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고급 실크 커튼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작고 가느다란 손이 커튼을 향해 뻗어왔지만, 뒤이어 쫓아오는 커다란 손이 작은 손을 움켜잡고 창문에 고정했다.
이미 네 번째였다...
남자는 일주일 출장을 다녀오는 동안 참았던 욕정을 모두 쏘아 붓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세희가 떨려오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남자를 돌아보며 애원하자 마침내 남자는 한탄을 크게 한 번 하며 동작을 멈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기는 여전히 끈적하고 후끈거렸다. 그녀의 등 뒤에서 전해지는 남자의 규칙적인 심장 소리와 더불어 그녀의 귓불과 목덜미를 따라 내려가는 남자의 숨결에 여자는 정신이 아찔해 날 정도였으니.
"못 참겠어?" 남자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여자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야릿한 통증에 몸을 돌린 한세희가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이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비쳐졌고 그의 두 눈에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남자는 이성을 잃은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었고, 공허함이 완전히 채워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세희는 이 순간의 감정에 영원히 속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한, 남자의 마음은 얼음보다도 차가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저 내일 선보러 가요."
"음."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의 차가운 입술이 다시 한세희의 뜨거운 입술을 향해 돌진했고 허리를 만지작 거리던 손이 천천히 미끄러져 그녀의 엉덩이에 머물렀다. 남자는 또다시 욕망을 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한세희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의 손길에 한세희의 몸이 작게 떨리더니 교태를 부리듯이 허리를 높게 들어 아치형을 이루었다.
입술을 꼭 깨문 한세희의 입에서 뜨거운 열기가 터져 나왔다.
"제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오면 바로 동의하려고요."
마침내 남자가 얼어붙은 듯 손을 움직이지 않았고 어두운 눈동자가 자신의 품에 갇힌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눈동자에 한세희는 당장이라고 말려들어 갈 것 같았다. "결혼할 생각이란 말이야?"
"저 이제 27이에요."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그녀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한세희는 남자의 입가에 번진 냉소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뜨거웠던 온기가 한순간에 사라지더니 환한 불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한세희는 황급히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원피스로 가슴을 가렸다.
남자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검은색 정장 바지는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잘 다려져 있었고, 검은색 셔츠는 단추 3개가 풀려져 있어 남자의 섹시하고도 매혹적인 매력을 극대화했다.
남자의 손끝에 위험하게 매달려 있는 담배를 무심코 쳐다본 한세희는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약혼반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반지는 오늘따라 더욱 눈이 부셨고, 오늘의 한세희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3년 전, 한세희는 남자의 비서 신분으로 강씨 그룹에 입사했다. 얼마 후, 상사인 강지한과 함께 출장을 떠나야 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강지한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한세희는 남자의 강압적인 태도에도 저항하지 않았고 뜨거운 밤을 보낸 후, 강지한은 한세희의 턱을 잡고 차갑게 한 마디 내던졌다. "마음에 들어." 그렇게 두 사람은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졌고 한세희는 낮에는 강지한의 비서였고, 밤에는 그의 배드 파트너였다.
만약 그날 밤, 한세희가 어리석은 선택만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여전히 순진 낭만하고 자신만의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소녀였을 것이다.
얼마 있지 않으면 강지한은 결혼을 하게 될 것이고, 그녀는 이 관계를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에 끼어드는 제3자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정부는 더더욱 싫었다.
더 이상 이어갈 관계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니, 그녀 손으로 직접 이 관계를 끊어 내야만 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처럼 비참하게 버려지는 것보다 그녀가 먼저 떠나는 것이 더 나은 건 사실이니.
시선을 거두어들인 한세희는 가방을 챙기고 미리 준비한 여벌 옷으로 갈아입었다. 강지한과 만날 때마다 한세희는 여분의 옷을 준비하곤 했다.
강지한과 함께 밤을 보낼 특권은커녕, 그의 곁에 설 자격도 없었으니.
가방에 손을 뻗은 한세희가 여분의 옷을 꺼내기도 전에 강지한은 그녀의 손목을 세게 움켜잡았다. 한세희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한 번만 더 해." 그가 입 밖으로 꺼낸 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모든 구속을 제거하고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고 끝까지 몰아붙였다. 허리 움직임을 멈춘 그가 그녀의 턱을 잡고 억지로 눈을 마주쳤다. "내일 맞선 취소해."
아무 힘도 남지 않은 한세희가 강지한의 손을 꽉 붙잡고 지난 3년 동안 한 말 중 가장 용기 있는 말을 내뱉었다.
"결혼... 취소할건가요?"
강지한만 허락한다면, 한세희는 평생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단, 정부의 자리는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강지한의 얼굴이 아주 잠깐 얼어붙은 것 같더니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어찌나 쌀쌀맞았던지, 두 눈 가득 새어 나오는 한기에 당장이라도 오한이 들 정도였다.
