후회하고 이혼하지 않으려는 걸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부성준이 후회할 리 없었다. 그녀를 하루빨리 떼어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간시아의 몸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부성준은 반드시 그녀를 버릴 것이다.
"내일 아침 9시, 법원에서 봐요."
그녀는 부성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고 8시가 되자,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가볍게 화장까지 마친 그녀는 곧장 법원으로 향했다.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부성준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초조함을 참지 못한 그녀는 곧바로 부성 그룹으로 향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부성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간서아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에 초조함과 분노가 가득한 그녀를.
"얼마나 기다렸어?"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그는 태연한 척 책상 뒤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30분이요."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
남자는 서류에 집중하는 척하며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간서아는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부성준, 당신 무슨 뜻이야?"
법원 앞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게 한 것도 모자라, 회사까지 찾아왔는데도 기다리게 하다니.
그의 눈에 그녀는 서류보다도 하찮은 존재인 것 같았다.
"대체 뭘 어쩌려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부성준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잖아."
"더는 못 기다려. 오늘 반드시 이혼할 거야."
그녀는 부성준의 차가운 태도와 무시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혼 못 해."
간서아는 그 자리에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성준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확인했다. 서류를 모두 확인한 그는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서 이혼 합의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넌 여전히 내 아내야. 나 사랑한다며? 부 사모님 자리를 원했잖아? 좋아, 그 자리는 네가 차지해. 아무도 못 뺏어가." 남자의 눈빛에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간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이혼 합의서에 서명까지 했고, 간시아의 병도 호전되고 있는데. 부성준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걸까?
2년 동안, 그는 그녀를 하루빨리 쫓아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이제 기회가 왔는데, 왜 잡지 않는 걸까?
"왜요?"
"이혼을 먼저 제안한 건 너야."
"시아한테 당신을 돌려주기로 했어요. 앞으로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저 좀 놔주세요." 그녀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그에게 애원했다.
모두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내린 힘겨운 결정이었다.
"널 놓아줘?" 부성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되지."
"갑자기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간시아의 소원이야."
"뭐라고요?"
"간시아가 너와 날 이어주겠다고 했어."
"..."
간서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간시아가 당신과 날 이어주겠다고 했다고요?"
"우리가 잘 지내길 바란다고 했어."
부성준은 차가운 미소를 거두고 평소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두 여자 사이에서 양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가 하려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서아는 부성준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간시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혼하지 않겠다고 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아와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녀의 말은 부성준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린 듯했다.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쏘아붙였다. "본가에 가서 짐이나 싸."
그녀가 다시 부씨 가문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걸까?
한 달 전, 그녀를 쫓아낼 때도 그는 이렇게 독단적이었다.
"부성준 씨..."
남자는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안 꺼져?"
"..."
그런 부성준을 본 간서아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성준은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는 그녀에게 등을 진 채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그가 뒤를 돌아봤을 때, 간서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리 없이 떠난 그녀의 자리, 테이블 위에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 한 잔과 그가 찢어버린 이혼 합의서 조각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2년 동안, 그는 이혼만 기다렸다.
이혼 합의서는 몇 달 전부터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지시했었다. 이혼 합의서에 서명만 하면 간서아와 완전히 관계를 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자 그는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심란하고 망설여졌다.
정말 간시아가 그와 간서아가 잘 지내길 바란다고 했기 때문에 이혼하지 않겠다고 한 것일까?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
늦가을.
밤바람이 쌀쌀하게 불어왔다.
간서아는 홀로 거리를 거닐었다. 하루 종일 유령처럼 거리를 헤매던 그녀는 어느새 중앙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몇 번이나 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간시아를 만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병원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거리에 북적이는 인파와 차량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마침내 눈 딱 감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 입원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시아가 있는 층에 도착한 그녀는 평소처럼 병실 문 앞에 멈춰 섰다. 병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맹미선이 간시아에게 엄하게 당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퇴원하면 바로 성준이랑 결혼해."
간시아는 눈에 띄게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성준 오빠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성준 오빠는 이미 언니 사람이잖아요."
맹미선은 간시아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왜 한 번도 널 위해 생각하지 않는 거야? 성준이가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네가 이혼을 재촉하면 되잖아. 부 서방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간서아가 아니라 너야."
"엄마, 저 몸이 좋지 않아요. 의사 선생님이 제 병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어요. 지금 제 몸 상태로는 골수 이식을 다시 받을 수 없어요.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항암 치료는 너무 고통스러워요.제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의사 선생님은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 반드시 재발한다고 하지 않았어."
"엄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요. 하지만 성준 오빠가 이혼 안 해준다는데 제가 어쩔 수 없잖아요."
간서아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술만 끝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병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간시아가 성준 오빠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