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남편은 시누이의 5주기를 기리기 위해 주말 동안 나를 외딴 별장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살아있는 시누이를 보았다. 그녀는 남편과, 심지어 나의 부모님과 함께 테라스에서 웃고 있었다. 그들은 남편의 머리칼과 ‘죽은’ 시누이의 눈을 가진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즐거워했다.
박주원은 나를 ‘순종적이고 슬픔에 잠긴 아내’라 부르며, 속이기 참 쉬운 여자라고 비웃었다. 나의 친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내게 보여준 적 없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박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5년간의 결혼 생활은, 그들이 비밀리에 진짜 인생을 사는 동안 나를 붙잡아두기 위해 설계된 한 편의 연극이었다.
그는 단순히 고백만 한 게 아니었다. 내가 ‘쓸모 있는 해결책’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마지막 계획을 밝혔다. 그들은 내가 꾸며낸 ‘슬픔’을 빌미로 나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킬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나는 도망쳤다. 소란을 피우기 위해 불을 지른 뒤, 도로 옆 배수구에 숨었다. 내 인생은 잿더미가 되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남편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단 한 사람에게 필사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최대 라이벌에게.
제1화
5년 된 거짓말에는 이름이 있었다. 박서연.
나는 잘 가꿔진 별장 정원에서 몸을 떨며 서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재스민의 두껍고 향기로운 장막 뒤에 숨어서. 늘 위안을 주던 그 향기는 오늘 밤따라 역겨웠다. 비와 기만의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축축한 안개가 내 피부에 달라붙어 얇은 드레스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 드레스는 박주원이 ‘편안한 주말여행’을 위해 직접 골라준 것이었다. 그의 비극적으로 죽은 동생의 기일을 견디는 나를 위한 주말.
하지만 박서연은 죽지 않았다.
그녀는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석조 테라스 위에 서 있었다. 프렌치 도어에서 쏟아지는 따뜻하고 황금빛 조명을 받으며. 반세기 동안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를 내지르며, 고개를 젖힌 채 내 남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남자, 박주원을. 그는 몇 년간 본 적 없는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품에 안은 작은 아이를 가볍게 흔들어주고 있었다. 주원의 검은 머리칼과 서연의澄澈한 눈을 가진 아이였다.
나의 부모님도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서연의 팔에 손을 얹고, 내가 단 한 번도 끌어내지 못했던 기쁨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주원의 옆에 서서 그의 어깨를툭 치며, 마치 진정한 가족을 거느린 자랑스러운 가장처럼 행동했다.
“날이 갈수록 널 더 닮아가는구나.”
축축한 밤공기 속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날아왔다.
“그래도 저 고집스러운 턱은 당신을 닮았어요.”
내가 묻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삶에서 들려오는 유령의 메아리처럼, 서연의 목소리가 답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아이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머리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건 꿈이다. 악몽이다. 서연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우리는 장례식도 치렀다. 나는 몇 달 동안 산산조각 난 주원을 위로하고, 슬픔에 잠긴 내 부모님을 다독였다. 그녀가 남긴 빈자리를 중심으로 내 삶을 재건했다.
“서아는 정말 아무것도 눈치 못 챈 거 확실해?”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게 울렸다. 익숙하고, 무시하는 듯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주원이 코웃음을 쳤다. 날카롭고 추악한 소리였다.
“강서아는 내가 의심하라고 하는 것만 의심해. 순종적이고 슬픔에 잠긴 아내 역할에 너무 심취해서, 진실이 코앞에 있어도 모를걸. 아직도 이번 주말이 서연이 추모하는 여행인 줄 안다고.”
끔찍한 구역질이 밀려와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세상이 기울어지는 듯했고, 재스민 덩굴이 나를 휘감으며 뒤틀리는 것 같았다. 순종적인. 슬픔에 잠긴. 아내. 그 단어들은 독약과도 같았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서연의 목에 걸려 빛을 반사하는 독특한 고풍스러운 은색 로켓. 정교하게 조각된鳴鳥 모양에 작은 사파이어 두 개가 눈으로 박혀 있었다. 할머니의 로켓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기 몇 년 전, 강도를 당해 잃어버렸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가보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그런데 그것이, 유령이어야 할 여자의 살갗 위에서 버젓이 빛나고 있었다.
