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강성에 위치한 윤씨 가문의 저택은 불안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였다.

"나래 언니,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거야?" 문에 기대어 서서,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윤여름이 말했다. "김 사장님이 나이가 좀 있긴 하지만, 여자가 원하는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야. 돈 많지, 힘있지, 믿음직스럽지.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된다니, 언니는 진짜 좋은 기회를 잡은 거야."

이 말을 들은 윤나래의 표정이 굳어졌다.

윤여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윤나래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뺨을 때리는 온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윤여름, 그렇게 좋은 '기회'라면 네가 잡지, 왜?" 윤나래의 목소리는 차갑게 날이 서 있었고, 그녀의 눈빛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네가 내 와인에 약 탄 거지?"

윤여름이 '악' 소리를 지르면서 얼굴에 선명한 손자국이 나타났다.

"윤나래! 이 정신 나간 게! 너 진짜 미쳤어?" 심옥란이 분노와 충격에 찬 얼굴로 다가오며 윤나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감히 여름이를 때리다니!

이 배은망덕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그랬다. 윤나래는 윤씨 가문의 딸이 아니었던 것이다.

석 달 전, 병원에서의 작은 사고가 모든 것을 뒤집었다. 윤나래가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했던 간단한 혈액 검사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말았다.

희귀 혈액형이었던 윤나래의 혈액형은 그녀가 부모라고 믿었던, 윤홍걸과 그의 아내 심옥란의 것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 충격적인 사실이 때문에 화목했던 윤씨 가문의 행복한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윤나래는 이들의 친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윤씨 가문에서는 진짜 딸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총동원했고 결국 친딸인 윤여름을 찾아냈다. 윤여름은 마치 처음부터 윤씨 가문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윤나래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날 이후로, 윤나래는 오랜 시간 원래 윤여름의 것이었던 것들을 빼앗은 못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때 그녀가 누리던 모든 것들은 이제 당연하다는 듯이 윤여름의 것이 되었다.

윤홍걸과 심옥란은 윤여름의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해 주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하지만 단순히 윤나래를 내쫓는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투자한 시간을 허비한것만 같았다. 때마침 부유한 사업가이자 윤씨 가문의 지인인 김 사장이 윤나래에게 관심을 보였다.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윤나래를 김 사장에게 넘기면 10억 원이라는 거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와인에 약을 타고 모든 것이 준비된 방으로 그녀를 밀어 넣어 김 사장과의 계약을 성사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략을 간파하한 윤나래는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니면 지금쯤은 이미 엎지른 물이 되겠지.

"여름이가 제 와인에 약까지 타 놓고, 절 조롱하고 모욕했어요. 뺨 정도는 충분히 맞을만하지 않나요?"

얼굴이 굳어진 윤여름이 입술을 떨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언니의 미래를 위해서 그런 건데.." 윤여름이 가식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엄마가 그러셨는데, 언니네 진짜 가족들은 지금 시골 달동네에서 살고 있대. 김 사장님과 결혼만 하면 언니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 거야.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아야지."

윤여름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감히 날 때려?

꼭 갚아줄게. 곧.'

"부자랑 결혼하는 게 그렇게 좋은 기회면, 네가 하는 건 어때?" 윤나래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은 윤여름과 심옥란을 뚫을 듯했다.

"이 배은망덕한 것!" 심옥란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떻게 여름이를 너랑 비교하려 들어? 여름이는 너랑은 격이 다르다! 여름이는 이미 명망 있는 한씨 가문의 한엽풍과 약혼한 몸이야. 우리 고귀한 여름이랑 딱 맞는 집안의 남자라고!"

윤여름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에 승리감이 번뜩였다. "맞아, 언니. 엽풍 오빠가 그러더라, 평생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

그제서야 깨달은 현실이 윤나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한엽풍은 원래 윤나래의 약혼자였다. 그녀가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난 순간, 둘의 약혼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윤여름은 마치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듯 자연스럽게 윤나래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한엽풍조차 놀랄 만큼 빠르게 윤여름에게로 마음을 돌렸다.

