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7년간 그림자처럼 내조하며 모든 걸 바쳤다. 내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훔친 약혼자는 업계 최고의 건축가가 되었다.

그런 그가 재벌 상속녀와 결혼하겠다며 나를 버렸다.

심지어 그녀 아버지의 장례식에 나를 불러내, 자신의 오랜 연인이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척 연기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에는 미안함 대신 오만함이 가득했다. 내 7년의 헌신은 그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버려진 그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초예현 씨, 나와 결혼합시다."

어릴 적 내 뒤만 쫓아다니던 꼬마, 지금은 IT 대기업의 최연소 CEO가 된 권천윤이었다.

제1화

초예현 POV:

7년 동안 그림자처럼 내조하며 그의 성공을 위해 모든 걸 바쳤던 약혼자가, 내게 이별을 고하며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나는 익숙하게 스케치북을 펼쳤다.

손끝으로 연필을 돌리며, 한범준의 다음 프로젝트 시안을 떠올렸다.

그의 건축사무소는 조용했다.

점심시간도 훌쩍 지났는데, 그의 메시지를 기다리며 텅 빈 책상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이 작게 울렸다.

친구들의 단체 채팅방이었다.

'초예현, 너 요새 통 얼굴 보기 힘드네!'

'범준 오빠랑 결혼 준비하느라 바쁜 거야?'

'결혼식 날짜 잡혔으면 빨리 공유해줘! 다들 기다리고 있어!'

친구들의 메시지를 읽으며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직 날짜를 잡았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모든 것이 확정된 듯 느껴졌다.

나는 한범준을 위해 내 모든 것을 희생해왔다.

대학 시절부터 7년간의 연애.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믿었기에, 나는 기꺼이 그의 그림자가 되었다.

내 아이디어를 그의 이름으로 발표했고, 내 디자인을 그의 프로젝트에 녹여냈다.

그는 승승장구했고, 나는 그 뒤에서 조용히 빛을 발했다.

사람들은 내가 이 모든 걸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네 헌신은 정말 대단해.'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어?'

모두가 나를 칭찬했지만, 그들은 내 희생이 나 스스로 만든 감옥이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나는 늘 한범준의 그림자였다.

그가 빛나면 나도 행복했다.

그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라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범준은 나에게 청혼했다.

업계 거물인 공세희의 아버지에게 사무실을 물려받기로 약속받은 그 날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 모든 희생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오랜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고 생각했다.

나의 헌신이 마침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공세희의 아버지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한범준은 달라졌다.

그의 눈빛은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는 내게 통보했다.

"예현아, 미안하지만 우리 결혼은 없을 것 같아."

내 심장이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선생님의 유언이셨어. 사무소의 완전한 상속을 위해 공세희와 결혼하라고."

그의 말은 내 존재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나는 그에게 희생한 7년의 세월에 대해 물을 자격도 없었다.

그는 내가 이 모든 걸 이해하고 기다려줄 거라고 착각했다.

내 헌신은 그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마치 오래된 가구처럼, 늘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겠지.

나는 그의 눈에서 미안함 대신, 오만함을 보았다.

내 사랑이 그에게는 그저 성공의 발판일 뿐이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내 모든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렇게 허탈하게 앉아 있을 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초예현 씨 되십니까?"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음색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맞는데요."

"권천윤입니다."

권천윤.

그 이름에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릴 적 동네 골목을 누비던 개구쟁이.

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마.

아무리 장난을 쳐도 묵묵히 받아주던 착한 아이였다.

집안끼리도 친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꿉친구가 되었다.

그는 늘 내 편이었다.

내가 울면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고, 내가 웃으면 따라 웃던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라면서 달라졌다.

말수가 적고 냉철해졌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IT 대기업의 최연소 CEO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우리 동네를 떠나 서울로 유학을 간 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한범준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와의 관계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고향은 나에게서 점점 잊혀져갔다.

권천윤의 전화는 정말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여전히 냉철한 사업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범준 씨와의 결혼이 파토 났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그는 돌직구를 날렸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 소문이 벌써 그렇게 퍼졌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렸다.

하지만 그는 내게 따질 자격이 없었다.

아니, 그 어떤 누구도 내게 따질 자격은 없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차분하게 나왔다.

"업계가 좁아서요. 그리고… 당신은 늘 저보다 한 발 늦었으니까요."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여전히 예리하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권천윤이었다.

"네, 사실이에요."

나는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그럼, 제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때가 된 것 같군요."

그의 목소리에 알 수 없는 흥미가 섞여 있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갑자기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듯 느껴졌다.

"제안이요?"

나는 되물었다.

"네, 전략적 결혼."

그의 말은 너무나 담담했다.

