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이혼 서류 접수했어." 김도욱은 짜증을 감추지 못한 채 계약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60억이면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거야."
한예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자국을 남겼다. "오늘 우리 결혼 3주년 기념일이야. 한예름이 겨우 입을 떼며 속삭이듯 말했다. "적어도 식사를 마치고 얘기해도 되잖아?"
그녀의 머리는 검은 핀으로 대충 묶여 있었고, 기름과 연기 냄새가 온 옷에 배어 있었다. 얼굴을 감싸듯 몇 가닥 내려온 잔머리가 깔끔하면서도 수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한예름은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몇 시간이나 들여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상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돌아온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이혼 통보라니.
김도욱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밥을 같이 먹는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은정이가 돌아왔어. 자존심 강한 애라 이런 상황, 절대 못 참을걸." 유은정의 이름을 꺼낼 때, 그의 표정이 잠시 부드러워졌다. 한예름이 최선을 다해 시부모님을 돌보고, 그에게 헌신해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스함이었다.
그의 첫사랑이었던 유은정은 3년 전, 그와의 약혼을 깨고 멀리 외국으로 떠났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김도욱은 단번에 이혼을 결심한 것이다.
한예름은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폭풍에 몸을 가누려는 사람처럼 테이블 가장자리를 꽉 붙잡았다. "할아버지도 알아?"
그녀의 말에 김도욱이 냉소를 터뜨렸다. "할아버지 뒤에 숨을 생각 하지 마. 지금 병원에 계셔서 스트레스 받으시면 안 돼. 부모님도 이혼 찬성하셨고. 사실 오늘 은정이랑 같이 만났어."
한예름은 충격에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때 천재 조향사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커, 또 각국의 지도자들이 앞다투어 찾는 뛰어난 무기 제작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신분을 숨기고 3년 내내 '완벽한 아내'로 살아온 것이다. 심지어 김씨 가문을 도와 협력자의 정보를 얻기 위해 며칠 전에 코브웹의 초대장까지도 준비했다. 코브웹은 제일 신비한 정보 조직으로서 초대장을 구하기란 엄청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와서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유은정 씨는 지금 부모님 댁에 있는 거야?"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지." 김도욱은 유은정을 떠올리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우리 부모님이랑 저녁 먹었어. 어머니 아버지가 계속 칭찬하시더라. 배려심도 많고, 이해심도 깊은 사람이라고."
"다들 유은정 씨가 돌아온 걸 알고 있었는데..." 한예름이 고개를 떨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만 몰랐던 거네." 한예름은 자조하듯 웃더니,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배려심 깊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니, 참 우스운 일이었다.
그 칭찬은 한때 자신에게도 하던 말이었다.
김도욱은 귀찮다는 듯 그녀를 쏘아보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집사님이 깜빡 하셨을 뿐이니까, 괜히 오해해서 없는 일 만들지 마."
그는 눈앞에 있는 한예름을 힐끗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의 표정이 경멸로 변했다.
매끄러운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한예름은, 맑고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예름과 함께 사는 것은 너무 단조로웠다. 주부로서는 완벽한 사람이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생활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매일 옷을 다리지 않는가 하면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곤 했다.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 규칙적이어서 김도욱은 한 번도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완벽한 아내였다. 언제나 집에 있으면서 묵묵히 모든 것을 감당하는. 하지만 그는 이런 것들이 너무 지겨웠다.
"그리고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오늘 밤 여기서 나가야 할 거야." 김도욱도 이것이 좀 심했다 싶어 잠시 멈추다가 말을 이었다. "란정 빌라로 이사해. 그 빌라, 이제 당신 거야."
그는 한예름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었다. 그녀는 시골에서 태어나 일찍이 학교를 중퇴한, 세상을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한 게 아니었다면 절대 김씨 가문에 시집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빌라 한 채 정도면 충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예름은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릴 뿐이다.
"그럼, 유은정 씨가 이 집에 들어오는 거야?"
한예름은 그가 준 빌라나 60억 같은 것들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해커인 그녀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저 3년간의 헌신 끝에 이렇게 버려진다는 사실이 마음 아플 뿐.
김도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2층 방은 원래 은정이 거였어. 은정이가 돌아왔는데, 당장 갈 곳이 없다길래 들어오라고 했어. 당신이 여기 있으면 은정이가 불편하잖아."
