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아흣, 석준 오빠..."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야릿한 신음소리에 문을 두드리려던 이세인은 그만 자리에 얼어붙었다.
등골을 따라 오한이 들면서, 찬물을 뒤집어쓴 듯, 손끝에서부터 몸 속 깊숙이까지 서늘한 한기가 파고들었다.
그녀와 장석준은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첫날밤은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잠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세인은 답답하게 미여 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부인하려 했다. 아니야, 석준 씨가 날 배신할 리 없어.
결혼식 날, 장석준은 자신이 발기부전을 비롯한 지병을 앓고 있다며 잠자리를 할 수 없는 몸이라고 고백했었다. 그러니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그 사람일 리 없다.
이세인은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막으며 헛된 거짓말로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런 그녀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곧이어 들려오는 남자의 신음소리가 그녀의 부질없는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너무나 익숙한 것이,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확실했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차가운 벽에 간신히 등을 기대어 숨을 몰아 쉬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왔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 손으로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았다.
3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장석준은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이세인은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씨 가문을 찾아가, 2년 가까이 장석준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단지 장석준이 그녀를 사고에서 구해준 적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사실상 장석준은 그녀의 뛰어난 의술 덕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과 마찬가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장석준은 제일 먼저 그녀의 손을 꼭 맞잡고 결혼을 약속하며 평생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겠다고 했었다.
이세인은 지금까지도 장석준의 결의에 가득 찬 눈빛과 울먹거리며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돌아온 건 배신이란 말인가?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에 이세인은 가슴을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녀가 그를 위해 희생한 모든 것이 보잘 것 없는 먼지처럼 느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가까스로 힘을 주며 지옥 같은 이곳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석준 오빠, 오늘은 오빠와 세인 씨 결혼기념일이잖아요." 가식적인 목소리가 살랑거리며 들려왔다. "아마 지금쯤 오빠도 없는 집에서 오빠가 돌아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결혼기념일에 집에 가지 않고 나랑 시간 보내도 돼요? 혹시라도 세인 씨가 알게 되면..."
"보미야,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이세인은 그저 날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고용인이라고 할까? 그동안 같이 자지도 않았어."
장석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더 이상 밖에서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이세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문을 힘껏 밀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장석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날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이세인에 장석준은 하던 것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그는 서둘러 이불을 들춰 자신과 옆에 누운 여자의 알몸을 가리며 한껏 불쾌한 얼굴로 이세인을 노려보았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집에서 얌전하게 기다리라고 했잖아."
장석준이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 몰랐던 이세인은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
하, 고작 이런 사람이었나? 이제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걸까?
야속한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세인은 입가에 쓴웃음을 띠며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오늘 들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어?"
장석준은 짜증난 얼굴로 침묵을 지키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곁에 있던 여자가 어색한 침묵을 깨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준 오빠는 아무 잘못 없어요.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탓하려거든, 차라리 날 탓하세요."
시선을 옆으로 돌린 이세인은 익숙한 얼굴에 헛웃음이 났다.
장석준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고 자란 윤보미였다.
이세인이 처음 장씨 가문에 방문했을 때, 장석준의 서재 책상 위에는 윤보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 그 사진은 사라졌고, 이세인은 장석준이 그녀를 완전히 잊었다고 확신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랑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세인은 윤보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장석준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나한테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지 그랬어. 굳이 우리 결혼기념일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장석준의 조롱 섞인 비웃음이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흠, 그래?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두는 게 좋겠어. 나 너랑 이혼할 거야. 장씨 가문 사모님은 처음부터 네가 아니라 보미였어야 했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차가운 시선에 이세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래, 이혼하면 되겠네. 대신 조건이 있어. 재산 절반은 반드시 위자료로 줘야 할 거야. 한 푼이라도 모자라면 그땐 상간소송을 할 거야."
장석준과 윤보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믿는 구석도 없는 고아 주제, 무슨 자격으로 장씨 가문의 재산을 절반이나 원하는 걸까?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입가에 조롱 섞인 웃음이 번진 윤보미가 가식적인 목소리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척했다. "세인 씨, 욕심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그동안 석준 오빠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하며 부족한 것 없이 지냈잖아요? 장씨 가문에서 여태껏 사모님 대접을 받았으면 감사히 생각하고 서로 보기 좋게 헤어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장씨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을 거예요?"
