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어디 가는 거야?"
결혼식에서 떠나는 진세명의 손목을 붙잡던 홍경인의 눈빛은 흔들렸고, 표정에서는 간절함이 돋보였다.
행사장에는 양가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자리에 앉아 대기 중이었다. 주례자는 진세명에게 홍경인을 평생 사랑할 것이냐 물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주례자를 무시하고 전화를 받은 뒤 갑자기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민지가 우리 결혼식을 알고서 건물에서 투신 자살을 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어. 너도 걔 우울증 알잖아. 구하러 가야 해." 진세명은 다급하게 말하며 홍경인을 옆으로 밀쳤다.
이로 인해 홍경인은 발목을 삐었고, 바닥에 넘어지며 어색하게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오늘은 우리 결혼식이야! 당신 이렇게 가고 나면 나 어떡해? 백민지가 전에 당신 뒤통수를 친 걸 잊었어? 그 사람은 당신한테 그렇게 많은 고통을 안겨줬는데, 왜 그 사람을 내려놓지 못하고 꼭 만나러 가는 거야?"
진세명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넌 나와 민지 사이에 있었던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 없어. 그녀의 잘못이던 말던 넌 평생 그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해."
홍경인의 마음에 비수가 꽂혔다. 진세명은 단 한 순간이라도 백민지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 사람에게 있어 홍경인은 영원히 백민지를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러는 거야?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결혼식이 끝날 때 까지만 기다려. 곧 반지 교환이잖아. 그것만 하고 나가."
진세명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경멸감을 담은 말투로 말했다. "사람의 목숨보다 결혼식이 더 중요하다는 거야? 이기적이고 악독하기도 하지. 결혼식 일정은 다시 잡도록 하지."
그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모인 손님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려하게 장식된 식장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신랑이 떠나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세명 씨, 제발 가지 마! 당신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 홍경인은 바닥에 처절하게 앉아 절규했다. 그녀는 몸을 떨었고, 흘린 눈물에 화장은 전부 망가졌다.
3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는 그녀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이렇게나 중요한 날 다른 여자를 선택했다. 진세명의 마음은 오직 백민지만을 향했고 남겨진 홍경인의 불쌍한 처지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조롱, 연민, 비웃음...
복잡한 시선들이 홍경인을 향하여 쏘아왔고 그 뜨거운 주목들로 그녀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수모였다!
아버지 홍강산이 다가왔다. 그녀는 위로의 손길을 바랐지만 오히려 그는 날카로운 말투로 매도할 뿐이었다. "남자 하나도 못 사로잡아? 어떻게 이리 쓸모가 없어!" 그는 그녀를 질책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내 황보미와 함께 떠났다.
그녀의 여동생인 홍경혜는 히죽히죽 웃으며 군중 속에서 나타났다. "언니, 창피하겠다. 결혼식 당일에 신랑이 대놓고 도망가다니. 언니 때문에 오히려 내가 창피해 죽을 지경이야. 나도 오죽한데, 엄마 아빠는 어떻겠어?" 그 말을 한 뒤 그녀도 돌아서서 떠났다.
홍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 둘 씩 떠나갔고, 그녀는 완전히 홀로 남겨졌다. 처음 진세명의 부모는 죄책감을 느꼈으나, 그녀의 가족의 반응을 보고는 일말의 미안함도 사라졌다.
"부모도 상관하지 않는 걸 우리가 뭐 어떻게 하겠어요? 전적으로 세명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요."
"맞아. 좋은 신붓감이었다면 왜 신랑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겠어?"
"바람이라도 피운 거 아니야? 갑자기 신랑이 떠날 이유가 그거 말고 더 있겠어?"
주변 손님들의 비난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때 갑자기 옆의 홀에서 소음이 들렸다.
돌아선 홍경인은 양복을 입은 채 휠체어를 타고 있던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주례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부 분은 어디 가셨죠?"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지나가던 스태프를 멈춰 세우며 물었다. "저 사람, 새 신랑 맞죠? 신부는 어디 있어요?"
직원은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타나지 않았어요. 남편의 장애를 감당하지 못해서라고 들었죠."
"그런데도 저 사람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휠체어를 타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경인은 그 남자 몸의 차가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등을 돌리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의 기분을 똑같이 공감할 수 있었다.
같은 운명을 지닌 불쌍한 이들이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홍경인의 눈빛은 결단력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진세명을 3년 동안이나 사랑했으나, 결국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면 더 이상 진세명에게 충성할 필요도 없었다. 널리고 깔린 게 남자인데 결혼상대 하나 못 구한다고?
진세명, 이젠 더 이상 너를 원하지 않아!
