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소서연은 누군가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옷을 마구 찢어 벗기는 느낌을 받은 것과 동시에 귓가에는 남자들의 비웃음이 섞인 듯한 거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뜨자마자 음흉하게 생긴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하하, 마침 깨어났네. 하마터면 지루할 뻔했잖아."

말을 마친 남자는 우악스러운 손짓으로 소서연의 옷깃을 찢었다.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피부가 드러나자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특수부대 출신인 그녀는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두 팔에 힘을 실어 남자를 단숨에 제압하려 했으나,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내 몸이 아니야!'

그녀는 분명 테러리스트의 폭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다른 사람의 몸에 영혼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바로 상황을 파악한 소서연은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더니 두 눈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힘으로 이길 수 없으니, 비열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훈련 기억을 떠올린 소서연은 젖 먹던 힘까지 주어 남자가 그녀의 몸을 덮치려 할 때, 다리 사이를 힘껏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남자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천한 계집이, 감히 날 밀어내? 내 오늘 반드시 네년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린 남자는 그녀를 향해 험한 욕설을 내뱉었다.

남자의 일행이 반응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손서연은 남자들의 포위망에서 빠르게 빠져 나왔다.

"저년을 당장 잡아 오거라. 지옥이 어떤 것인지 내 똑똑히 알려줄 것이다!"

도적 우두머리는 다리 사이를 감싸 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무리의 도적들이 일제히 소서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편, 누군가가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진 숲길의 끝에서, 시위병이 호화롭기 그지없는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때, 섬세한 손가락이 마차 문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광택 하나 없는 검은색의 망포를 입은 남자의 굵은 이목구비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고, 고고한 분위기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이 감돌아 주위 사람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의 지독히고 깊은 눈동자가 소서연을 발견하더니 놀라운 빛이 약간 피어 올랐다.

그녀의 가녀린 몸은 보기에 약해 빠진 것 같지만, 정확히 급소만 노리는 공격은 보통 사람의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마차 곁에 선 시위 욱이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예는 뛰어나지만, 아쉽게도 힘이 모자라군. 힘을 조금 더 키웠다면 도적들이 큰코다칠 수도 있을 텐데."

마차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멈춰 섰고, 도적 무리들 중 누구도 마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소서연의 공격은 도적들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들을 찾아 사주한 사람은 그녀의 몸만 더럽히고 목숨은 해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도적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고, 몇몇은 허리춤에 찬 칼까지 꺼내 들고 소서연의 뒤를 쫓았다.

앞으로 빠르게 내달리는 소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 무기도 없는 그녀는 한 무리 도적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데다, 도적들이 무기까지 휘두르면 상황은 더욱 불리해질 것이다.

특수 부대 요원 출신인 그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방법을 생각해 냈다.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가랑이를 움켜잡고 있는 도적 우두머리를 흘깃 돌아본 그녀는 그를 인질로 삼아 남은 도작들을 협박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서연은 뒤쫓아오는 도적들의 심기를 더욱 도발한 후, 도적 우두머리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몸 주인의 체력을 과대평가했다.

몇 발짝 달리지도 않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땅에 주저앉아버렸다.

'이제 끝났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끝이라는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차가운 칼날이 그녀의 목을 겨눴다.

"이런, 안타깝게 되었군."

마차에 기대선 욱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 여자는 꽤 영리해 보이나, 운이 좋지 않은 것 같네. 게다가 왕야는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

욱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차 안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목숨은 살려야지."

욱이는 멍한 얼굴에 흠칫 놀란 기색이 언뜻 스쳐 지나가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서 돌아서자마자 도적의 처절한 비명이 숲을 가득 채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도적이 소서연에게 멱살이 잡힌 채 목을 물어뜯긴 것이다.

그녀가 입술에 힘을 주자 도적은 피가 쏟아져 나오는 목을 감싸 쥐고 자리에 쓰러졌다.

소서연의 잔인한 공격에 잔뜩 겁을 먹은 도적들이 자리에 얼어붙은 사이,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능숙한 솜씨로 긴 칼을 휘두르자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지며 그녀의 살기 가득한 눈매가 칼날에 비쳤다.

분명 사람을 죽이는 잔혹한 행동이었지만, 어딘가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흘러 넘쳐 보였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 욱이는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소서연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에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이 어찌나 연약한지, 잠깐의 움직임으로 기력이 모두 소진됐다.

