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차서윤은 손에 든 보온 도시락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품고 심씨 그룹 건물로 들어섰다.

이 약선(藥膳) 한 그릇을 위해 그녀는 인맥을 총동원해 남미 지하 경매장에서 단 한 포기뿐이라는 혈갈초(血竭草)를 어렵게 확보했다. 그 뒤로 6시간 내내 냄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달였다.

남편 심도훈이 심각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기에, 이 요리는 그의 생명을 연장해 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차서윤의 눈에 들어온 건, 심도훈이 임세린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모습이었다.

임세린, 그녀는 심도훈의 첫사랑이었다.

차서윤은 속으로 의아해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세상에, 세인트 메디컬 콘퍼런스 초대장이에요?" 임세린은 환하게 웃으며 초대장을 받아들더니, 차서윤을 향해 도발적인 눈빛을 던졌다.

"왔어?" 차서윤의 인기척을 느낀 심도훈이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보온 도시락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곧 무심하게 거두며 말했다. "거기 놔둬."

심도훈의 태도를 본 임세린은 더욱 우쭐해졌다. 손에 든 초대장을 자랑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도훈 오빠, 고마워요. 이거 전 세계 최고의 의학 전문가들만 참석할 수 있는 학회라면서요? 오빠가 저한테 이런 걸 준비해 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제가 곧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큰 선물까지… 정말 감동이에요."

'선물?' 문 앞에 멈춰 선 차서윤은 순간 멍해졌다.

그건 세인트 측에서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의학 강연에 초대하기 위해 특별히 보낸 초대장이었다.

차서윤은 그저 심도훈에게 대신 받아 두기만 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인데, 어느새 다른 여자를 기쁘게 하기 위한 '선물'로 둔갑해 있었다.

차서윤의 어머니는 평생 희귀 유전병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에 매진했다. 하지만 연구가 막 돌파구를 찾으려던 순간, 누군가의 음모로 실종됐고 '학술 조작'이라는 누명까지 쓴 채 자취를 감췄다.

지난 5년 동안 차서윤은 심씨 가문에서 '요리만 할 줄 아는 가정주부'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저택 지하의 허름한 실험실에 틀어박혀, 눈이 빨개지도록 약제를 조제하고 데이터를 검증하며 어머니의 연구를 몰래 이어 왔다.

지난주, 차서윤의 연구 성과는 마침내 국제 의학 협회의 이중맹검 임상시험을 통과했다.

이 초대장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결백을 밝히고, 유전병 환자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차서윤은 앞으로 다가가 임세린의 손에 쥐인 초대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거 내 거야. 내놔."

초대장을 쥔 임세린의 손이 굳어지더니, 그녀는 재빨리 심도훈의 등 뒤로 숨었다. "서윤 언니, 왜 이러세요? 이건 도훈 오빠가 제게 주신 선물이라고요."

심도훈의 안색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차서윤, 그건 너한테 아무 쓸모 없는 물건이야. 난 이미 세린이한테 줬어."

"쓸모가 없다고?" 차서윤은 어이없다는 듯 쓴웃음을 흘렸다. "심도훈, 내 물건이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곁에 서 있던 심도훈의 비서 임재우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차서윤 씨, 당신 물건이라뇨? 지금 당신이 몸에 걸친 것 중에 심씨 집안 것이 아닌 게 뭐가 있죠?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게 대체 뭐가 있다는 겁니까? 임세린 씨는 해외에서 돌아온 의학 박사입니다. 초대장을 그분께 드리는 게 훨씬 낫죠. 가정주부인 당신은 책도 제대로 읽어 보지 못했을 텐데, 그게 뭔지 알겠어요?"

심도훈은 임재우의 말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의 기억 속 차서윤은 매일 주방에 틀어박혀 요리만 하며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여자였다. 의학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철저한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차서윤이 어디선가 초대장을 구해 와,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또 한 번 수를 쓰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심도훈은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세린이는 곧 졸업하잖아. 의학계에서 자리 잡으려면 이런 기회가 꼭 필요해. 이번 기회에 국제적인 최고 전문가들도 직접 만날 수 있고. 네가 이런 기회를 빌려 네 능력을 증명하고 내 관심을 끌고 싶어 한다는 건 나도 알아. 이제 더는 그런 노력 안 해도 돼."

