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한 통의 메시지, 거기에는 여섯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서로 엉켜진 속옷, 맞잡은 손, 구겨진 침대 시트, 욕실 거울에 비친 흐릿한 실루엣...

고시아에게 이런 도발적인 메시지는 처음이 아니었다.

고시아는 사진 속에서 그 여자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쥔, 뼈마디가 굵은 손이 강민규의 것임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무려 4년간 함께 살아온 남편의 손이었다.

그녀는 사진 속의 날짜를 한 번 확인했는데 그날은 마침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날 아침, 강민규는 저녁에 함께 축하하자고 말해놓고는 곧바로 연락이 두절된 채 사흘을 잠적했다. 결국 돌아온 건 갑작스러운 출장이 생겼다는 그의 비서가 보낸 단 한 줄 메시지였다.

'퍽이나 갑작스러웠겠다.' 고시아는 비웃음을 흘리며 채팅창을 닫고 연락처 목록에서 번호 하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 상대방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시아야."

"선배, 전에 말씀하셨던 기밀 연구에 참여할 인원 말이에요. 이미 결정했어요."

"누군데?" 핸드폰 너머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요."

그러자 상대방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장난하냐? 너도 규율이 엄한 걸 잘 알고 있잖아. 일단 기밀 연구에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외부랑 연락 다 끊어야 하고, 나가는 건 말도 안 돼. 심지어 프로젝트에 정식 등록되면 실종자로 처리돼. 기록도 다 말소돼서 완전히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야 해. 그렇게 되면... 네 가족은? 강민규는 어쩔 건데?"

고시아의 시선은 자연스레 벽에 걸린 결혼사진으로 향했다.

결혼 사진 속 두 사람은 마치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듯한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귓가에는 여전히 강민규가 속삭이던 맹세가 또렷하게 맴돌았고, 그와 함께했던 달콤했던 순간들은 이제 쓴물처럼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

"이미 결정 내렸어요. 내일 서류 작성하러 갈게요."

그렇게 말한 후, 고시아는 곧장 전화를 끊었고 상대방에게 계속 설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아래층에서 차량 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강민규의 훤칠한 실루엣이 현관에 나타났다. 그는 뼈마디가 선명한 큰 손으로 검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곧장 욕실로 향했다.

옷걸이에 걸린 그의 외투에선 VRA의 최신 향수 FIRE2의 짙은 향이 풍겨 나왔다. 불 같이 열정적이고 화끈한 그 향은 고시아의 담담함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강민규는 회색 목욕가운을 두른 채 욕실에서 나왔다.

헐렁하게 묶인 허리끈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과 복근, 촉촉한 머리카락에 어린 물기가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리며 그의 눈빛을 더 차갑고 짙게 만들었다.

강씨 가문의 장남이자 금융계의 금수저인 강민규는 말 그대로 외모든 재력이든,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다.

한때 그에게 그렇게 설레던 그녀는, 지금은 그만큼이나 깊은 혐오로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다.

"왜 멍하니 있어? 내 얼굴에 다시 한번 반한 거야?" 강민규는 느긋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고 섹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보고 싶었어?"

말하는 동시에 강민규의 손은 그녀의 허리 라인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졌고, 닿은 피부가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자, 고시아는 곧바로 몸을 살짝 피했다.

그러자 강민규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멈추었고,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래? 화났어?"

고시아는 감정을 다잡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다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 속의 고통을 억누르며 침대 옆의 서랍에서 비밀번호가 걸린 박스를 꺼내 강민규에게 건넸다. "이거, 선물이야."

그 안에는 그녀의 서명이 적힌 이혼서류가 들어 있었고, 이것은 그녀가 강민규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비밀번호를 맞혀야 열 수 있어."

강민규는 박스를 힐끗 보고는, 고사아가 여전히 장난치는 줄로만 생각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박스를 탁자 위에 툭 내려놓고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한테는 네가 제일 큰 선물이야."

고시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피했고, 강민규는 잠시 멈칫하더니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 때문에 바빠서 기념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는데, 화 많이 났지?"