퍼즐 조각들이 역겨운 속도로 맞춰졌다. 가짜 결혼. 거짓말들. 내 모든 인생은, 그들이 완벽하고 소중한 박서연을 안전하게 숨겨두는 동안, 내 상속 재산을 통제하고 나를 붙잡아두기 위해 세심하게 설계된 연극 무대였다.
나는 아내도, 딸도 아니었다. 나는 대역이었다. 도구였다.
충격을 뚫고 차갑고 순수한 분노가 타올랐다. 여길 벗어나야 해. 당장.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발걸음은 서툴렀고, 부드럽고 축축한 흙에 발이 빠졌다. 발뒤꿈치 아래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그 소리는 고요한 밤에 울리는 총성과 같았다.
테라스에 있던 모든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주원의 미소는 사라지고, 차가운 분노의 가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강서아.”
그의 입술에 오른 내 이름은 저주였다. 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돌아서서 달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가시덤불이 드레스를 할퀴고, 젖은 나뭇잎이 얼굴을 때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저 집의 따뜻하고 황금빛 불빛과, 차갑고 죽어버린 내 인생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길게 뻗은 자갈길 подъезд에 다다랐을 때, 주원의 손이 쇠붙이처럼 내 팔을 움켜쥐었다.
“이거 놔.”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며 숨을 헐떡였다.
“그만해.”
그가 쉿 소리를 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분노도, 당황도 아니었다. 오직 소름 끼치도록 의기양양한 끝맺음만이 있었다.
“끝났어, 서아. 네가 본 거 알아.”
“날 속였어! 당신들 전부!”
목구멍에서 날것 그대로의 거친 말이 터져 나왔다.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야.”
그가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말했다. 한때 위안으로 여겼던 그의 향수 냄새가 이제는 부패한 냄새처럼 느껴졌다.
“서연이는 잠시 사라져야 했어. 넌 그냥 쓸모 있는 해결책이었고.”
그가 나를 집 쪽으로 다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발뒤꿈치를 땅에 박고 버텼다. 심장이 갈비뼈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이럴 순 없어.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그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 음모 꾸미는 듯한 속삭임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서류는 이미 다 넘어갔어. 김 박사가 몇 달 동안 널 관찰해왔잖아. 너의 ‘깊은 슬픔’, ‘불안정한 상태’. 너무 쉬웠지. 우린 널 입원시킬 거야. 물론, 널 위해서지.”
강제 입원. 정신병원. 그 단어들이 숨통을 조이며 나를 후려쳤다. 이건 더 이상 거짓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었다. 그들이 몇 년에 걸쳐 내 주위에 쌓아 올린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들은 나를 그냥 버리는 게 아니었다. 나를 지워버리고, 내 버전의 진실이 미친 여자의 망상으로 치부될 곳에 가둬버릴 작정이었다.
아드레날린이 온몸으로 치솟았다. 원초적이고 절박한 생존 본능이었다. 나는 그의 비싼 가죽 구두를 힘껏 밟았다. 그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손아귀 힘이 아주 잠깐 풀린 순간, 나는 팔을 비틀어 빼냈다. 나는 분리된 차고 쪽으로 허둥지둥 달려가 옆문을 더듬었다. 잠겨 있지 않았다.
안은 휘발유와 오래된 나무 냄새로 가득했다. 내 눈은 주위를 훑다가 잔디깎이 옆에 있는 빨간색 연료통에 멈췄다. 내 마음속 어둠 속에서 거칠고 무모한 생각이 번쩍였다. 시선 끌기용 소란.
손이 떨렸다. 뚜껑을 열고 기름때 묻은 걸레 더미 위로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먼지 쌓인 작업대 위에서 성냥갑을 찾아냈다.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첫 번째 성냥은 꺼져버렸다. 두 번째 성냥에 불이 붙었다.
나는 그것을 걸레 더미 위로 던졌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는 광경은 끔찍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나는 문을 활짝 열어둔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폭풍의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비가 세차게 내리며 머리카락을 얼굴에 달라붙게 하고, 순식간에 나를 뼛속까지 적셨다. 등 뒤에서 연기를 발견한 그들의 첫 번째 당황한 외침이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았다. 폐가 타는 듯하고 맨발이 진흙탕에 미끄러져도 그냥 달렸다. 별장이 등 뒤에서 멀어지고, 증오스러운 빛으로 남을 때까지.
마침내 나는 큰길 근처 배수구에 숨어 쓰러졌다. 추위와 공포로 온몸이 통제 불능으로 떨렸다. 내 가방. 작은 이브닝 백을 손에 꼭 쥔 채였다. 안에 휴대폰이 있었지만, 추적당할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그들의 거미줄의 일부였다.
