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김하늘과 이휘찬은 사귄지 2년이 되었다.
오늘,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이휘찬은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했다며 그녀를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초대했다.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그녀를 소개시켜주겠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 시간 전, 장례식장에 한 여자가 찾아왔다.
이휘찬은 그녀를 보자마자 얼굴빛이 확 달라지더니, 김하늘에게 급한 일이 있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그 여자를 따라 급히 자리를 비웠다.
"하늘아, 그쪽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빨리 휘찬이가 어디 있는지 찾아봐. 휘찬이 삼촌이 곧 도착하신대."
이휘찬의 어머니인 나미영은 아들이 데리고 온 여자친구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안이 평범한 데다 여우처럼 남자를 홀리게 생겨 그녀와 함께 손님을 맞이하기에는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김하늘은 고개를 끄덕인 뒤, 홀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 이휘찬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방 안은 아주 조용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곳을 찾아보려던 순간, 그녀는 욕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김하늘은 하이힐을 벗고 기척을 죽인 채 반쯤 열린 욕실 문 앞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문틈 사이로 이휘찬이 한 여자의 허리를 움켜잡고 그녀를 세면대에 밀어붙인 채 격하게 몸을 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욕실 안에서는 물소리와 함께 뜨거운 숨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흘러나왔다.
"내가 돌아오지 말아야 했어."
그녀는 흐느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네 욕구를 채워주는 건 나야, 근데 왜 네가 다른 여자와 결혼 하늘 걸 봐야 하는 건데! 놔!"
"네가 먼저 연락도 없이 사라진 거잖아. 난 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줄 알고 걔를 찾은 거야."
이휘찬은 그녀를 꽉 껴안으며 달래듯 속삭였다.
"걘 그냥... 내 심심함을 달래주는 대체품일 뿐이야."
"그럼 걔랑 헤어져."
오예서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감정에 북받친 듯 가슴을 들썩였다. 이어 그녀는 눈물이 글썽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덧붙였다.
"난 예전의 내가 아니야. 지금은 오씨 가문의 딸이란 말이야. 나 이제 네 아내가 될 자격이 있어."
이휘찬은 순간 망설였다.
그는 김하늘과 2년을 함께 했고, 그 사이에 생긴 감정은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서야,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난..."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욕실 문이 열렸다.
김하늘이 체념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내가 헤어져줄게."
김하늘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나타내자 이휘찬은 깜짝 놀랐다. 오예서의 몸속에 박혀 있던 그것이 순간 축 늘어졌고,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늘아..."
김하늘은 두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밀착된 하체를 스치듯 바라봤다.
이휘찬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 무심했다. 하지만 눈가가 붉어 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입을 열었다.
"결혼하면 그때 몸을 주려고 했어. 근데 우리가 함께한 2년, 너에게 난 그저 대체품에 불과한 존재였을 줄은 몰랐어."
김하늘은 밖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바지부터 입어. 네 삼촌이 왔으니까."
이휘찬은 허겁지겁 바지를 끌어 올리더니 옆에 있는 오예서의 치마를 대충 내려주고는 그녀를 홀로 남겨둔 채 허둥지둥 김하늘을 쫓아갔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한참 망설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예서는... 내 첫사랑이야. 우리에겐 행복한 시절이 있었고, 한 때였지만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었어.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돌아오는 바람에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김하늘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뒤에 서 있는 오예서를 잠시 응시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지금 까지 많을 걸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네 배신으로 인해 너한테 낭비한 2년이란 시간, 돈으로 환산한다면 네 빚을 갚기엔 충분할 거야. 우리 깨끗하게 헤어지자."
"하늘아, 난 너랑 헤어질 생각이 없어."
이휘찬이 서둘러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오예서의 유혹에 빠져 그녀를 품에 안고 있을 때조차 김하늘과 헤어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니, 적어도 오늘까지는 네 여자친구로서의 역할을 할게."
그 말을 마치고 김하늘은 걸음을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녀는 순식간에 모든 감정을 감춘 채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 내더니 입가를 끌어 올려 자연스런 미소를 지었다.
