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구름이 몰려와 용시의 하늘을 덮은 날의 저녁, 마지막 햇살마저 어둠에 완전히 가려졌다.
펜트하우스의 눈부신 조명이 곳곳을 감싸고 통창 너머로 반짝거리는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통창에 바싹 붙어 선 강아윤의 검은색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흘러내렸고, 안개 낀 유리창을 따라 물방울이 가득 맺혀 있었다. 실크 가운은 그녀의 매혹적인 엉덩이에 느슨하게 달라붙었고, 부드러운 피부는 복숭아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몸과 함께 마른하늘에 울리는 천둥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남자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온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 강아윤은 추위에 몸을 흠칫 떨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몸을 돌려놓더니 미처 가시지 않은 열기가 다시 타올랐다. 그녀의 몸은 거친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움직임을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쳐 쓰러지고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하던 강아영이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환희의 희열감이 그녀를 덮쳤다.
빗물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습기로 가득 찬 공기가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자 남자는 주저 없이 강아윤의 등에 몸을 붙였다. 남자는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움켜잡더니 그녀의 눈 아래에 난 빨간 점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낮게 깔린 남자의 권태로운 목소리에 강아윤은 등골이 서늘해 났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대담하게 내 침대에 올라오지 않았겠지?"
고혹적이면서도 섬뜩한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강아윤은, 강렬한 질식감에 휩싸여 덧없는 꿈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뻔했다.
연달아 가쁘게 숨을 몰아쉰 끝에야 비로소 꿈 때문에 죽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휴대폰의 진동 소리에 화들짝 놀란 강아윤은 화면에 깜빡이는 '재민 오빠' 이름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일주일 전, 심재민의 무자비한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아윤아, 장씨 가문의 후계자 장윤재에 대해 들어봤지? 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줘야겠어. 장윤재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 줘. 네 언니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도 알잖아? 소연이는 장윤재를 포기해야만 내 마음을 받아줄 거야. 도와줄 거지?"
강아윤은 당시 심재민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의 말은 잔인하면서도 낯설기 그지없었다.
그때 그녀는 날카롭게 되물었다. "장윤재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하는 여자는 수도 없이 많은데, 왜 하필 저예요?"
심재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너는 소연이가 제일 싫어하는 여동생이니까. 장윤재가 너랑 밤을 보내면 소연이도 장윤재를 증오하게 될 거야."
고개를 떨군 강아윤의 입가에 조소가 스쳤다. 마지막 벨소리가 끊기기 직전,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재민 오빠,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나긋하면서도 기분 좋은 달콤한 목소리는 완벽하게 훈련된 것 같았다.
심재민은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파티가 있는데, 장윤재도 참석할 거야."
심재민이 그녀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알겠어요. 시간 맞춰 참석할게요." 강아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재민은 그녀에게 반박할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어 했다. "운전기사가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갖고 갈 거야. 꼭 입고 참석해." 그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리고 E.R 레트로 시즌 쇼 피날레 준비하고 있다고 했지? 그건 소연이한테 양보해. 다른 쇼 피날레를 알아봐 줄게."
심재민의 명령에 가까운 말투에 강아윤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당시 강소연은 강아윤이 강씨 그룹의 자산을 빼돌린다고 확신하며 그녀가 회사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경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강아윤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모델 대회에 참석하며 모델이 되었다.
그렇게 하면 강소연과 강씨 가문에서 완전히 벗어날 줄 알았지만, 강소연이 작년부터 모델 업계에 발을 들이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심재민과 강씨 그룹의 인맥 덕분에 강소연은 하룻밤 사이에 유명 모델로 자리 잡았고, 강아윤이 발탁되었던 기회마저 모조리 빼앗았다.
강소연의 변덕은 강아윤에게 치명적인 타격으로 다가왔고, 심재민의 공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는 강아윤이 힘겹게 얻은 기회를 하나도 빠짐없이 강소연에게 양보하도록 강요했고, 매번 같은 말로 그녀를 달래며 형식적인 핑계조차 찾으려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래왔던 것 같다. 강소연이 원하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강아윤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늘 양보해야만 했다.
이유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강소연은 강씨 가문에서 가장 사랑 받는 아가씨였고, 심재민이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면 강아윤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숨 쉬는 것조차 비난받아야 할 사람처럼 여겨졌다.