윤여름은 한참 동안 윤나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 선, 자연스럽게 광이 나는 피부, 그리고 타고난 우아함까지. 윤여름은 그 모든 것이 싫었다. 질투는 그녀의 가슴속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독을 내뿜었지만 그녀는 완벽한 미소 뒤에 그것을 감추었다.

"걱정 마, 윤여름. 한엽풍 같은 남자는 절대 안 건드려. 너희 둘이 참 잘 어울려. 별 볼 게 없는 남녀가 쌍으로 잘 만났어. 그러니까 둘이 계속 잘해 봐. 꼭 붙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말고." 윤나래가 비웃음이 담긴 미소로 말했다.

점점 고조되는 상황을 보다 못한 윤홍걸이 나섰다. "나래야. 이게 다 너를 위해서다. 네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찾아준 거야. 그런데도 네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할 수 없지. 이제 네 친부모를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윤홍걸은 심옥란과 윤여름의 계략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막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윤나래가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그녀를 윤씨 가문에 남겨둘 수는 없었다.

윤홍걸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봉투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200만 원이 들어있었다.

"이 돈이라도 받아라. 우리가 너를 청운현에서 데려온 실수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네 친부모님은 아직 거기 계실 거다."

청운현. 황폐하고 가난한 지역, 기업들의 자선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곳. 윤나래가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이었다.

심옥란이 팔짱을 끼고 비웃었다. "여보, 진심이에요? 우리가 얘를 10년 넘게 키웠는데. 우린 이 애한테 빚진 것 없어요. 그런데 여름이를 때리기까지 한 애한테 돈까지 주겠다고요? 이런 배은망덕한 기생충한테?"

배은망덕? 기생충?

윤나래가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낡아버린 물건처럼 자신을 쉽게 버리려는 그들의 모습은 생각보다 깊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사실 윤나래는 자신이 이들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큰 돈을 남기고 떠날까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뿐이었다.

윤홍걸은 사업을 경영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심옥란은 그저 사치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윤씨 그룹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윤나래의 보이지 않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녀가 손을 떼면 이 가문은 금세 무너질 게 뻔했다.

윤나래는 단단히 굳은 눈빛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윤 사장님, 그 마음은 고맙지만 이 돈은 필요 없어요." 그녀는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짐을 챙기기 위해 몸을 돌려 계단 위로 올라갔다.

윤여름도 서둘러 위층으로 따라갔다.

곧이어 윤나래는 어깨에 낡은 검은 색 가방 하나만 걸친 채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엔 미련이 없었다.

이내 윤여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나래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잠깐만, 언니! 왜 이렇게 서둘러? 이 옷들, 거의 새 거야. 이거 다 가져가. 언니 친 가족들이... 음... 그러니까... 좀 힘들게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윤여름이 마음 쓰인다는 듯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일부러 윤나래의 가방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가방이 열리며 안에 있던 물건들이 대리석 바닥에 우수수 쏟아졌다. 그 소리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쏟아진 평범한 물건들 중, 샤넬 팔찌 하나가 조명을 받아 유독 빛나고 있었다.

윤여름이 큰 소리로 숨을 들이마시며 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이건... 이건 아빠가 저번 주에 나한테 준 팔찌잖아! 이게 왜 언니 가방에서 나와?"

윤나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마지막까지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구나.'

윤나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여름을 빤히 바라보았다. 쇼를 원한다면 제대로 보여주지.

"윤나래!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심옥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널 여태 키워 준 사람들한테 도둑질을 하다니! 우리가 너한테 해 준 게 얼만데! 네가 돈을 안 받으려고 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미 더 비싼 걸 훔쳤으니 말이야! 집안 물건을 훔치다니, 이런 파렴치한 짓이 또 어디 있겠니!"

윤홍걸도 어두워진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래야, 설명해 보거라. 내가 여름이한테 준 팔찌가 왜 네 가방에서 나온 거냐?"

회차 2

"여보! 쟨 그냥 도둑이에요!" 심옥란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는 동시에 분노로 끓어올랐다. "당장 경찰을 불러요!"