한예름의 침묵이 김도욱의 신경을 긁었다. 위자료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싶은 마음에, 그는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더는 요구하지 마. 적당히 할 줄 알아야지."
그는 시계를 힐끔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쨌든 이혼 서류는 접수했으니까, 며칠 뒤에 법원에서 보자. 합의할 생각 없으면 변호사 선임해 두고..." 한예름이 그의 말을 자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어."
그녀는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눈이 멀어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어떤 소년이 그녀를 등에 업고 꼬박 사흘 동안 밤낮을 걸어 생명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김도욱이었다.
그리고 이제 결혼한 지 3년이 된 지금, 그 소년은 그녀에게 떠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세월은 사람을 이렇게도 낯설게 바꾸어 놓다니.
"나갈게." 한예름은 생각을 정리한 듯,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제는 비긴 거야."
김도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침 그때, 집사 이옥화가 계단 위에서 한예름의 짐을 힘겹게 끌고 내려오는 것이다. "도련님, 본가에서 한예름 씨를 당장 내보내라고 하셔서 짐을 좀 챙겼어요... 어머!"
이옥화가 일부러 발을 삐끗한 척하며 소리를 지르자, 한예름의 짐가방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방에 물건들이 흩어졌다.
회차 2
"한예름 씨,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이옥화가 호들갑을 떨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말했다.
"일단 봉지에 담아둘까요?" 이옥화는 진작에 한예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시골 출신 주제에 김도욱을 꼬셔 호강해 보려는 간사한 계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도욱이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들을 보며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 "참, 덜렁거리기도 하지."
가방에는 몇 벌 되지도 않는 옷과 값싼 액세서리만 몇 개 들어 있었다.
보아하니 요 몇 년 동안 한예름은 돈도 별로 쓰지 않고 아주 검소한 삶을 산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노력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었다.
"은정이 짐부터 챙겨. 이 사람 물건은 그냥 봉지에 넣어 두고." 김도욱이 부서진 가방을 힐끔 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 가방은 내일 집사한테 새로 하나 사 오라고 할게."
한예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가방은 당시 우리가 목숨을 걸고 도망칠 때, 납치범들한테서 훔친 거잖아. 이 가방이 아니었다면, 우린 그때 익사했을 거야."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이 가방을 소중히 여겨왔다. 마치 둘의 결혼 생활을 돌보듯이. 하지만 이제는 두 사람의 관계도 부서진 가방처럼 산산조각 나버렸다.
김도욱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얘기는 할아버지한테나 해. 나한텐 안 통하니까."
어린 시절 유괴 사건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그는, 한예름이 그때 자신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김도욱이 이옥화에게 소리쳤다. "얼른 정리하지 않고 뭐 해!"
"네, 도련님." 이옥화는 서둘러 한예름의 옷가지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부러 옷을 밟아 더럽히고 있었다.
이옥화가 비꼬며 말했다. "한예름 씨, 노부인께서는 늘 그러시잖아요. 사람도 옷과 같아서, 한 번 얼룩지면 아무리 빨아도 흔적이 남는다고."
한예름은 이옥화에게 늘 친절하게 대해줬었다.
뭐라 해도 이옥화는 김도욱의 할머니의 먼 친척이었으니.
예전에 박씨 가문의 장손인 박운호에게 커다란 실수를 저질러 박씨 가문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뻔했었다. 그때, 한예름이 김씨 가문을 대신해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었다. 당시 한예름은 다리를 다친 박운호와 협상을 이끌어내, 김씨 가문에 중요한 사업 부지를 확보하기도 했었다. 그땐 고마워하며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이옥화였지만, 김씨 가문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태도가 확연하게 바뀌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김도욱의 할머니의 태도가 변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맞아요, 옷이 한 번 더러워지면..." 한예름이 김도욱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깨끗해질 수는 없죠." "그렇다면, 이제 필요 없겠네요."
한예름은 애초에 그런 헐렁하고 밋밋한 옷들이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으니.
"하지만 사람이 잘못을 하면..." 한예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죠."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김도욱은 처음으로 한예름을 똑바로 주시했다. 평소에 순하기만 하던 한예름이 이렇게 차갑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으니 낯설기만 했다. 이옥화도 역시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곧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김씨 가문의 사람이에요. 이제 한예름 씨는 이혼을 했으니까..."
철썩!
