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과 매서운 바람이 유난히 차가운 밤이었다.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어깨에 자루를 짊어지고 황급히 깊숙한 숲으로 들어갔다.
"이런 제기랄, 이리 무거울 줄이야!" 두 사람은 자루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자루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소녀를 이미 죽은 돼지처럼 끌어냈다.
그러자 흉측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그대로 달빛 아래 나타났다.
진대범이 불쾌하다는 듯 바닥에 쓰러진 소녀를 걷어차며 침을 뱉었다. "약효가 엄청 센 약이라고 하지 않았어? 한 병 마시면 열녀도 욕구로 가득한 여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던데, 왜 아직도 반응이 없는 거지?"
흉측한 얼굴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지만, 둘째 아가씨의 명령을 받았으니 반드시 순결을 더럽히고 죽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최후가 더 비참해질 것이다.
그러니 다른 방법은 없었다. 헛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으며 분부를 따를 수밖에.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이상한 낌새를 차린 진대호가 자루 가까이에 다가가 소녀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동시에 소녀가 눈을 번쩍 떴다!
그렇게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본 진대호는 위험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큰 아가씨 아직 죽지 않았군요."
"마침 딱 깨어났네요. 최음제에 중독된 느낌이 아주 고통스럽지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바로 도와줄 테니까."
두툼한 손이 당장이라도 소녀의 옷깃에 닿으려 할 때였다.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소녀의 눈에 살기가 언뜻 거리더니 무릎으로 사내의 가랑이를 세게 위로 찍었다. 사내가 허리를 굽혀 비명을 지르는 순간, 소녀는 옆에 있는 돌을 잡고 사내의 머리를 있는 힘껏 찍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빠르게 변한 태세에 진대범이 정신을 차렸을 때, 진대호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차가운 주검이 되고 말았다.
피로 얼룩진 얼굴을 옆으로 돌린 소녀의 안색이 달빛에 가려져 언뜻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먹빛을 머금은 눈동자에 내뿜는 살의는 마치 악귀가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만 같았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아악!" 얼굴이 사색이 된 진대범이 허겁지겁 줄행랑을 치려 했다.
사내가 막 돌아선 순간, 도깨비와도 같은 그림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다.
"도망이라도 가려고? 아직 내 동의도 거치지 않았잖아?" 비죽거리며 냉소 짓는 소녀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빠르고 정확하게 손을 뻗었다.
퍽, 소리와 함께 진대범이 용서를 빌기도 전에 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진씨 형제를 처리하고 나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열기가 아랫배에서부터 전해지는 것을 느낀 소녀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바닥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
가슴 앞으로 빠르게 혈자리를 두 개 짚은 그녀는 열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강제로 억제하고 차분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김서완(金書晚), 원래 21세기 약재 가문의 18대 계승자로 의술과 독약에 능통하고 무예까지 뛰어났다. 그러다 어느 날, 밤을 새워가며 읽은 소설의 세계로 영혼이 오게 된 것이다.
원래 몸 주인의 이름도 김서완이었는데, 대하국 승상댁의 아가씨이자 경성의 제일 추녀였다.
승상 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못했을 뿐더러 계모에게 오랫동안 괴롭힘까지 받아온 그녀는 가문에서 줄곧 하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지냈다.
평양후작부의 박창세(樸世昌)와 혼인을 약조했으나, 계모의 딸 김이연(金伊冉)이 그녀의 세자빈 자리를 탐냈다. 하여 혼인 전날 그녀에게 약을 먹여 그녀의 순결을 더럽힌 후, 자리까지 빼앗으려 한 것이다.
결국 약효를 이기지 못한 그녀가 진씨 형제들에게 끌려가는 도중에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기억을 소화해 낸 김서완은 탐스러운 입술을 한 번 핥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걱정하지 말거라. 너를 다치게 했던 사람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음!"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전에, 혈자리를 눌러 억제했던 약효가 다시 몰려왔다.
김서완은 이번에 참지 못하고 눈살을 깊게 찌푸렸다.