"선 넘었어." 곧이어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모든 희망이 와장창 부서졌다.
물론, 강지한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또다시 그의 눈길을 피한 그녀가 강지한을 따라 웃었지만, 그 웃음소리마저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표님, 저는 내일 연차 사용할 예정이니 제가 신청한 연차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법적으로 정한 연차를 사용하는 거니까 거절할 이유도 없겠죠?"
턱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실리자 한세희는 몸을 움찔하고 반항적인 표정을 하며 강지한을 쳐다봤다. 그녀는 강지한의 지시에 따를 생각이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거칠게 일그러진 그의 이목구비가 화났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강지한은 그대로 꾹 억눌렀다.
남자의 주위에는 그의 말 한마디에 순응하고 파트너로 지낼 여자들이 넘치고도 남았다. 그러니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필요 없을 것이다.
"약 챙겨 먹고, 깨끗하게 정리해." 말을 마친 강지한이 한세희의 턱을 놓아주고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강지한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방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에는 3년 전, 자신이 한세희에게 건넨 은행 카드가 놓여 있었다. 이 카드는 강지한이 자신의 파트너로 지내는 한세희에게 지원한 카드였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한세희는 카드에 있는 돈 한 푼도 다치지 않았다.
회차 2
방금 전까지 그의 품에 안겨 야한 신음 소리를 내던 한세희의 모습을 떠올린 강지한은 이유 모를 짜증과 답답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9시, 카페.
이번 맞선이 첫 맞선은 아니었지만, 한세희가 이토록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36살의 나이에 평범한 생김새에 이제 막 귀국하여 지금은 모 전자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직업상 그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두 사람이 만나서부터 지금까지 한세희가 대화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세희는 그녀의 어머니인 유미원의 요구대로 예단과 예물을 비롯해, 신혼 집과 자동차를 요구했고 남자는 그녀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켜 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한 한세희는 마음이 공허해지며 심장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설 때, 유미원이 자상하고도 상냥한 모습으로 그녀를 배웅해 주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제 초등학교 5학년 남동생의 등교 준비를 도와주면서 한세희에게 맞선에서 주의해야 할 말과 반드시 제기해야 할 요구를 상기시켜 주며 결혼의 좋은 점에 대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한세희에게 예단 예물을 더 많이 요구하도록 지시했고,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과 앞으로 자신의 노후자금까지 요구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생각에 한세희의 입 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어머니 유미원은 6번의 결혼을 모두 실패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2년 전, 유미원은 갑자기 10살 남짓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나타나 그녀의 할머니가 유일하게 남겨둔 낡은 집 앞에서 통곡하며 10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딸에게 남자아이를 키우라고 강요했다.
한세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유미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녀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아도 될까?
하지만 현실은 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그녀의 발칙한 상상까지 박탈했다. 흙 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녀가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강지한의 곁에 서겠다는 욕심도 함께 말이다.
이때, 한세희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이정태의 움직임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정태는 그녀의 뒤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허리까지 숙여가며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강 대표님. 우연히 만나니 더 반가운 것 같습니다."
그녀의 바로 뒤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향수 냄새가 그녀를 덮쳤고, 한세희는 긴장한 듯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고개를 들자 블랙홀이라도 숨겨 놓은 것 같은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긴장감에 당장이라도 심장이 입 밖에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강지한이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있는 걸까?
카페에서 판매하는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아 강지한이 마시는 모든 커피는 다 한세희가 직접 만든 것이다.
"네, 안녕하세요." 한세희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인 강지한은 이정태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카운터로 향했다.
강지한은 이정태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이정태는 강지한이 자기 인사를 받아줬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곧바로 이정태는 강지한이 해외에서 유학 기간 동안 출간했던 논문에 대해 극찬했다. 이정태가 강지한에 대한 존경심은 하늘로 치솟을 것 같았고, 들으면 들을수록 한세희는 수치심이 들었다. 강지한이 이정태가 하는 말을 듣지 않길 바라며 카운터 방향을 돌아보자 다행히도 강지한은 통화 중이었다.
"그래." 강지한은 평소답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너만 좋으면 돼. 이따 봐."
통화를 마친 그는 코코넛 밀크를 포장하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코코넛 밀크를 마시는 사람들은 주로 여자 고객으로 강지한은 약혼자를 위해 직접 카페까지 온 것이다.
가슴이 아려오는 느낌에 한세희는 더 이상 이정태가 하는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맞선이 끝날 무렵, 한세희는 다음을 기약하는 이정태의 말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번 더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중, 이정태가 갑자기 전화를 받더니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지금 당장 돌아가 봐야 한다고 했다. 이정태는 한세희에게 연신 사과를 건네고 다음에 만날 약속까지 미리 잡은 후 카페를 나섰다.