강민규는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옷걸이에 걸린 외투 속에서 네모난 상자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음에 들어?"

상자 속엔 정교하게 세공된 고풍스러운 금실옥 비녀가 들어 있었다.

"특별히 널 위해 낙찰 받은 거야. 너 이런 거 제일 좋아하잖아. 한번 해봐."

남자의 목소리엔 억눌린 애정과 은근한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한때, 고시아는 그 말투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운성 사람이라면 강민규가 아내를 목숨처럼 아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고시아도 그때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휴대폰 속의 그 사진들만 없었다면, 그녀는 정말로 이 선물에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사진 속, 스무 살 초반으로 보이는 혼혈의 여자는 요염한 눈빛으로 고개를 젖히고 있었고, 풍성한 웨이브 머리는 강민규가 조금 전 고시아에게 건넨 비녀와 같은 것으로 느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늘고 예쁜 목덜미엔 선명한 키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건데, 마음에 안 들어?" 강민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겨주었고, 손끝이 그녀의 피부를 살며시 스치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시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눈 앞의 비녀를 그의 가슴에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평소와 전혀 다른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거 맞아?"

강민규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움찔했고 눈앞의 이 여자가 어딘가 평소랑 다르게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점점 깊어질 무렵, 고시아는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말 단 하나뿐인 거라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지." 그녀는 손을 들어 상자 뚜껑을 닫았다. "난 아직 마무리 못한 업무가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너 먼저 자."

그렇게 말한 뒤, 고시아는 상자를 꼭 쥐고 강민규의 품에서 빠져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살짝 헤쳐진 목욕가운 사이로 은은한 냉기가 스며들어왔고, 강민규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오늘의 고시아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비밀번호 상자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고시아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강민규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는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때, 목욕가운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연이어 진동했다.

휴대폰을 꺼내 내용을 확인한 강민규는 화면에 띄운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메시지에 목이 화끈하게 타올랐다.

침대에 앉아 몇 마디 답장을 보내던 강민규는 곧 메시지를 말끔히 삭제했다. 그리고 나서야 휴대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익숙한 향기가 은은하게 그의 신경을 어루만졌고, 강민규는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한편, 서재에서는 고시아가 그 비녀의 사진을 찍어 명품 리세일 샵에 전송하고 있었다. "이 물건, 최대한 빨리 처분해주세요."

그리고는 계좌번호도 함께 보냈다. "여기로 입금해 주시고요."

그 계좌는 연구소의 공용 계좌였다.

'이런 더러운 물건도 이 정도면 쓸모를 다한 거지.'

다음 날 아침.

강민규가 눈을 떴을 때, 고시아는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팔을 짚고 상체를 일으킨 뒤 그녀를 향해 손짓을 했다.

막 깨어난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며, 은근한 유혹이 깃들어 있었다. "이리 와, 한 번만 안아줘."

고시아는 셔츠 단추를 잠그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담담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연구소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나가봐야 해. 아침은 못 챙겼으니까, 너 혼자 알아서 해결해."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가방을 들고 몸을 돌려 떠났는데 어제 밤과 같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강민규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멈췄고, 가슴에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이 밀려오며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평소라면, 고시아는 아무리 바빠도 꼭 강민규에게 아침을 챙겨주었고, 딱 먹기 좋을 온도에 그를 깨워주었으며 작고 하얀 얼굴로 애교를 부리며 따뜻한 포옹과 아침 키스를 요구하던 그녀는 꼭 새침하고 나른한 고양이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시아야."

문을 열려던 순간, 강민규의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고, 고시아는 문득 심장이 거칠게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에 숨이 턱 멎을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눈빛은 어느새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왜?"

강민규는 고시아를 몇 초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이상함도 감지하지 못하자 자신이 예민했던 거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꼭 챙겨 먹고 밤샘은 되도록 하지 마. 마리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나도 며칠간은 바쁠 것 같아. 그러니까 밤 늦게까지 날 기다리지 않아도 돼."

