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지난 5년간, 나는 완벽한 여자친구였다.

강태준의 집안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나는 그의 곁을 지켰다.

그가 맨손으로 IT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도왔다.

나는 우리의 사랑이 진짜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나는 그가 잠결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신음처럼 내뱉는 것을 들었다.

유채리.

그의 돈이 사라지자마자 그를 버렸던 전 여자친구.

나는 끔찍한 진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의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대체품이었다.

그의 잔인함은 서서히 타오르다 지옥 불이 되었다.

파티에서 샹들리에가 떨어졌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구하고 내가 깔리도록 내버려 뒀다.

교통사고 후 피 흘리는 나를 길가에 버려두고 그녀를 위로하러 갔다.

그는 그녀를 선택했다.

언제나,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내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존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안식처가 아니었다.

안락한 거짓말로 지어진 감옥이었다.

그가 유채리의 자작극에 놀아나 요트 위에서 나를 버리고 그녀를 구하러 갔을 때, 나는 마침내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괴물 같은 몰골의 은둔자와의 정략결혼에서 도망치게 해달라고 애원했을 때, 나는 탈출구를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걱정 마. 내가 그와 결혼할게.”

제1화

첫 번째 신호는 강태준의 몸을 관통하는 깊은 전율이었다.

나는 그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움직임을 멈췄다.

“괜찮아? 열나는 거 아니야?”

그의 피부는 땀으로 얇게 젖어 있었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긴장해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우리는 5년을 만났고, 3년을 같이 살았다.

나는 그의 등의 모든 선, 숨소리의 모든 변화를 알았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괜찮아.”

그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이번 주에 일이 좀 많았어.”

나는 그의 어깨 긴장을 풀어주려 애썼다. 손가락으로 뭉친 근육을 꾹꾹 눌렀다.

“물이라도 갖다 줄까? 아니면 아스피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 태산테크의 압박은 엄청났다.

그는 금융 스캔들의 잿더미 속에서 가문의 이름을 혼자 힘으로 부활시켰고, 무에서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그 모든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아니, 하진아.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

그는 내 손길을 피하며 몸을 돌렸다.

“그냥… 자게 해줘.”

그는 완전히 등을 돌리고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그가 만들어낸 거리는 침대 위 몇 센티미터보다 훨씬 더 넓게 느껴졌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잠들기에는 너무 거친 숨소리였다.

뱃속에서 차가운 덩어리가 뭉쳤다.

뭔가 잘못됐다.

한 시간쯤 뒤,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클라이언트에게 보낼 그래픽 디자인 제안서를 마감해야 했고, 방 안의 불안한 공기 때문에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맨발로 거실로 나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소파에 앉았다.

막 일을 시작하려는데, 내가 가장 아끼는 펜을 침실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살금살금 침실 문 쪽으로 다가간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침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거친 신음.

고통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다른 무언가였다.

지극히 사적인 소리.

심장이 갈비뼈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나는 복도 그림자 속에 숨어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채리야.”

그 이름은 유령이었다.

우리가 이미 묻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속삭임.

유채리.

그의 전 여자친구.

그의 집안 재산이 증발하자마자 그를 버렸던 나르시시스트 사교계 명사.

그리고 지금, 태준이 다시 IT 거물이 되자 갑자기 우리 도시로 돌아와 가십 사이트를 도배하고 있는 여자.

나는 몸을 떨며 앞으로 기울여,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을 엿보았다.

달빛이 침대 위로 한 줄기 비쳤다.

태준은 등을 대고 누워 눈을 감고 있었고, 한 손은 이불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절박한 갈망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단 한 번도.

“채리야.”

그가 다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목소리는 날것 그대로의, 고통스러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발…”

그 소리가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것은 모독이었다.

그는 우리가 함께 쓰는 침대에서, 다른 여자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여자가 아니라, 바로 그녀를.

우리가 함께한 모든 세월 동안, 모든 은밀한 순간들 속에서, 그는 이런 열광적이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한 열정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나와 함께일 때 그는 따뜻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완벽한 남자친구였다.

세심하고, 관대하고, 가문의 유산을 재건한 남자.

하지만 이건… 이건 집착이었다.

이건 병이었다.

그리고 나는 끔찍할 정도로 명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그의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안식처였다.

나는 그가 폭풍을 갈망하는 동안 딛고 서 있는 안정된 땅이었다.

