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내 약혼자 서정혁과 나는 10년 된 연인이었다. 내가 직접 디자인한 성당의 제단 위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세상의 전부였던 남자와 결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례를 맡은 우리 웨딩 플래너, 한유라가 그를 보며 물었을 때. "신랑 서정혁 군,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그는 웃지 않았다. 그는 내가 몇 년간 본 적 없는 사랑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는 나를 제단 위에 홀로 버려두고 떠났다. 그의 변명은? 상간녀 한유라가 뇌종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 희귀 혈액형을 그녀를 살리는 데 쓰도록 강요했고, 그녀의 잔인한 변덕을 맞춰주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안락사시켰다. 심지어 물에 빠진 나를 그대로 지나쳐 그녀부터 구하러 가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를 죽게 내버려 둔 순간, 나는 부엌 바닥에서 질식하고 있었다. 한유라가 내 음식에 일부러 넣은 땅콩 때문에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온 것이다. 그는 내 목숨을 구하는 대신, 가짜 발작을 일으키는 그녀를 병원으로 옮기는 것을 택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단지 나를 배신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나를 기꺼이 죽일 수 있는 남자였다.

병원에서 홀로 회복하고 있을 때, 아버지에게서 황당한 제안이 담긴 전화가 걸려왔다. 은둔의 재벌이자 막강한 IT 기업 대표인 강태준과의 계약 결혼. 내 심장은 이미 죽어 텅 비어버린 상태였다. 사랑은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신랑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을 들었다. "네. 그 사람과 결혼할게요."

제1화

차주원과 서정혁.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세기의 사랑으로 남았어야 했다. 10년. 고등학교 축제에서 어색하게 파트너가 되어 춤을 췄던 순간부터, 지금 이 웨딩 로드 위에 서 있는 순간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만든 추억의 탑. 재능 있는 건축 디자이너인 주원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증표로 이 아름다운 성당을 직접 설계했다. 성공한 부동산 개발업자인 정혁은 10대 시절부터 그녀의 닻이자, 반쪽이자, 세상의 전부였다.

한때 두 사람의 인연은 이 동네의 전설이었다. 인기 많은 축구부 주장이었던 정혁의 눈에는 오직 조용하고 총명한 주원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를 따라 같은 대학에 진학했고, 지독하게 힘든 건축학 시험을 치르는 내내 그녀를 응원했으며, 그녀의 모든 성공을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사소한 다툼 끝에, 눈보라를 뚫고 세 시간을 운전해 와서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치자꽃 한 송이를 문 앞에 두고 간 남자.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네가 없는 내 세상은 너무 추워." 지난 10년간, 그는 주원의 세상이었다.

그 완벽했던 세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6개월 전이었다. 변화는 미묘했다. 언제나 속을 훤히 보여주던 정혁이 휴대폰을 감추기 시작했다.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압박이 심하다며 늦게 귀가하는 날이 잦아졌다. 결혼 준비로 정신없었던 주원은 그저 스트레스 때문이려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더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기까지 했다.

첫 번째 격진은 어느 화요일 밤에 찾아왔다. 정혁이 샤워하는 동안, 침대 협탁에 놓인 그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의심이 아니라 반사적인 행동으로 주원은 화면을 흘깃 보았다.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수많은 알림.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일 때문일 거야, 별거 아닐 거야.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차가운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주 후반, 그의 노트북에서 서류를 찾던 주원은 잠금 해제된 폴더 하나를 발견했다. 폴더명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프로젝트 H’. 지난 10년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갉아먹는 듯한 추한 호기심에 주원은 폴더를 클릭했다.

설계도나 재무 계획서가 아니었다. 사진 앨범이었다. 주원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자의 사진 수백 장. 생기 넘치는 눈과 프레임 전체를 밝히는 듯한 미소를 가진 여자. 그녀는 보트 위에서 웃고 있었고, 주원과 정혁이 자주 가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으며, 심지어 누가 봐도 정혁의 사무실인 곳에서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가장 최근 사진은 불과 며칠 전에 찍힌 것이었다.

별도의 텍스트 파일에는 두 사람의 대화가 담겨 있었다. 주원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유라 씨는 들불 같아요.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또 당신 생각이 나네요. 당신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주원이는… 편안해. 안정적이지. 당신은… 그 모든 것 이상이야."