대학교 2학년 때, 해외에서 돌아온 그녀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때, 이휘찬이 등록금과 기숙사비는 물론, 학원비까지 모두 부담해 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다양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강하늘은 그의 구애를 받아 들였고 조용히 자신을 감추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여자친구가 되어 무슨 일이든 그의 뜻에 따랐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도저히 잠자리 까지는 허락할 수 없었다.
하여 그녀는 혼전순결을 핑계 삼아 그 동안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오늘, 이휘찬이 갑작스레 그녀와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그녀의 몸을 너무 탐했던 나머지 이성을 잃은 채 섣불리 결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휘찬의 배신으로 그녀는 원하던 대로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었다.
바람을 핀 그가 전적으로 잘못을 했기에 그녀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의 곁을 떠날 수 있었다.
심지어 갚아야 할 빚을 모두 갚았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회차 2
위 층에서 꽤 오래 머무른 탓에 기다리다 못한 나미영이 계단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늘아, 휘찬이는 찾았어?"
"네. 찾았어요 아줌마. 금방 내려갈게요."
이휘찬은 조문객들이 곧 도착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와 실랑이를 벌일 수 없었고 오예서는 이곳에서 입을 열 자격조차 없었다.
그렇게 셋이 1층으로 내려와 정원으로 향했고 마침 저택 대문 밖에 검은색 고급세단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김하늘은 이휘찬의 넥타이가 한쪽으로 삐뚤어지고 단추도 풀려 있는 걸 눈치채고, 마지막 호의를 베풀고자 그의 옷차림을 정돈해 주었다.
"형, 형수."
갑자기 깊고 매혹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김하늘의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시선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난히 강렬하고 어둡게 빛나는 그 두 눈에 사로잡혔다.
이곳에서 그녀를 마주 칠 줄은 몰랐다는 듯, 그의 눈빛 깊숙이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더니, 이내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히자 김하늘은 숨이 막혀왔다. 이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얼굴이 달아 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2년전, 이유조차 가르쳐 주지 않고 자신을 떠났던 전 남친을 이씨 어르신의 장례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심지어 다시 만난 그의 모습은 이토록 세련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나미영이 이도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 도착하고 너만 기다리고 있었어.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이휘찬의 옆을 지나던 이도준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온 몸에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물었다.
"여자 친구야?"
이휘찬은 가늘게 떨리는 김하늘의 손을 꽉 잡으며 대답했다.
"네."
그 대답에 이도준은 코웃음을 치더니 아무 말 없이 둘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가문에 걸맞지 않는 여자를 데리 왔다는데 대한 조소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이도준이 멀어지자 이휘찬이 낮게 물었다.
"너, 손을 왜 이렇게 떠는 거야?"
김하늘은 숨을 가다듬으며 대충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너 때문에 화가 나서 그래, 나 지금 심장이 아플 지경이야."
변명하고 싶었지만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
"근데, 방금 저 사람은 누구야?"
김하늘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삼촌이야."
김하늘은 잠시 멈칫하더니 순간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런 우연이..."
"우연? 뭐가?"
"차 사고로 죽은 전 남친이 네 삼촌하고 꼭 닮아서 그래."
그 까칠하고 맨날 사고만 치며 겨우 복싱으로 간간히 살아가던 남자, 낡은 원룸에서 그녀의 목을 조른 채 거의 질식 할 때까지 거칠게 그녀의 몸을 탐하던 그 남자, 실종된 지 2년 만에 이휘찬의 삼촌으로, 그것도 진정한 재벌의 모습으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쓰레기 같은 새끼!'
이휘찬은 김하늘의 과거를 전혀 몰랐기에 그녀의 말에 순간 당황하며 살짝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조문객들이 영안실로 모두 들어가자 이휘찬은 김하늘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장례식장에 들어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일단은 그냥 내 옆에 있어. 나머지 이야기는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난 뒤에 하자."