나는 그의 대체품이었다.

뱃속의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얼음 같았다.

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내 인생이 무너지는 현장을 지켜보는 구경꾼이 된 것 같았다.

그때, 협탁 위에서 그의 휴대폰이 날카롭게 울리며 그 순간을 깨뜨렸다.

태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휴대폰을 더듬어 찾았고, 발신자 표시를 보자마자 잠기운이 가셨지만 즉시 경계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우야? 무슨 일이야?”

최진우는 그의 사업 파트너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태준에게 감히 쓴소리를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너 미쳤냐?”

진우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로도 날카롭게 들렸다.

“방금 유채리 SNS 최신 글 봤어. 시내에 새로 생긴 클럽에서 네가 아직도 자기 손아귀에 있다고 떠들고 다니던데.”

태준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우가 쏘아붙였다.

“지난주 갈라쇼에서 유채리가 ‘넘어졌다’는 이유로 하진이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달려갔잖아. 요트 엔진에 불났을 때도 유채리 먼저 안전한지 확인하겠다고 하진이 혼자 내버려 뒀고. 근데 이제 이것까지? 태준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요트 화재.

그는 나에게 모두가 안전하게 내리는지 확인했을 뿐이라고 했다.

거짓말.

언제나 유채리가 문제였다.

“채리는… 복잡해.”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걔한테 빚진 게 있어.”

“빚진 거 없어! 걔는 너한테 빚더미랑 상처만 남기고 떠났어. 하진이가 네 곁을 지켰잖아. 하진이가 네가 재기하는 걸 도왔다고. 그 애는 널 사랑해, 이 멍청아.”

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숨을 참았다.

내 모든 미래가 그의 다음 말에 달려 있었다.

“알아.”

태준이 마침내 말했다.

그 두 단어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진이는 착해. 친절하고. 안정적이야.”

“하지만 넌 그 애를 사랑하지 않지.”

진우가 체념한 듯 평탄한 목소리로 단정했다.

“사랑할 수 없어.”

태준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인정했다.

“채리랑 있을 땐… 모든 것이었어. 그게 날 거의 파괴했지. 난 거기로 돌아갈 수 없어. 안 돌아갈 거야. 하진이는… 하진이는 안전해. 이게 더 나아.”

“그래서 그냥 이용하는 거라고? 그냥 안주하는 거라고? 그거 잔인한 거야, 태준아. 하진이는 네 빌어먹을 대체품 이상의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그런 거 아니야.”

태준이 주장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정확히 그런 거야.”

진우가 말했다.

“너 그 애를 잃게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넌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고.”

“안 떠날 거야.”

태준이 오싹할 정도의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애는 날 사랑하니까.”

그는 잠시 멈췄다.

“설령 떠난다고 해도, 그게 최선일지도 몰라. 난 그 애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전화가 끊겼다.

나는 문에서 조용히, 기계적으로 물러났다.

거실로 비틀거리며 들어서자, 파노라마 창밖의 도시 불빛이 의미 없는 얼룩으로 번져 보였다.

내가 떠나도 그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안전하다고 했다.

안전한 항구라고.

하지만 항구는 배가 정말로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다.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억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내가 인생이라고 착각했던, 정교하게 구축된 거짓말의 급류.

우리의 첫 만남은 대학교 파티였다.

나는 조용한 그래픽 디자인과 학생이었고,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태준의 여동생인 강채원에게 끌려왔다.

공기는 값싼 맥주와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그때 그가 들어왔다.

강태준은 그냥 잘생긴 게 아니었다.

그는 전율 그 자체였다.

그가 방에 서 있는 방식은 다른 모든 것을 배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단순한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모든 시선을 끄는 타고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즉시, 희망 없이 그에게 사로잡혔다.

“저게 내 오빠야.”

채원이 눈을 굴리며 속삭였다.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마. 싫어하니까.”

그는 캠퍼스의 전설이었다.

똑똑하고, 야심 차고, 악명 높을 정도로 냉담했다.

여자애들이 끊임없이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는 정중하지만 깨지지 않는 차가움으로 모두를 거절했다.

나는 그저 군중 속의 한 얼굴이었고, 멀리서 그를 동경하는 것에 만족하며, 내 스케치북은 그의 비밀스러운 초상화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유채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가 아닌 모든 것이었다.