숨이 멎었다. 한유라. 낯선 이름이었지만, 이제 뇌리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주원은 정혁의 최근 이메일을 뒤졌다. 그녀가 있었다. 한유라. 자신들의 웨딩 플래너. 석 달 전, 주원이 직접 고용한 여자였다. 그녀의 유능함과 발랄한 성격에 반해서. 그들의 삶 구석구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자.

돌이켜보면 모든 징후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전에는 "시간 낭비"라고 부르던 회의에 참석하며 결혼 준비에 갑자기 관심을 보이던 정혁. 상담 중에 유라를 향하던 그의 길고 긴 시선. 주원은 그저 그녀의 일 처리에 대한 감탄이라고 착각했다. 정혁이 쓰기 시작한 낯선 말투와 농담들. 이제 보니 모두 유라에게 보낸 메시지에 타이핑된 문구들이었다. 한때 주원에게만 쏟아붓던 그의 사랑이 이제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주원은 그와 마주했다. 그가 침실로 들어섰을 때, 노트북 화면에는 사진들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사진을 보았고,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누구야, 정혁아?" 주원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10년의 신뢰가 먼지로 부서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나…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주원아." 마침내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냥 잠깐이었어."

"잠깐? 사진이 수백 장이야. 그녀는 ‘모든 것’이고 나는 고작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했다며!" 그 단어들이 입안에서 독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너무… 생기가 넘쳐." 그는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 "달랐어. 실수였어. 어리석고 찰나의 끌림이었을 뿐이야. 아무 의미 없어."

주원은 메스꺼움을 느꼈다.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그래서, 누구를 선택할 건데?" 그녀가 물었다. 최후통첩은 무겁고 최종적으로 공기 중에 내려앉았다.

그는 그제야 그녀를 보았다.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너야, 주원아. 당연히 너지. 언제나 너였어."

그는 끝났다고 맹세했다. 통제 불능이 된 어리석은 치기였을 뿐이며, 육체적인 외도는 결코 없었고, 그저 새로움에 눈이 멀었을 뿐이라고 맹세했다. 증명하기 위해 그는 휴대폰을 들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한유라의 번호와 모든 사진을 삭제했다. 그는 주원을 끌어안고 용서를 빌며, 자신의 미래는 오직 그녀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녀의 한쪽, 이성적이고 자존심 강한 부분은 당장 떠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다른 한쪽, 인생의 3분의 1을 이 남자와 사랑에 빠져 보낸 부분은 필사적으로 그를 믿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를 믿기로 했다. 고통과 배신을 가슴 깊이 묻었다. 모든 오랜 관계에는 시련이 있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것이 그들의 시련일 뿐이라고. 그들은 이겨낼 것이고, 여전히 결혼할 것이라고.

일주일 후, 정혁이 이상한 제안을 해왔다.

"유라 씨한테 전화 왔었어." 그는 조심스럽게 무심한 척 말했다. "모든 것에 대해 사과하더라. 정말 미안해하고 있어. 좋은 사람이야, 주원아. 그냥… 실수를 한 거지."

주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단단하게 굳어갔다.

"원래 주례 봐주시기로 한 분이 집안 사정으로 취소하셨어."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인데… 우리가 유라 씨한테 부탁하면 어떨까? 우리 사이에 나쁜 감정 없다는 걸 보여주는 방법이 될 거야. 우리 모두가 공식적으로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장을 시작하기 직전에 그 장을 닫는 거지."

너무나 기괴하고, 너무나 눈치 없는 제안에 주원은 할 말을 잃었다. 차가운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미쳤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깨끗한 시작"을 간청하는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자,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싸우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너무 지쳤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정말로 과거를 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그들을 파괴할 뻔했던 여자가 그들을 공식적으로 묶어주게 하는 것. 마지막 상징적인 승리.

모든 본능에 반하여, 그녀는 동의했다. "좋아." 그녀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해."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 있었을까? 그 질문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조롱하듯, 끊임없이 북을 치며 울려 퍼졌다.

여기, 그녀가 디자인한 성당의 제단 위에서, 그들이 아는 모든 사람 앞에서, 그녀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끔찍한 진실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단정한 크림색 정장을 입은 한유라는 하객들을 향해, 그리고 정혁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음악이 고조되었다가 잦아들었다. 공기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신랑 서정혁 군은," 유라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한 성당 안을 가득 메웠다. "저와… 저와 결혼하시겠습니까?"