단 하나만 빼고. 잊고 있던 옆 주머니에 넣어둔 명함 한 장. 몇 달 전 주원의 책상에서 발견했던, 은색으로 이름이 양각된 세련된 검은색 명함이었다. 권태하. 주원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최대의 사업 라이벌. 그때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아주 작은 반항심으로 간직해두었던 것이었다.
감각 없는 떨리는 손가ryo로 명함과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을 켰다. 엄지손가락이 번호 위를 맴돌았다. 미친 짓이다. 그가 날 도와줄 리 없어. 왜 도와주겠어?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내게 있었나? 영원히 갇히거나, 백만 분의 일의 확률에 걸거나.
나는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한 번, 두 번 울렸다.
밤처럼 깊고 차가운 목소리가 답했다.
“말해.”
회차 2
세찬 비를 가르는 헤드라이트가 쌍날검처럼 나를 그 불빛 속에 가뒀다. 폭풍 속에서 materialized된 것처럼 소리 없이 나타난 검은색 세단이 길가에 멈춰 섰다. 엔진은 낮고 강력한 포식자의 숨소리처럼 조용히 울렸다. 그 순간, 나는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주원의 사람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뒷문이 열렸다. 키가 큰 남자가 나타나, 희미한 빛마저 삼켜버릴 듯한 커다aran 검은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는 불안할 정도로 침착하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비싼 수트는 비를 튕겨냈고, 잘 닦인 구두는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가 가까워지자, 희미한 빛이 그의 날카로운 얼굴 윤곽을 비췄다. 그였다. 권태하. 경제 잡지에서 봤던 사진과 똑같았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 검은 머리칼,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 그리고 화강암으로 깎아낸 듯한 무표정.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나의 비참한 몰골을 훑었다. 찢어진 드레스, 진흙투성이 다리, 비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 그는 한 치의 동정이나 놀라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평가할 뿐, 그의 눈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
“강서아 씨군.”
질문이 아니었다. 단정이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다. 이가 너무 세게 부딪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날씨와는 상관없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차에 타.”
전화기 너머로 들었던 것처럼 딱딱하고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망설였다. 또 다른 괴물에게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새로운 공포가 밀려왔다. 남편이 그를 증오한다는 사실 외에 내가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인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다른 선택지는 남편에게 발견되길 기다리는 거지. 장담하는데, 그의 의도는 내 것보다 훨씬… 비전문적일 거야.”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배수구에서 나와 차 뒷좌席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 안은 바깥의 폭풍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고급 가죽과 값비싼 향수 같은 깨끗한 향기가 공기를 채웠다. 문이 묵직하고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며 닫히자, 빗소리가 차단되었다. 옆자리에는 두툼한 캐시미어 담요가 접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어깨에 둘렀다. 몸은 여전히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권태하가 반대편으로 올라탔고, 차는 부드럽게 도로 위로 다시 합류했다. 우리는 몇 분 동안 침묵 속에 달렸다. 서울의 도시 불빛이 비에 젖은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그들이 절 정신병원에 가두려고 해요.”
마침내 내가 속삭였다. 그 말은 독약처럼 느껴졌다.
“알아.”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은 stark하고 단호했다.
“박주원은 예측 가능한 인간이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건 파괴해 버리지.”
그의 앎은 불안했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보호와 자원, 그리고 반격할 방법을 제공하지. 하지만 내 도움에는 대가가 따를 거야.”
물론이겠지. 권태하 같은 남자들은 공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뭘 원하죠?”
그가 마침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나를 좌석에 고정시켰다. 그 눈은 바깥의 폭풍 구름과 같은 색이었고, 그만큼이나 격렬했다.
“아내가 필요해. 오늘 저녁 TH그룹 이사회 합병 최종 투표를 확보하기 위한 내 약속이 깨졌거든. 투표는 3일 후야. 안정적인, 기혼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해. 당신은 새로운 이름과 그에 따르는 법적 보호가 필요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지.”
나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랑… 결혼하자고요?”
“새벽까지.”
그가 확인시켜 주었다.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즉각적이고, 협상의 여지는 없어.”