나는 그 순간, 그의 제안이 나에게 유일한 탈출구임을 직감했다.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조건은요?"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는 IT 업계의 냉철한 사업가다.

아무런 대가 없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저도 제 후계자 자리를 굳건히 할 명분이 필요합니다. 초예현 씨의 능력과 배경이 그에 적합하고요."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그는 언제나 효율적이고 계산적이었다.

"그럼, 당신은 제게 무엇을 해줄 수 있죠?"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것 없는 사람처럼 물었다.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평온했다.

그의 제안은 내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모든 걸요."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한범준 씨에게서 완전히 벗어나, 당신의 이름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 이름으로 성공하는 것.

그것만이 나를 배신한 한범준에게 복수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내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다른 조건은 없습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그의 제안은 너무나 완벽했다.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회차 2

초예현 POV:

나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그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 알 수 없었다.

"하나 더 있습니다."

권천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우리 결혼은 계약 결혼이지만, 밖에서는 완벽한 부부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의 말은 예상했지만, 막상 들으니 낯설었다.

"사람들은 내가 재벌가의 사위가 되는 것을 원합니다. 당신은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분명히 내 질문을 미리 예상한 듯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완벽한 며느리를 원하죠."

"그런데 왜 하필 저인가요?"

나는 물었다.

"권천윤 씨는 저를 오랫동안 보지 않았나요. 제가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텐데요."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당신이 더 적합합니다."

"무슨 뜻이죠?"

"난 어릴 때부터 가족에게 결혼을 강요받았습니다. 어차피 사랑 없는 결혼을 해야 한다면,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과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권천윤다운 사고방식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어두워진 도시의 불빛들이 현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랑 없는 결혼은 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권천윤은 잠시 침묵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진지했다.

"하지만 결혼은 감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였다.

"알겠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미묘한 안도감이 스쳤다.

"내일 오전 10시에 집 앞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잠깐만요! 저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나는 급하게 말했다.

"며칠 정도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3일 후 오전 10시. 그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연락처를 확인했다.

권천윤.

나는 그의 이름을 '내 남편'이라고 수정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한범준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는 첫걸음.

나는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범준은 여전히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였다.

그는 공세희의 병간호를 핑계로 집을 비웠다.

나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미련은 이미 바닥났다.

나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결혼식 청첩장 모조리 회수해 줘."

친구들은 놀라서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너 청첩장 디자인 직접 만들었잖아!"

"그게 어때서? 그냥 다 버려줘."

나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들은 내 말에 당황한 듯했다.

'초예현이 한범준을 버리다니.'

아무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한범준에게 헌신했는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변했다.

아니, 변해야만 했다.

나는 내일 청첩장을 회수하러 가는 친구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할 생각이었다.

'내 결혼 상대가 바뀌었다고. 그것도 엄청난 재벌이라고.'

그들은 분명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시선에 연연하지 않았다.

나는 오직 내 앞날만 생각했다.

그날 저녁, 한범준이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은 깔끔했다.

그는 공세희의 병실에서 곧장 온 듯했다.

"예현아, 내가 할 말이 있어."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우리 결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감정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공세희 씨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어."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당분간은 공세희 씨 곁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아."

그는 내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내가 평소처럼 화를 내거나 울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초예현 씨는 알겠지만, 공세희 씨는 지금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내가 그녀의 곁을 지켜줘야 해."

그는 변명처럼 들리는 말을 덧붙였다.

"네가 날 이해해 줄 거라고 믿어."

나는 그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

"그래서요? 제가 뭘 해드려야 하죠?"

내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내 반응에 당황한 듯했다.

"예현아, 네가 이해해주면 좋겠다."

"제가 뭘 이해해야 하죠? 당신이 다른 여자에게 가는 걸 이해하라는 건가요?"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죠, 한범준 씨?"

그는 다시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뭘 원하냐니…."

그는 말을 더듬었다.

"그냥 네가 날 이해해주고 기다려주면…."

"기다리요? 뭘요?"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공세희 씨와 결혼해서 기업을 물려받고, 그 후에 저에게 돌아오라는 말인가요?"

내 말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현아, 그게 아니…."

"그래서요? 저보고 그분 장례식에 참석해달라고요?"

내가 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요?"

나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아버님 장례식은 내일모레야. 네가… 혹시라도 얼굴을 비춰준다면…."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제가 왜요?"

내 질문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했다.

내가 그의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했다.

그는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예현아, 아버님은 너를 참 좋아하셨어."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 디자인 감각을 칭찬하셨고, 너를 참 예뻐하셨어."

나는 그제야 생각에 잠겼다.

공세희의 아버지는 내게 잘해주셨다.

몇 번의 만남이었지만, 그는 내게 진심으로 호의를 보였다.

그의 죽음은 내게도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한범준에 대한 배신감에 가려져 있었다.