이옥화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한예름의 손바닥이 그녀의 왼쪽 뺨을 세차게 강타했다.
이옥화의 눈은 충격으로 휘둥그레졌다. "당신이 뭔데 날 때려?"
"그건 내 기분에 달렸지."
"노부인께서 아시면..."
철썩! 이번에는 더 강하게 뺨을 맞은 이옥화가 몸을 비틀거렸다. 양쪽 뺨이 똑같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충격으로 발목까지 삐끗한 그녀는 결국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이옥화의 얼굴은 굴욕감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도련님, 이 사람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옥화가 악에 받쳐 울부짖었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예름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목을 조르며 손을 뻗어 그녀의 목에 낀 목걸이를 낚아챘다.
"이 두 뺨은 내 가방과 옷에 대한 벌이야."
이옥화는 숨이 막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붉게 달아오른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처음부터 당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을 가져가는 거야."
에메랄드 펜던트에 다이아몬드가 소박하게 둘러진 목걸이였지만, 값어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목걸이 뒷면에 새겨진 글자는 이 목걸이가 처음부터 이옥화의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당신... 지금 이거 폭행이야!" 이옥화는 간신히 숨을 들이쉬며 외쳤지만, 공포에 질려 자신의 방광에 힘이 풀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예름의 손이 그녀의 목을 더욱 강하게 조여왔다. 이옥화는 마침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한예름은 목걸이를 망가뜨리고는 몸을 돌려 깔끔하게 자리를 떴다.
이옥화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김도욱에게 매달려 사정했다. "대표님, 다 오해예요. 제발…"
"나가!"
자신의 신발에 이옥화의 몸이 닿자, 짜증이 난 김도욱이 그녀를 발로 차 다시 바닥에 쓰러뜨렸다.
방 안에는 지독한 소변 냄새가 가득 찼고,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김씨 가문에 당신처럼 손버릇 나쁜 사람은 필요 없어."
그 사이 한예름은 이미 빌라 밖으로 나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전화가 연결되자 한예름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은아, 나 이제 이혼했어. 그 사람 빌라에서도 나왔고. 지금 집이랑 차는 아직 M국에 있어서 그런데, 오늘 밤 너네 집에 신세 좀 져도 될까?"
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침묵하던 정소은이 기쁨에 찬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드디어 그 멍청이랑 이혼한 거야? 신세라니! 그런 소리 하지 마. 우리 싱글 파티라도 해야지!
정소은은 멀리서도 들릴 정도로 깔깔 웃으며 말했다. "코브웹 애들이 창립자가 돌아왔단 걸 알게 되면 서버 다 터지겠다!"
회차 3
빌라 안에서, 이옥화는 김도욱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도련님, 오늘 밤에 크루즈 파티에서 은정 아가씨를 깜짝 놀라게 해주실 계획 아니셨어요? 제가 실수한 거, 꼭 만회할 수 있게 해주세요!"
몇 년 동안 유은정을 모셔 왔던 이옥화는 그녀의 취향 하나하나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김도욱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유은정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기에, 파티 장소는 준비조차 안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김도욱이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루즈 파티가 시작되기까지는 이제 겨우 세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에도 망치면 당신은 끝이야. 김씨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뿐만 아니라, 법원 소환장까지 받게 될 줄 알라고."
이것은 마지막 경고이자, 한 번뿐인 기회였다. 이옥화는 결코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급히 자리를 떴다.
김도욱은 다시 몸을 돌려 갖가지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식탁을 바라보았다. 순간, 방금 전에 한예름이 이옥화를 때리던 장면이 떠올라 짜증이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한예름은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어딘가 차갑고 냉혹해진 느낌이었다. 더는 그가 알던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털어버렸다. 어쨌든 그의 눈에 한예름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재미없는 아내일 뿐이니. 그를 떠나면 한예름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시각, 빌라 밖에는 고급스러운 람보르기니 한 대가 멈춰 섰다.
"예름아!" 정소은이 활짝 웃으며 다가와 한예름을 꼭 끌어안았다. "내 집에서 평생 살아도 돼! 언제든지!"
정소은은 용업 그룹의 외동딸로, 부모님은 부동산으로 시작해 집은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정소은이 한예름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물었다. "아직도 식용유 냄새가 나네. 설마 또 그 멍청이한테 밥 차려줬던 건 아니지?"
