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생일 날.

김이진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은 케이크를 샀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택시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던 그녀는 집까지 달려가야만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거실에 들어 선 그녀는 말도 없이 방문한 시어머니 소미연을 마주쳤다.

김이진의 처참한 꼴을 본 소미연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욕을 퍼부었다. "이 밤중에 집에도 안 들어오고 어딜 싸돌아다녀! 어머님이 아니었으면 너 같은 건 우리 서씨 가문에 시집을 오지도 못했을 거다! 그런데, 결혼한 지 2년이 다 되도록 아이 하나 낳지 못하다니! 너는 그딴 식으로 은혜에 보답하는 거니?!"

김이진은 소미연의 비난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소파 옆에 놓인 수건을 집어 들고 머리를 닦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결혼한 지 18개월 동안, 이준 씨가 집에 들어온 게 며칠이나 될까요. 전 혼자서 임신할 능력은 없는 걸요?"

소미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당장 이준이 불러오지 못해? 아내가 되어 가지고 남편 비위 좀 맞춰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소미연의 말에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김이진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거의 2년이 되어 가는 결혼 생활 동안, 그녀는 시어머니의 비난에 지칠 대로 지쳤다.

소미연은 옆에서 쉴새 없이 떠들었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김이진의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강수빈이 방금 전 올란 SNS를 보았던 것이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서 당황했어. 하지만 내가 필요할 때마나 내 앞에 나타나는 사람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사진 한쪽 구석에 있는 검은색 롤스로이가 눈에 들어왔다. 김이진이 그게 서이준의 차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전국에 단 한 대밖에 없는 한정판 차였기 때문이다.

강수빈의 아버지는 서이준을 구하다 폭발 사고로 사망했고, 그 후 서씨 가문은 강수빈을 보물처럼 아꼈다.

둘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뭔가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

가슴이 답답해진 김이진은 소미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머님, 그렇게 손자가 보고 싶으시면 강수빈 씨더러 낳아달라고 하세요."

"너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늙은이가 너와 이준이의 결혼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너한테는 기회조차 없었어!" 화가 난 소미연은 옆에 놓인 도자기 꽃병을 집어 들더니 김이진을 향해 던졌다.

김이진은 미처 피하지 못했고 꽃병은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맞추고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김이진은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꽃병이 작아서인지 다행이 피는 나지 않았다.

생일날 피까지 봤다면 정말로 비참했을 것이다.

소미연은 김이진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여기서 나랑 말다툼할 시간에, 남편의 마음을 되돌릴 방법이나 배우는 게 좋을 거다!"

말을 마친 소미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 떠났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김이진은 정신을 차렸다.

텅 빈 거실에 홀로 남겨진 그녀가 더욱 외로워 보였다.

지난해 그녀의 생일, 그때는 둘이 막 결혼을 했을 때였다.

서이준은 그녀를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고, 그녀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키스 하며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서이준은 그녀에 대한 불 같은 사랑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김이진은 확신 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이다. 적어 그때 그 순간 만큼은...

그녀는 그에게 빠져들었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계약 결혼 속에서 사랑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하지만 빠르게 찾아 온 그 사랑은 빠르게 사라졌다. 결국 제자리에 남은 사람은 그녀 혼자뿐이었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이진은 본능적으로 전화를 끊었고 그러자 이내 상대방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상대방은 바로 물었다. "여보세요, 서이준 씨 아내분 되시나요? 저희는 시립 병원 응급실입니다. 서이준 환자분께서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오셔서…"

김이진은 강수빈이 올린 SNSN를 떠올리며 의사의 말을 잘라 버렸다. "죄송하지만, 전 시간이 없습니다. 그 사람 여자친구한테 연락해 보세요."

강수빈이 서이준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니, 그를 돌보는 의무도 강수빈의 몫이라 생각했다.

