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천한 년이! 평소 예쁘장한 얼굴만 믿고 사내들을 유혹했다지? 이제 춘여관에 팔려왔으니, 네가 감당해야 할 사내들이 넘치도록 많을 것이다..."
채찍이 살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익숙하고도 낯선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엄청난 고통에 식은땀이 뚝뚝 흘려내렸고 점점 커지는 자극에 길세연(吉世煙)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현타가 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무슨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화려하지만 군데군데 조각이 난 침대였다. 다음으로는 촌스러운 찐 핑크의 비단 커튼인데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독하게 짙은 향에 어울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난 분명 국제 의료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비행기 안에서 사고로 죽은 것 같은데?'
길세연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빠르게 휘두르는 채찍이 그녀의 살갗에 내려앉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연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가 만족스러운 듯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리더니, 길세연을 향해 다시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다.
"이 동생의 마음이 모질다고 탓하지 말거라. 탓하려면 천한 네년의 운명을 탓해야지. 그동안 적녀 자리만 꿰찼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 같으니. 사내의 달콤한 말에 속아 기생집에 팔려가도 싸지!"
길세연은 머리가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았지만, 두터운 채찍이 당장이라도 그녀의 몸을 내리치려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손을 뻗어 채찍을 낚아채고 힘을 조금 주자 연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지는 것이다.
"으악!"
연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길세연은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손목을 가볍게 돌려 채찍을 손에 잡았다.
여자는 독기 어린 얼굴로 길세연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천한 것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으악!"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길세연이 가볍게 채찍을 휘두르자,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간 채찍은 정확히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의 입을 그대로 내리쳤다.
"네 엄마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오늘 내가 제대로 된 말버릇을 가르쳐줄게."
"짝! 짝! 짝!"
몇 번의 채찍질에 여자의 찢어진 피부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여자는 두 팔로 온몸을 감싸고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채찍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곧이어 여자의 얼굴과 몸에 보기만 해도 끔찍한 채찍 자국이 가득 났지만, 길세연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음의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몸 주인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은 두 번째 이유였다.
불과 몇 분 전, 길세연은 몸 주인의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그제야 자신의 영혼이 무왕조(武王朝) 공부시랑(工部侍郎)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적녀의 몸에 빙의를 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친어머니는 일찍 돌아가고, 아버지는 나 몰라라 했으며, 계모는 인정이 박하고 혹독한 사람이었다. 어린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갖은 고통을 겪으며 자랐고,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몸의 주인이 성인이 된 후, 아버지라는 자는 그녀를 초주검이 된 위무장군(威武將軍)에게 시집 보내려 했다.
삶의 희망을 버린 소녀는 간사하게 혀를 놀리는 자의 말만 믿고 사내와 야반도주하다 기생집에 팔려가게 된 것이다.
애초에 모든 것은 서녀 길가희(吉佳熙)와 그 남자가 함께 꾸민 계략이었으니.
그녀를 기생집에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 수치를 주며 순결을 빼앗고 학대까지 하려 했다.
몸의 주인이 죽기 전에 느꼈던 절망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느낀 길세연은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여봐라! 여봐라! 이 천한 년을 당장 잡아들이거라. 내 오늘 이 년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엎드린 길가희가 울부짖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밖에서 문을 지키고 있던 호위가 소리를 듣고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길세연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채찍을 옆으로 내던진 다음, 길가희의 머리채를 잡고 그대로 창문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악! 나한테 뭘 어쩌려는 것이냐!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길가희가 공포에 가득 찬 얼굴로 몸부림쳤다.
활짝 열린 창문 뒤에는 맑은 호수가 있었고, 뒤이어 길세연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뭘 할 것 같아? 당연히 네 잘못된 정신머리를 고쳐줘야지!"
길가희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길세연은 길가희를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악! 살려줘!"
"풍덩--"
문을 박차고 들어온 호위들도 모두 당황했다. "빨리 사람 구해!"
