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A시에 위치한 서산 저택의 호화로운 안방.
야릇한 분위기와 뜨거운 공기 속, 신하린의 가슴에 있는 작은 점에 살짝 입을 맞춘 김도준이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혼 하자."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처 가시지 못한 여운에 숨을 헐떡이던 신하린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김도준을 돌아봤다.
'우리가 결혼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이혼하겠다는 걸까?'
김도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위암이래. 앞으로 살날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더라."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내뱉자 얼굴 주위에 몽롱한 연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죽기 전에 내 아내로 살아보는게 마지막 소원이래."
깜짝 놀란 표정으로 김도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신하린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두 사람을 비추는 희미한 조명이 벽에 긴 그림자를 드리워 두 사람의 사이가 실제보다 더 떨어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김도준은 그런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뿐이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6개월 후에 우리는 지금처럼 다시 부부로 지낼 수 있어. 하린아, 그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6개월뿐이야."
담담하면서도 무심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통보에 가까웠다. 신하린은 김도준의 옆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나 바라봤다.
김도준은 신하린이 그의 요구라면 아무 조건 없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서로를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신하린이 어린 시절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일방적으로 그를 쫓아다닌 끝에 마침내 그와 결혼 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녀는 김도준의 곁을 맴돌며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신하린은 아직도 그날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김도준은 신하린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의 양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시 하린이 괴롭히면,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 모습에 신하린은 김도준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각목을 손에 꽉 움켜쥔 김도준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녀를 지켜줬다.
그 순간 신하린은 김도준을 평생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날, 신하린은 완전히 김도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뒤로 신하린은 그의 요구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고, 다른 누구보다 완벽하게 실행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칭찬했다.
"하린아, 너무 잘했어."
매번 그의 칭찬과 스킨십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연인이라고 하기도 애매 할 만큼 옅은 감정이었지만 신하린은 김도준의 성격이 원래 무뚝뚝한 탓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그녀가 사랑에 눈이 멀었다 빈정대도 그녀는 두 눈과 귀를 막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몸과 마음을 그에게 바친 지 7년이 지났다. 1년 전, 김도준의 할아버지 김성호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김씨 가문 사람들은 어르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줄 방법을 찾아 머리를 맞댔다.
결국 생각해 낸 방법이 김도준의 결혼이었다.
이후 김도준은 신하린을 찾아와 결혼을 요구했다.
그 순간, 신하린은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고 확신했지만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김도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그녀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신하린, 내 말 듣고 있어?"
그녀의 눈빛이 공허해진 것을 본 김도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그녀가 나긋하게 물었다.
그러나 김도준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하도 불쌍해서 그래. 지금은 내가 곁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아."
그의 대답에 신하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나는?"
김도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그의 눈빛에 귀찮은 기색이 피어 올랐다.
그렇게 3초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야. 너는 모르겠지만 아직 날 많이 사랑한다고 했어. 우리가 결혼했기 때문에 너에게 상처주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은 거야. 내가 물질적으로 보상해 주려 해도 싫다고 거절만 한 사람이야. 착한 사람이니까 이번에는 네가 양보해. 내가 널 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지 마."
김도준이 차분하게 내뱉은 말은 그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되었다.
이미 결혼한 유부남을 유혹하는 게 어딜 봐서 착하다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고
아내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양보를 하지 않는 게 어디가 매정하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신하린은 몇 년 전보다 조금 성숙해진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 시절 그녀가 반했던 그윽한 눈빛, 베일 듯 날카롭게 솟아 오른 코, 꽉 다문 입술까지...
'대체 그는 언제부터 변했던 걸까? 아마, 그 여자가 나타난 날부터겠지.'
"꼭 이혼까지 해야겠어?"
신하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재차 확인했다.
김도준은 대답하지 않고 불쾌한 기색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래, 너..."
"그래, 알겠어."
신하린은 바로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김도준은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추궁하듯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신하린, 날이 갈수록 더 대담해지는 것 같아."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 불쾌한 기색이 묻어났다.
"네 동의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 챈 모양이지? 왜? 협박이라도 하게?"