시끄럽고, 화려하고, 그를 향한 추격에 끊임없이 공격적이었다.

그녀는 몇 달 동안 그를 쫓아다녔다.

활기차고, 요구가 많은 자연의 힘처럼.

모두가 충격에 빠졌지만, 난공불락의 왕자였던 태준은 마침내 굴복했다.

그는 그냥 그녀와 사귄 게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숭배했다.

나는 한번 그들이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목청껏 터져 나오는 즐거운 웃음소리였다.

그는 그녀를 들어 올려, 마치 그녀가 그의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빙빙 돌렸다.

그는 그녀의 생일 선물로 차를 사주었고, 학자금 대출을 갚아주었으며, 심지어 술집에서 그녀를 모욕한 남자와 주먹다짐까지 했다.

그는 사랑에 홀린 남자였다.

나는 조용하고 타는 듯한 질투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태준의 집안 재산이 무너졌다.

그의 아버지가 대규모 횡령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 소식이 터진 날, 유채리는 짐을 쌌다.

그녀는 그에게 “자선 사업 대상”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태준은 산산조각 났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그의 작은 아파트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채원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그를 확인해달라고,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그저 그가 살아있는지 확인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몇 주 동안, 나는 그의 문밖에 식사를 두고 왔다.

문 밑으로 격려의 쪽지를 밀어 넣었다.

나는 그저… 머물렀다.

어느 날, 그가 마침내 문을 열었다.

그는 수척해 보였고, 눈은 퀭했다.

그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여기 있었어?”

그가 오랫동안 쓰지 않아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았다.

내 수년간의 조용한 숭배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길고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너 나 좋아해, 하진아?”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가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며 옆으로 비켜섰다.

“사귀자. 어쩌면 네가 그녀를 잊게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때조차도 내가 리바운드라는 것을, 그의 회복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사랑에 빠져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내 헌신이 그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조용하고 꾸준한 사랑이 결국 그녀의 시끄럽고 파괴적인 열정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5년 동안, 나는 그것이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가 세 가지 일을 하고, 그의 청구서를 지불하고, 그의 첫 작은 IT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것을 도우며 그를 지원했다.

태산테크가 마침내 성공했을 때, 그는 항상 그가 되어야 했던 남자가 되었다.

강력하고, 성공하고, 뛰어난 남자.

그는 나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었고, 호화로운 휴가를 데려갔으며, 세상에 내가 그를 구한 여자라고 말했다.

그는 완벽한 남자친구였다.

그는 친절했다.

그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오빠였다.

그는 내 인생의 사랑이었다.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그의 마음을 치유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치유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밑에서 여전히 곪고 있는 상처에 반창고를 붙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채리가 다시 부유하고 성공한 모습으로 도시에 돌아온 순간, 그녀는 그 반창고를 바로 찢어버렸다.

그는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 데이트를 취소했다.

휴대폰을 보며 미소 짓고 있을 때, 나는 그녀의 이름이 화면에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녀가 있을 법한 파티에 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야근 회의 중이라고 말했다.

경매는 첫 번째 공개적인 균열이었다.

그는 자선 갈라에서 상을 받고 있었고, 경매를 위해 유채리와의 저녁 식사를 “기부”했다.

역겹고 뒤틀린 권력과 복수의 게임이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통제권을 가진 사람, 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가 무대 위에 서서 남자들이 그녀에게 입찰하는 것을 지켜볼 때, 그의 눈에는 승리감이 아니라 익숙하고 절박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그는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아파트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 내 인생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으며 견딜 수 없는 명확한 그림을 형성했다.

그의 모든 친절, 모든 관대함은 모두 연기였다.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나를 상처 주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는 나에게 잘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잘해준다”는 버전은 편안함과 안정성으로 지어진 감옥이었고, 그의 마음이 다른 여자에게 묶여 있는 동안 내가 떠나지 못하게 설계된 것이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는 나라는 아이디어를 사랑했다.

그는 내가 쉽고, 충성스럽고, 유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랑했다.

나는 유령, 그가 진정으로 가질 수도, 진정으로 놓아줄 수도 없는 사람을 위한 대체품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어두운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내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너무 깊은 고통으로 커져 있어서 마치 가슴에 물리적으로 구멍을 뚫은 것 같았다.