도적 무리는 이미 목숨을 잃었고, 목이 찢어진 도적은 그녀에게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땅에 누운 소서연은 체력을 회복하며 몸 주인의 기억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몸 주인은 안정후부의 적장녀로 신분이 무척 고귀한 사람이다. 뻔한 소설 주인공의 기구한 삶이 늘 그렇듯,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안정후 부인은 난산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소서연은 안정후의 눈엣가시로 전락했다.

이후 안정후는 새 부인 서씨를 들였다. 서씨 부인은 첫째 딸 소미연을 낳은 이듬해 아들과 딸을 연달아 출산하여 안정후부에서 더욱 입지를 다졌다.

서씨는 자애로운 인상에 유려한 자태를 뽐냈지만, 마음은 지독하게 악랄한 사람이다. 겉으로는 소서연을 진심으로 아끼는 듯하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음모를 꾸며 소서연이 안정후와 노부인에게 예쁨을 받지 못하게 했다.

모진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녀에게도 꽤 든든한 정혼자가 있었다. 바로 현재 황제의 넷째 황자였다.

허나 넷째 황자는 다른 황자들과 많이 달랐다. 그의 생모는 신분이 가장 낮은 하급 궁녀였기에, 그는 황자 신분이었으나 황제의 관심과 애정을 받을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황제의 황자가 아니던가.

몸 주인은 혼인만 하면 힘든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혼례 이야기가 오가던 중, 서씨 부인이 몇 날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점성술사는 소서연에게 드리운 불운이 원인이라고 하면서 불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서연이 직접 성 밖에 있는 사찰을 찾아가 부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 소서연은 안정후부로 돌아가는 길에 도적을 만났고, 도적에게 괴롭힘을 당할 뻔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의 영혼이 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몸 주인의 기억을 빠짐없이 살펴본 그녀의 안색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몸 주인은 아마 모르겠지만,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기억 속에서 몸 주인의 정혼자와 그녀의 이복 여동생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씨는 두통이 없던 사람인데, 왜 하필 정혼 전날에 심한 두통을 느꼈으며, 몸 주인은 왜 안정후부로 돌아오는 길에 도적을 만나 순결을 잃을 뻔했을까?

만약 몸 주인이 순결을 잃으면 황실에 시집갈 수 없게 된다.

칼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소서연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흥미진진하네.'

웃음소리에 하마터면 놀라 까무러칠 뻔한 도적 우두머리는 지옥의 염라대왕이라도 본 사람처럼 겁에 질린 눈빛으로 소서연을 쳐다봤다.

소서연이 그를 돌아보자 공포에 질려 눈을 더욱 크게 뜬 우두머리는 피가 흐르는 목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헐레벌떡 도망쳤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쿨럭, 쿨럭..."

거칠게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 남자는 입에 고인 피로 인해 계속 기침을 했다.

체력이 거의 회복된 소서연은 곧장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가슴을 짓누르고 목에 칼을 겨누며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이실직고하거라."

잔뜩 겁에 질린 도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날 놓아주면 사실대로 말하겠다."

소서연은 남자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가슴을 짓밟은 발에 더욱 힘을 주며 재촉했다. "내가 셋 셀 때까지 말하지 않으면, 저승에서 염라대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회차 2

두 눈에 당혹감이 어린 도적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서연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

"칼을 치우면 바로 알려줄게."

콩알만 한 식은땀이 도적의 얼굴을 타고 연신 흘러내렸지만, 그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소서연은 누구보다 배후를 알아내고 싶어 하기에 이렇게 쉽게 그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도적 우두머리의 생각을 꿰뚫어 본 소서연은 차갑게 비웃었다. "둘."

"쾅!"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칼이 아래로 떨어지며 도적의 목을 그었다.

도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분, 분명 셋까지 센다고 했잖아..."

"어차피 배후를 밝힐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내가 왜 애꿎은 시간만 낭비해야 하지?"

다시 칼을 허리춤 뒤로 숨기는 소서연의 행동은 물 흐르듯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꿀꺽,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욱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자를 죽이면, 누가 너를 해치려 했는지 어떻게 알아낼 셈이냐?"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경계하며 고개를 돌린 소서연은 조각 같은 이목구비와 짙은 눈빛을 마주했다.