신하린은 대답하지 않고 벽에 드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담배를 비벼 끈 김도준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는 그녀가 어떻게 받아 들일지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자신의 요구가 얼마나 무례하고 터무니없는 일인지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신하린이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7년 동안 항상 그래왔으니 말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김도준이 떠나자 거대한 저택에 홀로 남게 되었다.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그녀는 문이 다시 열리기를 바라며 한참이나 방문을 응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면서 화면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익숙한 ID가 그녀에게 DM을 보내왔다.
[그가 또 나를 보러 왔는걸?]
짧은 문자와 함께 사진 한 장이 첨부되었다.
유리에 선명하게 비친 김도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있었다. 그 미소는 신하린이 7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였다.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은 그녀는 천천히 화면을 스크롤 하며 며칠 전에 보낸 메시지도 확인했다. [방금, 아직도 변함없이 날 사랑한다고 했어.]
[비가 많이 내리네... 춥지 않냐고? 아니, 내 곁엔 그가 있으니까. 근데, 넌 어때?]
[남편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는 너. 너야 말로 내연녀야. 신하린 넌 그저 그의 성욕이나 해소시켜 주는 도구에 불과 해.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이런 DM은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그 것들 하나 하나, 모두 김도준이 이미 자신을 배신 했음을 일깨워 주는 증거들이었다.
지난 7년 동안, 늘 그녀를 차갑게만 대하던 그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다정할 줄이야...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신하린은 그녀가 맨 처음 보내온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넌 내가 누군지 알 거야. 오늘 갑자기 거실에 나타난 꽃은 어때? 마음에 들어? 내가 보냈어. 도준이는 그 꽃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신하린은 상대가 누군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한미진, 한 플랫폼에서 재벌이나, 유명인사들의 저택이나 빌라에 꽃으로 포인트를 주며 분위기를 한층 더 밝고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유명 플로리스트다.
이전에 신하린은 김도준에게 메시지를 보여줬지만 김도준은 한미진이 보냈다는 증거가 있냐며 단번에 말을 잘라버렸다.
심지어 그녀가 일부러 부계정을 만들어 한미진을 모함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다.
한미진이 보내온 DM 중에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는 많지 않았고 그 사진 들로는 그녀가 한미진임을 증명하긴 어려웠다.
다만 오늘 그녀가 보내온 사진은 평소와 다르게 보란듯이 둘의 관계를 보여줬다.
'이걸 김도준에게 보여 줘야 하나?'
하지만 이내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둔 그녀는 서랍 제일 아래에 놓아둔 파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에는 낮에 병원에서 받은 초음파 사진이 담겨있었다.
가장 최악의 순간에 그녀는 김도준의 아이를 임신했다.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른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떨어져 초음파 사진을 적셨다.
어차피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사랑한 적 없는 김도준이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얼굴에 남은 눈물을 닦아 낸 신하린은 김도준의 라이터로 초음파 사진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김도준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혼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7년이란 시간, 그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하린은 더 이상 김도준을 사랑하지 안겠다고 결심을 내렸다.
회차 2
다음 날, 법원 밖에 차를 주차한 김도준이 왼손으로 가볍게 운전대를 두드렸다.
"도준아, 하린이와 결혼한 지 1년도 넘었는데, 이제 아이를 계획할 때도 되지 않았어?"
휴대폰 너머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표정이 약간 누그러진 김도준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언뜻 스쳤지만 이내 결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할머니, 저희 아직 젊어요. 그러니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지금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건강에만 집중하는 게 우선이에요."
"서두를 필요가 없다니?"
노부인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네 할아버지 건강이 많이 좋아졌지만,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데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게 말이 돼?"
"할머니..."
"말도 안 되는 말로 늙은이들 속일 생각하지 마라. 밖에 들리는 소문, 내 귀에도 들리니까. 너, 절대 하린이 한테 못되게 굴면 안돼."
한참이 지나도 김도준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노부인이 재촉했다.
"김도준, 내 말 듣고 있어?"
김도준은 좁혀 진 미간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한참 동안, 노부인의 잔소리를 더 듣고 나서야 김도준은 통화를 마칠 수 있었다.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옆으로 던진 김도준은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며 유리창 너머 법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화려한 꽃바구니 사진을 프로필로 한 '내 사랑'을 지나 '신하린'이라는 이름을 찾아 가볍게 터치했다.
마지막 메시지는 그가 신하린에게 이혼 절차를 밟아야 하니 아침에 법원 앞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었지만 신하린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야?]