잠시 후, 카페를 나선 한세희도 택시에 올라타고 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아침을 먹지 않은 원인일까, 아니면 빈속에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한세희는 차에 오르자마자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했고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기사님, 차 좀 세워주세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헛구역질이 먼저 나오자 차에 마련되어 있는 쓰레기봉투를 집어 머리를 숙였다.
길가에 차를 세운 택시 기사님은 자두 한 봉지를 건네며 말했다. "금방 임신하면 다들 그래요. 우리 아내도 아가씨랑 증상이 똑같았어요. 신맛이 강하게 나는 과일을 먹으면 조금 괜찮아질 수도 있어요. 첫 4개월 동안은 이렇게 힘들 거예요. 그 시기만 지나면 잠도 잘 자고 밥도 예전처럼 먹을 수 있을 거예요."
택시 기사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생리 주기를 계산하던 한세희는 깜짝 놀랐다. 생리 예정일이 이미 일주일이나 지난 상황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약을 빠짐없이 잘 챙겨 먹었는데...
갑자기 썰물처럼 밀려오는 기억에 그녀는 다시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정확히 3주일 전, 클라이언트와 미팅이 있던 강지한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 안에서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그녀와 두 차례 관계를 가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약국에 들러 피임약을 사려 했으나 유미원이 도박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너무 화가 치밀었던 나머지 피임약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기억났을 땐, 이미 약을 복용해야 하는 기한이 훌쩍 지나버린 후였다.
한세희는 가만히 손을 올려 복부를 쓰다듬었다.
맞선을 보자마자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회차 3
시내 한 병원, 접수증을 손에 쥔 한세희가 산부인과 복도에서 줄을 서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병원 로비에서 그녀는 형체만 보고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역삼각형 몸매에 어울리는 맞춤 정장은 남자와 완벽하게 매치되었다.
강지한은 조금 전 카페에서 포장한 코코넛 밀크를 곁에 선 여자에게 건넸다.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병원 창문에 반사되는 햇살을 맞아 유난히 눈부시게 빛났다.
가슴이 아려오는 느낌을 애써 누른 한세희는 시선을 피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강지한의 곁에 당당하게 선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똑바로 떴다.
바로 이때, 강지한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그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마주친 두 눈 사이로 강지한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한세희는 애써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다시 밀려오는 헛구역질에 그녀는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고 속을 모두 비워내고 나서야 숨을 고르게 쉴 수 있었다.
화장실로 달려올 때, 한세희는 강지한과 그의 약혼녀 뒤에 놓인 표지판에 적힌 글씨를 똑똑히 보았다. 두 사람이 나온 곳은 바로 산전 검사를 받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아마 결혼 전부터 계획할 아이를 위해 검사를 받으러 온 것이겠지.
강지한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병원에 방문했다는 사실과 카페에 들러 직접 코코넛 밀크를 포장한 것까지 생각하자 한세희는 또다시 마음이 쓸쓸해 나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강지한은 모든 애정과 시간을 쏟아부을 것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녀를 대했던 방식과는 너무 비교가 되었다. 한세희와 강지한이 배드 파트너로 지냈던 지난 3년 동안, 강지한은 그녀가 무슨 음식을 즐겨 먹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는지도 의심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다. 한세희는 거울 속에 비친 초췌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심호흡을 하더니 티슈로 입 주위를 닦고 나서야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강지한이 세면대 옆에 기대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미간을 깊게 찌푸린 그의 손가락 사이에 불을 붙인 담배가 있었다. 강지한은 이 곳의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마, 그의 약혼녀도 화장실에 있는 걸까?
한세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연기했다.
하지만 병원 화장실의 세면대는 한 줄로 놓여 있었고 손을 씻으려면 반드시 강지한의 곁을 지나가야만 했다.
손을 씻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강지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신했어?"
짧은 그의 물음 한 마디에 한세희는 가슴이 선뜩하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던 강지한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답해!"
강지한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고, 거리가 좁아질수록 한세희는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움켜쥘 것 같은 기세와 화난 눈빛.
만약 그녀가 임신한 것이 사실이라면, 강지한은 바로 그녀를 수술실로 끌고 가 낙태하는 장면까지 지켜볼 것이다.
강지한은 정부인 그녀가 자기 아이를 임신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가족끼리 약속한 결혼을 위태롭게 만드는 요소는 반드시 제거할 것이다.
그가 약혼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지한이 한 번 결정한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한세희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강지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배탈 때문에 약 받으러 왔어요."
"그래? 하지만 소화 내과는 여기 없는데?" 강지한은 그녀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했다.
한세희의 얼굴에는 쓸쓸한 미소만 번질 뿐이었다.
