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대문 밖, 배현석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왕야, 이제 돌아갈까요?"
왕야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욱이는 곁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해할 것 없다."
소서연이 빠른 걸음으로 대문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려 하는데, 대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를 알아본 문지기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왜? 내가 돌아오지 말아야 할 곳에 돌아온 건가?" 소서연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문지기를 노려봤다.
문지기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닙니다. 부인께서 아가씨가 도적들에게 납치되었다고 하셔서 이미 사람을 보내 수색하고 있습니다."
소서연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대문을 들어섰다.
예상대로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서씨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순결한 서연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도적들의 손에 끌려갔으니 모진 수모를 당할 텐데. 앞으로 경성에서 어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시위대를 보냈으니 반드시 언니를 구해올 것입니다."
서씨의 곁에서 나긋한 목소리로 서씨를 달래는 여인은 서씨의 첫째 딸 소미연이다.
서씨는 소미연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구해온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 도적들에게 유린당했으니 이번 생은 끝이나 다름없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서씨는 소미연의 곁에 선 남자를 돌아보며 한스럽게 외쳤다. "서연이가 도적들의 손에 몸이 더럽혀졌으니 황실에 시집갈 수 없을 겁니다. 사황자 전하와 서연이의 혼사도 파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서연이가 성 밖에 있는 사찰에 가지 않았을 텐데..."
소서연의 정혼자는 혼사가 파기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도 화를 내거나 분통한 기색 하나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부인,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이번 일은 소부인과 아무 상관 없는 일 아닙니까? 설령 소서연이 도적들에 의해 몸이 더럽혀졌다 해도, 그건 그녀가 자초한 일입니다. 본 황자 지금 바로 부황께 사실을 보고하여 혼약을 파기할 것입니다."
소서연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배경식의 목소리와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혐오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소서연과의 혼약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치욕이자 허물이었다.
만약 그녀의 몸과 명성이 더럽혀졌다면, 그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최소한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혼약을 파기할 수 있을뿐더러,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생각에 배경식은 눈을 반짝이며 곁에 선 소미연을 바라보았다.
연녹색의 치마를 입은 그녀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배경식을 바라보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경식 오라버니, 만약 언니가 순결을 잃었다면 소씨 가문과 오라버니의 혼약은..."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피는 소미연의 귀여운 행동에 배경식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렸다.
배경식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본 황자와 소씨 가문의 혼약이니, 소서연이 본 황자와 혼인할 수 없다면 소씨 가문의 다른 여식과 혼약을 지켜야지."
순식간에 두 볼에 홍조가 피어 오른 소미연은 수줍음 가득한 시선으로 배경식을 흘깃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에 들어선 소서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가슴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어린 소녀가 도적들에게 둘러싸여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거짓 계략으로 그녀를 모함하려 했다. 소서연은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소미연과 배경식이 끈적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을 때,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오늘따라 저택이 시끌벅적하군요."
소서연의 목소리에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미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언니, 어떻게 돌아왔어?"
"왜? 내가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어?"
소서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소미연의 안색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놀란 기색과 불안감을 감췄다.
소서연은 그녀의 어색한 반응을 무시하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배경식을 흘깃 쳐다본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예를 표했다. "사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방금 혼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혹 혼사 때문에 사황자 전하께서 직접 걸음 하셨습니까?"
배경식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서연이 멋대로 대답했다. "사황자 전하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혼사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익월의 혼사에 차질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배경식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소서연, 황실은 불결한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 이미 도적들에게 순결이 더럽혀진 네가 무슨 낯짝으로 황실에 시집오겠다는 것이냐?"
배경식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은 서씨가 소미연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후 서씨가 다급하게 소서연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서연아, 이 모든 게 내 불찰이다. 내가 너를 잘 지켰다면 죽일 놈의 도적들이 너를..."
서씨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저택에 높이 울려 퍼지자, 마당에 있는 사람들이 소서연을 바라보는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경멸에 가까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몸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소서연이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소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적은 무엇이고, 순결을 잃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저는 어머니와 사황자 전하께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서연의 말에 안타까운 척 연기하던 서씨의 몸이 흠칫 자리에 굳어졌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배경식은 소서연이 도적들에게 납치된 사실을 숨기려는 줄 알고 버럭 화를 내며 폭로하려 했다.
그때, 소미연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말을 가로챘다. "언니, 도적들의 손에 순결을 잃어 마음이 아픈 건 알겠지만, 불결한 몸으로 황실에 시집간다는 것은 황제를 모욕하는 행동이야. 설마 언니의 무지로 소씨 가문까지 위험에 빠뜨리려는 건 아니겠지?"
"하하, 미연이 너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니? 난 그저 사찰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돌아왔을 뿐인데, 그 사이에 내가 도적의 손에 순결을 잃고 황제를 모욕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니?"
소서연의 말을 들은 서씨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소매 아래로 주먹을 세게 움켜쥔 소미연은 이를 꼭 깨물고 물었다. "언니, 혹시 인정하기 싫은 거야? 방금 언니 계집종이 돌아와 언니가 성 밖에서 도적들에게 납치되었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바로 언니를 구하러 사람을 보냈어. 사황자도 이 일을 알고 계셔."
소미연은 말을 하면서 한 켠에 무릎을 꿇고 있는 계집종을 가리켰다.
소서연은 그제야 계집종을 발견했다.
몸 주인의 기억 속 계집종 진주는 서씨 부인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다.
만약 진주 계집종이 일거수일투족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몸 주인은 이렇게 쉽게 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두 눈에 살기가 언뜻 스친 소서연은 소미연을 돌아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도적이라니? 난 도적을 만나지 못했는데?"
"말도 안 돼!"
소미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소리를 질렀다.
소서연의 태연한 모습에 소미연의 머릿속에는 전생에 소서연이 봉황포를 입고 위엄을 떨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 소미연은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다.
전생에 소서연은 무사히 넷째 황자와 혼례를 올려 넷째 황자비가 되었다.
두 사람이 혼례를 올린 뒤, 평범하기만 했던 넷째 황자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더니 여러 차례 혁혁한 공을 세웠고, 결국 다른 황자들을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미연은 소서연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황후 자리에서 위엄을 떨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갖은 애를 쓰며 태자비의 첩이 된 그녀는 매일 괴롭힘만 당하다가 결국 유배되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소미연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 하느님이 다시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생에는 그녀가 먼저 넷째 황자와 정을 쌓고, 소서연의 혼사를 빼앗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넷째 황자가 왕위에 오르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황후는 소미연의 차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