5년 동안, 나는 내 사랑이 충분하다고 믿으며 그를 중심으로 내 인생을 만들어왔다.

그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애초에 경쟁 상대도 아니었다.

나는 다리를 떨며 일어섰다.

욕실로 걸어가 거울 속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뒤돌아보는 여자는 바보였다.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바보.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뜨겁고 따가웠다.

그리고 또 한 방울.

나는 흐느끼지 않았다.

고통이 너무 깊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조용하고 내적인 비명이었다.

나는 더 이상 대체품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의 안전한 항구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결심이 얼음덩어리처럼 내 영혼에 자리 잡았다.

나는 떠날 것이다.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카운터 위에서 내 휴대폰이 윙윙거렸다.

채원이 보낸 문자였다.

엄마한테 들었어. 권씨 집안에서 결혼 계약 마무리 짓고 있대. 나 그 괴물이랑 결혼해야 해. 하진아, 나 못해. 제발, 나 좀 도와줘.

정략결혼.

몇 년 전 태준의 집안과 강력한 구 재벌 권씨 가문 사이에 사업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맺어진 거래였다.

채원은 그 후계자인 권도혁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10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은둔자로, 흉측한 몰골에 잔인하다는 소문이 파다한 남자였다.

채원은 음악가 남자친구와 절실히 사랑에 빠져 있었고, 겁에 질려 있었다.

내 심장의 폐허 속에서 미치고 무서운 아이디어가 번쩍였다.

그것은 탈출구였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내 손가락은 모든 것을 바꿀 메시지를 입력했다.

걱정 마, 채원아. 내가 처리할게. 넌 그와 결혼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할게.

회차 2

“네가 뭘 해?”

채원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비명처럼 들렸다.

“하진아, 너 미쳤어? 진심 아니지?”

나는 인천국제공항 터미널에 서 있었다.

공항의 혼잡함은 배경의 둔탁한 소음일 뿐이었다.

“완전 진심이야. 내가 네 자리를 대신할 거야.”

“안 돼! 절대로 안 돼! 나는 도망치는 걸 도와달라고 한 거지, 네가 희생하라고 한 게 아니야! 사람들은 권도혁이 괴물이래. 어릴 적 사고로 끔찍하게 흉터가 남았고, 성질도 그에 못지않다고. 저택에서 절대 나오지도 않는대. 이건 결혼이 아니라 감옥살이야!”

“이미 끝난 일이야, 채원아.”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감정이 타버린 후에 찾아오는 이상하고 텅 빈 평온함이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혹시… 우리 오빠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태준이랑 나는 끝났어.”

“뭐?”

그녀가 소리쳤고, 근처에서 짐과 씨름하던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그 자식이 너랑 헤어졌다고? 그 개자식! 내가 죽여버릴 거야! 네가 그를 위해 해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유채리 때문이야? 맹세코, 하진아, 내가 그놈 인생 망쳐놓을게.”

그녀의 맹렬한 충성심이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을 안겨주었다.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채원아. 이건 내 선택이야. 너는 민준이랑 행복할 자격이 있어. 가. 파리행 비행기 타고 뒤돌아보지 마.”

나는 이미 그녀의 비행기 표를 예매해 두었다.

비상금의 마지막 남은 돈을 썼다.

나와 태준을 위한 집 계약금으로 모아두던 돈이었다.

그 아이러니가 쓴 약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하진아… 네 인생은…”

그녀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인생은 이제 내 거야.”

나는 말했고, 처음으로 그 말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야.”

우리는 보안 검색대에서 눈물범벅이 된 채 서둘러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내가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안아주었다.

“나 너한테 모든 걸 빚졌어.”

그녀가 내 머리카락에 대고 속삭였다.

“그냥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

나는 그녀를 게이트 쪽으로 부드럽게 밀며 말했다.

“그게 내가 필요한 보답의 전부야.”

나는 그녀의 비행기가 활주로를 따라 이동하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은빛 새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자유.

적어도 그녀에게는.

나는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다른 공항 방문의 기억이 마음속에서 재생되었다.

3년 전이었다.

태준은 막 태산테크의 첫 번째 주요 자금 조달을 확보했다.

그는 이탈리아행 티켓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바로 이 터미널에 서 있었고, 그는 나에게 키스하며, 내가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온 마음으로 믿으며 행복에 겨워 울었다.

얼마나 순진한 바보였던가.