'능력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차서윤은 옆구리에 늘어뜨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5년간의 결혼 생활 내내, 그의 눈에 차서윤은 그렇게 초라한 방식으로라도 관심을 구걸해야 하는 부속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가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 뚜껑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초대장에는 이미 제 이름이 적혀 있어요. 제 물건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색까지 내시다니, 심 대표님 정말 관대하시네요." 그녀는 임세린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임세린 씨가 의학 박사에 천재라면 초대장 정도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왜 가정주부인 제 초대장을 탐내죠? 설마 제가 임세린 씨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시는 건가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임세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도훈 오빠, 저는 정말 몰랐어요.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초대장이 서윤 언니 거라는 것도 몰랐고요. 알았으면 절대 받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초대장을 꼭 쥔 채 차서윤 쪽으로 내밀었다. "서윤 언니, 정말 미안해요. 돌려드릴게요."

차서윤이 손을 뻗어 초대장을 받으려는 순간, 임세린의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찰싹." 그 순간, 초대장은 뚜껑이 열린 보온 도시락 안으로 직통으로 떨어졌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어두운 빨간색 초대장은 순식간에 기름기로 뒤덮여 더럽혀졌다.

"아이고!" 임세린은 입을 가리며 비명을 지를 듯 소리쳤다. "죄송해요! 손이 미끄러져서… 초대장이 완전히 더러워졌네요."

차서윤은 얼룩이 번진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사랑하는 서윤아, 엄마의 꿈을 이어 훌륭한 의사가 되어 주렴.' 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건 어머니가 그녀에게 남겨 준 유일한 추억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글씨는 기름 얼룩에 번져, 거의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굽혔다.

"종이 한 장도 제대로 못 들어?" 심도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더러워진 초대장을 내려다봤다. 원래라면 차서윤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았겠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듯 그의 눈빛에는 이미 포기한 눈빛이었다.

"됐어. 그냥 종이 한 장일 뿐이잖아. 더러워졌으면 어때."

차서윤은 휴지로 초대장에 묻은 기름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기름은 종이 섬유 깊숙이 스며들었고, 어머니의 글씨는 점점 더 흐릿하게 번져 갔다.

차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대장을 손에 꼭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좋아. 초대장 일은 더 이상 따지지 않을게." 차서윤은 심도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빠 내일 해외에서 돌아와. 같이 마중 나가 주겠다고 했잖아. 오후 3시, 항구에서 봐."

이것이 그녀가 이 결혼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회차 2

심도훈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차서윤에게 아버지가 있었다고?'

결혼할 당시, 심도훈은 차서윤이 아버지가 해외에 있다고 했던 말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어딘가 외딴 나라에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5년 동안, 그녀의 아버지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차서윤이 5년 동안 그에게만 매달려 있었기에, 심도훈은 그녀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돌아오는 걸까?' 심도훈의 머릿속에는 탐욕스럽고 초라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는 친딸을 5년이나 남의 집에 맡겨 둔 채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 제대로 된 아버지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지금 와서 나타난 것도, 자신이 심씨 그룹 대표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몫 챙기려는 속셈일 게 분명했다.

심도훈은 이런 사람들을 가장 혐오했다. 하지만 차서윤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 심도훈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3시에 데리러 갈게."

차서윤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고 몸을 돌려 자리에 떠났다.

다음 날, 오후 3시 5분.

차서윤은 길가에 서서 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3시 15분. 드디어 휴대폰이 울렸다.

"서윤아." 심도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오늘 아버지를 데리러 가지 못할 것 같아."

"왜?"

"세린이 쪽에 교통사고 환자가 생겼대.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서 사람부터 살려야 해. 내가 먼저 세린이를 병원에 데려다줘야 하니까… 아버지는 다음에 찾아뵐게. 서윤아, 네가 먼저 모시러 가."