하객들 사이에서 몇몇 혼란스러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순한 말실수. 주례자의 긴장한 실수. 주원은 간신히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정혁이 웃어넘기기를, 그녀를 바로잡아 주기를,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아 서약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혁은 웃지 않았다.

그는 주원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유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주원은 혼란이나 재미가 아닌, 원초적이고 가감 없는 감정의 바다를 보았다. 너무나 깊은 갈망과 숭배의 눈빛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가 한때 그녀에게 주었던 눈빛이었지만, 천 배는 더 강렬했다.

세상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하객들의 혼란스러운 웅성거림은 둔탁한 굉음으로 멀어졌다. 주원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그녀의 약혼자, 10년간 사랑했던 남자가 마치 세상에 단 한 사람인 것처럼 다른 여자를 바라보는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분명했으며, 철저히 파괴적이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성당 안에서 일제히 터져 나온 경악의 숨소리. 유라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고, 승리에 찬 눈부신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정혁 씨." 그녀가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날 데리고 나가줘요. 제발, 그냥 데리고 나가줘요."

정혁의 시선이 찰나의 순간 주원에게 스쳤다. 죄책감, 어쩌면 연민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은 오자마자 사라지고 냉혹한 결의로 대체되었다. 그는 유라가 내민 손을 잡았다. 마치 그들이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손가락이 얽혔다.

그는 주원에게 등을 돌렸다. 그들의 10년에게. 그들의 미래에게.

"정혁아, 안 돼." 주원이 속삭였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뻗어 턱시도 소매를 스쳤다. "정혁아, 감히 이러지 마. 감히 떠나지 마."

그녀의 손길에 그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손길이 불에 덴 듯 팔을 뿌리쳤다.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그는 한유라를 이끌고 통로를 걸어 내려갔다. 충격에 빠진 친구들과 가족들을 지나, 무거운 참나무 문밖으로. 주원을 제단 위에 홀로 남겨둔 채.

뒤따른 침묵은 절대적이었고, 짓누르는 무게 같았다. 부케에서 풍기는 치자꽃 향기가 역겹게 느껴졌다. 그녀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아치형 천장이 이제 그녀를 덮쳐 질식시킬 듯 다가왔다.

그때,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였다. 어렴풋이 자신의 것이라고 인지한, 부서지고 히스테릭한 소리.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웃음과 함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모든 게 농담이었다. 그녀의 삶, 그녀의 사랑, 그녀의 신뢰. 모든 것이 장대하고 굴욕적인 농담이었다.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의 어머니가 제단 위로 달려왔다. "그 개자식! 그 천하의 개자식!" 그녀는 주원의 떨리는 몸을 끌어안으며 독설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바로 뒤따랐다. 그의 표정은 암울했다. 그는 주원을 지나쳐 하객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뒷줄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멈췄다. 은둔의 거물이자 막강한 IT 기업 대표인 강태준. 주원 아버지의 사업과 약간의 거래가 있는 집안의 지인이었다. 말수는 적지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남자.

"강 대표." 주원의 아버지가 혼란을 뚫고 외쳤다. "우리 집안이 빚을 하나 졌지. 그리고 여기 신부가 있소. 신랑을 바꾸는 건 어떻겠소?"

그 제안은 미친 짓이었다. 순전한 충격과 분노에서 비롯된, 체면을 차리기 위한 필사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인생의 폐허 위에 서 있는 주원에게는, 그것이 익사 직전의 바다에서 유일한 구명줄처럼 들렸다. 그녀의 심장은 가슴속에서 죽어버린 텅 빈 것이었다. 사랑은 거짓말이었다. 서약은 농담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모든 감정이 거세된 목소리였다. "그 사람과 결혼할게요."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즉시 강태준의 비서와 낮고 긴급한 목소리로 통화하며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주원은 멍한 상태로 어머니에게 이끌려 신부 대기실로 돌아갔다. 정혁과 함께 살던 집, 이제는 영안실처럼 느껴지는 집으로. 그녀는 산산조각 난 꿈의 상징인 아름다운 레이스 드레스를 찢어버리듯 벗어 던졌다. 하얀 실크와 굴욕의 더미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로봇처럼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옷, 노트북, 오직 그녀만의 것들을 던져 넣었다. 나가야 했다. 이 장소에서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워야 했다.

