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정린지 POV:
나는 눈을 감았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았다. 내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발밑에는 산산조각 난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다. 내 몸이 있던 자리였다. 나는 육체가 없는 존재가 되어, 내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평화와 해방감을 느꼈다. 드디어 끝났다. 훈우 씨의 무관심과 백희란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그 누구의 감정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얼마 후,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소방차와 경찰차가 낡은 창고 앞에 들이닥쳤다. 노란색 통제선이 둘러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남훈우. 그는 방화복을 입고, 헬멧을 쓴 채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준석 소방관도 함께였다.
훈우 씨는 내 잔해가 흩어진 곳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헬멧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늘 그렇듯 냉철함이 느껴졌다.
"현장 상황 보고해." 훈우 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네, 팀장님. 폭발물에 의한 폭발로 추정됩니다.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어 신원 확인이 어렵습니다." 한 경찰관이 보고했다.
"신원 불명이라고?" 훈우 씨가 내 잔해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가 제발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내가 죽어서도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인식되기를. 나는 그의 눈빛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저 차갑고 무심한 시선으로 내 잔해 위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훈우 씨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주변 실종자 명단을 확인하고, 감식반 불러."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는 내 죽음 앞에서도 그저 냉철한 소방관일 뿐이었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희망마저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는 나를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내 영혼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훈우 씨는 현장을 정리하고 경찰차에 올라탔다. 나는 그를 따라 차 안으로 들어갔다. 영혼이 되어도 그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팀장님, 아까 핸드폰은 왜 꺼두셨습니까? 백팀장님께 연락드렸더니 통화가 안 된다고 하셔서요." 이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훈우 씨는 한숨을 쉬었다. "아, 그 정린지라는 여자 때문이야. 또 쓸데없는 전화해서 짜증 나서 꺼놨어."
내 영혼이 고통으로 얼어붙었다. 그는 내 죽음의 현장에서, 나를 욕하고 있었다.
"정린지 씨도 팀장님 많이 좋아했던 것 같은데..." 준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좋아하긴 뭘 좋아해. 그냥 나한테 집착하는 거지. 내가 좀만 잘해주면 아주 기고만장해서 사람 미치게 한다니까. 아까는 납치됐다고 난리치더니,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했는지. 내가 그 여자 때문에 미치겠다, 정말." 훈우 씨는 비웃었다. 그의 말은 칼날이 되어 내 영혼을 난도질했다.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공기가 나를 질식시키는 것 같았다.
준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훈우 씨는 휴대폰을 켰다. 화면에 내 마지막 문자가 떠 있었다.
'훈우 씨, 다시는 볼 수 없게 해줄게.'
훈우 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봐. 이 여자 또 이러고 있잖아. 내가 다시는 안 볼 줄 알고 협박하는 거야?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그는 내 번호를 차단 목록에 추가하고 휴대폰을 던지듯 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경멸과 짜증이 가득했다. 나는 절규하고 싶었다. 내가 죽었다고! 내가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게 됐다고! 하지만 내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사라지면, 그저 귀찮은 존재 하나가 없어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그는 이제 나를 완전히 잊을 것이다. 차단 목록에 등록된 이름처럼. 내 영혼은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나는 그를 떠날 수 없었다. 내 영혼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에게 묶여 있었다.
경찰차는 경찰서로 향했다. 내 잔해는 감식반으로 옮겨졌다. 훈우 씨는 내 유해를 지켜보며 아무 감정 없이 말했다. "빨리 부검해서 신원 확인해." 그는 내 시신을 냉철하게 해부실로 밀어 넣었다.
나는 그를 따라 해부실로 들어갔다. 내 영혼은 내 자신의 시신이 해부대에 놓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훈우 씨는 내 시신을 해부하는 과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나의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를 떠날 수 없었다. 내 영혼은 여전히 그 옆을 맴돌고 있었다. 마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회차 3
정린지 POV:
다음 날, 부검 결과가 나왔다. 나는 훈우 씨 옆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회의실에서, 보고서의 내용은 내 영혼을 다시 한번 산산조각 냈다.
"피해자는 20대 후반 여성으로 추정됩니다. 몸에는 심한 폭행 흔적이 있었으며, 사망 원인은 폭발물에 의한 장기 손상입니다." 감식반 요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훈우 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보고서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피해자는 임신 2개월이었습니다."