최음제의 약효는 실로 대단했다. 그녀의 독보적인 점혈술도 소용없을 정도였으니, 원래 몸의 주인이 버티지 못하고 죽은 이유가 충분했다. 지금이라도 빨리 사내를 찾아 해독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그녀의 몸 상태로는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김서완은 서 있기조차 힘든 몸을 어렵게 이끌고 산 아래로 달리기 시작했다. 밤이 깊은 데다 최음제의 약효까지 치밀어 올라 앞으로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운 상태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덤불을 지날 때, 그녀는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으아아악!"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에, 김서완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가파른 비탈길을 굴러 차가운 연못에 빠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연못의 물에 몸을 담그고 나서야 김서완은 정신을 조금 차린 것 같았다. 빠르게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온 그녀는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고 주위를 둘러보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놓인 바위 위에 바르게 앉아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무심한 얼굴에 두 눈을 굳게 감은 사내의 구릿빛 피부에 달빛이 드리우며 잘빠진 근육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칠흑을 옮겨 담은 것 같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려 멀리서도 주변의 공기마저 내리누르는듯한 오만한 기세가 느껴졌다.
사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광경에 깊이 감격한 김서완은 사막에서 단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연못을 가로질러 헤엄쳤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사내의 준수한 외양에서는 검은 기운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얼굴만 봐도 사내가 맹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바위에 앉은 그는 한담(차가운 못)에 몸을 담가 체내의 독소를 억제하고 있었다.
"다 보았느냐?"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은 사내가 속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자, 눈 밑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텅 빈 눈동자가 드러났다.
회차 2
이런, 하필 장님이라니?
김서완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사내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이자, 곧바로 사내의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썩 물렀거라!"
겨우 최음제를 해독할 수 있는 도구를 찾았는데, 어떻게 이대로 물러날 수 있겠는가?
요염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김서완이 손을 앞으로 뻗어 사내의 옆구리 혈자리를 빠르게 내리찍은 다음, 머리에서 비녀를 뽑아 들어 사내의 목에 겨누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입 다무시오."
소천경(蕭千境)이 입 밖으로 꺼내려고 했던 말을 억지로 삼켜야만 했던 동시에 내력으로 혈을 파괴하려 할 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내려앉았다.
"미리 경고하는데, 괜한 힘 낭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 혈도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강제로 혈도를 뚫어 독이 재발한다면, 저는 시신도 거둬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가볍게 던진 말에 소천경은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넌 대체 누구야, 아니 잠깐. 대체 지금 뭘 하려는 것이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허리띠에 손을 올린 여인의 손길 덕분에 소천경은 신경이 완전히 곤두섰다.
뭘 하긴, 당연히 너를 범하려는 것이지.
김서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급해 그러니 몸 좀 빌립시다."
소천경은 찰나의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곧바로 정신이 든 그의 안색이 굳어 내리더니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본 왕이 누군지 아느냐?"
그제서야 손동작을 멈춘 김서완의 예쁜 눈매가 사내의 준수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머릿속에 저절로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소천경!
현 황제의 친동생이자 대하국에서 이름을 날린 전왕이었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군영에 들어가 열두 살에 전쟁에 참가해 적을 무찌르고, 젊은 나이에 현갑군을 이끌어 남만을 치고 북방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병사를 이끌고 전장을 나갈 때마다 백전백승의 승리를 거두었고, 무작위 한 수단에 적군은 간담히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그의 이름만으로도 밤새 자지 않고 우는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고, 그의 초상화는 백성들이 대문에 붙여 악귀를 몰아내는 작용이 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5년 전, 전장에서 독에 중독되어 실명하게 된 후로는 출전하지 못했으며, 지금은 경성에서 자유로운 날을 보내는 왕야가 되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내의 모든 정황이 꼭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아 소천경 본인이 틀림없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줄행랑을 쳤겠지만, 김서완은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잔뜩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경성 백성 중 어느 누가 왕야의 명성에 대해 모릅니까? 듣건대 왕야께서 스물세 살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혹 신체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닌지요?"
제발 빛 좋은 개살구는 아니길.