공항 다음으로 내가 처음 들른 곳은 청담동 명품거리에 있는 고급 웨딩 부티크였다.

정략결혼을 위한 태준 집안의 연락 담당자가 차갑게 전화해서 “신부”가 오늘 드레스를 맞춰야 한다고 알려왔다.

그들은 이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어떤 딸이든 상관없었다.

여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계약이 이행되는 것만이 중요했다.

연습된 플라스틱 미소를 지닌 판매원이 나를 맞이했다.

“강채원 양이시죠? 베르사유 스위트룸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저희 가장 정교한 드레스들을 미리 골라두었고요.”

나는 무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냥 가장 심플한 디자인으로 보여주세요.”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가장 심플한 거요? 하지만 이건 권도혁 씨와의 결혼식을 위한 건데…”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심플한 걸로요.”

나는 반복했다.

그녀는 나를 장식 없는 매끈한 실크 시스 드레스로 안내했다.

레이스도, 비즈도, 트레인도 없었다.

우아하지만 삭막했다.

“이걸로 할게요.”

내가 말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치수를 재고 피팅을 시작할까요?”

“필요 없어요.”

나는 태준이 “비상시”에 쓰라고 준 신용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그냥 표준 6사이즈로 포장해주세요. 수선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여자의 미소가 흔들렸다.

“하지만, 손님… 입어보지도 않으시고요?”

“이건 비즈니스 거래예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포장이 완벽할 필요는 없죠.”

나는 괴물과 결혼하는 데 무엇을 입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건 사랑이나 행복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탈출에 관한 것이었다.

권씨 가문은 강력하고, 은둔적이며, 나라 반대편에 살았다.

그들의 후계자와 결혼하는 것은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태준은 결코 그곳까지 나를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다.

태준의 집안은 동맹이 성사되는 한 어떤 딸을 보내든 상관하지 않았다.

내 부모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반대할 사람도 없었다.

이건 깔끔한 단절이었다.

아파트, 그의 아파트로 돌아와서, 나는 의식을 시작했다.

우리 사진이 담긴 모든 액자를 내렸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찍은 것, 그의 첫 회사 론칭 때 찍은 것, 작년 크리스마스 때 찍은 것.

나는 그것들을 부수지 않았다.

그저 사진을 꺼내, 각각 네 조각으로 깔끔하게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그가 준 모든 선물을 모았다.

디자이너 핸드백, 비싼 보석, 초판본 책들.

나는 그것들을 모두 기부할 큰 판지 상자에 넣었다.

내가 간직한 유일한 것은 도예 수업에서 그를 위해 만든 못생긴 세라믹 머그잔이었다.

삐뚤어진 하트와 우리 이니셜이 새겨진 것.

왜 간직했는지는 몰랐다.

아마도 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휴대폰을 훑어보았다.

내 엄지손가락은 무자비한 무기였다.

모든 사진, 모든 문자, 모든 저장된 음성 메일을 삭제했다.

모든 게시물에서 나를 태그 해제하고, 그의 번호를 차단하고, 우리 5년의 모든 디지털 흔적을 지웠다.

그것은 체계적이고 고통 없는 전멸 행위였다.

노트북을 지우려던 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서하진 씨? 클럽 발할라의 마틴입니다. 지난주 자선 갈라에 오셨었죠? 작은 스케치북을 두고 가신 것 같아서요. 저희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내 스케치북.

내 디자인, 내 아이디어… 내 모든 직업적 삶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뒤쪽에 숨겨진, 태준의 오래된 스케치 수십 장.

“지금 바로 찾으러 갈게요.”

내가 말했다.

클럽 발할라는 억만장자들이 위스키와 시가를 피우며 거래를 하는 그런 종류의 배타적인 사교 클럽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메인 홀은 이상하고 포식적인 에너지로 윙윙거리고 있었다.

군중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낮고 흥분된 중얼거림이었다.

“그가 정말로 저러고 있다는 게 믿겨져? 그녀의 ‘첫날밤’을 다시 경매에 부치다니? 야만적이야.”

샤넬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속삭였다.

“첫날밤은 아니지, 자기야. 한참 멀었지.”

그녀의 친구가 비웃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원칙이야. 그는 그녀를 말 그대로 경매대에 올리고 있어. 그녀가 그에게 기어 돌아온 후에, 이게 그의 복수 방식이야. 기발해. 그리고 역겹지.”