난리 통에 길세연이 기회를 엿보고 도망치자 뒤에서 길가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천한 년이! 당장 저년을 잡아 오너라. 내 저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길세연이 이흥루를 나서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회차 2
이렇게 큰일이 났으니, 이흥루의 포주가 직접 시위대를 대동하고 수색하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길세연은 그대로 뒤돌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인적이 없는 삼 층에 도착해 아무 방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이방은 다른 방과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진한 연지와 백분의 냄새도 없었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에 은은한 약초 향이 퍼졌다.
마음속의 의문이 점점 커질 때, 갑자기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길세연이 고개를 들자 핏기 가득한 두 눈에 고독한 늑대와도 같은 눈을 한 남자와 마주쳤고 순간 살기가 온몸을 엄습했다.
남자의 얼굴은 꽤나 잘생긴 편에 속했다. 뚜렷한 오관과 눈썹은 장인이 직접 정교하게 빚은 것 같았다. 그러나 창백한 그의 안색과 이마에 솟구친 핏줄, 그리고 핏대 선 눈은 정말이지 오싹해 날 지경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길세연이 몸을 버둥거리자 남자의 단단하고도 마른 몸이 그대로 그녀의 몸 위에 쓰러졌고, 커다란 두 손만이 그녀의 두 팔을 움켜잡고 있었다.
"공자... 그러니까 저는 일부러 공자의 처소에 쳐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잠깐 몸을 피하고자..."
그러나 두 눈 가득 빨간 막이 안개처럼 낀 남자는 아예 의식이 없는 듯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길세연의 어깨를 세게 물었고, 길세연은 고통에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피비린 냄새가 방에 가득 퍼졌고 길세연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정상이 아니었다!
입술을 꼭 깨문 그녀가 마음속으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침상 머리에서 자수바늘을 찾아냈다. 남자가 더욱 큰 힘으로 어깨를 물려 하자 자수바늘로 곧바로 남자의 혈 자리를 찾아 찔렀다.
광기를 일으킨 남자는 곧바로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길세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자의 맥을 짚더니 미간을 깊게 찌푸리는 것이다.
남자는 정신을 억제하는 종류의 독에 중독되었고, 중독된 시간은 어림잡아 7, 8년이 넘은 것 같았다.
길세연은 쓰러진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곳은 조건이 제한되어 있으니 당장 해독할 방법은 없었다. 그저 독이 몸에 더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은침으로 치료할 수밖에는.
반 시진 후.
길세연이 은침을 모두 뽑자 남자의 하얗게 질린 안색도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종이에 처방전을 쓰고 남자의 머리맡에 두었다. 이곳을 피난처로 삼은 보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길세연이 바깥 동태를 살피자 일 층과 이 층은 여전히 시위들이 지키고 있어 소란스럽기만 했지만, 삼 층은 조용했다.
이제 보니 남자의 신분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그녀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방은 거리와 면해 있었고, 뒤편은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길세연은 바로 침상에서 이불을 끌어당겨 한쪽을 침상 다리에 묶고 자리에서 가볍게 뜀박질하더니 그대로 이불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전생에 다양한 취미를 가진 자신에게 감사하면서 말이다. 복싱, 등반, 유도는 이미 수준급의 실력을 보유했다.
마침내 호랑이와 늑대 소굴에서 벗어난 길세연은 그 길로 약 점포로 향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것도 모자라 남자가 어깨를 세게 물어 피까지 났으니 소독약과 진통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큰 길에 있는 약 점포는 엄두도 내지 못한 그녀는 그저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약 점포에서 약초를 구매해 상처를 치료했다.
골목 어귀를 나서자마자 마대자루에 잡힐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다.
마대자루에서 나오자마자 눈을 가늘게 뜬 길세연은 익숙한 풍경을 둘러보며 화를 이기지 못해 욕설을 퍼부었다.