강지한은 그녀의 임신이 대체 얼마나 싫은 걸까?
"이곳 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적으니까요. 제가 하는 말을 믿고 싶지 않는 거라면, 대표님께서 저와 함께 산부인과 진찰을 받으면 되겠네요."
한세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강지한은 절대 약혼녀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한세희의 예상대로 강지한은 실소를 터뜨리더니 담배를 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훑을 때 뜨거운 담배가 그녀의 얼굴 바로 앞으로 다가왔고, 자리에 얼어붙은 그녀는 얼굴에 흉이 질까 두려웠다.
"만약 지금 내 앞에서 한 말이 거짓말이라면, 그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착하게 굴어야지. 내일 출근해."
그리고는 거칠게 한세희의 턱을 놓아 주었다.
강지한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 희미한 향수 냄새가 한세희의 코를 찔렀다. 낯선 향수 냄새에 한세희는 아려오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세희는 강지한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강지한은 여자 향수 냄새를 제일 싫어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세희는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결국 불가능한 건 없었다. 단지 그 규칙을 어길 수 있는 사람들만 가능한 것일 뿐.
멀어지는 강지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한세희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 퇴사하겠습니다."
몇 발짝 떼지 못한 남자가 다시 자리에 멈춰 서더니 그녀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퇴사하겠습니다." 한세희는 이번엔 좀 더 차분하고 확고한 태도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강지한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고 입술에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현모양처가 될 생각이야?"
한세희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현모양처도 나쁘지 않네요. 맞선 상대가 오늘 저와 결혼까지 약속했어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어?" 강지한의 목소리는 압박적이었고 한세희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이나마 자신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에 강지한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라고 믿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한가득 묻어났다. "그 남자가 널 만족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말 한마디에 한세희의 얼굴은 화끈 거리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서의 강지한은 평소의 강지한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침대 위의 강지한은 한세희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말을 주저 없이 내뱉었으며 귀를 깨물고 허리를 꼬집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가 울먹이며 애원하는 목소리를 제일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을 대놓고 밝히다니, 한세희는 더욱 굴욕감이 느껴졌다.
"그 남자, 나도 잘 아는 사람이야. 너랑은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
한세희는 강지한이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의 말투는 회사에서 업무를 맡길 때와 다름없이 담담하고도 평온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저 묵묵히 그의 지시를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세희는 그녀의 자존심도 묵살하는 남자의 발에 짓밟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하는 자신이 싫었다.
용기를 낸 한세희는 그의 말투를 흉내 내며 비아냥거렸다. 심지어 옅은 미소까지 지으며 강지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요. 누가 알아요? 의외로 속궁합이 잘 맞을지."
그리고 세면대에서 대충 손을 씻은 뒤, 강지한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멀어져 갔다.
병원 건물을 나서는 순간까지 한세희는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강지한이 너무 두려웠던 그녀는 산부인과 검사도 받지 못했다.
강지한의 비서가 된 순간부터 한세희는 단 한 번도 그의 말을 반박하거나 말대꾸한 적이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이런 행동이 어떤 후과를 초래할 지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강지한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한다.
영원히 지날 것 같지 않았던 시간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다. 한세희는 욕실 거울 앞에서 출근할지 말지 한참을 망설였다. 2시간 후, 손에 사직서를 든 한세희가 강지한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가 집무책상 위에 공손하게 내려놓았다.
"대표님, 사인해 주세요." 한세희는 그가 있는 쪽으로 사직서를 내밀며 정중하게 말했다.
한세희가 그의 앞에 멈춰 설 때까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그가 사직서라는 말에 움찔거렸다.
그녀가 진짜 사직서를 제출할 줄 몰랐던 강지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세희를 노려봤다.
강지한이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자, 한세희는 사직서를 집무책상 한 켠에 놓아두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깊고 검은 눈동자에 한세희는 심장이 빨리 뛰며 몸이 움찔움찔해 나는 것을 느꼈다.
"결정했어?" 그의 목소리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녀의 온몸을 감쌌다.
"네. 결정했습니다." 한세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강지한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검지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이리 와."
입술을 꼭 깨문 한세희는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퇴사하고 싶지 않아?"
동시에 강지한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한세희는 경계 가득한 모습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익숙하고도 포근한 그의 향수가 그녀를 감쌌지만 숨 막히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한세희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강지한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지한은 평소에도 소리를 내어 웃지 않는 편이었다. 기껏해야 입 꼬리만 비스듬히 올리고 미소만 지을 뿐. 그러니 그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그의 언짢은 기분을 설명했고 그것은 곧 다가올 폭풍의 전야였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은 강지한이 눈 깜박할 사이에 그녀를 집무책상 위에 누르고 가만히 내려다봤다. 수백 수천억 규모의 계약 서류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