내 피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군중을 헤치고 나아갔다.

내 눈은 방 앞쪽의 임시 무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거기 있었다.

태준은 경매사 옆에 서 있었다.

어두운 정장을 입은 그는 잘생기고 잔인해 보였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은 방을 훑어보며 차가운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두 명의 거구의 남자가 유채리를 무대 위로 끌고 왔다.

그녀는 등이 파인 얇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화장은 완벽했으며, 표정은 두려움과 반항적인 자부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이것에 동의했다.

돈을 위해, 지위를 위해, 그의 궤도로 다시 들어갈 기회를 위해, 그녀는 그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모욕하는 것을 허락했다.

군중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얼굴은 충격과 흥분된 쾌감이 뒤섞여 있었다.

“저 사람 좀 봐.”

내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가 가난했을 때 그녀가 어떻게 그를 버렸는지에 대한 복수라고 하던데.”

“복수?”

다른 목소리가 비웃었다.

“제발. 저 남자는 아직도 집착하고 있어. 다른 누구도 그녀를 갖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 뒤틀린 구경거리라는 명목 하에 자기가 직접 ‘사는’ 거야. 그는 그녀를 소유하려는 거지.”

“그의 여자친구는 어쩌고? 그 디자이너? 하진이었나?”

“불쌍한 여자. 남자친구가 전 여친이랑 이런 역겨운 게임을 하는 동안, 자기는 분별 있고 지루한 선택지라는 게 어떤 기분일까. 그녀는 그냥 대체품이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그는 결코 유채리를 사랑했던 방식으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목소리들이 내 귀에서 둔탁한 울림으로 사라졌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보았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이것은 구애의 춤이었다.

똑같이 상처받은 두 사람 사이의 유독하고 파괴적인 의식.

그는 결코 그녀에게서 자유로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경매사가 입찰을 시작했다.

태준은 거기에 서서 지켜보았다.

자신의 부서진 여왕을 되찾는 조용하고 소유욕 강한 왕처럼.

회차 3

경매사의 목소리, 군중의 흥분된 속삭임,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소음으로 합쳐졌다.

내 마음은 순수하고 잔인한 구경거리에 의해 깨끗이 지워진 백지 상태였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내 심장이 마침내 포기하고 멎어버린 것 같았다.

생각 없이,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태준은 물론 “경매”에서 이겼다.

그는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단 한 번의,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입찰가를 제시했다.

그는 의기양양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필연적으로 보였다.

그는 유채리의 팔을 소유욕 강하게 잡고, 구경하는 군중을 떠나 웅장한 계단을 올라 개인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나는 유령처럼 그들 뒤를 따랐다.

복도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푹신한 카펫이 내 발소리를 삼켰고, 마침내 나는 부분적으로 열린 문 바로 밖에 서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태준아?”

유채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두려움 아래에는 흥분의 기류가 흘렀다.

“나한테 벌주려는 거야?”

“벌주다니?”

태준의 웃음은 낮고 유머가 없었다.

“아니, 채리야. 이건 벌이 아니야.”

“그럼 뭔데? 아직도 날 사랑해? 아직도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마침내 그가 말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애무 같았다.

“난 널 증오해.”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아직도 널 원해. 넌 다시 내게 기어들어왔지, 네 게임을 다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규칙이 바뀌었어. 이제 내가 널 소유해.”

“언제나 날 쫓아다닌 건 너였어.”

그녀가 도전적인 어조로 속삭였다.

“그리고 널 잡게 해준 건 너였지.”

그가 반박했다.

그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고, 목소리는 날것 그대로의, 은밀한 으르렁거림으로 낮아졌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네가 나에게 잔인해지는 법을 가르쳤지.”

그의 말은 독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절박한 해독제였다.

나는 마비된 채 지켜보았다.

그가 그녀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엉켜 머리를 뒤로 젖혔고, 그의 입이 그녀의 입술에 부딪혔다.

그것은 사랑의 키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유, 분노, 굶주림, 그리고 너무나 유독해서 그들 둘 다를 영구적으로 뒤틀어버린 역사의 행위였다.

그 광경은 음란했다.

소리는 더 끔찍했다.

옷이 스치는 소리, 날카롭게 들이쉬는 숨소리, 부드러운 신음.