"알았어." 고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따스한 아침 햇살에 비친 그녀의 미소는 마치 첫 만남의 그 순간을 방불케 하듯 다시 강민규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정만 끝나면, 강심도로 여행 가자.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고시아는 마음속의 상처가 더 벌어지는 것 같았고, 핏물이 흐를 정도로 심장이 조여왔다.

몇 년 전, 그들이 결혼을 준비할 때 그녀는 수십 개의 여행 일정을 계획했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그 중의 한 곳을 선택해 여행을 즐기기로 하며 평생의 사랑과 변치 않을 마음을 약속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 강민규는 다른 여자를 데리고 강심도로 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 은밀한 사진이 아직도 그녀의 휴대폰에 남아 있다.

고시아는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일정만 끝나면..."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고시아의 눈에는 더 이상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강민규, 안타깝지만, 이번엔 그런 기회는 없어.'

회차 2

고시아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은색 폭스바겐을 몰고 M 연구소 기지로 들어섰다.

막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박서연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너 진짜로 신청서 쓰러 온 거야? 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카톡도 몇 번이나 보냈는데, 답장도 없고… 이건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야. 설령 진심으로 이 연구에 참여하려는 거라 해도, 강민규랑은 상의해야 하는 거 아니야?"

고시아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는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 박서연에게 카톡 채팅창을 내보였다.

도발적인 메시지들과 사진은 하루 이틀 된 게 아니었고, 내용도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사진 몇 장을 넘겨 본 박서연은 곧장 휴대폰을 그녀에게 돌려주더니, 팔을 걷어붙이며 씩씩댔다. "이 개자식이! 네가 그때 가지고 있던 특허 아니었으면 그 새끼 회사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겠냐? 그런데 지금 와서 바람질이야?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아주 반 병신 만들어 줄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고시아가 그녀를 막아 섰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당하고도 그냥 넘어가겠다고?"

"그럴 리 없죠!"

고시아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하지만 이걸 까발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저는 강민규가 저지른 모든 짓에 대해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만들 거예요."

박서연은 이 후배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연구에선 천재라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마음씨는 착하고 순수했지만 원칙 하나만큼은 단단히 지키는 타입이었다. 누구든 그 원칙을 건드리기만 하면 반드시 배로 되갚는 성격이었다.

때문에 박서연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신청서 작성은 꽤 순조로웠고 몇 가지 절차와 도장을 밟고 나면 이제 최종 심사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돌아가기 전, 고시아는 학술 세미나에 참석해 회의 자료를 받아오는 임시 업무 하나를 맡게 되었다.

오후 3시 반, 그레이스 호텔에서 회의를 마친 고시아는 서류 봉투를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난치지 말고 얌전히 굴어."

고시아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봤다.

강민규는 한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여자는 서툰 한국어로 달콤하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그녀는 말을 하며 강민규의 목에 팔을 감더니 그대로 입술을 맞췄고, 붉은 입술은 그의 귓불을 스치며 목덜미까지 천천히 미끄러졌다.

강민규는 웃음 섞인 낮은 숨을 내뱉으며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여자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고, 그 손길에는 선명한 욕망과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고시아의 두 눈이 찔리듯 아파왔다.

'이 여자도 같이 다니고 있었구나. 대낮부터 호텔을 들락거려?'

다음 순간, 회전문 너머로 고시아와 강민규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욕정으로 젖어 있었고, 그녀의 눈은 냉소와 조소, 그리고 매정할 정도의 담담했다.

주변의 공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강민규의 품에 안긴 여자도 고시아를 발견했다.

그녀는 고시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꼬리를 당겨 싱긋 웃더니 다시 한번 강민규의 입술에 입을 맞췄는데 보란 듯이 거칠게 키스를 이어갔다.

고시아는 순간 밀려온 역겨움에 머리를 돌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차 문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불쑥 나와 문을 막았다. 뒤따라온 강민규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그녀를 막아섰고, 그의 몸에 밴 진하고 자극적인 향수 냄새가 고시아의 비위를 심하게 자극했다.

