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김유나는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들고 박주헌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헌아, 연서가 돌아왔으니 너희도 이제 결실을 맺어야지. 하지만 너희 집에 있는 그 여자 말인데, 성격이 만만치 않던데? 걔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유리문 너머, 조명이 어두운 탓에 박주헌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무심한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걘 아직 어려, 애가 하는 말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어."

"김유나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걔가 널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어? 걔가 널 쫒아 다닌지도 몇년이 됐는데, 정말 단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 없냐?"

진성우의 질문에 김유나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도 궁금했다. 박주헌이 자신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 있는지.

나른한 자세로 소파 중앙에 앉아 있는 박주헌은 성숙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는 아직 어려. 그리고 너희들, 다시는 그런 농담 하지마. 유나는 그저 내 조카일 뿐이야. 걔를 좋아하게 될 일은 절대 없어."

'걔를 좋아하게 될 일은 절대 없어.'

그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김유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방 안의 사람들은 문 밖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래,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연히 민연서겠지. 네 첫사랑이잖아. 김유나와는 차원이 다르지."

박주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따가 민연서 앞에서 유나 얘기 꺼내지 마. 오해할까 봐 걱정돼."

"그게 우리한테 부탁한다고 될 일이냐?"

진성우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김유나 성격 몰라? 네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걸?"

"맞아."

옆에 있던 친구도 맞장구치며 웃으며 놀렸다. "근데 박주헌. 김유나도 이제 스무 살이 넘었어? 그냥 세컨드로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집에 한명, 밖에 한명 얼마나 좋아? 걔는 널 미친듯이 좋아하잖아. 아마 거절하지 않을 걸?"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주헌이 싸늘한 눈빛이 그에게 닿았다.

"헛소리 집어 쳐. 애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형한테 입양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야.

"내 마음 속엔 민연서 하나 밖에 없어. 다시는 그런 말 하지마. 역겨우니까."

문고리를 잡고 있던 김유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내 사랑이 역겨웠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이라도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한 순간에 힘이 풀려 버렸고 말 할 힘조차 없었다.

고개를 숙인 김유나는 고인 눈물을 꾹 참으며 걸음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어두운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프라이버시가 잘 보장되어 있는 이 술집은 한적한 강변 가에 위치해 있다. 그 탓에 길가에 택시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김유나는 생일 선물을 꼭 움켜쥔 채, 빠르게 걸었다.

방금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지난 몇년 동안, 난 대체 뭘 고집하고 있었던 걸까?'

'나...김유나... 그렇게 하찮은 여자였나?'

김유나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고,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걷다 보니 어느새 사거리에 다다랐고 지나다니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그녀의 눈을 찔렀다. 순간.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선물을 놓치고 말았다.

생일 선물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상금으로 산 커프스, 꽤 비싼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강서준, 네 제안에 동의 할게. 결혼 하자."

강서준은 그녀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그는 박씨 가문 이웃에 살았고 둘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 나중에 강서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유학을 떠났고, 얼마 전에야 돌아왔다.

현재 강북에 자리를 잡은 그는 며칠 전에 김유나를 불러 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그는 고민을 털어 놓았다. 집안에서 너무 결혼을 재촉을 하는 탓에 진저리가 난 다는 것이다.

"유나야. 우린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팔자야. 집안 어른 들은 우리가 행복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아. 그들은 그저 결혼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어."

"어차피 결혼을 해야 하는 거라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서 말인데, 차라리 우리 둘이 결혼하는 건 어때?"

당시 김유나는 그의 제안이 웃기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쁠 것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건물을 바라봤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네온 사인, 마치 박주헌을 향한 자신의 사랑 같았다.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이니,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오빠네 부모님이 결혼을 재촉하신다며? 빨리 진행해도 좋아."

남자는 그녀가 이렇게 쉽게 동의할 줄 몰랐다. 그는 2초간 침묵하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언제 데리러 갈까?"

김유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선물을 내려다봤다. "인턴십 일정을 정리하고 연락할게.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강서준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니, 굳이 H시에서 인턴십을 할 필요는 없었다.

통화를 마친 김유나는 한참을 걸은 후에야 택시를 잡아 사우스 베어로 돌아왔다.

사우스 베어는 시내 중심에 위치한 고급 저택 단지로, 그녀가 원래 살던 집에서 5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본가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김유나가 9살이 되던 해, 김씨 그룹은 파산했다. 거액의 빚을 감당하지 못했던 부모님은 함께 목숨을 끊었고 집은 불에 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 채권자들은 9살 밖에 되지 않은 김유나에게 까지 마수를 뻗쳤다.