빼어난 얼굴에 옥골선풍으로 기강을 잡았지만, 안타깝게도 다리를 쓰지 못하는 듯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몸 주인의 기억을 더듬은 소서연은 눈앞에 나타난 남자에 관한 정보를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섭정왕 배현석, 현제 황제의 아우로 원래 '진'이라는 봉호를 받았으나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선황에 의해 섭정왕으로 봉함으로써 황제를 보좌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신하와 백성의 눈에는, 배현석은 조정을 장악하고 대군을 틀어쥔 간사하기 그지없는 왕야로 인식되어 평판이 바닥을 쳤다.

이후 어찌 된 영문인지, 기이한 독에 중독되어 다리가 마비된 후 조정의 크고 작은 일도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소서연은 섭접왕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군인이라면 항상 마음이 앞선 그녀는 몸 주인의 기억을 더듬다 섭정왕이 변방에서 나라를 위해 땅을 지키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전공이 혁혁한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문 가득한 소서연의 얼굴이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저를 해치려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습니다. 배후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한 명씩 찾아가 복수하면 됩니다."

무심하게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에 살기가 묻어났다.

욱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여자는 외모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더니, 귀여운 얼굴과 가녀린 몸을 지닌 여인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끔찍한 행위를 할 줄 누가 알기나 했을까.'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던 소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신도 아직 처리하지 못한 데다, 그녀의 행동을 몰래 지켜본 사람까지 있었다.

몸 주인은 이리저리 치이는 신세니, 만약 경성에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대인이 있다면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끝마친 소서연은 배현석을 올려다보며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진왕 전하, 혹 신녀와 거래를 할 마음이 있습니까?"

배현석은 긴 손가락으로 휠체어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소서연은 배현석의 다리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싱긋 미소 지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신녀가 진왕 전하의 다리를 치료할 수 있사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맞은편에 선 욱이의 안색이 급격하게 일그러졌고,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두 눈에 날카로운 분노가 어려 있었다.

배현석의 차갑게 식은 눈빛도 이미 흥미를 잃은 듯했다.

'처음엔 재미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모두 계획된 일이었을 줄이야. 그녀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황형일까, 아니면 잘난 조카들일까?'

소서연은 절대 근거도 없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 출신인 그녀가 귀의를 따라 의술을 배웠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배현석의 다리를 보자마자 대강 감을 잡았다.

배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본 소서연은 그가 그녀의 말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여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 추측이 맞다면, 왕야의 다리는 한독에 중독되었을 겁니다. 온밤 극심한 통증을 참기 어려울 것이며, 벌레가 살을 물어뜯는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무엄하구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욱이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배현석이 여전히 그녀의 말을 믿지 않자 잠시 고민에 잠긴 소서연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 배현석의 맥을 짚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배현석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가 손을 앞으로 내밀 때 배현석은 손을 들어 막으려 하다,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소서연을 흘깃 쳐다보더니 바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욱이는 허리춤에 매단 검을 뽑아 들고 소서연을 더욱 경계했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이상 행동을 한다면, 검은 바로 그녀의 목을 벨 것이다.

소서연은 배현석의 맥을 집중해서 짚어 보았다.

"왕야께서 중독된 독은 수한이라는 독입니다. 독은 처음에 사람의 몸을 빠르게 피곤하게 만들어 쉽게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그러다 독이 오장육부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며 몸은 아래에서 위로 점차 감각을 잃게 될 것이고, 결국 독이 온몸에 퍼져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겁니다."

소서연은 배현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왕야, 신녀의 말이 맞습니까?"

소서연을 내려다보는 배현석의 눈빛이 약간 변한 것 같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한 증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울창한 숲 사이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씨는 겉으로는 소서연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그녀가 도적들의 손에 망가지는 모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배현석은 소서연의 눈빛을 가만히 응시하며 명을 내렸다. "욱아, 처리하거라."

"네, 왕야."

욱이는 내키지 않았지만 왕야의 눈빛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시신들을 처리하러 갔다.

시위 몇 명을 부른 욱이는 바닥에 쓰러진 도적의 시체를 능숙하게 치우고, 바닥에 남은 혈흔까지 흙으로 덮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소서연의 전복된 마차를 제외하고 이상한 점을 찾아볼 수 없게 변했다.

소서연은 만족스럽게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현명한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즐긴다.

그녀는 배현석을 향해 돌아선 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신녀의 마차가 산에서 내려오던 중 전복되었고, 혼란 중 마부는 절벽 아래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때마침 나타난 왕야께서 신녀의 목숨을 구해줬지만, 신녀가 마차 없이 저택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듯합니다."

눈을 가늘게 뜬 배현석은 태연하게 말했다. "낭자만 괜찮다면, 본 왕이 낭자를 저택까지 데려다 줄 수 있네."