그가 말하는 동안, 내 눈은 바깥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권태하의 차와는 다른, 날렵한 검은색 무표시 차량이 평행한 거리를 천천히 순항하고 있었다. 경찰차도 아니었고, 주원이 고용한 경호원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차 안의 남자들은 그림자 같았지만, 그들의 자세는 경계심이 가득하고 전문적이었다.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수색 중이었다. 하지만 누구지? 이 음모에 제3의 미지의 플레이어가 있다는 오싹한 생각에 새로운 공포가 치솟았다.
내 시선은 다시 권태하에게로 향했다. 결혼. 미친 짓이었다. 절박하고 미친 문제에 대한 절박하고 미친 해결책. 하지만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나? 그와 함께 가거나, 주원과 그의 정체 모를 위협적인 친구들에게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거나. 하나의 감옥에서 다른 감옥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지만, 이쪽은 적어도 반격할 가능성을 제공했다.
“좋아요.”
나는 간신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할게요.”
놀라움인지 만족감인지 모를 감정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가 즉시 사라졌다. 그는 앞 좌석 주머니에서 얇은 가죽 폴더를 꺼내 내게 건넸다.
“혼전 계약서야. 내 변호사는 철저하지.”
나는 그것을 열었다. 차 안은 어두웠지만, 빽빽한 법률 용어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페이지들을 훑어보았다. 머리는 내용을 따라가기 위해 애썼다. 자산 분리, 비밀 유지 조항 등 모두 표준적인, 무자비한 재벌의 계약서 내용이었다. 그러다 내 눈이 끝부분의 한 문단에 멈췄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 조항은 철옹성과 같았다. 나, 강서아가 어떤 이유로든 박주원이나 내 부모님과 접촉을 시도할 경우, 계약을 위반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권태하의 보호를 상실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내 가족 회사에 대한 상당한 지분을 포함한 내 모든 상속 재산이 즉시, 합법적으로 그에게 양도되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방패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 전쟁의 소유권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는 내 가족이 통제하려 했던 바로 그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금박을 입힌 새장은 강철로 된 창살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조항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이건 당신에게 모든 걸 주는 거잖아요.”
“그래.”
그가 간단히 말했다.
“그게 당신의 충성을 보장하지. 당신은 그들에게 돌아갈 수도 없고, 나를 상대로 한 장기말로 이용될 수도 없어. 그들을 당신 인생에서 완전히 끊어내거나, 모든 것을 잃거나. 중간은 없어.”
나는 폴더를 닫았다. 비싼 가죽이 손가락 아래에서 미끄럽고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돌아갈 길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나를 묻으려 했다. 유일한 탈출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를 통하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나는 텅 빈 목소리로 물었다.
“24시간 운영하는 구청.”
그는 내게 새 휴대폰을 건넸다. 추적 불가능한 최신 모델이었다. 내가 그것을 받자, 그가 설정해 둔 뉴스 피드에서 푸시 알림이 화면에 떠올랐다. 헤드라인은 내장을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었다.
‘서진그룹 상속녀, 정신적 붕괴. 강서아, 비극적 사건 후 사랑하는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 입원.’
기사에는 작년 자선 행사에서 찍힌, 카메라를 향해 멍하니 웃고 있는 내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들은 단 1초도 낭비하지 않았다. 나를 불신하게 만들고, 히스테릭하고 망가진 여자로 보이게 하려는 대중 캠페인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깊은 슬픔”과 “사랑하는 딸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도움을 받게 하려는 헌신”을 표명하며 인용되었다.
뜨겁고 분노에 찬 눈물 너머로 글자들이 흐릿해졌다. 그들은 나를 가두는 것뿐만 아니라, 내 인격을 암살하고, 내 신뢰도를 파괴하여 아무도 나를 믿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절박한 희망인 권태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회색 눈에는 새로운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사인해.”
그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절망을 꿰뚫는 목소리였다.
“그게 네가 반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회차 3
펜트하우스는 집이라기보다 하늘 위의 요새였다. 우리는 인적 드문 구청에서 지친 표정의 공무원과 권태하의 무표정한 운전기사를 증인으로 세운 채, 조용하고 무미건조한 혼인신고를 마친 뒤 이곳에 도착했다. 이제 그의 거실 한가운데 서 있으니, 마치 현대 미술관의 전시품이 된 기분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통유리창이 두 개의 벽면 전체를 차지하며, 서울의 반짝이는 스카이라인을 숨 막히게 아름다운 파노라마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유리는 창문이라기보다 세상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 장벽처럼 느껴졌다. 가구는 모두 날카로운 각과 흑백의 색조—검은 가죽, 크롬, 회색 대理石—로 이루어져 있었다. 잡동사니도, 사진 한 장도 없었다. 인간이 실제로 산다는 흔적이 전혀 없었다. 공기는 마치 삶의 모든 향기를 깨끗이 문질러 없앤 것처럼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규칙은 이래.”