바로 그때, 박주헌이 그녀를 박씨 가문으로 데려왔다.

당시 17살이었던 그는 형인 박명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형, 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입양 자격이 없어. 형이 유나를 입양해 줘. 앞으로 유나는 내가 책임 질게."

박주헌은 약속을 지켰다. 그녀에게 최고의 삶을 제공해 주었고 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그녀를 아끼고 보살폈다.

그는 항상 김유나의 삼촌으로 자처했으나 김유나는 단 한번도 그를 삼촌이라 부른 적 없었다.

박주헌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녀였다.

18살이 되던 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고백을 했다.

그녀의 고백에 박주헌은 그녀를 나무랐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고 자신은 그저 그녀의 삼촌일 뿐이니 허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그녀가 이성친구를 곁에 두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김유나는 그게 질투라 생각했고 자신을 거절 하는 건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어린 탓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빨리 어른이 되면 되지 않을까?'

김유나는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겼고 어느새 눈시울이 빨개졌다.

'어른이 되어도 소용이 없는 걸까...'

'사랑하지 않는 여자, 그에겐 그저 부담일 뿐이겠지...'

'그래 박주헌, 이제 널 놓아 줄게...'

집에 도착한 김유나는 눈물을 닦고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잠을 설칠 줄 알았으나 의외로 숙면을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김유나는 하품을 하며 주방으로 다가갔다. "유 아주머니, 이렇게 일찍..."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방에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허리에 베이지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앞치마는 그녀의 아름다운 허리라인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긴 머리는 머리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박주헌의 첫사랑이자 전 여자친구인 민연서다.

"유나야, 일어났어?" 민연서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침을 다 차리고 나서 너를 깨우러 올라가려고 했는데, 일찍 일어났네?"

이렇게 시끄러운데 깨지 않는다면 그건 귀에 문제가 있는게 틀림 없다.

김유나는 여태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민연서는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젯밤에 주헌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내가 데라다 줬어. 씻겨주고 옷도 갈아 입혀 줬지. 그러다 문뜩 네가 혼자 집에 있다는 게 생각나더라고? 너와 함께 먹으려고 아침을 준비했던 거야."

즉, 두 사람은 어젯밤을 함께 보냈다는 말이다.

예의상 억지로 유지하던 김유나의 미소가 흔들렸고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굳이 그쪽이 제 아침을 챙겨 주실 필요는 없어요."

그때, 뒤에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유나,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사과해!"

회차 2

김유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방금 샤워를 마친 박주헌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몸에 짙은 회색의 홈웨어만 걸치고 있었지만 잘생긴 얼굴과 우월한 기럭지는 여전했다.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외모였다. 얼굴에 자리한 그 엄숙한 표정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김유나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그의 시선을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연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일부러 화난 척 박주헌을 흘겨보더니 다가가 그의 팔짱을 꼈다.

"왜 유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잠에서 깨면 짜증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너도 평소에 짜증 많이 내잖아."

민연서는 그를 나무랐지만 왠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김유나의 안색이 창백해 졌고 그녀는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주헌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처럼 싸늘한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다. 그는 민연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김유나를 향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로 따라와."

"너 유나 어른인 건 맞아. 그렇다고 해서 유나를 항상 그렇게 엄격하게 대해선 안돼, 좋게 타이를 수도 있잖아."

김유나는 침묵을 지켰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민연서는 벌써부터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김유나는 속으로 차갑게 실소를 흘렸다. 딴 생각을 하던 그녀는 앞장 서 걷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그의 등에 코를 박고 말았다.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든 김유나는 박주헌의 차갑게 식은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

어쩌면 마지막 남은 미련일지도 몰랐다. 혹은 그저 그의 반응이 궁금했을 수도 있다.

박주헌은 미간을 더욱 찌푸리고 그녀를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말했다. "김유나, 쓸데 없는 생각은 거두라고 했지. 너 곧 졸업이잖아.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 줄게. 단! 그 사람은 절대 내가 아니야. 난 네 삼촌이고 연서는 앞으로 네 작은 어머니가 될 사람이야. 날 존경하는 것처럼 연서도 존경해야 해. 알겠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박주헌은 그녀를 사랑하기는커녕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고 했다.

강서준이 한 말이 맞았다.

'하… 난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이미 마음을 굳게 먹지 않았던가?'

김유나는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한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작은 삼촌."