"네, 재민 오빠 말대로 할게요." 강아윤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꾹 눌러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후 짧은 침묵이 이어졌지만 심재민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어느새 눈빛이 차갑게 식은 강아윤은 휴대폰을 몇 번 터치하는 것 같더니 '재민 오빠'로 저장된 이름을 '바보'라고 바꿨다.
숨을 길게 내쉰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30분 후, 심씨 가문의 운전기사로부터 도착했다는 전화가 울렸다.
강아윤이 현관문을 열자 운전기사가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얇은 실크 가운을 연상케 하는 드레스의 과한 노출에 순간 당황했다.
얼굴에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숨 한 번으로 모든 불만을 삼켰다.
결국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선 강아윤은 예쁘다는 말 한마디로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매끄러운 피부와 촉촉한 속눈썹 끝에 걸린 반짝임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홀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 밑에 자리한 붉은 점은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마치 그 작은 점 하나가 사람을 빠져나올 수 없게 붙잡는 듯했다.
가녀리면서도 볼륨감 넘치는 완벽한 몸매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강아윤이 모습을 드러내자 참지 못하고 곁눈질한 운전기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강아윤 씨, 출발해도 될까요?"
강아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밤색 클럽은 용시에서 유명한 클럽으로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은 재벌 가문 자제나 유명 인사들이었다.
밤색 클럽에 처음 방문한 강아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곳곳을 훑어봤다.
운전기사는 그녀를 VIP 입구로 안내하며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VIP 룸 문을 열자 화려한 조명이 곳곳을 비췄고 매캐한 담배 연기가 코를 찔렀다.
손잡이를 잡고 안으로 들어간 강아윤은 짙은 연기에 참지 못하고 기침을 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심재민을 발견하고 억지로 싱긋 미소 지었다. "재민 오빠."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심재민은 그녀의 몸에 걸친 드레스를 확인하는 것 같더니 그제야 무심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윤아, 이리 와."
강아윤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우아하게 장내를 가로질러 다가갔다. "네."
중요한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실크 드레스는 그녀의 가녀린 몸에 달라붙어 움직일 때마다 얇고 쭉 뻗은 각선미를 더욱 잘 드러냈다.
매끄러운 피부 위에 깔린 부드러운 빛은 훤히 드러난 등을 고스란히 비췄고 아찔한 모습에 눈 둘 곳 없게 했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욕망으로 얼룩진 추악한 눈빛을 가볍게 무시한 강아윤은 방안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그녀의 무심한 눈빛이 구석진 곳에 있는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다리를 꼬고 소파에 기대앉은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부와 명예, 권력을 손에 쥔 사람답게 오만함과 당당함이 깔려 있었다.
잠시 스친 시선이 차가웠던 탓일까, 강아윤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뛰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목적을 떠올린 순간, 온몸을 타고 전율이 흘렀다. 긴장과 흥분이 한데 뒤섞인 감정이 그녀의 모든 신경을 팽팽하게 조였다.
회차 2
곳곳에서 장난기 섞인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심 도련님, 이 아름다운 여자는 누구예요? 저희에게도 소개시켜 주실 거죠?"
곁에 선 남자도 감탄하며 말했다. "웬만한 배우보다 더 예쁜데? 오늘 파티가 아니라 화보 촬영이라도 하러 온 것 같아."
강아윤이 룸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진하석은, 옆에 앉아 있던 여자의 엉덩이를 가볍게 치며 쫓아냈다. 그리고는 강아윤을 향해 장난스러운 윙크를 보냈다. "예쁜이, 오빠 옆에 와서 앉아."
여자는 강아윤을 노려보며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강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그녀의 목적은 장윤재를 유혹하는 것이지, 재벌 망나니들의 시중을 들러 온 것이 아니다.
심재민은 다소 무리한 농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소개했다. "아윤이는 우리 회사에서 새로 계약한 모델이야. 마침 오늘 휴가라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으로 우리 아윤이 잘 부탁해."
진하석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심재민, 우리가 언제부터 에이전시와 계약한 모델들과 어울렸지?"
심재민은 싱긋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고 강아윤을 돌아봤다. "아윤아,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
그의 말속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차린 강아윤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조금 전부터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방 한 모퉁이로 곧장 향했다.