이세인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경멸이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을 흘겨봤다. "내연녀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설교하는 거지? 분명히 말하는 데, 난 지금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야. 오늘 일이 소문이라도 퍼지면, 창피를 당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희 둘이란 걸 명심해."
그녀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뒤돌아서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밤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이세인은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빠르게 연결되었고, 전화기 너머에서 흥분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인 누나? 정말 세인 누나예요? 드디어 내 생각이 난 거예요?"
"그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 했다. "나 지금 장석준 개인 별장 앞에 있어. 주소 보내줄 테니까 데리러 와."
"네.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통화를 마치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고급 세단 여러 대가 빠른 속도로 진입하더니 이세인 앞에 연달아 멈춰 섰다.
세단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자 이세인의 얇은 입술을 비집고 자조적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결국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위해 스스로를 암흑 속에 가두고 미련하게 부속품처럼 지내왔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삶이 따로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현실에 눈을 떴으니, 늦지 않았다.
"누나." 하윤슬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빠르게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누나 울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이세인의 앞에 멈춰 선 하윤슬은 그녀의 얼굴에 남은 선명한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약한 소리 한번 하지 않던 세인 누나가, 울고 있다고?
손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낸 이세인이 애써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나 이혼하려고."
"네? 이혼이요?" 충격 받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뜬 하윤슬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을 정리한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잘 생각했어요. 드디어 내가 알던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네요. 지옥 같은 장씨 가문에서 벗어난 걸 축하해요."
회차 2
30분 후,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근교 빌라.
하윤슬이 라면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장석준 그 개 자식이! 누나가 모든 걸 포기하고 장씨 가문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자식이 멀쩡한 몸으로 다른 여자랑 바람 피는 일은 상상도 못했을 텐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 누나를 배신했단 말이에요? 망할 새끼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이세인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 차갑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 사람에 관한 말이라면 더는 듣고 싶지 않아."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누그러진 하윤슬의 분노가 걱정으로 바뀌었다. "알겠어요. 이제 그 자식에 대해 말 안 할게요." 바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가 자취를 감춘 지난 3년 동안, 사람들이 누나의 행방을 찾느라 얼마나 혈안이 되었는지 몰라요. 장석준과 이혼하면 다시 일을 시작할 거예요?"
의자에 등을 기댄 이세인이 고민에 잠긴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신의 백소담이 돌아왔다는 소식, 이제 전할 때가 된 것 같아."
하윤슬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 찬 채 입가에 번진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간절히 바라왔던 소망이 현실이 되자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잘됐어요. 최근 들은 것 중에 가장 기쁜 소식이에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그는 눈가가 뜨거워지며,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다 장씨 그룹에서 거금을 들여 신의 백소담을 찾는다는 소식을 떠올린 그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였다.
결혼한 지 3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내가 신의 백소담이라는 사실마저 알아차리지 못한 장석준은 그야말로 어리석고 멍청하기 그지없다.
...
다음 날 아침.
포근한 침대에서 곤히 잠든 이세인은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탁자 위에 놓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자 장석준의 어머니 김현월의 욕설이 들려왔다. "너 지금 어디야? 감히 말도 없이 외박을 해? 당장 집에 기어들어 오지 못해?"
예전의 이세인이었다면 김현월의 욕설을 듣자마자 바로 비굴하게 사과부터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이세인이 아니다.
달콤한 잠을 방해 받은 이세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장석준 씨랑 이혼하기로 했어요. 그러니 제가 장씨 가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일은 없을 거예요."
"뭐? 이혼하기로 했다고?"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은 김현월은 마치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조롱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혼이 그렇게 쉬워? 이세인, 네가 어떻게 우리 가문에 들어왔는지 벌써 잊었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말대꾸를 해? 30분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네 물건들 다 내다 버릴 거야!"