소서연은 바로 그의 이런 대답을 기다렸다.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라탔고, 서씨가 안배한 사람들은 헛걸음을 하게 될 것이다.

넓고 화려한 마차는 두 사람이 타기에 충분했다.

배현석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본 왕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느냐?"

"네, 신녀가 약속한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것이옵니다." 소서연은 말을 하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그녀의 옷이 흐트러져 있지만, 엄숙한 얼굴로 하는 말은 묘하게 사람을 설득했다.

배현석은 흥미롭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씨 가문 적장녀가 몇 해 동안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어떻게 의술을 익혔지? 본 왕에게 거짓말을 한 대가가 어떤지 똑똑히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소서연은 시종일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스승님께서 사문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의술에 관한 정황을 자세히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왕야께서 신녀를 도와주셨으니, 왕야의 다리를 낫게 하는 것으로 신녀의 의술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어떻게 낫게 해주겠다는 것이냐?"

소서연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치료에 귀한 약재가 필요합니다. 신녀가 처방전을 써드리면 사람을 보내 약재를 찾아오도록 하십시오. 독이 왕야의 몸에 오랫동안 잠식되었으니 독을 말끔히 없애려면 꽤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왕야께서는 매달 신녀를 찾아와 침을 맞으셔야 합니다."

배현석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머리가 영리하군."

매달 소서연을 찾아가야 한다는 건 그가 그녀의 목숨을 지켜주는 대가로 병을 치료해주겠다는 말이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완벽한 계략은 없을 것이다.

소서연은 부인하지 않고 입 꼬리를 살짝 끌어 올려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욱이가 종이와 붓을 챙겨오자 소서연은 단숨에 처방전을 적어 내려갔다.

빠르게 달린 마차는 어느새 안정후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이 소서연을 찾으러 나선 사람들보다 더 빨리 도착한 것 같다.

"신녀를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녀도 최선을 다해 왕야의 다리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소서연은 배현석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 뒤 마차에서 뛰어내려 빠르게 안정후부로 들어갔다.

회차 3

대문 밖, 배현석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잠겼다.

"왕야, 이제 돌아갈까요?"

왕야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욱이는 곁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해할 것 없다."

소서연이 빠른 걸음으로 대문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려 하는데, 대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를 알아본 문지기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왜? 내가 돌아오지 말아야 할 곳에 돌아온 건가?" 소서연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문지기를 노려봤다.

문지기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아, 아닙니다. 부인께서 아가씨가 도적들에게 납치되었다고 하셔서 이미 사람을 보내 수색하고 있습니다."

소서연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리며 대문을 들어섰다.

예상대로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서씨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순결한 서연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도적들의 손에 끌려갔으니 모진 수모를 당할 텐데. 앞으로 경성에서 어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시위대를 보냈으니 반드시 언니를 구해올 것입니다."

서씨의 곁에서 나긋한 목소리로 서씨를 달래는 여인은 서씨의 첫째 딸 소미연이다.

서씨는 소미연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구해온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느냐. 도적들에게 유린당했으니 이번 생은 끝이나 다름없다."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서씨는 소미연의 곁에 선 남자를 돌아보며 한스럽게 외쳤다. "서연이가 도적들의 손에 몸이 더럽혀졌으니 황실에 시집갈 수 없을 겁니다. 사황자 전하와 서연이의 혼사도 파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서연이가 성 밖에 있는 사찰에 가지 않았을 텐데..."

소서연의 정혼자는 혼사가 파기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도 화를 내거나 분통한 기색 하나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부인,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이번 일은 소부인과 아무 상관 없는 일 아닙니까? 설령 소서연이 도적들에 의해 몸이 더럽혀졌다 해도, 그건 그녀가 자초한 일입니다. 본 황자 지금 바로 부황께 사실을 보고하여 혼약을 파기할 것입니다."

소서연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배경식의 목소리와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혐오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소서연과의 혼약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치욕이자 허물이었다.

만약 그녀의 몸과 명성이 더럽혀졌다면, 그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최소한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혼약을 파기할 수 있을뿐더러,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생각에 배경식은 눈을 반짝이며 곁에 선 소미연을 바라보았다.

연녹색의 치마를 입은 그녀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배경식을 바라보는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경식 오라버니, 만약 언니가 순결을 잃었다면 소씨 가문과 오라버니의 혼약은..."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며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피는 소미연의 귀여운 행동에 배경식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렸다.