그녀가 지나갈 때 진하석은 일부러 자리를 양보했지만, 그녀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젠장!" 작게 욕설을 내뱉은 진하석은 강아윤이 향하는 곳을 보자 곧바로 입을 꾹 닫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강아윤이 불현듯 자리에 멈춰 서며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의 옆 자리에 앉자 방안에 정적만 흘렀다.
진하석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윤재가 용시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난 오늘, 진하석은 그를 환영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는 어린 시절부터 그들과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 모두 참석했다.
하지만 장윤재는 재벌 2세 망나니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그의 집안은 막강했다. 친할아버지는 정치권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쥔 인물이었고, 이모는 국제 외교관이었다. 아버지는 국군정보사령부 소속 장군이었으며, 어머니는 연구 업적으로 각종 기록을 갈아치운 천재였다. 외할아버지는 국내 상업계를 움직이는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용시에 권력과 재부를 동시에 틀어쥐고 있는 장씨 가문에 맞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업무에 집중하는 장윤재가 그들과 어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무자비한 명문 가문 서열 속에 진하석도 할아버지 인맥 덕분에 겨우 장씨 가문과 연줄이 닿았다.
파티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장윤재가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진하석에게는 더 바랄 게 없었다.
장윤재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누구도 먼저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존귀하면서도 무정한 사람이었다.
강아윤은 죽을 각오까지 하고 먼저 그에게 접근한 걸까?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를 향해, 목숨을 건 도박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불안감에 등골이 서늘해 나는 것을 느낀 진하석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강아윤을 끌어내려 했지만, 강한 힘에 의해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하석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심재민을 돌아봤다.
심재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싱긋 미소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술이나 마셔."
눈을 가늘게 뜬 진하석은 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강아윤은 심재민의 꼭두각시로 쓰임을 위해 오늘 파티에 참석한 것이다.
심기가 불편해진 장윤재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강아윤은 용시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다.
심재민은 냉정하지만 동시에 지독히도 위험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하석은 재미있는 구경을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장윤재와의 관계가 틀어지면 진하석은 모든 잘못을 심재민에게 뒤집어씌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강아윤은 위험한 멜로드라마 여자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장윤재의 옆에 자리를 잡고 떨리는 손으로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손끝이 살짝 떨리더니 비싼 술이 손목에 튀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강아윤은 축축하게 젖은 손목을 닦을 새도 없이 연신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새 잔에 다시 따라드릴게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윤재가 섬세한 손길로 냅킨 한 장을 건넸다.
"강아윤 씨, 천천히 하세요." 장윤재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녀에게 눈길도 건네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몸에서는 권위나 오만이 아닌 의외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빨간 입술을 꽉 깨문 강아윤은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요."
넓은 VIP 룸을 통째로 빌린 진하석은 장윤재가 불편하지 않게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배치했다. 그로 인해 강아윤과 장윤재가 나누는 대화마저 엿듣지 못했다.
진하석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심재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강아윤을 이렇게 보내도 괜찮을까?"
술을 한 모금 마신 심재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사랑 받지 못한 사생아일 뿐이야. 소연이와 비교할 자격조차 없어."
불현듯 강아윤이 그의 앞을 지나갈 때 스친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것을 느낀 진하석은 드물게 동정심이 피어 올랐다. "그래도 8년 동안 널 잘 따라줬잖아. 소연의 친동생은 아니지만, 피를 나눈 이복동생이야. 이대로..."
심재민의 날카롭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단번에 말을 가로챘다. "진하석, 강아윤이 장윤재와 함께 밤을 보내지 않으면, 소연이는 평생 그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진하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진하석은 강소연과 심재민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소연은 어릴 때부터 장윤재와 결혼해 완벽한 아내가 되는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에게 장윤재를 제외한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곁을 지켜온 친구 심재민이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강소연은 장씨 가문이 가진 권위와 그에 따르는 명예에만 모든 관심을 쏟았다.
장윤재의 어머니와 강소연의 어머니는 대학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로, 두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혼사를 정했다.
비록 장윤재가 강소연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었지만, 그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더욱이 강소연은 자신을 미래 장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자처하기도 했다.
진하석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아윤이 정말 장윤재를 유혹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뭐야? 물론 예쁜 건 맞지만, 상대는 장윤재야."