그는 그녀 드레스의 등을 찢었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는 조용한 방에서 폭력적인 소음이었다.

그러다 그 모든 것의 절정에서, 단 한 번의, 목이 메인 흐느낌이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채리는 그의 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 울고 있어.”

그녀가 이상하고 승리에 찬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닥쳐.”

그가 두껍고 부서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는 내 몸을 느낄 수 없었다.

내 손은 벽에 눌려 있었지만, 차가운 석고를 느낄 수 없었다.

내 손톱은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따끔거림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가 끝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몸은 쾌락보다는 고통에 가까워 보이는 해방감으로 떨렸다.

그는 그녀와 몇 시간을 보냈다.

나는 슬픔의 조각상처럼 서서, 그가 마치 그녀를 그의 영혼에서 몰아내려는 듯이 그녀를 더 깊이 박아 넣으며 몇 번이고 그녀를 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의 손길은 이제 부드러웠고, 표정은 너무나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내 자신의 심적 고통이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그녀의 잠든 얼굴을, 한 번도 나에게 보여준 적 없는 사랑과 숭배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내가 마침내 무너진 순간이었다.

나는 돌아서서 기계적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클럽의 텅 빈 복도를 지나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나섰다.

세상이 축이 기울어진 것 같았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신경 쓰지도 않으며 걷기 시작했다.

타이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내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눈부신 빛의 섬광, 끔찍한 금속과 뼈의 으스러지는 소리, 그리고… 어둠.

나는 소독약 냄새와 기계의 규칙적인 삐 소리에 잠에서 깼다.

간호사가 내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직업적인 걱정으로 흐릿했다.

“정말 운이 좋으셨어요, 서하진 씨.”

그녀가 말했다.

“팔 골절과 심한 뇌진탕이지만, 훨씬 더 심각할 수도 있었어요. 뼈를 맞추기 위해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녀는 나에게 클립보드를 건넸다.

“동의서에 서명하셔야 해요. 비상 연락처로 전화해봤는데…”

내 비상 연락처.

태준.

물론이지.

떨리는 손으로, 나는 내 소지품이 담긴 비닐봉지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시야가 흐릿했다.

즐겨찾기 목록 맨 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은 마지막 절박한 습관이었다.

두 번 울리고 나서 한 여자가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졸리고 거만했다.

“여보세요?”

유채리였다.

목이 메어왔다.

“누구세요?”

유채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요구했다.

“태준 씨는 샤워 중인데요. 아, 혹시 하진 씨?”

그녀가 잔인한 즐거움이 섞인 어조로 속삭였다.

“그가 지금 좀… 바쁘셔서요. 어젯밤에 정말 저를 지치게 했거든요.”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태준 씨, 자기야!”

그녀가 달콤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불렀다.

“당신 그 꼬마 여자친구가 전화했어. 통화할 거야?”

샤워 소리가 멎는 것이 들렸다.

태준의 목소리가 멀고 차갑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하진아? 나 바빠.”

“나… 병원이야.”

나는 간신히 속삭였다.

단어들이 목을 긁었다.

“사고 났어. 수술해야 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심장이 멎을 듯한 순간, 나는 희망을 품었다.

“기다릴 수 있는 거야?”

그가 물었다.

“채리가 몸이 안 좋아. 내가 돌봐줘야 해.”

내 옆의 심장 모니터의 삐 소리가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선택하고 있었다.

지금조차도.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그는 그녀를 선택하고 있었다.

“이제 걔는 내 소유야, 알지.”

그가 아까 들었던 그 소유욕 강한 으르렁거림으로 목소리를 바꾸며 계속했다.

“내 투자가 보호받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나는 배경에서 유채리의 부드러운 킥킥거림과 키스 소리를 들었다.

전화가 끊겼다.

그가 내 전화를 끊었다.

간호사가 동정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전화할 다른 분은 없으세요? 가족이라든가?”

“없어요.”

나는 마지막 항복의 단어를 속삭였다.

“아무도 없어요.”

나는 그녀에게서 펜을 받았다.

내 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서 서명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낙서가 되었다.

손에 난 상처에서 핏방울이 종이 위로 튀었다.

내 옛 삶을 서명으로 날려버린 문서에 찍힌 진홍색 봉인처럼.

그리고 다시, 어둠이 나를 완전히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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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탈출이자 계약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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