막 여행 가방의 지퍼를 올렸을 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정혁이었다.

그는 지쳐 보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긴장되어 있었지만, 광적인 절박함은 사라지고 무겁고 침울한 슬픔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달려와 팔을 뻗었다.

"주원아, 정말, 정말 미안해."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고, 끔찍하게도 주원은 그 순간 그를 거의 믿을 뻔했다. "설명하게 해줘."

그녀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움찔했다. 온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설명?" 그녀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뭘 설명할 게 있는데, 정혁아? 넌 우리 웨딩 플래너 때문에 날 제단에 버렸어. 그 자체로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 같은데."

"아니, 넌 이해 못 해."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유라 씨가… 아파, 주원아. 죽어가고 있어."

주원은 어리둥절한 채 그를 쳐다보았다.

"뇌종양이야." 그가 말을 쏟아내며 목이 메었다. "교모세포종. 의사들이… 석 달,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대. 오늘 아침에 최종 진단을 받았어. 패닉 상태였던 거야. 결혼식에서 그렇게 말한 건… 도와달라는 절규였어. 죽기 전 소원이래, 내가 자기한테 ‘네’라고 말하는 걸 한 번만 듣는 거. 딱 한 번만.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주원아? 죽어가는 여자의 마지막 소원을 어떻게 거절해?"

그는 진지하고 가슴 아픈 고뇌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이해해주기를, 그의 잔인한 배신 속에 담긴 고귀함을 봐주기를 애원하고 있었다. 그는 결혼식을 연기하고, 유라의 마지막 몇 달을 그녀 곁에서 보내게 해달라고, 이 "자비로운" 행동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주원은 10년간 사랑했던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나약함의 깊이를 보았다. 그는 유라를 사랑했다. 제단 위에서 그의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 이 완벽하게 비극적이고 영화 같은 죽어가는 소원 이야기는 편리한 변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그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이었다. 새로운 사랑에게는 영웅이 되고, 헌신적인 약혼녀는 대기시켜 두는 것. 그는 그녀를 가두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 거짓말의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 순간, 유라의 기만의 진정한 범위와 정혁의 잔인함의 한계를 알았더라면, 그의 얼굴에 대고 비웃으며 영원히 떠났을 것이다. 유라에 대한 그의 사랑이 주원을 몇 번이고 던져 넣을 준비가 된 바닥없는 구덩이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녀는 단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과거와 조작된 비극적인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며 우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약해진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그녀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시작이었다.

바로 그때, 그의 전화가 날카롭게 울렸다. 정혁의 고개가 홱 돌아갔고,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극심한 공포로 바뀌었다.

"네? 무슨 일이에요?" 그가 전화기에 대고 짖듯이 말했다. "피를 쏟고 있다니 무슨 말이에요? 지금 가겠습니다!"

회차 2

정혁의 얼굴은 공포로 굳어 있었다. "유라 씨가 병원에 있어. 출혈이 시작됐대. 피가 필요하대. 아주 많이."

그는 전화를 끊고 주원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아귀는 쇠사슬 같았다. "가야 해. 지금 당장."

"뭐? 내가 왜?" 주원은 팔을 빼내려 애썼다. 그의 갑작스러운 폭력적인 손길에 충격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슬퍼하며 사과하던 남자가 아니었다. 절박하고 무자비한 누군가였다.

"그녀 혈액형," 그가 그녀를 문 쪽으로 끌며 말했다. "희귀 혈액형이야. AB형 Rh-. 너랑 같아. 병원 혈액 은행에 재고가 부족해. 제시간에 수혈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네가 그녀를 살려야 해, 주원아."

그의 요구는 너무나 뻔뻔해서 아찔할 정도였다. 그는 방금 자신의 인생을 파괴한 여자를 구해달라고 하고 있었다. 그는 묻는 것이 아니었다. 명령하고 있었다.

"싫어." 주원은 발뒤꿈치를 땅에 박으며 버텼다. "이거 놔, 정혁아. 난 아무 데도 안 가."

"이기적으로 굴지 마!" 그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포효했다.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야!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

그는 이제 그녀를 집 밖으로 끌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고통스럽게 그녀의 살을 파고들었다. 그녀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상징해야 할 그의 손가락에 낀 무거운 결혼반지가 그녀의 살을 짓눌렀다.

