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차라임 POV: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옆에 잠들어 있는 도원섭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모든 것이 마치 나 혼자만의 전쟁인 양 느껴졌다.
뒤척이던 내 몸 위로 도원섭의 팔이 스르르 넘어왔다.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순간 움찔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는 내 뒤통수에 입술을 묻었다.
"라임아, 왜 잠을 설치고 그래?"
그의 목소리는 잠결에 잠겨 있었지만, 다정했다. 나는 그의 손길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아니요, 그냥 잠이 잘 안 와서요."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희미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 겁니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는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은 따뜻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빨리 이 상황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쉬세요."
그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걱정은, 내가 아내라서가 아니라, 그저 직장 동료로서의 걱정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잠시 후, 어두운 방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한참 쓸어내리던 그는 문득 나를 돌아봤다.
"아, 맞다. 오늘 낮에 서류에 사인했던 것, 제가 한 번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무슨 서류 말씀이세요?"
"부모님께서 새로 이전하시는 아파트 명의 서류 말입니다. 제가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네요. 어디에 뒀습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의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말이 비수처럼 박혔다. 그는 내가 건넨 서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사인했던 것이다.
"아, 그거요... 제가 지금 꺼내 드릴까요?"
내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으시다면요."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류는 침대 옆 협탁 서랍에 넣어뒀었다. 내가 서랍을 열려는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에는 '려예솔' 이라는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그는 서류 이야기는 까맣게 잊은 채, 급하게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예솔아,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등 뒤에서 멈춰 섰다. 내 손은 여전히 협탁 서랍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오빠, 나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너무 힘들어..."
려예솔의 가녀린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에 익숙했다. 그녀는 늘 그랬다. 도원섭에게 매달리고, 그를 필요로 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어디야? 내가 지금 갈게."
도원섭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예솔 씨가 많이 아픈가요?"
나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을 겁니다. 그냥 예민해서 그런 걸 겁니다."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예솔이 아플 때마다 늘 저렇게 다급하게 달려갔으니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 금방 다녀올게요. 걱정하지 말고 쉬어요."
그는 급하게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 쾅,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손에 들린 서류 뭉치. 그는 이 서류를 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정말로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마음이 아팠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려예솔의 SNS에는 새로 올라온 사진이 있었다. 그녀는 도원섭의 팔에 기댄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코멘트에는 "오빠 덕분에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고마워요, 내 전부."라고 적혀 있었다.
내 심장은 다시 한번 차갑게 식었다. 그는 나를 두고 려예솔에게 달려갔고, 그녀는 그에게서 위로를 받고 있었다. 내 생일도, 내 결혼 기념일도, 심지어 내 목숨이 위태로웠던 날에도 그는 늘 려예솔의 곁에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정말 끝이었다. 그들이 행복하든 말든, 나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지옥 같은 관계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버릴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옷장 한구석에 놓여 있던 큰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도원섭과 함께 찍은 사진들, 그가 선물했던 시계, 커플링 등 우리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가득했다.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그것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그리고는 그가 평소에 가장 아끼던 컵과 접시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의 무심함에 지쳐버린 나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새벽녘, 도원섭이 돌아왔다. 그는 침실 문을 열고 망가진 컵과 접시를 발견했다.
"라임아, 이게 무슨 일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함께 희미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칠 뿐이었다.
"아, 제가 실수로 떨어뜨렸어요. 죄송해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조심하지 그랬어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그는 깨진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쓸어 담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니 문득 서글퍼졌다. 그는 내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자는 또 뭡니까?"
그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가려다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우리가 함께했던 흔적들이 담겨 있었다.
"아, 정리하다가 나온 쓸모없는 물건들이에요. 버리려고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상자 안의 물건들을 잠시 바라봤다. 아마도 그에게는 그저 '쓸모없는 물건들'이겠지만, 나에게는 내 청춘과 사랑의 전부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상자를 들고 쓰레기봉투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의 등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는 이 물건들이 어떤 의미인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가 상자를 들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니,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이제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회차 3
차라임 POV:
며칠 후, 나는 도원섭의 서재에서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었다. 급한 업무가 있었지만, 내 노트북은 고장이 나버린 상태였다. 그의 노트북을 켜자 익숙한 바탕화면이 나타났다. 내가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배경화면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는 시늉을 했다.
메일을 확인하던 중, 우연히 그의 메일함에서 새로운 메일을 발견했다. 제목은 '교수님, 이번 주말 모임에 꼭 참석해주세요!'였다. 발신인은 병원 내 친목 모임의 총무였다. 나는 무심코 메일을 클릭했다. 본문에는 모임의 일시와 장소, 그리고 참석자 명단이 적혀 있었다. 참석자 명단을 훑어보던 내 눈에 려예솔의 이름이 들어왔다. 옆에는 '특별 초청'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내 손이 순간 덜덜 떨렸다. 그는 언제나 려예솔을 특별하게 대했지만,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까지 함께할 줄은 몰랐다. 그는 나와의 결혼 생활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병원에서는 우리는 그저 선후배 관계일 뿐이었다. 하지만 려예솔은 달랐다. 그는 려예솔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했다.
나는 메일을 닫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나를 철저히 숨기고, 려예솔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그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했고, 려예솔은 그의 빛을 받으며 빛났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고 도원섭이 들어왔다. 그는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요."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걱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일이 좀 많아서요."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쉬엄쉬엄해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교수님, 혹시 이번 주말에 병원 모임에 가실 건가요?"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의 망설임 속에서 묘한 죄책감을 읽었다. 그는 내가 그 모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한 듯했다.
"아... 네, 아마도요. 왜요?"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걱정의 기색이 없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나를 병원 모임에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나를 아내로 소개할 생각조차 없었다.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저도 혹시 시간이 되면 참석할까 해서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눈썹을 치켜떴다.
"아, 그래요? 음... 차 교수님은 바쁘시니까요. 굳이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내게 참석하지 말라고 간접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나를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좀 바빠서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참석할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의 눈은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향했다. 나는 서재 문을 닫고 나왔다. 내 마음속에는 차가운 비수가 박힌 듯했다.
그날 밤, 도원섭은 병원 모임에 갔다. 나는 그의 SNS에서 올라온 사진들을 봤다. 그는 려예솔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려예솔을 자신의 옆에 세워두고, 그녀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찬사를 보냈다. 그들의 완벽한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며칠 후, 엄규 변호사에게 연락이 왔다. 도원섭이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한 후, 한 달의 숙려 기간이 끝났다는 것이다. 나는 미련 없이 이 관계를 끝낼 것이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었다.
나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내 옷, 내 책, 내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들. 나는 그것들을 상자에 담았다. 그와 함께했던 3년의 결혼 생활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악몽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내가 이혼 서류에 사인을 받아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결혼반지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영상 편지가 담긴 USB를 함께 놓았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편지를 썼다.
'오빠, 그동안 고마웠어. 이제 나는 이 지옥 같은 관계에서 벗어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려예솔과 행복하게 살아. 나는 이제 더 이상 오빠의 아내가 아니야.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될 거야.'
나는 편지를 쓰고,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