휴대폰 너머로 임세린의 다급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훈 오빠, 빨리 가야 해요. 다들 저 기다리고 있어요…"

"걱정 마. 내가 있잖아." 심도훈의 목소리는 금세 부드러워졌다.

차서윤은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길가에 서 있었다.

맞은편 도로에 검은색 마이바흐가 멈춰 섰다.

심도훈은 허리를 굽혀 임세린을 스포츠카에서 안아 올렸다.

임세린은 그의 품에 안겨 조금도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교통사고? 사람을 구한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우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된 각본처럼 느껴졌다.

차서윤은 마이바흐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졌다.

텅 빈 가슴에 바람이 불어와도 춥지 않았다.

"심도훈." 그녀는 이미 끊어진 휴대폰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제 끝이야."

그녀는 몸을 돌려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건 다음, 액셀을 끝까지 밟았다.

한편, 스카이 레지던스.

입구에는 검은 바탕에 금색 무늬가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유럽 지하 세계에서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차씨 가문의 문양이었다.

평소라면 허가받은 차량 외에는 어떤 개인 차량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입구의 경비원은 차서윤의 차량 번호를 확인하더니, 아무 말 없이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녀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멀리서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양쪽에 도열해 있었다.

수백 명의 경호원들이 뿜어내는 싸늘하고 살벌한 기운이 사방을 압도했다.

그들 모두 실탄이 장전된 총기를 휴대한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차서윤이 차에서 내려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촤악!" 수백 명의 경호원들이 마치 한 몸처럼 동시에 움직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동작이었다. 이내 모두가 동시에 허리를 깊이 숙여, 구십 도로 일제히 인사했다.

"아가씨,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양쪽으로 열렸다.

통창 앞에는 사람들을 등진 채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인사 소리를 들은 남자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자,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10미터 뒤에서 멈춰 섰다. 누구도 감히 그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많이 말랐구나." 차정우는 딸의 앞에 멈춰 서서 그녀의 얼굴을 만져 보려 했다. 하지만 혹여 닿기만 해도 부서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손끝은 허공에서 잠시 멈칫했다. "서윤아, 아빠가 돌아왔어!"

지금 이 순간, 유럽 지하 세계를 뒤흔드는 차씨 가문의 수장인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짙게 어려 있었다.

차서윤은 5년 만에 만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코끝이 시큰해 났다. "아빠."

"미안해. 아빠가 너무 늦게 돌아왔어." 차정우는 차서윤을 품에 꼭 안았다.

그 말에 차서윤의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어졌다. 벌써 5년이었다. 그녀는 다시는 부모님을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

차정우는 두 손으로 차서윤의 얼굴을 감쌌다. "누가 우리 서윤이를 이렇게 힘들게 했어? 그 자식이야? 걱정 마. 이제 아빠가 있잖아. 고작 심씨 그룹 따위, 내겐 아무것도 아니다. 설령 유럽 전체를 뒤집는 일이 생기더라도, 아빠가 끝까지 널 지켜 줄게."

"엄마는..." 차서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차정우의 손이 잠시 멈췄다. 눈빛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살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깊은 슬픔만이 내려앉았다. 그는 품에서 누렇게 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차서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건 그들 세 식구가 같이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 어머니는 하얀 가운을 입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실험 보고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네 엄마는 우리를 버린 게 아니다. 그때 가문 내 싸움이 너무 심했어. 가주 자리를 노리던 방계들이 네 엄마가 가지고 있던 유전자 치료제 제조법을 노렸거든. 그래서 네 엄마는 그 킬러들을 다른 쪽으로 유인하려고 일부러 자취를 감춘 거야."

차서윤은 사진을 꼭 움켜쥐었다. 어머니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사라진 것이었다...

"내가 5년 동안 돌아오지 않은 것도 가문 내부를 정리하기 위해서였어." 차정우의 눈빛에 섬뜩한 기운이 스쳤다. "우리 가정을 망가뜨린 그 나쁜 놈들은 내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정리해 뒀다. 이제 네 엄마만 다시 찾으면 된다."