"죽어가는 여자야, 주원아! 넌 원한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걸 지켜볼 만큼 그렇게 냉혈한이야?" 그가 그녀를 반쯤 밀치고 반쯤 끌어당겨 차에 태우며 소리쳤다.

그 말은 잔인한 도덕적 협박이었다. 그는 그녀 자신의 연민을 그녀를 공격하는 무기로 비틀고 있었다. 고통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의 작고 지친 일부가 굴복했다. 생명은 생명이었다. 설령 한유라의 것이라 해도.

병원은 형광등 불빛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공포의 냄새로 흐릿했다. 정혁은 수혈 센터에 도착할 때까지 한순간도 그녀의 팔을 놓지 않았다.

"지금 당장 피가 필요해요!" 그가 놀란 간호사에게 소리쳤다. "환자 이름은 한유라입니다. 이쪽이 헌혈자고요."

간호사가 재빨리 주원의 팔을 준비했다.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주원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를 훔치고 아는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에게 굴욕을 준 여자에게 자신의 피, 자신의 생명력을 주려 하고 있었다. 그 부조리함은 너무나 심해서 광기에 가까웠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팔을 빼려 했다. "정혁아, 나 이거 못 하겠어."

"해야 해." 그가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녀의 의자 뒤로 이동해 어깨에 손을 굳게 얹어 그녀를 꼼짝 못 하게 했다. "하세요." 그가 간호사에게 명령했다.

바늘은 차갑고 날카로운 따끔함이었다. 주원은 움찔했고, 순수한 굴욕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검붉은 피가 투명한 튜브를 통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몸을 떠나 경쟁자를 구하러 가는 피. 정혁의 손은 그녀의 어깨를 떠나지 않았다. 위로라기보다는 감옥처럼 느껴지는 무겁고 소유욕 강한 무게였다.

혈액 팩이 채워지자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450밀리리터. 표준 헌혈량이었지만, 그날의 감정적 파괴를 겪은 후 그녀의 몸은 고갈되고 텅 빈 느낌이었다. 눈앞에 검은 점들이 춤을 췄다.

"끝났습니다." 간호사가 그녀의 팔에 솜을 붙이며 말했다.

바늘이 빠지자마자 정혁은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안도감은 역력했다. 바로 그때, 근처 수술실에서 의사가 뛰쳐나왔다.

"서정혁 씨! 환자는 안정됐지만,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정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주원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수술실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유라에게 쏠려 있었다.

그가 달려가는 동안, 주원은 일어서려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고, 그녀는 쓰러졌다. 머리가 금속 의료용품 카트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카트가 흔들리더니, 무거운 스테인리스 스틸 기구 트레이가 쏟아져 내려 그녀의 머리와 어깨를 덮쳤다. 눈 뒤에서 날카롭고 눈부신 통증이 폭발했고, 그리고 모든 것이 까맣게 변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수술실 문으로 사라지는 정혁의 뒷모습이었다.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유기의 행위.

주원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머리의 둔하고 욱신거리는 통증이었다. 그녀는 개인 병실에 있었다. 정혁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녀가 뒤척이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지친 듯한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원아, 깨어났구나."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미안해. 네가 쓰러지는 걸 못 봤어. 유라 씨 걱정에 정신이 없어서…"

그녀는 그저 텅 빈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과는 살균된 병실 안에서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다치는 걸 못 봐서 미안한 것이지, 그 원인이 된 것에 대해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말하지 마." 그녀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아팠다.

"내가 너무 멍청하고 거칠게 굴었어."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빼냈다. "약속할게, 주원아. 다시는, 절대로 너한테 그렇게 대하지 않을게. 유라 씨가… 떠나고 나면…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야. 너와 나. 약속해."

차갑고 씁쓸한 웃음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려 했다. 예전으로 돌아가? 그는 그들의 세상을 산산조각 내놓고 이제 와서 빈말로 그 조각들을 붙여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그는 유라의 고귀한 구원자 역할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자신이 남긴 잔해를 보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돌보려 애썼다. 식사를 가져다주고, 베개를 부풀려주고, 부드럽고 달래는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분산되어 있었다. 그의 휴대폰은 유라의 병실에서 오는 업데이트로 끊임없이 울렸다. 그는 주원에게 죽 한 숟가락을 떠먹여 주다가도,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더 이상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녹아내렸다.