김현월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긴 통화를 가만히 내려다본 이세인은 짜증 섞인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의 방에 아직 중요한 물건이 남아있기에 그것들을 챙겨 나온 후, 장씨 가문 사람들과 완전히 연을 끊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장씨 고택 앞에서 내린 이세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새된 목소리가 잔뜩 비아냥거리며 그녀를 반겼다. "그래도 집은 잘 찾아왔네. 허락도 없이 외박한 주제,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설마 외간남자랑 침대에서 뒹굴다 온 건 아니겠지?"
이세인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자 김현월과 그녀의 딸 장다은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이세인의 안색이 확연히 굳어지더니 차갑게 조소했다. "침대에서 뒹군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장석준이 윤보미와 바람을 피웠어요. 그것도 결혼기념일에, 제가 직접 현장까지 덮쳤고요. 이 사실이 밖에 퍼지면, 장씨 가문의 명예도 하루아침에 추락하겠죠.
"뭐? 윤보미가 돌아왔어?" 찰나의 순간 김현월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차갑게 비웃음을 흘렸다. "굳이 탓을 하자면 네 탓 아니겠니? 쓸모 없는 것.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임신을 하지 못하니 우리 석준이 어떻게 바람을 피우지 않을 수 있겠어? 우리 장씨 가문의 대가 이대로 끊기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잖아?"
곁에 앉은 장다은도 뒤질세라 고개를 끄덕이며 참견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석준이 사고를 당하지 않고 할머니 유언만 없었다면, 네까짓 게 감히 우리 장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기회가 있었을 것 같아? 집안 배경이든, 재능이든 네가 윤보미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잖아. 게다가 아이도 낳지 못하니, 우리 석준이 어떻게 바람을 피우지 않을 수 있겠어?"
이세인은 김현월과 장다은의 파렴치한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을 꾹 참았다.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가방에서 장석준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건강검진 보고서를 꺼내더니 장다은의 무릎에 던졌다. "장석준은 결혼 3년 동안 저와 잠자리를 한 적 없어요. 저 혼자서 무슨 힘으로 아이를 낳아요?"
장다은이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화를 내기도 전에, 검사 결과에 선명하게 적힌 '발기부전'을 발견하고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보고서를 움켜쥔 그녀의 손이 작게 떨려왔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김현월도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날카롭게 반박했다.
"하지만 우리 석준이 윤보미와 바람이 났다면 지금 아무 문제도 없다는 말이잖아?" 결국 네가 무능해 석준이 마음을 완전히 잡지 못한 거네!"
"그래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린 이세인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장석준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장씨 가문 사람들은 대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윤보미는 해외로 도망쳤죠? 그때 장석준을 도와준 사람이 누군지 벌써 잊었어요?"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김현월이 멈칫하더니 이세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우리 장씨 가문에 발을 들이기 위해 일부러 석준이를 돌봐준 걸 내가 정말 모를 것 같아? 결국 너도 우리 가문의 돈이 탐났던 거잖아. 너도 윤보미 그년과 똑같아!"
어린 시절부터 윤보미와 가깝게 지낸 장다은은 김현월이 윤보미를 욕하자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 났다.
그녀가 재빨리 김현월의 팔에 팔짱을 끼며 반박했다. "엄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보미는 석준이를 위해 유명한 의사를 찾으려고 해외에 나갔지,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어요. 돈에 눈이 먼 이세인과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에요."
곧바로 세모 눈으로 이세인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네가 일부러 석준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 석준이 너와 결혼할 일도 없었고, 보미가 상처받고 계속 외국에서 지내지 않았을 거야. 보미가 돌아왔으니 이제 네가 빠져줘야지. 결국 네가 보미와 석준이 사이에 끼어든 거야. 네가 두 사람의 사이를 방해했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이세인이 조용히 고개를 내젓더니 가방에서 이혼 서류를 꺼내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서류에 적힌 글씨 보여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경멸이 가득 묻어났다. "저 장석준과 이혼할 거예요. 장석준이 서류에 사인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어요. 저만 빠져주면 된다고 했죠?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게 내가 허락한 거예요."
의미 없는 말다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이세인이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벙찐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말이다.