의심 가득한 말투에 조금은 놀란 듯한 목소리는 소천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목구비가 거칠게 일그러진 그가 이를 꽉 악물고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명을 다한 게라면 어디 한 번 시도해 보거라."
"왕야께서 진심을 담아 부탁하신 일이니 저도 더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김서완은 말을 하면서 소천경의 속바지를 덥석 벗기더니 중심부를 흘깃 쳐다본 후, 그의 허벅지에 올라탔다.
한담을 녹일 것 같이 뜨거운 열기가 밤새 이어졌다.
몸속의 최음제가 칠할 정도 풀린 것을 느낀 김서완은 허리를 붙잡고 일어나더니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안색인 소천경을 쳐다보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잇속만 챙기고 입 싹 닫는 파렴치한은 아니니까. 왕야께서 제 목숨을 살려줬으니 저도 왕야의 몸에 쌓인 열독을 풀어드리죠.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기억하십시오."
김서완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약재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옥수지, 자후꽃, 사린과, 보리지, 양제잎, 천년혈개구리... 이상 49가지 약재를 섞어 가루로 만들어 욕조에 넣어 매일 반 시진씩 발을 담그십시오. 그렇게 열흘이 지나면 몸속의 열독이 모두 빠져나갈 겁니다."
소천경은 김서완이 하는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중독된 최음제도 해독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어의도 속수무책인 열독을 해독할 수 있단 말인가?
김서완은 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왕야께서 제 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지만, 좋은 마음으로 조언 하나 하겠습니다. 한담은 열독이 발병했을 때의 고통을 덜어줄 뿐, 근본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열독이 쌓이게 내버려두면 왕야는 기껏해야 반년밖에 더 살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제가 왕야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김서완은 자신의 의술에 자신감이 넘쳤다. 필경 열독보다 백배나 보기 드문 독도 치료했던 그녀였기에 이 정도 열독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소천경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치더니 이내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고 물었다. "본 왕이 기억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지 않느냐?"
허리를 살짝 숙여 그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김서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듣건대 왕야께서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절대 잊지 않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고작 이까짓 약재가 왕야를 곤란케 할 수 있을까요? 왕야께서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49가지 약재를 어떻게 모을까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또 뵐 수 있겠죠. 반년 후에도 왕야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기 바랍니다."
어둡게 가라앉은 소천경의 이목구비가 거칠게 일그러졌다.
이대로 가려고? 단숨에 김서완의 목덜미를 낚아챈 그가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아니, 이런!"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김서완은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전왕이라는 작자가 기습공격을 해오다니!
"소... 전왕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왕야가 이런 야비한 술수나 부리는 사람이었군요." 김서완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회차 3
김서완의 목덜미를 낚아챈 소천경이 그녀를 한 대 때리려는 순간, 김서완이 먼저 소천경을 단숨에 기절시켰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는 한담 가장자리를 향해 달렸다.
맑고 잔잔한 수면 위에 거뭇거뭇한 반점이 가득 나 있는 얼굴이 비쳤다.
몸 주인이 원래 못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못생겼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 이상 얼굴을 쳐다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더니 아침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김서완이 떠나고 얼마 후, 기절해 있던 소천경이 깨어났다.
"왕야, 수하의 불찰입니다. 부디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뒤늦게 도착한 호위대장 경태가 한 쪽 무릎을 꿇고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는 대나무 숲에 숨은 자객을 제때에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객의 기습에 기절하여 큰 화를 초래할 뻔했다.
비록 왕야가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았지만, 그의 엉망진창인 몰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뿐더러 머릿속에 불길한 추측들이 자꾸 피어 올랐다.
"오늘 누가 이 산에 들어왔는지 당장 찾아내거라. 본 왕의 손으로 그 계집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소천경은 그 여인이 자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산에서 발을 헛디디며 굴러 떨어져 우연히 그를 만난 것이겠지.
그렇다면 분명 어딘가에 단서를 남겼을 것이다. 야밤에 산을 들어온 사람을 알아내면, 반드시 그 계집을 찾아낼 수 있을 테지.
....
그 시각, 김서완은 자신이 이미 소천경의 추적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일찍이 성문을 지난 그녀는 평양후작부 대문 앞에 도착했다.