곧이어 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김도준이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 안색이 창백한 신하린이 서 있었다.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 탄 신하린이 그를 흘깃 쳐다봤다.
김도준은 전날 그녀가 직접 골라준 옷을 아직도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이래 그의 옷은 물론이고 작게는 향수까지 모두 그녀가 직접 골라줬다.
"왜 늦었어?"
김도준이 무심하게 물었다.
신하린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늦지 않았어."
다만, 예전처럼 일찍 도착해 그를 기다리는 멍청한 짓은 더이상 하지 않았다.
습관처럼 핸들을 가볍게 두드리던 그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신하린을 바라봤다.
신하린은 어젯밤 그의 이혼 통보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얼굴이 많이 초췌해 보였다.
그러나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방금 할머니께서 연락이 왔었어."
김도준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계속 말했다.
"우리가 이혼했다는 사실은 두 분께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할아버지 건강도 좋지 않으니 감당하기 힘들지도 몰라."
신하린이 되물었다.
"할머니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빨리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 같아."
딱딱하게 말하는 김도준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차 안에 한참 침묵이 이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신하린이 피식 웃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김도준은 손에 힘을 주어 핸들을 꽉 잡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가끔 자기에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어떨지 상상을 하곤 했다.
전에 신하린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살짝 얹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하린아, 언제 내 아기를 낳아줄 거야?"
하지만 두 사람을 꼭 닮은 아이는 끝내 찾아 오지 않았다.
김도준은 어차피 6개월 후에 다시 재혼할 예정이니 그때 임신을 계획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면, 한미진의 생명은 단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또다시 침묵이 내려 앉았고 여전히 신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너, 정말 나랑 이혼 할거야?"
"이제 와서 후회 돼?"
김도준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한미진이 아직도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짜증 섞인 물음에 신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김도준에게 건넸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류를 훑었다. <재산 분할 협의서>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이혼하기로 했으니 마무리도 깔끔해야지? 법대로 하자."
신하린은 태연한 얼굴로 계속 말을 뱉었다.
"욕심을 낸 건 없어. 난 내가 받아야 할 만큼만 받을 거야. 숙려 기간 동안 우리가 벌어들인 돈은 각자의 개인 재신으로 인정 될 거야."
말을 마친 신하린은 펜을 꺼내 서류 위에 올려놓았다.
"사인해."
협의서에 적힌 사항을 꼼꼼하게 확인하던 김도준의 미간이 더욱 세게 찌푸려졌다.
재산 분할 협의서의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신하린의 말대로 그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고 위에는 그녀의 사인이 있었다.
그러나 김도준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상 가짜 이혼을 하려는 것뿐인데,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는 단지 6개월 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한미진의 마지막을 곁을 지켜주려는 것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나서 신하린과 다시 재혼할 생각이었고 하여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신하린은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사람이었기에 김도준은 그녀의 한계나 자존심을 고려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때 그녀가 귀찮아진 그가 일부러 그녀의 자존심을 깎아 내리며 그녀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이기도 했었다.
그의 무리한 요구도 신하린은 거절하지 못했고 시종일관 고분고분한 태도로 얼굴에 웃음을 띄운 채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과를 가져다 주며 그에게 말했었다.
"자기, 나 해냈어. 나 대단하지 않아?"
온순하고 순종적인 신하린은 아내로서는 완벽했다.
지난 7년 동안 그는 몇번이고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한미진만 없었다면, 그의 결혼 생활은 계속 이대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한마진이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하면서까지 애써 미소 짓는 모습이 떠 올랐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왔고 그 통증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김도준은 창문을 힐끗 바라 보았다. 유리에 비친 신하린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설마, 날 협박하려는 건가?'
전에도 가짜 메시지까지 만들어 가면서 한미진을 모함 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한미진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내 김도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펜을 집어 들고 협의서에 사인을 했다.
그는 누구도 자신을 협박 할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신하린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가 사인을 마치자 신하린은 그 중 한장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이어 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서 내려 법원에 들어가 이혼 절차를 밟았다.
이후 숙려기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완전히 남이 될 것이다.
필요한 절차를 다 마치고 두 사람은 법원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햇살이 그녀를 감싸자 신하린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김도준은 잠자코 서서 법원을 드나드는 행인들을 지켜보았다.