홍경인 갑자기 일어서자 그녀를 수군거리며 조롱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드레스를 들어 올리고 당당하게 휠체어를 탄 남자에게로 걸어가는 홍경인에게 집중되었다.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다가오는 모습에 남자의 하객들도 깜짝 놀랐다.
그녀의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은 남자도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홍경인은 그대로 멈춰 선 채 놀란 듯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잘생긴 남자를 바라봤다. 이어 그녀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신부가 필요하시다고 들었어요. 제 신랑도 방금 저를 두고 떠났어요. 우리 결혼하는 거 어때요?"
회차 2
"제 이름은 홍경인이에요. 괜찮으시다면 결혼식 끝나고 혼인신고하러 가죠."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의 대담한 제안은 관중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심지어 영상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홍경인 씨, 정말 괜찮으실까요? 제 장애 때문에 경인 씨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지도 몰라요." 남자는 본인의 상태를 숨기지 않으며 조심스레 다시 생각해 보라 일렀다.
"결심했어요." 홍경인은 결단력 있는 태도를 일관했다.
"저는 권준호라고 합니다."
그녀의 각오를 본 권준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우려를 표했다. "경인 씨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홍경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본인의 결정에 확신이 있었다. 한때 진세명과의 결혼에만 전념했지만, 결국 진심에 돌아오는 건 진심이 아니었다. 결혼 또한 그동안의 집념에 대한 끝을 맺으려 한 것 뿐이라서 상대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자 시청에서 결혼 절차를 마친 홍경인과 권준호는 이제 공식적인 부부 사이가 되었다.
혼인 증명서를 손에 넣은 홍경인은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진세명의 마지막 배신은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홍강산은 홍경인이 진 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지 못했다고 말이 많았지만 홍 씨 집안에는 딸이 하나 더 있었다.
홍경혜, 홍경인은 자기의 이 동생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탐욕에 사로잡힌 홍경혜가 진세명의 아내이자 진 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는 기회를 포기할 수야 있겠는가?
따라서 권준호와 결혼하는 것은 홍경인이 가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그녀는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혼인 증명서를 곰곰이 살펴보던 홍경인을 바라보던 권준호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장애인 남자와 결혼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시나요?"
홍경인은 고개를 저으며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는 대답했다. "잘 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권준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에는 불신의 기미가 담겨 있었다.
어떤 여자가 장애인 남자와 진심으로 결혼하고 싶어하겠는가? 그는 그녀가 단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 가족의 주의를 분산시킬 일시적인 신부가 필요했다. 어쩌면 그 기간 동안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홍경인은 권준호를 차에 태우고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권준호의 집은 호화로웠다. 넓은 정원과 수영장, 정장을 갖춰 입은 집사와 메이드 복을 입은 메이드들이 즐비해 있었다.
홍경인 고급 양모 카펫 위에 발을 딛으며 새 남편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사는 그들에게 정중하게 다가와 물었다. "준호 도련님, 이 분이 사모님이십니까?"
호화로운 집을 둘러보며 남편의 이름을 곱씹던 홍경인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권 씨 집안은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집안이었으며, 권준호는 뛰어난 재능과 역량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1년 전 교통사고 이후 다리를 다친 권준호는 대중들의 눈앞에서 사라졌고 전의 모든 업적도 금방 잊혀졌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름도 유명한 권준호와 결혼했다는 말인가?
홍경인은 그가 한 씨 집안의 아가씨와 약혼 했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결혼식 날 사라진 신부는 그 한 씨 집안의 아가씨라고?
시청에서 권준호의 이름을 들은 홍경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만약 이 남자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양아치처럼 다가가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결혼 이야기를 꺼낼 용기조차 없었을 것이다.
권준호는 그녀의 얼굴에 담긴 충격과 공포를 알아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내가 누군지 몰랐다는 건가?' 권준호가 장애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홍경인, 오늘부터 이곳의 안주인이 될 거야." 권준호는 힘 있는 목소리로 그녀를 소개했다.
"한유라는 도망쳤어. 홍경인 씨는 내가 장애인이라도 상관 없다며 결혼하자고 했지." 그는 불쑥 덧붙였다.
"한유라 씨가 결혼식 날에 도망치셨다고요?" 집사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한 씨 집안은 권준호와 한유라를 결혼시킴으로서 두 집안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혼식 날 신부는 사라졌다. 권준호에게 고의적인 모욕을 준 것이 아니라면 이게 무엇이라는 말인가?
집사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도련님, 어쩌면 도망간 게 나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맞는 사람을 찾으신 것 같네요."