윤여름은 늘 그렇듯, 가식적인 태도로 나섰다. "아빠, 엄마,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세요. 어쩌면 단순한 오해일 수도 있잖아요. 나래 언니가 모르고 팔찌를 가방에 넣었을 수도 있고요. 분명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거예요."

"뭐? 그런 의도가 아니야? 그 팔찌를 모르고 가방에 넣었다는 걸 믿으라고? 이건 그냥 보통 팔찌가 아니야. YUN이 직접 디자인한 작품이고, 예술품이라고! 세상에 하나뿐인 건데, 그걸 얘가 모를 리 없잖아. 얘는 아주 얼굴에 욕심이 써 있어. 내가 그래서 걱정했던 거야. 우리가 아무리 오래 키웠어도 본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경멸이 가득한 심옥란의 말은 채찍처럼 날카로웠다.

"엄마, 그냥 넘어가세요." 윤여름은 일부러 부드러운 어조로 심옥란을 말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윤나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입술에는 희미한 동정의 미소가 떠올랐다. "언니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데, 그냥 줘버려요. 어차피 이제 다시 볼일도 없을 테니까요. 물론, 이 팔찌가 저한테 특별하긴 해요. YUN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라, YUN의 작품은 제게 정말 소중하거든요."

윤나래는 아무 말없이 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 모든 몸짓은 마치 연극 대본처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당장이라도 연기에 도전하면 아주 크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연기력이다. 이들을 지켜보던 윤나래는 그 황당함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는 차분히 몸을 숙여 팔찌를 집어 들었다. 팔찌가 조명 아래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천천히 윤여름에게 다가가 팔찌의 잠금 부분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잘 봐." 윤나래가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새겨진 글자를 읽어봐."

윤여름의 미소가 흔들렸다. 그녀의 자신감도 미소와 함께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윤여름이 눈을 가늘게 뜨며 팔찌에 새겨진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우아하게 새겨진 이니셜 'Y.R'이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Y.R'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윤여름이 당황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YUN이 만든 작품들 다 꿰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럼 잘 알겠지. 이 시리즈는 이니셜 각인이 옵션인 디자인이야. 모든 팔찌가 주문한 사람이 원하는 이니셜이 각인된 채로 만들어진다고. 그리고 이건 한정판이야. 모든 작품이 고유의 시리얼 넘버로 등록돼 있지. 하나뿐인, 절대 복제 불가능한 작품." 윤나래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조롱이 담겨 있었다.

윤여름이 대답도 하기 전에, 계단에서 바삐 내려오는 발소리에 방 안의 침묵이 깨졌다. 하인이 손에 다른 팔찌를 들고 내려왔다.

"여름 아가씨, 찾으시는 팔찌가 이건가요?"

방 안은 순간 얼어붙었다. 모두의 시선이 하인의 손에 들린 팔찌로 향했다.

윤여름은 곧바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그녀는 과장되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여기 있었네! 여기에 두고 찾고 있었다니, 내가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윤여름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속으로는 아주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녀는 분명히 윤나래의 가방에 팔찌를 넣었다고 생각했다.

윤나래는 싸늘한 눈빛으로 윤여름을 바라보며 입가에는 멸시가 담긴 미소가 스쳤다. "윤여름, 아직도 내가 네 팔찌를 훔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말 경찰 부를 거야?"

윤여름은 순간 흔들렸지만, 재빨리 마음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이 팔찌, 엄청나게 비싼 건데. 언니가 어떻게 이 팔찌를 가지고 있는 거야? 설마..." 윤여름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설마 조금... 부끄러운 방법으로 산 건 아니지? 요즘 여자애들 돈만 많이 준다고 하면 뭐든지 하잖아."

이 말을 들은 윤나래가 냉소를 지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그런 쪽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것 같네? 말해 봐. 혹시 직접 겪은 경험에서 나온 말인가? 윤씨 가문에 돌아오기 전에 그런 식으로 일한 거야? 그래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거야?"

윤여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분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

"윤나래! 이 버릇없는 계집애 같으니!" 심옥란이 소파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분노에 찬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감히 여름이한테 그런 말을 해?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다시는 우리 가족 앞에 나타나지도 마!"