어느 날 오후,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돕다가 그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았고, 그의 관심은 즉시 옮겨갔다. "깨어났어요? 뭐 필요한 거 있대요?"

정신이 팔린 그는 주원의 팔을 너무 빨리 놓아버렸다. 그녀는 어색하게 미끄러졌고, 다친 어깨가 침대 난간에 부딪히며 비틀렸다. 날카로운 고통의 비명이 그녀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정혁은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그의 얼굴은 죄책감과 좌절감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주원아."

"나가." 그녀가 위험할 정도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나가, 정혁아. 그녀 곁으로 가. 넌 여기 있어도 나한테 아무 소용없어."

"주원아, 내가 만회할 수 있어."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평생에 걸쳐서 너한테 만회할게."

하지만 그의 약속은 입안의 재와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를 차단했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그는 이제 낯선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심장이 뛰는 남자. 그녀가 그토록 공들여 설계했던 그들의 미래는 철거되었고, 그는 그 잔해 위에 서서 그녀에게 경치를 감상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회차 3

정혁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지만, 유라의 병상이 주는 끌어당김은 그가 주원에게 느끼는 어떤 죄책감보다 강했다. 그는 개인 간병인을 고용하고 주원의 모든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도록 조치했다. 이는 그의 존재를 대신하는 보잘것없는 대체품이자, 그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보여주는 신호였다.

퇴원하는 날, 주원은 그들이 함께 지었던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낯설고 차가웠다. 공기는 죽어버린 관계의 유령으로 가득했다. 직원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그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진을 내려 "실수들"이라고 이름 붙인 상자에 담았다. 그가 항상 사주던 치자꽃 향초를 버렸다. 그의 번호를 휴대폰에서 삭제했지만, 이미 외우고 있었다. 버려지는 물건 하나하나가 작지만 만족스러운 단절이었다.

그들이 첫 데이트 때부터 모아온 영화표 뭉치를 봉투에 담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정혁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한유라가 창백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그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실크 가운을 입고 있었고, 머리는 예술적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상자와 쓰레기봉투에 둘러싸인 주원을 보자, 그녀의 눈은 약하거나 아픈 기색 없이, 숨길 수 없는 승리감으로 반짝였다.

"뭐 하는 거야?" 정혁이 그들의 삶의 해체된 잔해를 보며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청소." 주원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 버리는 중이야."

정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이미 팔에 매달린 여자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유라 씨가 회복하려면 조용한 곳이 필요해." 그는 묻는 것이 아니라 통보했다.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가 상태에 최악이라고 하셨어. 여기서 지내게 할 거야."

그는 유라를 소파로 이끌어, 마치 그녀가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쿠션에 기대게 했다. 유라는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사과와 무력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눈은 날카롭고 도전적이었다. 그것은 소유권 선언이었다. 이제 이 집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남자.

주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분노와 고통은 모두 타버리고, 얼어붙은 평온만 남았다. "좋아." 그녀는 상자로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네 집이잖아."

정혁은 그녀의 반발 없는 태도에 안도하는 듯했다. "고마워, 주원아. 네가 이해해 줄 줄 알았어." 그는 그리고 가정부에게 돌아섰다. "마리아 아주머니, 아래층 손님방 유라 씨를 위해 준비해 주세요. 편안하게요."

주원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유령처럼 집 안을 돌아다니며, 벽에서 자신의 존재를 체계적으로 지워나가는 작업을 조용히 계속했다. 다음 며칠은 특별한 종류의 고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보이지 않는 관객이 되어, 자신이 결혼했어야 할 남자가 다른 여자를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유라를 위해 과일을 깎아 작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주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그의 낮고 부드러운 속삭임은 한때 주원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약을 챙기고, 식사를 신경 쓰고, 그녀가 약한 척할 때마다 안아주었다. 한때 오직 그녀만의 것이었던 다정함이 이제 공개적으로 전시되며, 그녀의 대체자에게 아낌없이 퍼부어졌다. 그것은 그들이 공유했던 모든 좋은 기억을 천천히, 의도적으로 독살하는 행위였다.

