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그때부터 강서경은 권태범을 지독하게 짝사랑했다.
이후 권태범은 해외로 유학을 떠났고, 그녀는 그와 같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공부에만 매진했었다.
그와 같은 대학에 입학하여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그와 가깝게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침내 어느 날, 권태범이 먼저 그녀를 찾아와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그날, 그녀는 여태껏 그만 바라왔던 자신의 진심이 드디어 그의 마음을 녹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그녀만의 착각이었던 것이고, 권태범은 임태라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단지 임태라의 대체품에 불과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서경은 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썼다.
게다가 임신 초기였기에 감정 기복이나 스트레스를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의 신신당부도 있었다.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 아무 일도 없는 듯 태연하게 침실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온 그녀가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권태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라가 돌아왔어. 우리 이혼해."
이혼이라는 두 글자가 애써 다잡은 마음을 와르르 무너뜨리며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가 이혼을 입에 올리기 전까지, 희망을 놓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 텐데...
강서경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입을 열 수 있었다.
"임태라 씨가 돌아와서, 날 버리려는 건가요?" 애써 태연한 척 담담하게 물었지만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질문에 권태범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그녀를 쳐다봤다.
"우리가 결혼할 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당신 것이 아닌 건 절대 욕심내지 말라고.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보상해 줄게."
그렇다. 신혼 첫날 밤, 권태범은 이사회의 끊임없는 잡소리들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와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고백하며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었다.
어리석은 희망에 눈이 먼 그녀는 언젠가 권태범이 그녀의 진심에 마음을 열 것이라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지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든 강서경이 권태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우리가 2년 동안 함께한 밤마다, 날 임태라 씨로 생각한 거예요?"
그녀의 직설적인 질문에 권태범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무언의 긍정이라고 생각한 강서경의 마음이 완전히 차갑게 식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럼에도 지난 2년 동안, 그의 품에 안겨 보낸 밤이 유난히 따스하고 포근해 잠시나마 잔혹한 현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의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었다.
줄곧 착각 속에서 지내왔다는 것을 누가 알기나 했을까?
애초에 처음부터 권태범의 마음속에는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꼭 감은 강서경은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요, 이혼 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당분간 객실에서 지낼 생각으로 필요한 짐만 간단히 챙기기 시작했다.
담담한 얼굴로 물건을 챙기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권태범은 알 수 없는 불쾌감에 미간을 깊게 찌푸려졌다.
강서경이 그의 곁을 지나려 할 때, 냉큼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망설이던 그가 입을 열려 할 때, 때마침 임태라의 전화가 걸려 왔다.
권태범이 전화를 받기 위해 손목을 놓아주자 강서경은 곧바로 그를 지나쳐 객실로 향했다.
"여보세요? 태라야. 아니, 괜찮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지만, 권태범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하다는 것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객실 문을 닫고 힘없이 침대에 주저앉은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고 울음소리를 감추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그녀가 이혼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녀와 임태라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른 그의 반응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기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강서경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벅차고 힘들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겨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땀과 눈물에 젖은 옷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온수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며 몸을 따뜻하게 적셨지만,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까지 녹이지 못했다.
다시 욕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밀려드는 서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그녀는 샤워를 핑계 삼아 하염없이 목놓아 울었다.
대체 왜 하늘은 이리도 불공평한 걸까? 왜 그녀에게만 이리 잔인한 걸까?
울다 지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지고 말았다.
"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그녀가 제일 먼저 아랫배를 소중하게 감쌌다.
안방에서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들은 권태범이 제일 빠른 속도로 객실로 달려왔다.
미처 닫지 못한 욕실 문 앞에 강서경이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유난히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 맺혀있었다.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그녀가 오직 배만 감싸 쥐고 있었다. 보아하니 어딘가에 배를 부딪힌 모양이었다.
죄책감에 마음이 약해진 권태범이 한달음에 달려와 강서경을 단숨에 안아 들었다.
"왜 그래? 어디 다쳤어?"
그의 목소리에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조급함이 살짝 엿보였다.
머리가 어지러워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강서경은 권태범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나서야 반응할 수 있었다.
"괜, 괜찮아요." 속삭임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권태범은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가만히 있어." 명령조에 가까운 그의 목소리에 강서경은 하는 수 없이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있어야만 했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부터 하자." 그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
상체를 살짝 숙인 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따스한 반응에 강서경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굳었던 마음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갑자기 권태범의 손목을 세게 움켜잡고 절박함과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보, 내가 만약 임신했다면 그래도 나랑 이혼할 거예요?"
아무 잘못 없는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이혼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을까?
강서경은 기대와 불안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권태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그 말에 놀란 듯 멈칫하던 권태범이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 "피임에 계속 신경을 썼는데 어떻게 임신할 수 있다는 거야? 설상 네가 임신을 했더라도, 지워야 할 거야."