심재민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강아윤에게 고정되었다. "시도도 안 해보고 결과를 단정할 수는 없잖아."
진하석은 심재민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이복동생인 강아윤을 죽도록 증오한 강소연은 강아윤의 손을 거친 물건이라면 단 한 번도 만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심재민은 강아윤이 장윤재와 밤을 함께 보내면, 강소연이 미련 없이 물러나 줄 거라 믿고 있었다. 진하석은 그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대담한 시도라는 점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회차 3
VIP 룸의 어두운 조명 덕분에 방안은 더욱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장윤재의 큰 키와 다부진 체구가 대부분의 빛을 가렸고, 덕분에 강아윤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겨 호기심과 욕망에 얼룩진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아윤은 살짝 고개를 들어 그의 주의를 끌며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장윤재의 차분하면서도 무관심한 태도는 그녀에게 작은 관심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건네지 않았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강아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네.'
파티가 끝날 때까지 강아윤은 제대로 입 한 번 떼지 못했다.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앉아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장윤재가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심재민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진하석은 흥미진진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계획이 실패한 것 같네?"
심재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다. "강아윤을 과대평가한 내 잘못이지."
아무리 예쁘장하게 생겼다 해도, 장윤재의 취향은 아닌 듯했다.
파티가 끝나갈 무렵, 강아윤은 심재민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몇 번이나 장윤재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약간 술에 취한 진하석이 장윤재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 했지만 공중에 어색하게 들어 올린 팔은 다시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장 도련님, 그래도 우리 어릴 때는 꽤 친했잖아요? 이제라도 시간 나면 자주 봐요. 그리고 성동구 프로젝트, 잊지 마세요. 내일 시간 맞춰 장씨 그룹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진하석이 오늘 파티를 개최한 진짜 목적은 바로 성동구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장윤재는 다소 사무적인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진 대표님이 직접 오실 필요 없습니다. 제 비서가 진 대표님 사무실에 가서 가져오면 됩니다."
진하석은 흥분된 기색을 주체하지 못하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대표님만 귀찮게 해드렸네요."
"아닙니다." 장윤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진하석이 장윤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지켜본 강아윤은 그의 절박한 모습에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장윤재가 비서를 보내겠다는 것은 진하석의 기획안이 그에게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뜻이었다. 단지 사업 절차상 진행되는 형식적인 만남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뜻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진하석은, 마치 장윤재의 가장 친한 친구라도 된 듯 실실 웃기만 했다.
"강아윤." 그때, 심재민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강아윤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장윤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윤재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장 도련님을 배웅해 드려." 심재민은 굴하지 않고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듯했다.
강아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윤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려 할 때, 차갑게 식은 목소리에 다시 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강아윤 씨, 그럴 필요 없어요."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장윤재가 드디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강아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장윤재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설명을 보탰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어요." 그리고 가차 없이 돌아서 방을 떠났다.
안색이 눈에 띄게 굳은 심재민은 장윤재가 방을 나서자마자 강아윤을 향해 돌아섰다. "아윤아, 이렇게 쉬운 일도 망칠 줄 몰랐는데."
강아윤은 커다란 눈을 연신 깜빡이며 동정을 구했다. "장 대표님이 저한테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심재민이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강아윤!"
강아윤에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어 안달 난 그녀에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강아윤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돌아서 자리를 피했다.
강렬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강소연의 얼굴에 분노가 타올랐다.
심재민은 빠르게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부드럽게 달랬다. "소연아,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분노가 가득한 강소연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몰라서 묻는 거야? 내가 1분만 더 늦었으면, 강아윤은 내 남편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겠지!"
강씨 가문에서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강소연은 자신의 물건을 빼앗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심재민의 가슴을 힘껏 밀친 그녀는 강아윤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그 시각, 강아윤은 끝없이 이어진 복도를 따라 장윤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벽에 기대 선 그녀의 뒤로 강소연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저승사자의 부름처럼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미간을 세게 찌푸린 강아윤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겨우 숨을 고르며 문에 기대선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중심을 잡지 못해 자리에서 비틀거리자 누군가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하면서도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찌르더니 머리 위에서 차가운 비웃음소리가 들렸다.
"강아윤 씨는 남자 품에 안기는 게 취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