"비켜!" 고시아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그의 힘에 가로막혀 끝내 닫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허리춤을 붙잡힌 채 뒷좌석으로 밀려들어갔고, 강민규 역시 뒤따라 차에 올라탔다. 그의 차가운 얼굴엔 다급함이 서려 있었고, 눈동자 속엔 억눌린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시아야, 내가 다 설명할게."

도망칠 공간조차 없어지자, 고시아는 최대한 몸을 옆으로 피하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네 입술에 묻은 립스틱부터 좀 닦고 말해."

강민규의 표정은 순간 어두워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가를 문지르더니, 이내 눈가에 번졌던 당혹스러움도 금세 지워냈다. "마리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투자 때문에 진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어. 그래서 노바 그룹에 협력을 요청한 거야. 수지는 그 그룹 이사장의 딸이고, F국에서 유학 와서 정착하는 중이라, 그냥 좀 적응할 때까지만 도와달라는 부탁이었어. 한국어도 잘 못하고 오늘은 술까지 마셨길래, 그냥 호텔까지 데려다준 거야."

강민규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고 고시아에게 바짝 다가오며 익숙하게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너도 F국 사람들 성격이 좀 자유로운 거 알잖아. 앞으론 조심할 테니까 이제 화 풀어, 응? 내가 다 보상해줄게."

고시아는 고개를 들어 강민규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은 가을바람처럼 싸늘했지만, 말투는 오히려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투자받으려면 그 정도로 밀착해서 도와줘야 한대?"

그녀는 울지도, 투정도 부리지 않았고, 분노에 날을 세워 따지지도 않았다.

고시아는 나른한 솜 같은 말 한마디로 강민규의 모든 변명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렸다.

왠지 모를 허전함이 다시 밀려들자, 강민규는 짜증난 듯 넥타이를 몇 번 당겼다. "시아야, 나도 일 때문에 그런 건데, 이런 일로 문제 삼지 말자, 응?"

그 말에 고시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문제를 삼는 거라고? 내 휴대폰 안에 있는 사진들 전부 네 얼굴 앞에 들이밀어야 뭐가 진짜 문제인지 알겠어?'

수년간 쌓아 올렸던 감정은 지금 이 순간 불에 달군 칼날에 지져진 듯 고통과 함께 그녀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강민규. 만약 이 결혼이 지겨워졌다면 그냥 솔직히 말해. 난 언제든 이혼해줄 수 있어. 절대 매달리지 않을 거니까."

'도대체 왜 굳이 날 바보처럼 여기고 거짓말을 하는 거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민규는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어두웠다. "이혼은 안 돼. 우리 약속했잖아. 문제가 있으면 같이 해결해 나가고 이혼이란 말은 누구도 꺼내지 않기로."

'해결? 바람나서 다른 여자랑 자기까지 했는데 뭘 어떻게 해결하자는 거지?'

고시아는 마치 가시덤불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에 상처가 날 것 같았다.

그 순간, 전화 벨소리가 갑작스럽게 울러 퍼졌고, 강민규는 얼굴을 굳힌 채 휴대폰을 꺼내더니 화면을 보자마자 곧장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고시아는 이미 그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봐버렸다. '앙큼 고양이'

그리고 강민규가 아직 휴대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카톡 알림이 또다시 휴대폰 화면을 밝혔다. 이번엔 '핫베이비'라는 이름으로 온 메시지였다.

"자기야, 나 다쳤어... 너무 아파."

"난 자기 없이 안 돼. 얼른 와."

"피도 나고 있는데...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세 메시지는 모두 프랑스어로 되어있었다.

회차 3

강민규는 고시아가 프랑스어를 못 알아들을 거라 여겼는지, 카톡으로 답장을 보낸 뒤에야 화면을 껐다. "곧 갈게."

"시아야, 나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얼른 가봐야 해. 도와주지 못해도 제발 귀찮게는 하지 마. 얌전하게 있어, 알겠지?"

강민규는 따뜻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빠르게 자리를 떴고, 고시아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산산이 찢긴 가슴은 이제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감각해졌다.