윤나래는 더 환하게 웃었다. "무릎 꿇고 빌어도 다시는 이 집에 발도 들이지 않을 거예요." 윤나래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문 쪽으로 걸어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윤씨 가문과 그들의 가식적인 행동들은 이제 그녀의 삶에서 완전히 과거가 되었다.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감이 들 뿐이었다. 이제 연극은 모두 끝났다.

"잘 가라! 이 고마운 줄도 모르는 계집애야!" 심옥란은 뒤에서 독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그녀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집안에서 성가신 짐 하나를 덜어낸 기분이었다.

윤나래는 차가운 저녁 공기를 가르며 저택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저택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고 그녀는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나래 누나, 들었어요. 결국 쫓겨난 거예요?"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이태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됐어." 윤나래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더니, 이태호가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인간들 진짜 뻔뻔하네요."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딱 '좋을 때만 친구.라는 거죠. 누나 덕분에 성공한 줄도 모르고. 양심도 없는 거죠.."

"그만해." 윤나래는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담담히 말을 잘랐다. "내 친부모에 대한 소식은?"

윤홍걸은 모든 것이 병원의 실수였다고 주장했다. 아이를 고의로 버린 게 아니라 단순한 착오였다는 얘기였다. 윤나래는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 진실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친부모를 꼭 만나야 했다.

이태호가 크게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진행 중이에요. 곧 구체적인 결과가 나올 거예요."

"그래." 윤나래는 간결하게 대답하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큰길로 접어들려는 순간, 찬 바람 속에서 어디선가 날카로운 금속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등에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을 감지했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그의 흰 셔츠는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가슴과 손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점점 힘이 빠지는 듯 느리게 걷기 시작했고, 어딘가에 기대려 하는 듯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도망치지 마, 이 비겁한 놈아! 얌전히 있으라고!" 그의 뒤에서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나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피투성이 남자를 사냥하듯 뒤쫓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리고 침착했지만, 의도는 너무도 분명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 최시훈은 휘청거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놀랍도록 단단했다. "누구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거지?"

"닥쳐! 얘긴 끝났어." 무리 중 한 남자가 소리쳤다. 그는 동료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제 끝내자."

"잠깐." 다른 한 남자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누가 또 있어."

모든 시선이 일제히 윤나래를 향했다.

이런. 타이밍도 아주 기가 막히네. 오늘 하루는 이미 최악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불청객들까지.

남자들이 적의를 품고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윤나래는 깨달았다. 이들이 목격자를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녀를 이런 상황에 빠뜨린 원인은 바로 앞에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비틀거리는 남자.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커다란 남자가 차가운 미소를 띤 채 앞으로 나섰다. 그는 윤나래를 위아래로 훑으며 뚫어져라 쳐다봤고, 입가에는 불쾌한 웃음이 번졌다.

그의 주위에 있던 남자들도 낄낄거리며 비열한 웃음을 터뜨렸다.

"겁먹지 마, 아가씨." 그들 중 한 명이 윤나래를 향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이 놈만 처리하고 나면, 아주 잘 모셔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윤나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의 차갑고 흔들림 없는 눈빛이 그들의 시선을 꿰뚫고 있었다. 긴장된 분위기를 가르며 그녀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

남자들은 비웃으며 재밌다는 듯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지만, 이내 이들의 웃음은 얼어붙었다. 희미한 은빛의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기 때문이다.

윤나래의 손에는 길고 매끈한 바늘이 쥐어져 있었다. 바늘 끝이 빛을 반사하며 서늘하게 빛났다.

그녀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눈빛은 살기 어린 냉혹함으로 차 올랐다. 그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윤나래가 먼저 움직였다. 우아하고 재빠르게 손을 들자 바늘은 어둠 속을 가르며 날아가 정확히 목표를 맞췄다.

목, 어깨, 다리. 바늘은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박혔다.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한 채, 남자들은 차례로 바닥에 쓰러졌고 손에 쥐고 있던 무기들도 힘없이 떨어졌다. 조롱으로 가득 찼던 남자들의 자신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야 비로소 남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깨달았다.

간신히 몸을 버티고 서 있던 최시훈은 넋이 나간 듯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구지?