권태하의 목소리가 동굴 같은 공간에서 살짝 울렸다. 그는 수트 재킷조차 벗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서서 도시의 불빛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을 이루고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우린 헌신적인 신혼부부야. 모든 사업 문제에선 내 의견을 따르되, 넌 내 파트너가 될 거야. 내 동등한 상대. 내 계좌, 직원, 자원에 접근할 수 있어. 마음껏 써.”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적인 공간에선, 우린 비즈니스 파트너야. 이쪽은 내 공간.”
그가 오른쪽 복도를 가리켰다.
“저쪽은 당신 공간. 우린 각자의 삶을 유지할 거야. 이건 계약이지, 로맨스가 아니니까.”
*계약이지, 로맨스가 아니니까.* 그 말은 안도감을 줘야 했지만, 가슴속에 이상하고 공허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캐시미어 담요를 몸에 더 단단히 둘렀다. 아직도 축축하고 찢어진 드레스 차림이었다. 마치 궁전에หลง 들어온 길고양이 같았다.
“가사도우미가 옷을 좀 준비해 뒀어. 사이즈가 맞을 거야.”
그가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여전히 그 무심하고 평가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일은 새 옷을 맞춰야지. 넌 이제 권씨 집안사람이야. 그에 걸맞게 보여야 해.”
그는 날렵한 검은색 콘솔 테이블로 걸어가 얇은 태블릿을 집어 내게 건넸다.
“그리고 이건 당신 숙제.”
나는 태블릿을 받았다. 화면이 켜지며 암호화된 단일 폴더가 나타났다. 제목은 ‘서진그룹’이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파일을 열었다. 그것은 기업의 부정행위, 수상한 거래, 숨겨진 계좌들로 얽힌 상세한 조사 자료였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초상화가 탐욕과 부패라는 stark한 색채로 그려져 있었다. 압도적이었다.
그때, 내 눈이 하위 폴더 하나에 꽂혔다. 제목은 대부분 가려져 있었지만 두 단어는 보였다. ‘프로젝트 나이팅게일.’ 숨이 멎었다. 나는 그것을 탭해서 열었다. 대부분의 문서는 암호화되어 있었지만, 한 파일에 거친 이미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고풍스러운 鳴鳥 모양 로켓의 클로즈업 사진이었다. 할머니의 로켓. 서연이 차고 있던 바로 그것. 사진 아래에는 짧고 암호 같은 메모가 있었다. *자산 키 확인됨. 나이팅게일 프로토콜 활성화.*
로켓은 단순히 盗まれた 가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열쇠였다. ‘프로젝트 나이팅게일’이라는 무언가로 가는 열쇠. 내 가족의 가장 깊은 음모와 권태하의 개인적인 복수심을 연결하는 중요한 비밀. 차가운 공포가 나를 덮쳤다. 이건 단순한 가족의 배신보다 훨씬 더 큰 문제였다.
내가 그 의미를 처리하기도 전에, 내가 대리석 테이블 위에 놓아둔 새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엄마’라는 단어가 떠 있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나는 휴대폰을 쳐다보며 손을 공중에 멈췄다. 권태하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고, 그의 침묵은 시험이었다. 혼전 계약서. *만약 당신이 접촉을 시도한다면…* 하지만 그녀가 내게 연락한 것이었다.
“받아.”
권태하가 조용히 말했다.
“스피커폰으로.”
나는 떨리는 숨을 내쉬고 화면을 탭했다.
“여보세요?”
“서아야! 아가, 세상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무균실 같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꾸며낸 눈물과 공포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우리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어디 있니? 주원이가 걱정돼서 죽으려고 해. 밤새 널 찾아다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위선이 너무나 엄청나서 숨이 막혔다.
“얘야, 집에 와야 해.”
그녀가 애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연습된 것처럼 갈라졌다.
“네가 뭘 봤다고 생각하는지 알아. 스트레스, 슬픔… 그게 사람 마음을 속일 수 있단다. 김 박사님이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어. 네가… 환각을 볼 수도 있다고. 서연이를 본 거… 오, 서아야, 내可怜한 딸, 네가 그 애를 너무 그리워해서 그래.”