그녀는 자료를 M 연구소에 반납한 후,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 후로 사흘 내내 강민규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시아도 굳이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고시아는 집 안의 짐들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창고에는 지난 세월의 추억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처음 고백받았을 때의 손 편지, 첫 데이트 때 함께 만든 도자기, 별똥별을 보러 산에 올랐을 때 주운 하트 모양의 돌멩이, 그리고 여섯 다발의 사진 액자들... 심지어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초기 모델부터 최신형까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고시아는 기억을 간직하는 걸 좋아했기에 언젠가 그들이 백발이 될 무렵, 함께 웃으며 그 추억들을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지금 와선 그 모든 기억이 웃음거리로 되고 말았다. 고시아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그 추억들을 벽난로에 던져 태워버렸다.

그리고 그 값비싼 선물들, 명품 시계, 다이아 반지와 고급 목걸이... 심지어 결혼반지까지, 그녀는 일일이 사진을 찍어 명품 리세일 샵 대표에게 전송했다.

주얼리장이 텅 비고 나서야 그녀는 새삼 느꼈다. 천만금을 주고도 쌓인 추억이나 정을 살 수 없다지만, 배신 앞에서 가장 저렴한 것, 또한 바로 사랑이었다.

5일 뒤, 기밀 연구 신청서가 승인되었다.

정식으로 기밀 연구에 투입되기까지는 아직 열흘이 남아 있었다.

고시아는 옷을 갈아입고 연구소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 쇼핑몰에 들렀다. 하지만 쇼핑백을 들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던 중, 1층 주얼리 코너 앞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녀를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었던 시어머니 유경자는 친밀하게 박수지의 팔짱을 낀 채 얼굴에는 활짝 핀 꽃 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5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은 그녀의 남편 강민규는 다정한 눈빛으로 박수지에게 다이아 팔찌를 손수 채워주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야말로 진정한 가족처럼 다정했다.

그 팔찌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는지, 유경자는 박수지의 눈썰미를 칭찬하며 블랙카드를 꺼내 계산까지 도맡았다.

하지만 고시아는 그 장면에 코웃음을 쳤다.

그 카드는 그녀의 것이었다.

고시아는 그 카드에 미리 돈을 넣어뒀고, 브랜드 디자인 디렉터와도 절친한 사이였기에 최저할인가로 구매는 물론, 신상품까지 가장 먼저 받아볼 수 있는 혜택도 있었다.

원래는 유경자에게 효심을 보이려, 며느리로서의 예를 다할 겸 준비한 카드였지만 지금 그 카드로 남편과 시어머니가 불륜녀에게 선물을 사주고 있다니.

고시아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직원의 손에서 그 카드를 낚아챘다. "죄송하지만, 이 카드는 지금부터 무효처리 할게요."

직원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고객님, 이건 저희 브랜드의 프리미엄 블랙카드예요. 유효기간도 없고 무효 처리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요?" 고시아는 주저 없이 카드를 반으로 탁 끊어버린 후, 곧장 근처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제 무효로 된 거 맞죠?"

잠시 정적이 흐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은 유경자는 말없이 손을 뻗어 고시아의 얼굴을 후려쳤다.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눈치도 없고, 버릇도 없고! 이런 걸 어디에 내세우겠어!"

강씨 가문은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강민규는 언론에서 '금융계 천재'라 불리는 재벌 2세이다.

그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부터 유경자는 고시아를 단 한 번도 곱게 본 적 없었고, 결혼 후엔 그 태도가 더 악화되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떻게 노력해도, 유경자는 그녀에게 웃음 한번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시아는 강민규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유경자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맞서지도 않았고, 강민규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참아왔던 모든 건,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 1초도 참아 줄 수 없다.

"짝! 짝!" 두 번의 날카로운 뺨 소리와 함께 고시아는 망설임 없이 강민규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그 강민규가? 운성 재계 뉴스에서 거의 신처럼 추앙받는 그 사람이? 공개된 자리에서 대놓고 뺨을 맞았다고?'