그러고는 눈앞의 딸을 바라보며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윤아, 이제 집으로 돌아오너라. 차씨 가문의 문은 언제나 너를 위해 열려 있다. 누가 또 우리 서윤이를 힘들게 하면, 아빠가 그 자식을 이 세상에서 없애줄게."

한참이 지나서야 차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빠, 제가 직접 해결하고 싶어요."

그녀는 지난 5년 동안 괜히 쏟아부었던 진심을 하나씩 거둬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어리석고도 허망했던 지난 5년과도, 이번에는 반드시 제 손으로 끝을 내기로 했다.

차정우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 이것만은 잊지 마. 네 뒤에는 언제나 차씨 가문이 있다."

회차 3

심씨 별장.

"엄마, 세린 언니가 얼마나 세련되고 분위기 있는지 몰라요. 게다가 박사 학위까지 있잖아요. 그런데 차서윤 그 여자는 하루 종일 죽은 사람처럼 축 처져 있으니 보기만 해도 입맛이 떨어져요. 흥, 그런 여자는 우리 집에서 밥이나 해 주는 게 딱이죠."

그때 최미경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그 여자, 그 가난한 아빠 만나러 간 거 아니야?"

심유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해외에서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외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일하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이제 돌아와서 딸한테 기대려는 거겠죠."

그 말에 심도훈은 그저 미간만 찌푸렸을 뿐,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차서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본 최미경의 얼굴에 혐오감이 가득 피어 올랐다. "어머, 그래도 돌아올 줄은 아네? 빨리 밥이나 해."

차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심유정도 곧장 쏘아붙였다. "야, 엄마가 말하잖아. 못 들었어? 그게 무슨 태도야? 밖에 나가서 그 가난한 아버지 한번 만나고 왔다고, 이제 와서 성질까지 부리는 거야?"

차서윤은 걸음을 멈추고, 제 앞을 막아선 심유정을 차갑게 노려봤다. "비켜."

그 눈빛에 심유정은 순간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지만 곧바로 표정을 굳히고 언성을 높였다. "네가 감히 나를 노려봐? 여긴 우리 집이야. 우리 오빠 덕에 먹고살면서, 밥 한 번 하라는 게 뭐가 문제인데?"

"너희 집?" 차서윤이 비웃듯 되묻고는 시선을 돌려 별장 안을 천천히 훑어봤다.

처음 집을 구하던 때, 심도훈은 막 슬럼가에서 벗어난 처지였다. 차서윤은 그에게 고작 50만 원만 받고, 바로 차씨 가문 소유의 저택으로 들어와 살게 했다. 심지어 그의 자존심을 지켜 주려고 이곳이 친척 집이라 잠시 있어도 된다고 했다.

차서윤은 차갑게 헛웃음을 흘렸다. "심도훈, 설마 네 가족들한테 이 집이 네 집이라고 말한 거야?"

심도훈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차서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낯설기만 한 남자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되물었다. "왜, 말 못 하겠어?"

"닥쳐!" 심도훈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그래, 인정할게. 네 아버님 마중 나가지 못한 건 내 잘못이야. 나한테 불만이 있으면 내가 사과할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 피곤하면 올라가서 쉬어."

"나 안 피곤해." 차서윤은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냥 확실하게 말해 두고 싶을 뿐이야."

평소와 전혀 다른 차서윤의 태도에 최미경은 화가 치밀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네가 감히 도훈이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 네 엄마도 외간 남자랑 도망간 건지 누가 알아?"

"뭐라고?" 차서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더니 최미경을 노려봤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최미경은 허리에 손을 얹고 침을 튀기며 말했다. "실종이라니, 웃기지도 않네. 분명 남자 따라 도망간 거겠지. 천박한 년! 너 오늘 이렇게 늦게 들어온 것도, 네 엄마처럼 밖에서 딴 남자 만나고 온 거 아니야?"