가스라이팅. 그것은 명인의 연기였다. 고통스럽고 끔찍한 순간, 내 어린 시절의 열병과 악몽을 달래주던 그 목소리, 그 원초적인 감정 조작이 거의 먹혀들 뻔했다. 한 줄기 의심이 내 결심을 꿰뚫었다. *내가 정말 미친 걸까? 내가 모든 걸 상상한 걸까?*
나는 고개를 들어 권태하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의 회색 눈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그 눈에는 판단이 없었다. 오직 조용하고, 명료한 집중만이 있었다. 그는 진실을 보았다. 그는 나를 믿었다. 그 조용한 확신이 내가 필요로 하던 anchor였다.
나약함은 지나가고, 차갑고 단단한 확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집에 안 가요.”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하지만 서아야—”
나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찔러 통화를 끊었다. 뒤따른 침묵은 무거웠다. 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마치 그녀가 전화기를 통해 손을 뻗어 내가曾经是女儿였던 마지막 흔적까지 파내어 버린 것 같았다.
권태하가 다가와 내 감각 없는 손에서 태블릿을 가져가 파일을 닫았다.
“좀 쉬어.”
그가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내일부터 시작이야.”
나는 그가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자기 쪽 아파트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가죽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고 잠시 멈췄다.
“옷 입어.”
그가 강렬한 시선으로 말했다.
“약속이 있어.”
“약속이요? 지금요? 한밤중인데.”
“밤은 아직 젊어.”
그가 처음으로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것은 위험하고 포식자 같은 미소였다.
“그리고 연례 서울 헤리티지 자선 갈라가 아직 한창이거든. 올해는 네 아버지 회사가 주 후원사지. 아마 가족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기조연설을 할 예정일 거야.”
피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진심일 리가 없었다.
한 시간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용하고 효율적인 가사도우미인 김 여사님의 도움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이제 몸에 착 달라붙는 짙은 자정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위로 쓸어 올렸고, 섬세한 화장은 밤의 흔적을 감춰주었다. 거울 속에는 낯선 사람이 있었다. 세련되고 우아하며, 몇 시간 전 배수구에서 쓰러졌던 망가진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여자. 나는 권씨 집안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권태하가 완벽하게 재단된 턱시도를 입고 문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나를 보았을 때, 처음으로 그의 평가하는 듯한 시선에 다른 무언가가 스쳤다. 인정.
서울 그랜드 호텔의 연회장은 보석과 샴페인의 바다였다. 공기는 정중한 대화 소리와 현악 4중주단의 연주로 윙윙거렸다. 우리가 들어서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고개들이 돌아갔다. 속삭임이 들불처럼 번졌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뉴스 알림을 읽었다. 그들은 미친 여자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권태하의 손이 내 허리를 단단하고 따뜻하게 감싸며, 마치 왕족이 바다를 가르듯 군중 속을 헤쳐 나갔다. 그는 아는 사람들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누구든 우리에게 도전하려는 자를 압도하는 힘과 자신감을 발산했다.
연회장 맨 끝 무대 위에는 아버지가 연단에 서 있었고, 어머니와 주원이 자랑스럽게 그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가족 가치가,”
아버지가 거짓된 진심으로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지역사회와 우리 회사의 기반입니다.”
권태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우리 앞의 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무대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속삭임은 잦아들고, 충격에 찬 집단적인 숨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박수갈채를 받으며 연설을 마치는 순간 무대 계단에 도착했다. 주원이 우리를 먼저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미소는 싸구려 도자기처럼 얼어붙고 금이 갔다. 어머니는 손을 입으로 가져갔고, 그녀의 눈은 공포로 커졌다.
권태하는 두 번의 쉬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내 허리에 있었다. 그는 연단에 도착해, 정중하지만 단호한 몸짓으로 아버지의 힘없는 손에서 마이크를 빼앗았다. 연회장 전체가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권태하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강철처럼 날카로웠다.
“그저 장인어른의 감동적인 연설에 축하를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 말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장인어른. 군중 속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권태하의 시선이 내 가족의 겁에 질린 얼굴을 훑고 청중에게로 향했다. 그는 다시 그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 밤 우리 가족의 기부금 발표는 제 아내와 제가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내 눈을 찾았다. 그 순간, 수백 쌍의 눈초리 아래에서, 불꽃처럼 터지기 시작하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나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아내였다. 그리고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