짐을 싸다가 그녀는 작은 자수 베개를 발견했다. "정혁 + 주원 영원히." 할머니가 주신 선물이었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들고 있다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쓰레기봉투에 던져 넣었다. 영원은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5년 전 그녀의 생일에 정혁이 선물한 푹신한 주황색 고양이, 귤이였다. 귤이는 그녀의 그림자였고, 차갑고 텅 빈 집에서 따뜻하게 가르랑거리는 존재였다. 그녀가 울 때면, 귤이는 그녀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그녀가 잠 못 이룰 때면, 폭풍 속의 털북숭이 닻처럼 그녀의 가슴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어느 날 오후, 소포가 도착했다. 정기적인 치과 스케일링을 마치고 동물병원에서 막 돌아온 귤이였다. 익숙한 얼굴을 보고, 행복한 야옹 소리를 듣는 것은 주원이 몇 주 만에 처음으로 느낀 진정한 온기였다. 그녀는 귤이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그녀는 예전의 자신을 되찾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귤이를 품에 안고 복도를 걷다가, 부엌으로 가던 유라와 마주쳤다. 유라의 시선은 즉시 고양이에게 고정되었다.

"어머, 귀여워라." 유라가 역겨울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안아봐도 될까?"

"안 돼." 주원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귤이를 더 꽉 안았다. "낯가림이 심해서."

유라의 얼굴에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가 이내 토라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 제발? 나 너무 외롭고 슬픈데. 작은 털뭉치가 기운 나게 해줄 것 같아."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 된다고 했어."

유라의 토라진 표정은 비웃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앞으로 달려들어 주원의 팔에서 고양이를 낚아채려 했다. 놀라고 겁먹은 귤이는 하악질을 하며 발톱을 휘둘러 유라의 손을 할퀴었다. 피부가 겨우 벗겨질 정도의 피상적인 상처였다.

"아야!" 유라가 총에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틀거렸다. 그녀는 고통과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비명 소리에 정혁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유라 씨, 괜찮아?"

"고양이가!" 유라가 흐느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작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날 공격했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나한테 달려들었어!"

"거짓말이야!" 주원이 소리쳤다. "네가 억지로 뺏으려고 했잖아!"

정혁의 시선은 유라의 눈물 젖은 얼굴과 주원의 반항적인 얼굴 사이를 오가며 굳어졌다. 그의 눈은 유라의 손에 난 아주 작은 상처에 머물렀다.

"그녀는 아파, 주원아." 그가 위험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면역 체계가 약해져 있어. 어떤 감염이든 치명적일 수 있어." 그는 유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마치 치명상인 것처럼 아주 작은 상처를 살폈다. "이 집에 사나운 동물을 둘 수는 없어."

"사납지 않아! 그녀가 도발했어!" 주원이 애원했다. 심장이 가라앉았다.

유라는 또 한 번 흐느꼈다. "난 그냥 쓰다듬어주고 싶었어, 정혁 씨. 난… 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귤이가 내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녀는 고양이를 가장된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무서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냥 고양이일 뿐이야, 주원아." 정혁이 차갑고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유라 씨의 건강이 더 중요해. 그녀가 고양이를 원해. 남은 시간 동안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줄 거야." 그는 손을 뻗어, 주원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팔에서 귤이를 낚아챘다.

"안 돼!" 주원이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겁에 질려 버둥거리는 고양이를 승리에 찬 유라에게 건넸다. "자, 자, 아가야." 유라가 털을 쓰다듬으며 가짜 달콤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려줘, 정혁아! 내 고양이야!" 주원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 정혁이 그녀와 유라 사이에 서며 쏘아붙였다. "이게 최선이야. 그녀의 마지막 소원 중 하나를 들어주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야."

그는 돌아서서 유라를 이끌고 가기 시작했다. 유라는 이제 귤이를 꽉 껴안고 있었다. 오직 주원만이 볼 수 있는 잔인하고 승리에 찬 미소를 얼굴에 띤 채. 고양이는 그녀의 품에서 발버둥 치며 괴로운 야옹 소리를 냈다.

주원은 차가운 공포가 온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날 저녁 정혁이 샤워할 때까지 기다렸다. 집은 조용했다. 그녀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유라의 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고양이를 되찾아야 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광경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지금 전체 스토리 읽기
작가를 후원하고 Moboreader의 다음 이야기를 응원해 주세요!
모든 회차 잠금 해제

치명적인 배신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품다

1화
회차
사용자 설정
다음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