박주헌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김유나는 사고를 치고 용서를 구할 때만 그를 작은 삼촌이라고 불렀다. 평소라면 분명 그에 말에 토를 달며 맞받아쳤을 것이다.

김유나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연서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봐봐. 아침까지 직접 차려주잖아. 연서한테 적대감 갖지 마. 알겠어?"

민연서가 아침을 차려주지 않았어도, 박주헌은 직접 아침을 차려줬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나는 애초에 아침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작은 어머니와 잘 지낼게요."

막주헌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입을 입을 열었다. "어제는 왜 오지 않았어?"

어제는 그의 28번째 생일이었다.

사실. 김유나가 가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

김유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에 강좌가 있었어요. 강좌가 끝나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해서 바로 집에 왔어요. 작은 삼촌, 생일 축하해요."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고 싶은 그녀였다. 그러니 더 이상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그는 짧게 대답하고 나서 김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작은 삼촌한테 말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알겠어? 이제 아침 먹으러 내려가자."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사랑하는 여자까지... 셋이서 아침을 먹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던 김유나였다.

아이러니한 상황에 그녀는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박주헌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제는 이런 상황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지켜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후, 박주헌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김유나도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학교에 가서 지도 교수와 인턴십에 대해 상의해야 했다.

"유나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주방 문 앞에 서서 고무 장갑을 손에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연서가 보였다. 태연하고 우아한 모습은 마치 박씨 가문의 안주인 같았다.

김유나는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고... 그냥 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

민연서가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눈에까지 번지지 않았다. "월반 까지 할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며? 이제 곧 졸업인데, 어디서 인턴생활을 할지는 생각해 봤어?"

관심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녀를 떠보고 있었다.

김유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그건 작은 어머니가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박주헌의 뜻을 따른 다면 그녀는 박씨 그룹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당시 그 소식을 들은 김유나는 날아 갈 듯 기뻤다. 그와 어깨 나란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럴 마음이 없었다.

민연서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난 그저 네가 신경 쓰여서 물어본 거야. 네 작은 삼촌은 남자잖아. 너와 이런 이야기를 세세한 얘기를 나누는게 불편할 것 같아서."

'뭐가 불편하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크든 작든 모든 일을 박주헌에게 털어 놓았던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눈 앞의 여자는 그의 여자친구다. 하여 그녀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김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예상치 못했던 김유나의 반응에 민연서의 눈빛에 의외의 빛이 감돌았다. "이제 너도 다 컸잖아, 삼촌과 함께 사는 게 불편하지 않아? 아니면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때? 나 혼자 사는게 외로웠거든."

사랑 싸움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적지 않게 봐 왔던 김유나는 여자들의 여우짓이 낯설지 않았다.

드라마를 볼 때만 하더라도 TV속 내용이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일 줄이야.

함께 살고 싶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그저 그녀를 박주헌의 곁에서 떼어 놓고 싶었을 뿐이다.

김유나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민연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작은 어머니, 저를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시다니요. 설마 제가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그 순간, 민연서는 김유나에게서 박주헌에게서만 느낄 수 있던 압박감을 느껴졌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때, 민연서의 시선이 잠깐 김유나의 뒤에 머물렀다. 이내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나야, 내가 너한테서 네 삼촌을 뺏어 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헌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여전히 너야... 난 ... 앗!"

말은 하던 그녀는 문턱에 걸려 중심을 잃었고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김유나가 그녀를 부축하려 할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 한쪽으로 끌어냈고 그녀는 테이블에 부딪히고 말았다.

박주헌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목소리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김유나! 넌 애가 왜 갈수록 악독해지는 거야!?"

회차 3

박주헌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에 김유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탁 모서리에 허리를 제대로 찍은 탓에 너무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우두커니 서서 박주헌이 민연서를 조심스레 안아 올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유나는 코를 훌쩍이며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몇 분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소 아주머니가 도착한 것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에 들어 선 아주머니는 김유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가씨, 아가씨 왜 그래요? 왜 이렇게 울고 있어요?"

심한 통증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김유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저 좀 도와주세요. 너무 아파요."

아주머니는 경비실에 연락해 김유나를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갔다.

검사 결과,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당분간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약도 제때 바르세요."

의사가 처방전을 건네고 나서 김유나의 앳된 얼굴을 보며 위로했다. "심하게 멍이 들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김유나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아주머니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아가씨, 사장님한테 전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민연서를 돌보느라 바쁘겠지. 내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도 않을 거야.'

김유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움직여 보았다. 통증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았던 그녀는 약을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아주머니, 먼저 집에 들어가요. 저는 학교에 가봐야겠어요."