'또다시 기생집 후원에 잡혀 오다니. 왜 떨쳐내려 해도 떨쳐낼 수 없는지!'
"가시죠,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가운 목소리는 상의할 여지마저 없는 것 같았다.
"어서 날 풀어주지 못할까! 난 공부시랑의 아가씨다. 내 아버지가 이곳을 찾아왔을 때, 이곳 기생집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미천한 목숨마저 지키지 못할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길세연은 그저 자신의 가문을 앞세워 위세를 부리며 상대에게 겁주려 했다.
회차 3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색 옷으로 무장한 두 사내는 길세연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팔을 세게 움켜잡으며 반항할 여지조차 주지 않을 뿐이다.
길세연은 그대로 끌려 올라가기 시작했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이상한 예감을 지우지 못했다.
익숙한 방문 앞에 멈춰 섰을 때, 길세연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어떻게? 여긴 이상한 남자가 지내는 방 같은데?
마음속에 의문을 잔뜩 품고 있을 때 문이 활짝 열렸다. 팔선탁 앞에 검은 옷을 입고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는 남자의 잘생긴 외양에 길세연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해월성(海月城)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눈이 길세연을 담담하게 쳐다봤다.
처방전을 손에 쥔 그가 입을 열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심금을 울렸다.
"네가 쓴 것이냐?"
길세연은 마음속으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방 포주에게 잡혀 남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세게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제가 적은 것입니다. 어제 공자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만약 제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고 침으로 독이 온몸에 퍼지는 것을 막지 않았다면, 공자는 아마 제명에 살지 못했을 겁니다."
눈을 가늘게 뜬 해월성의 눈언저리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독이라?"
오 년 전, 전장에서 치명상을 입고 깨어났을 때, 그는 가끔 병이 발작하면서 자기 통제를 할 수 없게 되어 사람을 다치게 했다. 의원은 그가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이렇게 변했다고 답했다.
이후, 전국에 의술이 능하다는 의원을 모두 찾아다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똑같았고 시간만 허비했다.
다친 머리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회복해야 하고, 언제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그가 독에 중독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길세연이 처음이었다.
길세연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독에 중독된 줄 몰랐습니까?"
조금 고민에 잠긴 그녀가 문득 깨달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공자가 중독된 독은 세간에 보기 매우 드문 독입니다. 천 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섭혼화(攝魂花)는 사람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독이죠. 섭혼화를 먹은 사람은 처음에는 석 달에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키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해를 입힙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꽃의 독성이 오장육부에 침투해 발작을 일으키는 횟수가 늘어나게 되죠. 어떤 때는 한 달에 두세 번 발작할 때도 있습니다. 독에 중독된 사람은 성격마저 완전히 변하게 되며 성질이 급해지고 나중에는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언제든 신경이 폭발하여 갑자기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말을 들은 해월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길세연이 말한 증상은 지금 그의 증상과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능력이 사실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기에 더욱 믿음이 갔다.
해월성의 곁에 선 현명(玄冥)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다급하게 물었다. "해독할 방법은 있습니까?"
이 세계에 환생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고 집에는 악독한 계모와 서매가 있어 지금 당장 그들 눈 밑에서 탈출하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남자를 이용해 도망치는 건 어떨까...
길세연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해독할 방법이 있지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눈살을 깊게 찌푸린 해월성의 목소리가 더욱 차가워졌다. "감히 나한테 조건을 제기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구나."
그러자 길세연은 더욱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길세연의 대답에 해월성은 더욱 놀랐다. 작은 계집이 자신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이리 대담하다니.
"네가 내 비밀을 알았으니, 내가 너를 죽일까 두렵지 않느냐?"
길세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를 죽이면 공자를 위해 해독약을 만들 사람도 없겠죠. 그러면 공자도 머지않아 죽을 텐데, 저는 공자가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해월성은 가볍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세상에 의술에 능통한 자는 많고도 많지. 너 한 사람만 의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