이제 막 혼인 신고한 부부와 이혼하는 부부를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 커플이 손을 맞잡은 채 법원을 나서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의 얼굴 가득한 행복한 웃음을 보니 1년 전 신하린과 혼인 신고를 하던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 신하린의 얼굴에도 저런 웃음이 어려있었는데...'
그는 옆에 선 신하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우리가 남으로 지내는 6개월 동안 생활비는 꼬박꼬박 보내줄게."
그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는 우리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마."
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신하린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의 세단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어 그녀가 부른 택시가 도착했고 그녀는 차에 몸을 실었다.
택시는 그가 떠났던 방향과 반대인 방향으로 주행했다.
고급 세단은 VVA 스튜디오 앞에 미끄러지듯이 멈춰 섰고, 택시는 A시 국립병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김도준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자 한미진이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김도준은 이혼 협의서를 그녀 앞에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이혼 절차는 끝났어. 별 탈 없었어."
한편, 임신 보고서를 손에 쥔 신하린은 진료실 의자에 앉아 앞에 앉은 의사를 바라 봤다.
의사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린아, 정말 아이를 지우기로 결심했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A시 국립병원 산부인과 의사인 임지연이 물었다.
"네가 얼마나 임신을 바래 왔는지, 임신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잊었어?"
신하린은 대답 대신 이혼 협의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응, 결정했어."
신하린은 단호했다.
"더 고민할 필요도 없어. 아이를 지울 거야."
회차 3
임지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혼 합의서를 확인했다.
그녀가 신하린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 10년 동안, 그녀가 김도준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바로 곁에서 지켜봤었다.
심지어 신하린이 김도준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1년 전, 둘이 결혼한 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임지연은 그 결혼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인 신하린이 오랜 소원을 이룬 셈이니
그녀는 진심을 담아 그녀가 행복하길 축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난 김도준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됐어."
임지연이 묻기도 전에 신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임지연을 쳐다보며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신하린의 미소에 임지연은 신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 아버지의 사랑을 온몸에 받고 자랐던 재벌 가 아가씨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미소에 임지연은 마음이 놓였다.
"김도준은 내가 임신한 것도 몰라."
신하린이 이어서 말했다.
"숙려기간이 30일이야, 난 굳이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아. 김도준에겐 비밀로 할거야."
숙려 기간 동안 한쪽이 이혼을 원하지 않으면 이혼 신청을 철회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두 사람은 여전히 부부로 지내야 했다.
임지연은 신하린이 김도준에게 마음이 완전히 식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후, 임지연은 간단한 검사를 진행한 뒤 다시 진료실에 돌아와 말했다.
"하린아, 네 수술은 며칠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아."
신하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수혈을 위한 혈액을 준비해야 해. 근데 너도 알다시피 넌 RH- 혈액형이잖아. 혈액을 신청했더니 그쪽에서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하더라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신하린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희귀 혈액형인 그녀는 아버지의 혈액형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혈액 이야기가 나온 탓에 그녀는 또다시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아빠가 아직 살아계셨다면...'
"응, 알겠어."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신하린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임신 초기 유산 징조도 있으니 앞으로 며칠 동안 조심해야 할 거야."
임지연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두 사람이라, 임지연은 신하린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신하린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퇴근할 때까지 기다릴래? 오늘 제시간에 퇴근 할 수 있어. 이따가 같이 갈까?"
신하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 의자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아직 평평한 배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산 징조...
아기가 그녀의 결정을 알고 미리 떠나려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신하린은 보고서를 손에 쥐고 검사실로 향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며 은행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입금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그녀는 새로 은행카드를 만들었다. 숙려기간 동안 재산을 따로 관리해야 하니까 말이다.
지금부터 그녀의 모든 수입은 모두 그 카드에 찍힐 것이다.
곧이어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작권료가 지급되었습니다. 해당 계좌로 입금되었으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하린은 김도준과 결혼하기 전, 익명의 작곡가로 조용히 활동하고 있었다.
음악은 그녀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만 해도, 부족함 없이 자란 그녀는 신씨 가문의 외동딸로 모든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문은 몰락해 버렸고 그 탓에 그녀는 어린 나이에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아빤 몰랐을 거야. 생전에 취미로 나한테 가르쳤던 음악으로 내가 돈을 벌고 있을 줄은...'