회차 3
강서경의 안색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권태범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기를 지우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언제부터 이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변한 걸까?
"왜요? 당신이 아무리 아이를 원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지우겠다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그녀의 목소리가 세차게 떨렸다.
하지만 권태범은 자책은커녕 이 모든 게 당연한 듯 그녀를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처음부터 계약 결혼으로 시작했잖아. 네가 아기를 갖게 되면 서로에게 짐이 될 수 있어."
극심한 좌절감에 고개를 떨군 강서경은 심장이 저릿해 나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둘 사이의 무거운 침묵이 영원할 것만 같던 그때 강서경이 꼭 감은 두 눈을 천천히 뜨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걱정 마세요. 당신 아이를 낳아서 부담 주는 일 절대 없을 거예요."
그녀는 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오직 그녀를 위해서 이 아기를 보란 듯이 키울 것이다. 아기가 아빠의 존재를 묻는다면, 일찍이 하늘나라로 갔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권태범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네. 몸이 불편하면 일찍 쉬어. 당분간은 출근하지 않아도 돼."
말을 마친 후, 그는 바로 객실을 나섰다.
다음 날, 강서경은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나타났다.
혼자 아기를 키우겠다고 마음을 굳혔으니, 앞으로 돈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무리 지치더라도 쉴 틈 없이 움직여 돈을 모아야 한다.
권씨 그룹에서 출근하는 그녀는 권태범과 가까워지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권씨 그룹의 비서부에 이력서를 제출했고 치열한 경쟁을 거쳐 채용 되었다.
두 사람의 계약 결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권태범의 개인비서와 회사 임원들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강서경이 비서실에 들어가자, 회의실 앞에 모인 직원들이 휴대폰 화면을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권 대표님 여자 친구란 말이네요?"
"소문만 무성한 게 아니라 공식적인 여자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리 대표님은 여자 친구를 위해 2년 동안 아무런 스캔들도 없었잖아요."
"두 사람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던데, 너무 부러워요."
"방금 회의도 얼마나 분위기 좋았는지 몰라요. 아마 여자 친구가 지켜보고 있는 탓이겠죠?"
"임태라 변호사가 앞으로 권 대표님 개인 변호사라니. 두 사람 진짜 천생연분이잖아요!"
…...
직원들이 수군거림은 비수가 되어 강서경의 마음을 아프게 도려냈다.
임태라가 떠난 지 2년이나 되었지만 직원들은 아직도 그들의 사랑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게 되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직원들이 하는 말들에 귀를 막고, 아침 뉴스를 도배한 사진들을 외면한 채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업무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천생연분이라는 단어는 지워지지 않고 계속 그녀의 뇌리에서 맴돌았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뛰어갔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두려웠던 그녀는 물을 크게 틀어놓고 토를 했다.
결국 쓴 물까지 뱉고 나서야 속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헹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재삼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자리로 돌아갈 때, 살짝 열린 회의실 문틈 사이로 권태범과 임태라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체를 살짝 숙일 때마다 매혹적인 목선과 쇄골이 엿보이는 옷을 입은 임태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권태범을 향해 싱긋 미소 지어 보였다.
어깨가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은 언뜻 보면 다정한 연인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 하나를 사이 두고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서경은 극심한 좌절감에 마음이 아려왔다.
지난 2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그녀야말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방해꾼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팔꿈치에 화분이 부딪치며 조용한 공간에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들리는 소음에 고개를 번쩍 든 권태범과 임태라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강서경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강서경은 속으로 자신을 끝없이 자책했다.
권태범이 회의실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임태라도 뒤따라 달려 나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 강서경을 발견한 권태범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동시에 강서경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임태라가 일부러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태범아, 이분은 누구셔?"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강서경도 이혼을 앞둔 권태범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조적인 그녀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권태범의 대답은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회사 직원이야."
회사 직원?
메아리처럼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그녀를 사정없이 비웃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권태범의 아내가 아닌, 권씨 그룹 직원일 뿐이다.
그녀의 소개를 마친 권태범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멍한 얼굴로 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임태라도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갔다.
충격에 얼어붙은 강서경은 마치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한참이나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흐리멍텅한 기분으로 퇴근 시간까지 버틴 그녀는 할머니 박애란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경아, 이 할미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할미가 죽기 전에 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잘 사는 모습을 봐야 하는데. 그래, 언제면 번듯한 남자 친구를 할미 앞에 데려올 수 있겠어?"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포근한 목소리에 강서경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권태범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에게조차 비밀로 되었다.
결혼하기 전, 회사 임원들 외에 결혼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권태범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임태라가 돌아올 줄 알았던 걸까?
아니, 임태라가 돌아올 수 있게 미리 길을 마련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무슨 정신으로 통화를 마쳤는지 모르겠으나, 이번 주 토요일에 남자 친구를 데리고 할머니 집에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던 말만 선명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누구를 데리고 가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