정소은의 따뜻한 포옹에 한예름은 목이 메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차에 가서 얘기하자."
람보르기니에 올라탄 후, 한예름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용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차분한 한예름의 목소리와는 달리, 이야기를 듣던 정소은의 표정은 점점 분노로 가득 찼다.
"말이 돼? 결혼식 날 유은정한테 차인 주제에, 이제 와서 널 버리고 다시 유은정한테 가겠다고? 둘이 딱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 수준 낮은 것들끼리!" 정소은이 분노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 집안 사람들은 대체 뭐야?" 정소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네가 그 집안 뒷바라지한 게 몇 년인데, 널 이렇게 대해?"
정소은이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 부었다.
"그렇잖아. 아무리 그 사람이 어렸을 적의 기억을 잃었다지만, 지금 너한테 하는 짓들이 용서되는 건 아냐. 넌 지난 3년 동안 할 만큼 했고. 충분히 갚았어.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맞춰줄 필요 없어. 그냥 깨끗이 끝내자."
한예름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세상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다 끝났어. 나도 이제는 빚진 거 없다고."
지난 3년 동안 한예름은 김도욱이 원하는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이 되기 위해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하이힐도 포기하고, 긴 머리는 질끈 묶고 다녔으며, 심지어 단정하고 따분한 옷차림까지 감수했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 유은정처럼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김도욱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사실, 김씨 가문은 너랑 함께할 자격도 없어."
한예름의 피곤함을 눈치챈 정소은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은 우리 집에서 지내. 우리 둘은 가족이나 다름없잖아."
한예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고마워."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에게 가족은 생소한 단어였다.
하지만 정소은은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녀를 아껴주었다.
이들이 타고 있던 차는 한 전문 메이크업 스튜디오 앞에 섰다. 정소은은 창문을 내리고 유명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Marry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Marry! 오늘 특별한 손님이 있어요!"
한예름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나 오늘은 진짜 너무 피곤해서.. 메이크업은 사양할게."
"에이, 무슨 소리야! 너 설마 그렇게 '집에서 남편 기다리는 차림'으로 파티에 갈 건 아니지?"
"아... 아니지."
"그럼 됐어!" 정소은의 얼굴이 밝아졌다. "편하게 있어. 전문가들이 알아서 다 해줄 거야. 세계 최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거든. 오늘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시켜 줄 거라고!"
30분 후, 한예름의 말 그대로 환골탈태를 했다. 사람들은 모두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피곤함에 묻혀 있던 그녀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전문가의 손길을 만나자마자 순식간에 빛나기 시작했다.
한예름의 길고 매력적인 눈매는 자연스러운 음영이 더해져 훨씬 더 깊어졌고, 눈가에 살짝 찍힌 눈물점이 아슬아슬한 매력을 더했다.
그 모습을 본 정소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 이게 내가 알던 한예름이지!"
그리고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 거 아무거나 골라. 오늘은 너의 자유를 축하하는 날이니까, 내가 특별히 럭셔리한 요트랑 모델 같은 남자들도 8명이나 준비해 뒀다고! 절대 잊지 못할 밤이 될 거야!"
한예름이 손사래를 쳤다. "지금 남자에겐 관심이 없어."
정소은이 답답하다는 듯 한예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관심 없어? 너 안 한 지 벌써 3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아무 생각이 없는 거야?"
사실 그간 욕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김도욱은 늘 유은정에게만 순정을 바치겠다며 그녀를 외면해 왔으니, 한예름은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예름도 사람인지라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억지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소은은 한예름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자, 아직도 그녀가 마음을 접지 못한 줄 알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오늘 파티에 유명한 조향사들도 오는 거 알지? 카리스마의 대표도 온대. 드디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야. 설마 관심 없다고는 못 하겠지?"
카리스마는 M국에서 가장 유명한, 최고의 향수 브랜드였다.
한예름은 과거 국제 향수 대회에서 카리스마의 대표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예술 그 자체였고, 묘하게도 엄마의 향기가 느껴질 정도로 익숙했다.
하지만 그 대표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카리스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음에도, 그는 한 번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 가보자." 한예름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동의했다.
사실 한때 한예름은 카리스마의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한 적이 있었지만, 그 어떤 정보도 얻지 못했다. 마치 운명처럼, 그녀는 카리스마의 CEO가 자신의 어머니와 어떤 인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