의사의 목소리가 더욱 엄숙해졌다. "안 됩니다. 환자분께서 과다출혈로 생명이 위독한 상황입니다. 반드시 직계 가족분께서 오셔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 주셔야 합니다."

의사의 말은 마치 천둥처럼 김이진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녀는 서이준을 미워하고 원망했지만, 그가 죽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이준은 쓰레기 같은 놈이긴 하지만, 죽을 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

김이진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흠뻑 젖은 옷은 반쯤 말라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환자보다 더 처참한 모습이었다.

"저기요, 방금 교통사고로 들어온 서이준 씨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그녀는 다급하게 간호사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간호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간호사 너머 복도 쪽의 상황을 보고는 하려던 말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서이준은 병원 의자에 앉아 있었고, 강수빈은 그의 곁에 쪼그려 앉아 그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고 있었다.

회차 2

서이준은 강수빈의 스킨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나쁜 남자가 될 자질이 충분했다. 얼굴은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입체적이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우아함과 고귀함이 몸에 배인 듯 그의 모든 행동에서 자연스레 묻어났다.

그는 검은색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단추가 몇개 풀어져 있었고 긴 팔에 감긴 붕대가 훤히 드러났다. 붕대를 감은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퇴폐적인 매력을 더해 주었다.

강수빈이 유부남인 그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질척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서이준은 허리를 굽혀 강수빈을 부축해 일으켰다. "일어나. 쪼그려 앉지 말고. 검사도 다 받았잖아. 큰 문제 없대."

"다 제 잘못이에요. 오늘 오빠가 저를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교통사고도 나지 않았을 텐데." 서이준의 부축을 받은 강수빈은 의자에 앉는 대신 그의 품에 기대앉았다.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김이진은 한참이나 앞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몸도 추웠지만 그 것보다 마음이 더 차갑게 식어 내렸다.

서이준에게 완전히 마음이 식었다고 생각했던 그녀다. 하지만 그가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자 무딘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와 강수빈... 도대체 누가 서씨 가문의 사모님일까?'

그때, 의사 한 명이 김이진에게 다가와 손에 든 두 장의 보고서를 내밀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착각했습니다. 남편분께서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사람은 다른 서 씨 남자분입니다. 방금 10중 추돌 사고가 발생해 정신이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김이진이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떠나려 할 때, 서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침침해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김이진은 가방 끈을 꽉 움켜쥐었다.

잠시 후, 서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 죽는다고 하니까 달려 온거야? 왜? 내가 죽지 않아서 실망했어?"

"제가 오든 말든, 달라 질게 있나요?"

김이진은 담담한 목소리로 강수빈을 흘깃 쳐다봤다.

강수빈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김이진을 돌아봤다. "이진 언니, 다 제 잘못이에요. 이준 오빠가 저를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이런 사고도 나지 않았을 텐데. 비가 많이 내려 길이 미끄러워서 그만..."

그녀는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김이진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도발이 가득했다. 사랑받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김이진은 시선을 거두고 강수빈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병원을 나섰다.

이런 저급한 수법에도 상처를 받았던 건, 그만큼 서이준을 사랑했고 그 감정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혼을 결심했다. 그러니 강수빈과 이런 유치한 싸움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김이진!" 서이준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김이진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걸음을 재촉해 병원 문을 향해 걸어갔다.

서이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부터 저 여자가 나를 무시하기 시작한 거지?'

"이준 오빠…" 강수빈이 그의 팔을 흔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듣지 못한 서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수빈은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이준 오빠!"

그제야 서이준은 뒤를 돌아 강수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나 먼저 갈게. 얌전히 출근해."

말을 마친 그는 강수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병원 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강수빈은 멍하니 서서 서이준의 뒷모습을 가만히 노려봤다, 그녀의 눈빛에 증오가 스쳐 지나갔다.

응급센터를 나선 서이준은 김이진이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김이진에게 다가갔다. "같이 가."

김이진은 화를 꾹 참으며 차갑게 말했다. "같은 방향 아니에요."