아무래도 이휘찬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오예서가 옆에서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란을 만들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김하늘이 이씨 가문의 미래의 며느리 신분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음을 조문객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이휘찬에게 이끌려 다니며 이씨 가문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경멸의 시선과 험담에도 그녀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김도준 앞에 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금 전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 속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2년전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던 그 김도준이 현재, 진씨 가문의 딸과 정략 결혼을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두 사람 모두 재벌가 출신이고 모두 사생활이 깨끗하며 두 가문이 협력하면 사업적으로도 큰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며 둘을 천생연분이라 치켜 올렸다.
그러나 김하늘은 그 말들을 듣자 속이 뒤틀리며 구역질이 밀려왔다.
회차 3
그녀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을 꾹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휘찬의 매무새를 다시 한번 다듬어 준 뒤, 그의 팔짱을 끼고 이도준에게 인사했다.
"삼촌, 안녕하세요. 저는 휘찬이의 여자친구 김하늘입니다."
김하늘이 손을 내밀자, 이도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굳은 표정에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악수를 받아줄 의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로 있었다. 이도준의 이 행동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하늘이 이휘찬의 여자친구가 될 자격이 없음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삼촌?"
김하늘은 정중한 미소를 유지하며 다시 불렀다.
불과 5분 전만 해도 그녀는 이휘찬의 여자친구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도준을 마주한 순간, 그 소름 끼치는 시선과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이 남자가 있는 한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아직은 이휘찬의 여자친구로 남아야만 했다.
얼마 전 가문으로 돌아온 이도준의 행동에 나미영도 속이 시원했다. 적어도 이휘찬의 결혼 문제만큼은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으니 말이다.
이도준이 끝까지 악수를 거부하고 그녀의 신분도 인정하지 않자, 김하늘은 애절한 눈빛으로 이휘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휘찬은 김하늘이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지, 그리고 오늘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며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이도준에게 말했다.
"삼촌, 어쨌든 하늘이는 제 여자친구예요. 저를 봐서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시는 게 맞지 않나요?"
이도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흘렀다. 그의 시선이 김하늘의 옆모습과 그녀의 허리를 감싼 이휘찬의 손에 머물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너, 미친거 아니야? 아무 여자나 데려와 여자친구라고 하다니."
이휘찬이 분노로 가득 차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김하늘이 그의 가슴을 토닥였다.
다른 여자의 향수 냄새를 꾹 참으며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휘찬아, 난 괜찮아. 너만 날 이해해주면 돼. 어차피 내가 사랑하는 건 네 가족이 아니라 너니까."
김하늘은 지난 2년간 이휘찬을 상대하기 위해 이런 가식적인 말과 행동을 수없이 반복해왔기에 아주 능숙했다.
이휘찬의 죄책감은 더 깊어졌다. 그는 김하늘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알아.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이도준이 비웃음을 터뜨리며 조소를 띤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정말 그 여자에 대해 잘 알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휘찬이 단호하게 받아쳤다.
"삼촌, 오늘 좀 지나치신 것 같아요. 선 좀 지키시죠."
평소 이도준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고 더구나 공개적으로 여자한테 굴욕을 줄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행동은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 붙자 이휘찬의 아버지 이재혁이 호통쳤다.
"체면 깎는 행동은 적당히 해! 얼른 와서 아버지한테 절이나 올려."
김하늘은 눈물을 닦는척 하며 이휘찬을 살짝 밀며 말했다.
"가 봐."
이휘찬은 그제야 마지 못해 정원을 떠났다.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느라 온 가족이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고, 밤이 깊어서야 조문객들이 모두 떠났다.
김하늘은 오늘 하루 종일 출세에 눈이 먼 야먕녀를 자처하며 온종일 분주히 움직이다 이제 겨우 물 한잔 마실 여유를 가졌다.
그때, 오예서가 다가오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섹스를 하는 걸 보면 당연히 휘찬이한테 이별을 통보 할 줄 알았더니, 정작 헤어질 용기는 없나봐? 이씨 가족들 앞에서 가식을 떠는 게 너무 대단하더라고. 역시 휘찬이의 돈과 권력은 차마 포기하지 못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