배경식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본 황자와 소씨 가문의 혼약이니, 소서연이 본 황자와 혼인할 수 없다면 소씨 가문의 다른 여식과 혼약을 지켜야지."

순식간에 두 볼에 홍조가 피어 오른 소미연은 수줍음 가득한 시선으로 배경식을 흘깃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원에 들어선 소서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가슴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어린 소녀가 도적들에게 둘러싸여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을 때,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거짓 계략으로 그녀를 모함하려 했다. 소서연은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소미연과 배경식이 끈적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을 때,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질렀다.

"오늘따라 저택이 시끌벅적하군요."

소서연의 목소리에 모두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미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언니, 어떻게 돌아왔어?"

"왜? 내가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어?"

소서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소미연의 안색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놀란 기색과 불안감을 감췄다.

소서연은 그녀의 어색한 반응을 무시하고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배경식을 흘깃 쳐다본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예를 표했다. "사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방금 혼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혹 혼사 때문에 사황자 전하께서 직접 걸음 하셨습니까?"

배경식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서연이 멋대로 대답했다. "사황자 전하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혼사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니, 익월의 혼사에 차질 없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배경식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소서연, 황실은 불결한 사람을 들이지 않는다. 이미 도적들에게 순결이 더럽혀진 네가 무슨 낯짝으로 황실에 시집오겠다는 것이냐?"

배경식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은 서씨가 소미연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후 서씨가 다급하게 소서연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서연아, 이 모든 게 내 불찰이다. 내가 너를 잘 지켰다면 죽일 놈의 도적들이 너를..."

서씨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저택에 높이 울려 퍼지자, 마당에 있는 사람들이 소서연을 바라보는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경멸에 가까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몸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소서연이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소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도적은 무엇이고, 순결을 잃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저는 어머니와 사황자 전하께서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서연의 말에 안타까운 척 연기하던 서씨의 몸이 흠칫 자리에 굳어졌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배경식은 소서연이 도적들에게 납치된 사실을 숨기려는 줄 알고 버럭 화를 내며 폭로하려 했다.

그때, 소미연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말을 가로챘다. "언니, 도적들의 손에 순결을 잃어 마음이 아픈 건 알겠지만, 불결한 몸으로 황실에 시집간다는 것은 황제를 모욕하는 행동이야. 설마 언니의 무지로 소씨 가문까지 위험에 빠뜨리려는 건 아니겠지?"

"하하, 미연이 너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니? 난 그저 사찰에 가서 기도를 드리고 돌아왔을 뿐인데, 그 사이에 내가 도적의 손에 순결을 잃고 황제를 모욕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이니?"

소서연의 말을 들은 서씨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소매 아래로 주먹을 세게 움켜쥔 소미연은 이를 꼭 깨물고 물었다. "언니, 혹시 인정하기 싫은 거야? 방금 언니 계집종이 돌아와 언니가 성 밖에서 도적들에게 납치되었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바로 언니를 구하러 사람을 보냈어. 사황자도 이 일을 알고 계셔."

소미연은 말을 하면서 한 켠에 무릎을 꿇고 있는 계집종을 가리켰다.

소서연은 그제야 계집종을 발견했다.

몸 주인의 기억 속 계집종 진주는 서씨 부인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다.

만약 진주 계집종이 일거수일투족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몸 주인은 이렇게 쉽게 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두 눈에 살기가 언뜻 스친 소서연은 소미연을 돌아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도적이라니? 난 도적을 만나지 못했는데?"

"말도 안 돼!"

소미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소리를 질렀다.

소서연의 태연한 모습에 소미연의 머릿속에는 전생에 소서연이 봉황포를 입고 위엄을 떨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 소미연은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다.

전생에 소서연은 무사히 넷째 황자와 혼례를 올려 넷째 황자비가 되었다.

두 사람이 혼례를 올린 뒤, 평범하기만 했던 넷째 황자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더니 여러 차례 혁혁한 공을 세웠고, 결국 다른 황자들을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미연은 소서연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황후 자리에서 위엄을 떨치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갖은 애를 쓰며 태자비의 첩이 된 그녀는 매일 괴롭힘만 당하다가 결국 유배되는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소미연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 하느님이 다시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생에는 그녀가 먼저 넷째 황자와 정을 쌓고, 소서연의 혼사를 빼앗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넷째 황자가 왕위에 오르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황후는 소미연의 차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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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요원이 왕비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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