"고시아!" 유경자는 팔을 걷어붙이며 다시 한번 고시아의 뺨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고시아는 턱을 살짝 들며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쪽이 저를 한 번 때리면, 저는 당신 아들의 뺨을 두 번 칠 거예요. 어디 한번 해보죠?"

"너, 너..." 유경자는 가슴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민규야, 이 천박한 년 좀 봐!"

고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민규를 바라봤고,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말해봐. 내가 널 때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강민규는 이를 꽉 깨물며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고,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아야, 이제 화 풀렸으면 좀 가만히 있자."

그때, 박수지가 느닷없이 강민규의 품에 안기며 그의 손을 자신의 허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애교가 섞인 프랑스어로 고시아의 난폭함을 불평하기 시작했다.

말끝마다 '자기'라고 부르며 뼈도 없는 듯 강민규의 몸에 바짝 달라붙었다.

강민규 역시 프랑스어로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이국적인 언어로 속삭이는 둘 사이의 대화를 들으며, 고시아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시아는 갑자기 입을 열었고, 완벽한 발음의 유려한 프랑스어가 그녀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비겁하게 남의 남편을 유혹해놓고, 어디서 순수한 척이야? 유부남 꼬셔서 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자기 한 추한 짓은 인정하지 못 해? 프랑스어로 안 되면 영어, 독일어, 일본어… 네가 아는 언어 다 꺼내봐. 난 16개 국어 가능하거든. 뭐든 편한 대로 해봐. 다 맞춰줄 테니까. 난 말싸움으로 지는 법 없거든."

박수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고시아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걸 꿈에도 몰랐던 눈치였다. '강민규 말로는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라며?'

강민규 역시 표정이 확 굳더니, 목소리까지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시아야. 너 언제 프랑스어 배운 거야?"

그 질문은 비수처럼 고시아의 가슴에 꽂혔다.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조소를 흘렸다.

"우리 남편, 정말 나를 많이 사랑했었네?" 고시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 "쇼핑이나 계속해. 난 이만 가볼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고시아는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강민규는 안절부절못하며 고시아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유경자와 박수지가 각각 그의 팔을 붙잡았다.

"민규야, 저 싸가지 없는 년이랑 당장 이혼해! 재수없는 년, 감히 널 때려?"

유경자는 이미 수십 번도 넘게 이런 말을 해왔고, 강민규는 늘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그 말이 너무 불쾌하게 들려왔다.

그는 두 사람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말했다. "그건 우리 둘 문제예요." 그리고는 곧장 고시아를 뒤쫓아갔다.

그리고 고시아가 차에 올라타기 전에 그녀를 따라잡았다. "시아야."

손목에 닿은 따뜻한 온기는 이제 독사의 혀에 쓸린 듯한 혐오감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았고, 고시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강민규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강 대표님, 그 앙큼 고양이랑 계속 쇼핑하시지 않아도 되겠어요?"

강민규의 표정은 순간 어두워졌다. "박수지는 그냥 동생 같은 애야. 왜 쓸데 없이 질투를 하고 그래? 제발 철 좀 들어! 그리고 꼭 이렇게 밖에서 사람 난처하게 굴어야겠어?"

고시아는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이게 다 내 오해고 내 잘못이라고?'

"그러니까 강 대표님의 뜻은, 앞으로 내가 불륜 현장을 직접 목격해도 강씨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서 손수 당신들을 위해 커튼을 쳐주고 문 앞에서 망이라도 봐줘야 한다는 뜻이야?"

강민규는 고시아의 손을 더욱 꽉 움켜쥐었고, 눈빛에는 거의 불꽃이 튈 듯한 분노가 맺혔다. "내가 말했잖아. 수지는 그냥 동생일 뿐이라고!"

"동생일 뿐이라고?" 고시아는 비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요염하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나도 오빠 하나 찾아야겠네. 그리고 니가 박수지랑 했던 모든 짓들, 나도 그 오빠랑 하나하나 다 해볼 거야. 그땐 너도 질투 같은 거 하지 말고, 어른답게 굴자. 우리 남편은 그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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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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