그녀의 움직임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고 계산되어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본 어떤 것보다도 놀라웠다. 이 여자의 솜씨는 단순히 숙련된 수준이 아니었다. 아주 완벽했다.

회차 3

윤나래는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들을 흘깃 쳐다본 뒤, 부상당한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 어둡고 차가운 눈빛, 딱딱하게 굳은 표정, 마치 조각이라도 한 듯이 완벽한 얼굴.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창백해졌지만, 그럼에도 고요한 강인함을 내뿜고 있었다.

윤나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뒤로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 정이 많고 마음이 약한 윤나래의 동정심이 여지없이 발동한 것이다.

결국, 윤나래는 한숨을 내쉬며 남자 옆에 무릎을 꿇고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최시훈이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윤나래는 무심한 듯 대답했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그를 치료하고 있었다.

최시훈의 맥박을 재던 윤나래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출혈이 심하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맥박이 약하고 불규칙했다. 이건 독이 몸속에서 퍼지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윤나래는 가방에서 작은 도자기 병을 꺼냈다. 마개를 열고 고운 약가루를 그의 상처에 뿌리자, 출혈이 즉시 멎었고 따끔한 통증 대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 그녀는 작은 알약을 꺼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드세요. 독을 해독할 겁니다. 지금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그 말에 최시훈은 약간 머뭇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나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그의 상처를 붕대로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가 치료를 마무리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또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표님..."

"제 사람들입니다." 최시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어깨는 한결 가벼워졌고, 자세도 조금 풀어졌다.

윤나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사람들이 왔으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아가씨." 최시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윤나래를 불러세웠다.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윤나래는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시훈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윤나래는 곧장 자리를 떴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의 문제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최시훈은 자신을 구해준 그녀의 뒷모습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끝까지 지켜보았다.

맥박만으로 몸에 독이 퍼졌다는 사실을 알아채다니, 믿기 어려웠다.

정확함, 흔들림 없는 침착함, 그리고 전문가 같은 손길. 이 모든 것들이 그의 관심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가 강성에 머무르는 한, 그는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라는 것을.

윤나래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다른 계획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윤나래는 정신을 차렸다. 커스텀 제작된 롤스로이스 한 대가 가로등 불빛 아래, 매끈하게 빛나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윤나래는 잠시 얼어붙었다. 이런 최고급 차는 TV나 잡지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한 중년의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드디어 찾았네요! 저는 고씨 가문의 집사, 안창민입니다. 사장님과 사모님의 부탁으로 제가 직접 모시러 왔습니다."

"네? 저를요?" 윤나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이 사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윤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의 친부모가 청운현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 있는 남자와 차는 엄청난 부와 권위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네, 아가씨 말입니다!" 안창민은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는 고씨 가문의 아가씨입니다. 사모님은 아가씨가 살아 계신 걸 아시고는 너무 놀라고 감격해 거의 실신하실 뻔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저한테 직접 모시고 오라고 부탁하셨고요. 어서, 저와 함께 가시지요."

그는 차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한 발 물러섰다.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눈빛에는 깊은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윤나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윤씨 가문의 조사가 잘못된 건가? 아니면 조작된 걸까?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그녀의 결심은 서서히 굳어졌다. 원래부터 친부모를 직접 찾아보겠노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지금 누군가 친부모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윤나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차에 올랐다. 문이 부드럽게 닫히자 차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트 별장은 강성에서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고급 주택 단지였다. 단 12채의 가구만이 존재하는 이 빌라에는, 강성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만 거주하는 곳이었다.

차가 빌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전용 도로를 달리는 동안, 안창민은 한층 더 공손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가씨, 지금 고씨 가문에는 아가씨의 오빠 되시는 고준혁 도련님과 입양된 동생 분, 고예은 아가씨가 계십니다. 사모님과 사장님이 아가씨를 얼마나 그리워하셨는지 몰라요. 수년 동안 전국을 샅샅이 뒤지면서 아가씨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셨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 사장님은 청운현 출신이십니다. 수십 년 전, 사장님과 사모님이 조상님들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청운현을 방문하셨는데, 마침 그때 아가씨가 태어나신 겁니다. 하지만 출생 직후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겨 아가씨를 잃어버리고 말았죠. 사장님이 아가씨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셨지만, 결국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하신 채 강성으로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슬픔은 가슴 깊이 묻고, 아픔을 견디며 성공을 위해 온 힘을 다하셨죠."