생각에 잠긴 채, 휴대폰 화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신하린이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작곡가님이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이에요. 지난 몇 년 동안 히트곡을 많이 썼는데, 이대로 은퇴할 생각은 아니시죠? 최근 저희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어요. 작곡가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러는 건데, 자세한 내용은 메일에 보내둘게요. 이미 참가 신청은 해 두었어요.]
신하린이 메일을 열자 맨 위에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관한 기획서였다.
흔하게 TV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이라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특별한 부분이라고 한다면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창작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조금 더 고민해 볼게요.]
휴대폰을 다시 거둬들이던 그때, 아랫배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또다시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오늘 만해도 벌써 두 번 째였다.
그 시각, 인터넷에는 핫이슈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미진 위암>
<플로리스트 한미진 시한부 판정>
<6개월 시한부 한미진>
가장 인기 있는 게시물은 한미진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기자의 내용이었다.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플로리스트 한미진 씨가 위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 포털사이트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으나 이대로 무너지지 않겠다고 전했습니다. 플로리스트 한미진은 남은 6개월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며 삶의 마지막을 팬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곧이어 영상에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한미진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을 뱉었다.
"앞으로 남은 6개월 동안 제가 느끼고 겪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여러분들에게 공유할 생각입니다. 팬들의 동정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다시 화면에 나타난 기자가 물었다.
"한미진 씨와 김씨 그룹 대표 김도준 대표님과의 열애설은 이전부터 계속 끊이지 않고 올라왔었죠. 하지만 김도준 대표는 유부남이신인데, 한미진 씨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할지 의문입니다."
한미진은 기자의 물음을 예상이나 한 듯 싱긋 미소 지으며 다가와 앞에 멈춰 서더니 카메라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김도준 대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아요. 그는 정말 완벽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니까요. 그 사람을 사모하는 사람은 적지 않을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이미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의 가정을 파탄 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막돼먹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기자만 남겨둔 채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피해 차에 올라탄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C국에서 데려온 엘리트 간병인이 그녀에게 물 한 잔을 건네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간병인의 안색을 눈치챈 한미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사도 내사람이야, 눈치 볼 필요 없어."
눈치를 살피던 간병인은 상체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한미진 씨, 검사 결과는 암이 아니라 위궤양입니다. 저희 쪽에서 진단서를 암으로 바꾸는 것 만으로도 이미 많은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터넷에서 위암이라고 밝힐 수 있습니까?"
한미진의 차갑게 비웃는 모습에 간병인을 더욱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 요양원도 의료 시설 중 하나잖아."
그녀의 태연하게 묻는 말에 간병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당신네 요양원은 환자의 병력 데이터를 독자적으로 관리하겠지."
간병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관리하는 내 병력 데이터엔 내가 위암말기라고 나와 있잖아? 반년 시한부 판정까지 더해져서 말이야."
간병인은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미진은 싱긋 미소 지으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모든 증거가 확실 한데 뭐가 문제야? 아무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한미진 씨는 위암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혹시라도..."
"두가지 방법이 있어."
한미진은 간병인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첫 번째, 내가 당신들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다 기적적으로 회복했다는 가설. 아마 그건 사랑의 힘이겠죠? 두 번째, 당신들 요양원의 검사에 오류가 있었던 거지. 그건 사고였고 덩달아 난 그 동안 있지도 않은 암 치료를 받은 거지."
한미진은 위협 가득한 표정으로 간병인을 노려봤다.
"어느 방법이 더 나은 것 같아?"
간병인의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한미진 씨,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미진 씨의 생각이 옳은 것 같아요."
한미진은 그런 간병인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한미진 씨,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간병인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먼저 말을 걸었다.
한미진은 휴대폰을 흘깃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A시 국립병원으로 가."
간병인은 얼굴이 더욱 사색이 되어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진단서는 내버려 두고 진통제만 처방 받으면 되니까."
말하는 와중에 한미진은 분주하게 손가락을 놀리며 김도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도준에게서 빠르게 답장이 도착했다.
[알겠어.]
같은 시각, 병원 화장실. 신하린은 점점 거세지는 아랫배의 통증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손에 들린 티슈에는 피가 흥건했다.
유산 징조가 틀림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