회차 3
이세인이 필요한 짐을 챙기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김현월과 장다은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굳은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말 석준이와 이혼할 생각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장다은의 목소리에 의심이 가득 묻어났다. 다시 이혼 서류에 적힌 조항들을 자세히 확인하던 그녀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더니 버럭 소리질렀다. "하, 이세인.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이번에도 돈이 목적이잖아. 엄마, 이것 좀 보세요. 위자료로 우리 가문 재산 절반을 요구한대요!"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며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장석준이 돌아왔다.
동시에 김현월과 장다은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빠르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다.
"석준아, 방금 세인이가 다녀갔는데 글쎄." 김현월이 먼저 격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장씨 가문을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 이혼을 핑계로 우리 가문 재산을 반이나 달라는 거야!"
장다은이 뒤질세라 목을 빼 들고 소리쳤다. "게다가 태도는 어찌나 기고만장한지. 이혼 서류를 엄마와 내 얼굴에 던지고 집을 나갔어. 내가 보기엔 우리가 먼저 선수 쳐야 할 것 같아. 이세인은 우리 장씨 가문에서 버림받은 여자라는 소문이 나면, 어느 가문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거야. 때가 되면 제 발로 다시 기어들어 올 수밖에 없겠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은 장석준의 눈살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런 소문이 나면 안 돼요."
현재 장씨 그룹은 큰 전환점을 맞이해, 세계 100대 기업 중 하나로 인정받는 중이다. 현재 장씨 가문의 수장이자 군사, 및 금융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장만승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장씨 그룹은 더욱 높은 위치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 그에 관한 부정적인 소문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가면 치명적인 오점으로 책잡힐 수 있다.
장석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찌푸려진 얼굴로 전화를 받더니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신의 백소담이 돌아왔다고?" 두 눈을 반짝인 그가 재촉하며 말했다. "계속 추적해.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백소담의 도움을 받아야 돼."
......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 물든 저녁, 브렌든 술집.
"세인 누나의 귀환을 축하합니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잔을 높게 치켜든 하윤슬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가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 그의 곁에 둘러앉은 수하들도 잇달아 잔을 들고 높은 소리로 환호했다.
"세인 누님, 축하합니다!"
"역시, 우리 세인 누나야. 신의 백소담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리자마자, 사람들이 득달같이 모여들었어요."
"그러니까요. 장씨 그룹에서 계약금으로 20억을 제안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장석준이 세인 누님이 바로 신의란 걸 알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하겠죠?"
장석준의 이름을 들은 이세인의 안색이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바로 알아차린 하윤슬이 서둘러 대화 주제를 돌렸다. "20억? 그깟 푼돈으로 뭘 할 수 있겠어? 잘 들어. 100억을 제안한 사람도 있어.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신의 백소담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 추가로 500억을 더 주겠다고 제안했어!"
이세인은 잔을 들어 술을 홀짝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에 600억을 제안한 사람이라면, 어마 무시한 권력을 손에 쥔 것과 동시에 쉽게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을 것이다.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이세인은 너무 복잡한 일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미동도 없자 하윤슬도 더 강요하지 않고 수하들과 가벼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세인은 멍한 얼굴로 잔에 담긴 술만 홀짝일 뿐이었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외향인 남자들이 가득 모이자,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로 쏠렸다.
낯선 사람들의 주목에 신경이 잔뜩 곤두선 이세인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하윤슬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스테이지를 가리켰다. "춤추러 가자."
대답도 듣지 않고 스테이지로 향한 이세인이 가볍게 허리를 흔들며 음악에 몸을 맡겼다. 지난 3년 동안, 장씨 가문에서 숨 막히는 생활을 해온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유를 만끽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에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음악과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서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도 어느새 그녀의 춤사위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그녀의 몸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 몸에 꼭 맞는 미니 드레스는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더욱이 골반과 가슴을 요염하게 흔드는 모습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설마, 이세인?"
막 술집 입구에 들어선 장석준이 스테이지에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춤을 추고 있는 이세인을 발견하고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윤보미가 귀국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장다은을 비롯한 친구 몇 명과 함께 술집을 방문한 그는 이곳에서 이세인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평소에 펑퍼짐한 옷차림에 늘 머리를 하나로 묶고 다니던 이세인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이야?
장석준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따라 들어온 윤보미도 이세인을 발견하고 적지 않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먼저 이세인을 발견한 장석준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윤보미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