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최순옥의 손을 꼭 잡은 민시월의 표정은 김미자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밝았다. "할머니, 기침 좀 하시네요. 제가 이모님에게 배숙 레시피 알려 드릴게요. 끓여 드시면 좀 나으실 거예요."
최순옥은 말 잘 듣고 사려 깊은 손주 며느리를 제일 좋아했다. "아가, 어쩜 이리 마음씨가 고울까? 글쎄... 난 이제 나이가 꽤 들어서 건강이 좋지 않아. 늙은 할미를 관심하는 건 너뿐이구나."
무시 당한 김미자는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어머, 너 대체 뭐 하는 거니? 이미 이혼한 마당에 손주 며느리 노릇이라니? 일부러 어머님에게 잘 보여서 우리 집안 돈 떼먹을 속셈 아니니?"
최순옥이 끼어들었다. "시월이는 우리 집안 사람이 된 이후부터 늘 성실하고 부지런했어. 욱이가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게 누군지 잊은 게냐? 나나 어미한테나 늘 얼마나 깍듯하게 대했는데. 2년 동안 고생한 걸 생각해서라도 예쁘게 봐줘야지, 어미는 왜 이리 심술궂은 게냐?"
"어머님! 쟤는 별볼일 없는 민씨 가문 여자예요. 왜 계속 감싸주시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김미자는 속상한 듯 발을 굴렀다.
그리고는 민시월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 말 틀렸어요? 쟤처럼 막돼먹은 애가 어떻게 우리 아들과 결혼할 수 있어요? 어머님 아버님만 아니었어도 절대 전 이 결혼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게다가 결혼한 이후로는 우리 집안에서 호강했잖아요. 우릴 존중하는 건 당연하죠.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 게다가 2년이 되도록 애도 안 생겼어요. 증손주 보고 싶으시죠? 아마 그거 때문에 이혼하는 걸 수도 있어요."
최순옥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미야, 말 조심 하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김미자는 주춤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사실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다행이죠, 뭐. 애라도 있었으면 이혼하는 게 더 어려웠을 테니까. 어차피 그렇게 낳은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최순옥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그녀는 민시월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무시하렴, 아가. 원래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잖니. 할미가 부탁한다. 이혼 다시 생각해 봐. 내가 살아있는 한 너 말고 다른 손주 며느리를 들일 생각은 없다. 우리 부부가 네게 얼마나 고마운 지 몰라. 욱이 태도는 너무 신경 쓰지 말아.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최순옥의 말에 김미자는 어이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머님, 대체 왜 그러세요? 왜 두 분은 항상 민시월을 감싸주는 거냐고요! 젠장! 민시월, 이혼한 거 잊지 마. 너희 두 사람은 미래가 없어."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는 민시월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최순옥은 여전히 침착했다. "어미야, 이제 그만해. 애들 결혼 생활에 네가 뭐라 할 자격은 없어. 간섭하지 마. 며느리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계속 그렇게 할 거면 나가. 지금 당장!"
민망함과 분노로 얼굴이 벌개진 김미자는 이를 악물며 입을 다물었다.
최순옥은 다시 민시월을 향해 물었다. "아가, 네 생각은 어떠니?"
그 순간, 민시월의 뺨 위로 두 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님...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차욱이 신채희와 한 침대에 있는 걸 봤어요. 둘이... 그러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욱이의 태도도... 너무 차갑고 무심했어요. 더 이상 이 결혼을 유지할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놀란 듯 얼굴이 창백해진 최순옥이 대답했다. "이 모든 건 욱이 잘못이야."
그녀는 민시월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2년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김미자가 큰 소리로 정적을 깼다. "아니, 신채희 그 더러운 계집애가 돌아왔다고? 말도 안 돼! 어머님, 제가 가서 그 여자를 만나야겠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녀는 재빨리 가방을 집어들고는 거실을 뛰쳐나갔다.
민시월은 눈물을 닦으며 안도했다.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아가, 이제 이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으마. 시간되면 꼭 할미 보러 와. 그걸로 이 할미는 충분하단다."
최순옥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차욱이 회복할 수 있었던 건 민시월의 공이 컸다. 그녀의 헌신과 희생을 옆에서 지켜보고는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민시월은 최순옥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럼요. 또 올게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잊지 말고 꼭 제가 알려드린 레시피로 드셔보세요."
뭔가 결심을 내린 듯한 최순옥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떠났다.
한편 최순옥은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집사에게 지시했다. "차욱하고 다른 애들 내일 12시까지 오라고 해."
"네, 노부인."
저택 현관을 나서자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사모님, 어디로 모실까요?"
그는 민시월을 여전히 이 집안의 여주인으로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었다.
휴대폰을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친구 임연수였다. "시월아, 오늘 밤에 글래머 클럽 갈래? 차욱이 오늘 신채희 환영 파티 연다는데? 꽤 큰 파티일 거야. 가서 한바탕 혼쭐 좀 내주자."
민시월은 빠른 회답을 했다. "그래."
곧바로 임연수의 답장이 도착했다. 물음표 달랑 한 개였다. 생각보다 빠른 동의에 놀란 모양이었다.
"나 이혼했어. 이제 싱글이야."
잠시 아무 말 없던 채팅 창에 온갖 흥분을 나타내는 이모티콘이 가득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딱 기다려!"
흥분한 친구의 모습이 재미있었던 그녀는 스프랜더 빌딩 위치를 전송한 뒤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스프랜더 빌딩으로 가주세요."
이 빌딩은 수도에서 가장 하이엔드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럭셔리 쇼핑몰이었다.
민시월이 도착하자마자 직원들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M, 오랜만이야. 디자인 스케치를 전달하러 온 거야?"
호화로운 드레싱 룸에 장식된 다이아몬드는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어 더욱 화려해 보였다.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엘바는 그녀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다 아파. 왜 예쁜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 거야? 피어나면 누구보다 화사할 꽃봉오리인데."
민시월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그럼 오늘, 엘바님의 매직 체인지 부탁해요~"
그녀의 반박을 예상했지만 의외의 대답에 엘바는 깜짝 놀랐다. "어...? 혹시... 진짜 마음 먹고 온 거 맞아? 어머! 나한테 오길 잘했어!"
엘바는 디자인 초안 건을 제쳐두고 그녀를 서둘러 의자로 안내했다.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 오늘 넌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될 거야."
그녀는 메이크업 브러시를 손에 들고 작업에 들어갔다.
한창 메이크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 임연수가 도착했다.
그녀 역시 엘바를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고개 인사를 한 뒤 바로 민시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월의 여신이 돌아온 걸 축하해. 너의 1번 사신 임연수가 왔으니 말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