홍경인이 권준호의 장애에 개의치 않았으며, 그와 결혼까지 한 것을 보고 집사는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회차 3
권준호의 다리를 본 홍경인은 그를 향한 동정심을 느꼈다. 한때 도시를 휘두르는 거물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너무 연약하고 불쌍해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라고 약혼까지 한 한유라는 일말의 배려도 없이 결혼식장에서 도망쳤다. 홍경인이 결혼식 때에 느꼈던 절망감의 배는 될 것이다.
홍경인은 권준호에게 다가가며 그의 손을 잡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우리는 이제 부부예요. 제가 평생 당신을 돌볼게요."
권준호의 표정은 굳어졌다. 평생? 감히 입 밖으로 내뱉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동정심 가득한 눈빛을 하며 진심어린 관심이 진짜처럼 느껴지니 참으로 연기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권준호는 아무 말도 없이 휠체어를 굴리며 1층의 서재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집사는 미안한 듯 말했다. "사고 이후로 도련님께서 좀 더 변덕스러워지셔서요."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홍경인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누구던 그와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이보다 더 할 것이지 친절하게 대하라고 요구하기에는 너무 야박했다.
이후 그녀는 집사를 따라 2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
"사장님."
큰 덩치에 꽉 끼는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근육이 셔츠를 찢고 나올 것 같았다.
유힘찬은 정중하게 권준호의 시가에 불을 붙였다.
"한유라 씨는 해외로 나갔습니다. 한 씨 집안에서는 아직도 답이 없고 조용합니다."
"한 씨 집안이 나한테서 6억의 돈과 A급 프로젝트를 다섯 건 가져가놓고 이렇게 보답한다고?"
권준호는 연기를 뿜으며 가볍게 대답했다. "이대로 넘어가면 나를 우습게 보고 업신여기는 자식들이 많아지겠지? 한 씨 집안, 가서 머리 밟고 와."
유힘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한유라 씨를 다시 데려올까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우리 사람들을 소개시켜 드려야 할까요?"
"됐어."
시가를 물고 있던 권준호는 데스크에서 문서 한 장을 집어 들어 창가로 걸어갔다.
휠체어는 쓸쓸히 방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문서에는 홍경인의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심지어 진세명과의 관계도 적혀 있었다.
그는 무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평범한 여자네. 단순히 돈 보고서 결혼했겠지."
당시 권 씨 집안은 장애가 된 권준호에게 후계인이라도 만들어주기 위해 아내를 찾는다고 선언했다.
이 발표가 공시되었을 때, 어느 가문에서도 이 청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오직 딸을 팔아먹어 계급을 올린 한 씨 집안만 예외였다.
그들의 동기는 간단했다. 딸을 대가로 돈을 노리는 것이었다.
유힘찬은 홍경인이 권준호와의 혼인을 택하는 것이 오로지 금전적인 이득을 노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또 있었다. "그녀는 원래 진세명과 결혼할 예정이었다고 하더군요."
"진세명? 요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진 씨?" 권준호는 눈썹을 치켜 뜨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전 애인의 전화를 받고는 식장에서 뛰쳐나간 모양인 것 같습니다."
유힘찬은 잠시 멈칫했다가 추측했다. "어쩌면 진세명을 골탕 먹이기 위해 사장님과 결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권준호는 문서 정독을 멈추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유힘찬을 빤히 쳐다봤다. "어리석기는. 나와의 결혼은 그녀에게 이길 수밖에 없는 거래지. 나 같은 장애와 결혼한 진짜 이유도 이것이고."
권준호가 보기에 홍경인은 그저 지금은 아직 본모습을 들어내지 않았을 뿐. 그러나, 권준호는 홍경인이 이런 욕심이 있다 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권준호는 본가 사람들의 입을 막을 아내가 필요했고 홍경인이 정말로 돈 때문에 결혼한 것이라면 나중에 이혼하는 것도 쉬울것이다.
——
홍경인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휴대폰을 스크롤했고, 실시간 검색어를 발견했다.
<새신랑이 예비신부를 버리고 애인을 만나러 갔다?>
<신랑이 도망치자 홧김에 낯선 남자와 결혼?>
홍경인은 아무 생각 없이 댓글들을 읽었다. 넷티즌들은 이 화제를 두고 토론이 뜨거웠지만 이해불가라는 언론이 제일 많았다. 하지만 화제가 더 나아가면서 홍경인의 개인 정보도 노출되었다.
그녀가 음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사실이 밝혀지고 심지어 공연 동연상까지 나타났다.
홍경인이 이 영상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진세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경인아, 지금 어디야? 만나서 얘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