그 말이 회의실에 울려 퍼지자마자, 모든 사람의 움직임이 멎었다. 적막이 흘렀다. 임신? 나는 내 영혼의 몸을 내려다봤다. 배가 납작했다. 나는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 뱃속에 아이가 있었다니. 너무나 작고, 너무나 짧았던 생명. 죄책감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내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나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두 개의 생명이 사라졌습니다." 감식반 요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훈우 씨는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군. 범인은 반드시 잡아야겠어. 두 생명을 앗아간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범죄에 대한 직업적인 분노일 뿐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나를 위한 정의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어 했다. 영웅의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무관심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었을 뿐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알지 못할 터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훈우 씨는 준석과 함께 건물 뒤뜰로 나갔다. 준석은 훈우 씨에게 담배를 권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팀장님, 정린지 씨한테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팀장님 많이 좋아했지 않습니까."
훈우 씨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준석아, 네가 뭘 몰라서 그래. 그 여자, 내가 좀만 신경 써주면 아주 기어 올라온다니까. 다음번엔 아예 죽었다고 거짓말할 걸? 그때는 내가 뭘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비수를 꽂는 그의 말에 몸서리쳤다. 그는 내 죽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후회? 죄책감?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까?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끔찍한 구속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쉬고 싶었다. 하지만 내 영혼은 여전히 그의 곁에 묶여 있었다.
준석은 고개를 저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그런데 실종자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직 연락 온 곳은 없습니까?"
"아니. 실종자 명단을 추려봤는데, 조건에 맞는 사람이 거의 없어." 훈우 씨가 한숨을 쉬었다. "다른 폭발물 제조자들도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이대로는 진전이 없어."
그때 훈우 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백희란의 이름이 떠 있었다. 훈우 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에게는 보인 적 없는 따뜻한 미소였다.
"희란아, 무슨 일이야?" 훈우 씨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오빠, 언제 와? 나 혼자 무서워." 희란이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렸다.
"응? 무슨 일인데? 오빠 지금 일하는 중이라 좀 바빠." 훈우 씨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치이, 오빠는 맨날 일이야. 나 저번에 오빠가 잡아갔던 그 방화범 때문에 너무 무서워서 잠도 못 잤잖아. 오빠가 항상 내 옆에 있어줬는데..." 희란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오빠가 빨리 끝내고 갈게. 이번 주말에 오빠랑 같이 여행 갈까? 네가 가고 싶어 했던 제주도 어때?" 훈우 씨는 희란이를 달랬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정말? 오빠 최고! 근데 오빠, 그 사건은 어떻게 됐어? 뉴스에서 엄청 떠들던데..." 희란이 물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폭발 사건인데, 걱정할 거 없어. 희란이 너 놀랄까 봐 오빠가 자세히 말 안 해주는 거야." 훈우 씨는 희란이를 감싸 안듯 말했다. 그는 나에게는 온갖 짜증을 냈으면서도, 희란이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보호하려 들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나에게는 그렇게 차갑게 대하면서, 희란이에게는 왜 그렇게 극진한지. 나는 그의 이중적인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희란이를 지켜주려 애썼지만, 나는 죽음 앞에서조차 외면당했다.
훈우 씨는 전화를 끊고 다시 수사에 몰두했다. 밤늦도록 수사는 진전이 없었다. 모든 실마리가 끊긴 듯했다. 결국 준석이 제안했다. "팀장님, 아무래도 피해자 정보를 공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제보가 필요할 것 같아요."
훈우 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
준석은 곧바로 방송국에 연락했고, 다음 날 아침 뉴스에는 훼손된 시신의 일부와 함께 실종자 제보 요청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나와 비슷한 체격,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 실종자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밤늦게, 훈우 씨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그의 옆에 바싹 붙어 그 전화를 지켜봤다.
"여보세요." 훈우 씨가 피곤한 목소리로 받았다.
"거기 경찰서 맞습니까? 혹시 저희 딸 정린지를 찾고 계신 겁니까? 제가 뉴스에서 본 사진이랑 저희 딸이랑 너무 비슷해서요..." 휴대폰 너머로 쉰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엄마였다. 엄마가 드디어 나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