그의 목소리에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고씨 가문입니다. 수년 동안 고씨 가문은 성장을 거듭했고 지금은 강성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일들을 하시면서도, 단 한 번도 아가씨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윤나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창민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가 전혀 알지 못했던 과거의 조각들을 끄집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더니, 거대한 저택 앞에 멈췄다. 저택은 마치 그림에나 나올 법한 웅장한 모습으로 풍경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천천히 차에서 내린 윤나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가만히 둘러봤다. 웅장한 저택 입구에서 두 사람이 흥분한 얼굴로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단정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은은한 온화함이 느껴졌다.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우아함이 몸에 배어 있었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기품이 넘쳤다.

윤나래를 본 송진영은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 송진영은 윤나래에게 달려와 힘껏 그녀를 안았다. "나래야, 사랑하는 내 딸..." 송진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너를 찾았구나. 그 오랜 세월 동안...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안 된다. 다 우리 잘못이야. 우리가 널 지키지 못했어."

송진영은 윤나래를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꼭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송진영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절대로, 다시는 딸에게 그런 고난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반면, 그런 다정함이 낯설게 느껴졌던 윤나래는 굳은 몸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어쩌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 속엔 분명히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천천히 윤나래의 마음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전 괜찮아요. 정말로요." 윤나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실 그 말은 진심이라기보다는 송진영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송진영은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팔을 풀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래야, 약속할게. 이제부턴 어떤 것도, 그 누구도 너를 힘들게 하지 못할 거야."

곁에 서 있던 고문철도 침착하던 평소와는 달리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분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집으로 왔구나, 아가야. 그거면 됐다. 어서 들어가자."

세 사람은 함께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 안쪽에 서 있던 고예은은 이 모든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잠시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래 언니,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 "나는 고예은이라고 해."

고예은은 윤나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윤나래는 고씨 가문의 핏줄임이 확실했다. 놀랍도록 닮은 윤나래와 송진영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고예은은 잠깐 시선을 들어 윤나래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에 질투가 스쳤다.

송진영은 마음을 가다듬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래야, 여기는 고예은이야. 우리가 입양한 딸이지. 이제부터 네 동생이다. 그리고 네 오빠는 해외 출장 중인데, 곧 돌아올 거야. 너희 할머니는 요양 중이시고, 이번 달 말쯤에 집으로 오실 예정이고."

윤나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이 정도로 크고 영향력 있는 가문이라면, 복잡한 관계와 숨겨진 의도가 있기 마련일 것이다. 윤나래는 다시 만난 가족에 대한 환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그녀는 적절한 때가 오면 이태호를 시켜 고씨 가문의 과거를 철저히 조사해 보리라 다짐했다.

"아, 나래야. 널 만나면 꼭 주고 싶었던 게 있어." 송진영이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우아한 손짓으로 손목에서 에메랄드 팔찌를 풀었다.

"내가 항상 차고 다니던 팔찌인데, 이젠 너한테 주고 싶구나."

송진영은 이 팔찌를 정확히 어디서 받은 것인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중요한 누군가가 준 것이 분명했기에 오랜 시간 소중히 간직해 왔다.

윤나래는 잠시 망설였다. 그 순간의 무게가 그녀를 압도했다. 그 팔찌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수십억 원에 이를 정도로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이건 너무 부담스러워요." 윤나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비싼 건 받을 수 없어요."

"나래야, 언젠간 내가 가진 모든 게 다 네 것이 될 거야. 이건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란다."

윤나래가 다시 거절하기도 전에, 팔찌는 이미 그녀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선명한 에메랄드는 그녀의 손목 위에서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방 한쪽에서 이들을 지켜보던 고예은의 미소가 굳어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떨리더니, 이내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던지, 고통이 무감각해질 정도였다.

이건 너무나도 노골적인 편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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