오늘은 김씨 가문과 박씨 가문이 혼인하기로 약조한 날이다. 대문 앞에 화려한 등불을 가득 매단 후작부에서는 시끌벅적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작부를 뒤덮은 경사스러운 분위기에 이상한 점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길 양 켠에 모여든 백성들은 저마다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듣자 하니 김씨 가문 큰 아가씨가 어젯밤에 야반도주를 했다지. 하여 오늘 김씨 가문 둘째 아가씨가 대신 혼인한다던데, 사실인가?"
곁에 선 사내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이 두 눈으로 추녀가 외간 남자와 마차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봤는데,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단 말이오?"
"이런, 멀쩡한 세자빈 자리를 버리고, 혼인 전날 밤에 야반도주라니. 승상댁에서 어찌 이리도 멍청한 아가씨가 나왔단 말인가."
"야반도주라도 하길 다행이지. 못생긴 데다 멍청하기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세자의 세자빈이 될 수 있겠어..."
김서완은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태연하게 길가에서 따온 바나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어쩐지 김이연이 위험을 무릅쓰고 몸 주인을 성 밖으로 내보내려 하다니, 속에다 이런 꿍꿍이를 담고 있었군.
혼인 전날, 신부가 외간 남자와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은 김씨 가문과 박씨 가문에 큰 망신을 주었다. 이럴 때 경성 제일 미녀인 김이연이 자발적으로 후작부에 시집가겠다고 나선다면, 평양후작부의 명성을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박창세는 경성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여인을 세자빈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참으로 계획을 잘 세웠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세계로 오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김이연의 계획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폭죽이 동시에 터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징과 북이 길을 열며 높은 말에 올라탄 박창세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선두에 나타났다. 그 뒤로 여덟 명의 하인이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게 만들어진 가마를 짊어지고 웅장하게 거리를 가로질러 후작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김이연 아가씨는 얼굴이 예쁘장한 데다 마음씨까지 고우니, 듬직하고 풍채가 뛰어난 박창세 세자와 아주 천생연분이라지."
붉은색의 혼례복을 입고 꽃 가마에서 내린 김이연은 한곳에 모인 사람들의 칭찬을 듣더니 붉은 너울 아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그녀는 경성 제일 미녀라고 불리지만, 생모의 출신이 낮은 탓에 경성의 권문세가 아가씨들은 늘 그녀를 꺼려했다.
이제 드디어 그녀가 오매불망 바라던 후작부에 시집오게 되었으니, 박창세가 후작부를 물려받으면 그녀는 존귀한 신분인 후작 부인이 될 것이다. 때가 되면 어느 누가 감히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을 수 있을까?
장어멈의 손에서 붉은 비단을 받아 든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모습은 마치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후작부를 향해 걸어가는 것 같았다.
고고한 자태로 앞으로 걸어 나간 김이연은 갑자기 발밑이 미끄러지는 것을 느끼더니 몸의 균형을 잃고 앞으로 자빠지는 것이다. 그 충격에 머리에 쓴 너울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아!"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이연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얼굴을 찧었다.
"저런..." 구경꾼들은 잇달아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 대신 심한 통증 느끼는 것 같았다.
장어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혼례 날, 신부가 신랑 집 대문 앞에서 자빠지는 것도 모자라 너울이 벗겨지다니. 이보다 더 큰 불길은 없을 것이다.
제일 빠른 속도로 달려온 박창세가 김이연을 부축하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연아, 괜찮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이연의 빨개진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얼굴 군데군데 묻은 폭죽의 잔해에 신부의 단아하면서도 청초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통증에 김이연은 분통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낼 수 없었다.
손을 들어 박창세 앞으로 내민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흐느끼며 말했다. "세자 오라버니, 너무 아픕니다..."
그녀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발견한 박창세가 안타까움에 위로의 말을 건네더니 구경꾼들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누가 바닥에 바나나 껍질을 버린 것이냐?"
그는 어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녀석이 후작부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지 똑똑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곧바로 그는 모여든 구경꾼들 속에서 낯익은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