아주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정말 괜찮겠어요?"

"의사 선생님도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잖아요. 괜찮을 거에요."

한참 동안 시간을 들여서야 그녀는 아주머니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차에 올라 탄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 아이러니했다.

8살 때부터 박주헌과 함께 지낸 그녀는 항상 그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정작 다쳤을 때,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아주머니뿐이었다.

그러나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었다.

인연의 끝은 이별인 법이니까.

'나와 박주헌은 그저 이별을 했을 뿐이야.'

김유나는 담당 에게 서류를 건네며 강북에서 신턴십을 할 예정이라고 알렸다.

담당 교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강북? 너무 멀지 않아? 전에 작은 삼촌과 헤어지기 싫어서 작은 삼촌 회사에 가겠다고 했잖아? 너희 작은 삼촌이 걱정하지 않을까?"

박주헌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던 김유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저와 삼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예요. 삼촌한테 계속 걱정을 끼칠 순 없죠. 그리고 저도 이제 21 살이잖아요. 독립할 때가 됐어요. 삼촌도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 작은 삼촌이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이 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네가 이렇게 컸는데도 직접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고, 다른 남자애들이 너를 꼬실까 봐 아주 걱정이 많으신 것 같더구나."

"방금 독립하고 싶다고 했니? 잘 생각했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봐. 너의 능력이라면 어디서는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난 너를 믿어."

김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당 교수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학교를 나섰다.

그녀의 대학 생활은 길지 않았지만, 교수의 말대로 박주헌은 그녀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대학 1학년 땐, 박주헌은 그녀를 돌보기 위해 심지어 학교 근처에 집을 사서 직접 끼니를 챙겨 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의 일 뿐이다.

이제 그에겐 진정으로 챙겨 줘야 할 여자가 생겼다. 그는 그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할 것이다. '이제 난, 그에게 방해만 되는 존재일 뿐이야.'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 그녀가 박주헌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일 것이라 생각했다.

집 앞에 도착 한 김유나는 박주헌이 오늘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민연서를 챙겨야 할 테니까.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박주헌이 보였다.

인기척을 들은 박주헌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수업 끝났어?"

그녀는 멈칫하더니 이내 눈치 챘다. 그녀가 학교에 다녀왔다는 건 아마 아주머니가 그에게 전해 줬을 것이다.

"네."

김유나는 가방을 신발장에 넣고 물었다. "민연서는 괜찮아요?"

박주헌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네 작은 어머니야. 어떻게 이름을 불러? 예의도 몰라?"

그가 또다시 '서열' 정리를 한다고 생각한 김유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거잖아요? 저는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박주헌은 그녀의 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깐 너무 급하게 서두르느라 힘을 조절하지 못했어. 아주머니가 네가 식탁에 부딪혔다고 하던데, 많이 다쳤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가 푼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괜찮아요."

박주헌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그녀가 너무 아파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강하게 자란 그녀다. 그런 그녀가 눈물을 흘릴 정도라면 많이 아팠을 것이다.

박주헌은 미간을 더욱 찌푸리더니 노트북을 내려놓고 김유나에게 다가갔다. "어디 봐봐…"

그가 손을 내밀자 김유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박주헌은 그녀가 피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유나?"

그는 고개를 들어 착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나 연서가 너무 걱정돼서 미처 너를 신경 쓰지 못했어. 미안해, 삼촌이 사과할게."

'그래, 당시 당신 눈엔 민연서 밖에 없었지. 난 안중에도 없었고...'

김유나는 가슴이 묵직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그 통증은 이내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표정을 숨긴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부딪힌 것뿐이에요. 민연서처럼 심하게 다치지 않았어요. 삼촌은 민연서 곁에 있어주는 게 좋을 것 같은 데요?"

"정말 괜찮아?"

"네."

박주헌은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으로 보아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만약 심하게 다쳤다면, 그녀의 성격상 이미 난리를 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박주헌이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소파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손에 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연서야?"

"조심하지 그랬어. 많이 다쳤어?"

말을 하는 와중에 박주헌은 소파에 걸려 있던 재킷을 손에 쥐었다. "지금 바로 갈게."

현관문 앞에 도착한 그는 김유나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싸돌아 다니지 말고 얌전히 집에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김유나는 그가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곧 엔진 소리와 함께 차는 천천히 멀어졌다.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왠지 허리가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 가방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강서준이었고 그녀는 코끝이 찡해졌다.

통화 버튼을 누른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서준... 나 다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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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삼촌, 왜 이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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