"닥쳐!" 차서윤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자, 위에 놓여 있던 컵들이 덜컥거리며 들썩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기 어머니를 모욕하게 둘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장 깊은 상처였고,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이었다. 감히 그 선을 넘는 사람은 누구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차서윤의 갑작스러운 기세에 최미경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더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나, 도훈아. 네가 데려온 아내 꼴 좀 봐라!"

그 모습을 본 심도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왜 소리를 질러? 우리 엄마잖아! 엄마가 연세도 있고 몸도 안 좋은데 엉겹결에 아무 말이 할 수도 있지? 꼭 네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야겠어? 빨리 엄마한테 사과해."

'사과? 그녀의 어머니를 천박한 여자라고 모욕한 것이 엉겹결에 한 말이었다고?'

차서윤은 지난 5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해 온 그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때 목숨까지 걸고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정말 눈앞의 이 사람과 같은 인물인지, 이제는 그것조차 의심이 들었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심도훈, 다시 한 번 물을게. 너도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너도… 한 번도 내 엄마를 찾아 주려고 해 본 적 없었던 거야?"

심도훈은 차서윤을 바라보더니, 어머니와 여동생의 화난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만약 지금 어머니 편을 들지 않으면, 최미경이 또 난리를 피울 게 뻔했다.

어차피 차서윤은 자신을 떠나지 못할 테니, 적당히 달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차서윤의 뜨거운 시선을 피한 채 끝내 침묵했다.

또 침묵이었다. 심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괴롭힐 때마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침묵으로 답해 왔다. 그 모습을 보며 차서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답은 이미 오래전에 나와 있었던 것 아닌가? 지난 5년 동안, 그녀가 어머니를 찾는 것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심도훈은 항상 말을 돌리거나, 헛수고하지 말라고 암시했다.

결국 그의 마음속에서도 그녀의 어머니를 향한 평가는 최미경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차서윤의 분노는 마침내 끝까지 치솟았다. "좋아. 아주 좋아. 심도훈, 벌써 다 잊었어? 3년 전에 너의 회사 자금줄이 끊겼을 때, 누가 너를 도와서 첫 투자 받아 왔어? 네가 운이 좋아서 된 일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예전 교수님께 부탁해서 겨우 성사시킨 거야. 그리고 네 어머니가 심한 위궤양으로 수술까지 받아야 한다고 했을 때, 누가 매일 3시간만 자면서 약선을 만들어 드렸는지도 잊었어? 그렇게 해서 겨우 몸을 회복시킨 거잖아."

그 말에 심도훈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건… 다 지난 일이야…"

"그리고 너, 심유정." 차서윤은 그의 말을 냉정하게 끊어 냈다. "네가 유럽 상류층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게 정말 심씨 가문 돈 덕분이라고 생각해? 내가 연회 전에 네 드레스부터 액세서리까지 직접 골라 주고, 누구 앞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 주지 않았으면 넌 아직도 그 세계 문턱조차 밟지 못했을 거야. 나는 심씨 가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 그리고 진심으로 당신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너희는?"

"그만해!" 최미경은 더는 참지 못하고 차서윤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치려 했다.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려! 우리 심씨 가문이 널 받아 주지 않았으면, 넌 진작 길바닥에서 굶어 죽었어! 네가 없었으면 내 위병도 벌써 다 나았을지 누가 알아? 이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최미경의 손바닥이 매섭게 바람을 가르며 차서윤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차서윤이 몸을 살짝 피하자, 최미경은 그녀의 품에 안긴 서류 봉투를 낚아챘다. "이게 뭐야? 내놔!"

"찌익!" 서류 봉투가 찢어지며, 안에 있던 가족사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최미경은 사진을 보지도 않고 바로 집어 찢어 버렸다. "재수 없는 년! 죽은 네 엄마처럼 너도 끝까지 더럽게 재수 없어! 다시는 우리 심씨 가문에 발도 들이지 마!"

차서윤은 최미경을 거칠게 밀어냈고, 바닥에 흩어진 찢어진 사진 조각들을 주우려 급히 몸을 숙였다. 어떻게든 빨리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사진 조각들을 움켜쥔 채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심도훈이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차서윤은 그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그는 그렇게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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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메스를 든 그녀는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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