'내가 그분께 작별 인사는 드려야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참석하죠."

내 대답에 한범준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감이 스쳤다.

"고마워, 예현아."

그 순간, 나는 그의 눈에서 비로소 진심을 보았다.

하지만 그 진심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세희를 위해 나를 이용하려 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이용당하기로 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옷장으로 가 가장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를 꺼냈다.

"같이 가죠."

내 말에 한범준은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없이 집을 나섰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나는 더 이상 그의 그림자가 아니게 될 테니까.

나는 새로운 시작을 꿈꿨다.

한범준은 내게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었다.

그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나는 내일 공세희의 아버지 장례식에서, 한범준과 완벽하게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권천윤이라는 새로운 남자와 함께, 내 인생의 다음 챕터를 시작할 것이다.

회차 3

초예현 POV:

장례식장은 인파로 북적였다.

고인이 얼마나 존경받는 사람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한범준의 팔짱을 끼고 조심스럽게 홀 안으로 들어섰다.

고인의 영정 사진 앞에서 헌화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공세희 씨는 상복을 입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옆에서 그녀를 부축하고 서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공세희 씨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빛은 충격과 분노로 일렁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한범준에게 달려들었다.

"오빠… 오빠는 대체 어디 있었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녀는 한범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한범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나를 향했던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없었다.

오직 공세희만을 위한 눈빛이었다.

그는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예현아, 잠시만 저쪽에 가 있어줄래?"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나는 조용히 장례식장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혼자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조문객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한범준과 공세희를 멀리서 지켜봤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자격이 없었다.

아니, 더 이상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조문이 끝나고, 공세희의 어머니가 내게 다가왔다.

"예현 씨, 와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따뜻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범준 씨와는 잘 지내고 있나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애써 미소 지었다.

"네, 덕분에요."

"우리 사위가 예현 씨를 참 아꼈는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범준 씨가 우리 딸 곁을 지키겠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요."

나는 그녀의 말에 순간 얼어붙었다.

'사위?'

그녀는 이미 한범준을 사위로 여기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약속한 사이였다.

"예현 씨 같은 착한 아가씨가 범준이를 이해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속은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이해? 이해라니….'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침묵을 공세희의 어머니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예현 씨, 혹시 범준이한테 서운한 거라도 있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애써 대답했다.

"범준이가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 아이인지 예현 씨도 잘 알잖아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공세희가 지금 많이 힘들어해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범준이가 공세희 곁을 지켜주는 게 당연하죠."

내 말에 공세희의 어머니는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정말 예현 씨는 마음이 넓네요. 범준이에게도 제가 말해둘게요."

그녀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음이 넓다니….'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나는 그저 체념했을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한범준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예현 씨, 범준이가 예현 씨를 얼마나 아꼈는지 몰라요."

갑자기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현 씨가 범준이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범준이가 늘 말했어요."

그녀의 말은 내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나를 아꼈다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나를 아꼈다면,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갈 수 있었을까?'

내 눈은 흔들렸다.

"정말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네, 그럼요. 예현 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준이가 눈을 못 뗐어요."

그녀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예현 씨의 디자인 실력을 칭찬하고, 예현 씨의 아이디어를 누구보다 높게 평가했어요."

그녀의 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알던 한범준은 나와 공세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기적인 남자였다.

"범준이는 예현 씨를 정말 특별하게 생각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한범준의 다른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내가 그의 그림자로 지내는 동안, 그는 나를 정말 아꼈을까?

내 헌신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동시에 나를 존중하고 사랑했을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럼 왜 나를 버렸지?'

나는 그 질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사랑했으면서, 왜 그렇게 쉽게 나를 포기했지?'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더 이상 그에게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의 사랑이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

영원히.

시간이 흐르고, 조문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한범준은 마지막까지 공세희 곁을 지켰다.

그는 공세희의 손을 잡고 흐느끼는 그녀를 위로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그리고 조용히 장례식장을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나를 감쌌다.

나는 장례식장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곧 한범준이 차를 몰고 내 앞에 섰다.

나는 익숙하게 조수석 문을 열려 했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유리창이 천천히 내려갔다.

나는 차 안을 들여다봤다.

공세희 씨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빨개진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초예현 씨, 우리 오빠를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마."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게 차갑게 명령했다.

"이제 그만 사라져 줘."

내 뒤에서 공세희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희야, 예현 씨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공세희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엄마는 가만히 있어! 오빠는 이제 내 남자라고!"

그녀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한범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는 나를 외면했다.

아니, 나를 버렸다.

이것이 우리의 끝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내 감정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행복하세요."

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나는 뒤돌아섰다.

더 이상 그들을 볼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정리했다.

나는 이제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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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그녀, 어린 시절 친구의 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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