서이준은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내 차는 고장 났어. 네가 나를 데려다줘."

김이진은 그제야 서이준이 그녀를 뒤쫓아 나온 건 그저 운전기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서이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달빛정원으로 가."

김이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1년만에 집으로 돌아가신다니, 서 대표님. 어련하시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자 강수빈이 응급실 앞 계단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회차 3

김이진은 얼굴을 굳힌 채 조수석 문을 열었다. 서이준을 쫓아 내려던 말은 전부 되 삼켜 버렸다.

서이준을 사랑하지 않는 그녀지만, 내연녀가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으스대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서이준과 단둘이 차에 있는 것이 어색할까 봐 걱정했지만, 그는 조수석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한 듯 보였다.

김이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내연녀한테 정성을 다할 땐 언제고, 내 앞에서 피곤한 척은?'

김이진은 액셀을 세게 밟고 속도를 높였다.

서이준이 갑자기 눈을 뜨고 소리쳤다. "김이진, 운전 똑바로 해!"

김이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방금 전에 사고 낸 게 누군지 잊었나 보네요?"

서이준이 발끈 하는 모습을 본 김이진은 하루 종일 쌓였던 화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달빛정원에 도착하자마자, 김이진은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녀는 더 이상 서이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김이진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눈앞이 캄캄해 지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쑥 나타난 한기가 김이진의 단잠을 깨웠다.

비몽사몽 중에 누군가 자신을 뒤에서 안아주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뜨거운 체온이 그녀의 몸에 스며들어 한기를 몰아냈다.

신혼 때, 그녀가 고열에 시달린 적이 있다. 당시 서이준은 바로 이렇게 그녀를 품에 안고 재워 주었다.

잠결인 지라 그녀는 두사람의 사랑이 이미 끊났다는 걸 잊었고 습관적으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로 한기를 몰아내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

그녀의 귓불에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닿았다. 이어 그의 입술 사이에서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어, 딱딱한 무언가가 그녀의 허리춤에 닿았고 불편했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뒤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큰 손이 그녀의 잠옷 아래로 파고들어 허리를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가더니,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김이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아랫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서이준은 간신히 지켜오던 마지막 이성까지 완전히 잃었다. 그의 다른 손으로 그녀의 잠옷 허리춤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더니 물기가 새어 나오는 그곳을 탐색했다.

잠자리를 너무 오래 갖지 않았던 탓에 갑자기 들어 오는 손가락에 통증을 느낀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뒤늦게 눈을 뜬 그녀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급히 서이준을 밀어내고 침대 가장 자리까지 물러나 몸을 웅크린 채 스탠드를 켰다.

"어떻게 들어 온 거에요?"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고 얼굴에 남아있던 홍조는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서이준은 천천히 침대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헐렁한 잠옷 바지 아래로 솟아오른 작은 텐트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가 차갑게 비웃으며 반문했다. "여긴 내 집이야.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설마 나른 놈이 기어 들어 오기를 기대했던 거야?"

서이준의 말에 모욕감을 느낀 김이진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녀는 평생 서이준 한 남자만 사랑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를 마치 아무 남자와도 잘 수 있는 여자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여태 강수빈과 살다가 뻔뻔하게 내 침대에 기어 올라 오다니!' 너무 역겨웠던 그녀는 분노하며 욕을 퍼부었다.

"내가 너인 줄 알아!? 더러운 새끼! 다 너 같은 줄 알아!?"

서이준은 김이진이 방금 전력으로 때렸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는 냉소를 지었다. "김이진. 내가 그렇게 싫은데 왜 나랑 결혼 했어?"

"결혼 전에는 네가 하도 다정하게 굴어서 그게 사랑인 줄 알았으니까! 결혼하자마자 바람피울 줄 알았으면, 죽어도 너랑 결혼 안 했어!"

"이런 생과부 같은 생활,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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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그러들고 이혼을 막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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