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여자의 첫 경험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야만 하는 걸까?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찢는 순간, 임하늘은 자신에게 그런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낯선 남자의 거친 움직임에, 그녀는 눈앞이 흐려질 만큼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든 도망 가고 싶었지만 무거운 몸뚱아리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한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소한... 피임이라도... 제발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순간 멈칫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고, 난폭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게 끝났을 무렵 임하늘은 마지막 남은 기력마저 빼앗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호텔 방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지저분한 침대와 녹초가 된 몸, 그리고 몸에 남은 흔적들이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일이 현실이었음을 일깨워 주었다.
이건 치밀하게 짜여진 함정이었다. 단순한 손님 접대라고 생각했던 술 자리는, 사실 그녀를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었고, 그녀는 술에 취해 거의 정신을 잃은 채 이 방으로 끌려와 유린 당했다.
어젯밤, 그녀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가 떠올린 건 출장에서 막 돌아온 남편, 이준재였다. 본능적으로, 거의 반쯤 의식이 끊긴 상태에서도 그녀는 그에게 수 차례 전화했고, 문자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았을 때, 돌아온 건 차갑고 무심한 목소리뿐이었다. "바빠, 경찰에 신고해."
이준재의 그 차가운 말이 계속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뼈가 시리고 가슴이 찢기는 듯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준재에게 쏟아 부은 그녀의 사랑과 존엄이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녀는 쓰디쓴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침대 이불 속에서 명함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그것을 주워들었고, 눈에 익은 로고를 보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씨 그룹.
어젯밤, 방 안은 어두웠고 그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이준재의 회사와 관련된 사람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설마, 이준재가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집으로 돌아온 임하늘은 현관 앞에 놓인 익숙한 구두와 외투를 보고 이준재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임하늘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욕실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오는 이준재를 마주쳤다. 욕실가운만 걸쳤을 뿐인데, 그가 가진 고귀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이목구비, 그녀를 바라 보는 시선에는 익숙한 무심함이 서려 있었다.
임하늘을 마주한 순간,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를 바라 보는 눈빛에는 무심함을 넘어 묘한 혐오감까지 스며 있었다. "뭔데?"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하늘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고, 애초에 이어지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었다. 3년 전, 이준재의 아버지가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했을 때, 임하늘은 자신의 골수를 기증했다. 그 대가로 이준재의 아버지는 그녀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녀는 그 소원으로 이준재와의 결혼을 택했다.
참 철이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너무 어렸던 그녀는, 이기적인 욕망에 취해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차가운 마음도 녹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준재에게 그녀는 실리만 추구 하는 속물에 불과했다.
그는 이기적이고 심계가 깊은 그녀를 증오했다. 결혼한 3년 동안 그는 신혼방을 호텔 드나들 듯이 했고 그녀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단 한번도 그녀를 아내라고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임하늘은 그 모든 걸 묵묵히 견뎠다.
어려워진 집안 사정 때문에 그녀는 가녀린 어깨에 많은 것들을 짊어 져야 했기에 그녀는 이준재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도 그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차가운 무관심에도 그녀는 항상 자신을 위로 했다. 언젠가는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어젯밤 이후, 그녀는 이제 사랑이란 감정을 마음 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 함정에 이준재가 개입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씨 가문과는 분명히 연관이 있었다. 사실을 따져 물으려고 이 집으로 돌아 왔지만, 막상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녀는 모든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준재 씨..." 목이 타 들어 가듯 메마른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지만,
이준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옷방으로 향하더니 그녀가 정성스레 준비한 옷들을 입기 시작했다.
등을 돌린 채,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아침이나 준비해. 30분 뒤에 나가야 하니까."
임하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재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준재 씨, 우리 이혼해요."
회차 2
이준재는 임하늘의 말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를 고쳐 매고 천천히 그녀를 돌아봤다. 입가엔 조롱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젯밤 일 때문이지? 네 부탁을 거절해서?"
어젯밤을 떠올리는 순간, 임하늘의 가슴은 조여왔고, 몸 속 깊은 곳까지 저릿하게 아파왔다.
이준재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조금 전에 예원이랑 통화했어. 최씨 그룹과의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었던 건 네 공이 크다더군. 보너스는 제대로 챙겨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임하늘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예원은 이준재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었고, 그는 그녀의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줬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사람은 이예원이었다.
이준재의 사업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에, 임하늘은 그것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자신의 주량이 약한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이준재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억지로 잔을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이예원이 벌인 이 끔찍한 일은 이준재에게 있어서 그냥 단순한 어린애의 실수일 뿐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것이다.
극에 달한 절망이 고통 까지 삼켜버려서 일까? 아니면 마음이 무뎌진 걸까? 가슴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녀는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럼 깔끔하게 끝내죠. 당신도 어젯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 곧 소문도 날 거고. 당신 같은 사람이 나 같은 속물이 당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놔둘 리 없잖아요?"
이준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속물? 3년 전 넌 골수를 아버지께 기증하는 조건으로 나와 결혼했지. 그런 넌 얼마나 깨끗하길래? 사실 지금과 전혀 다를 게 없어."
결혼한 지 3년 동안, 그는 거의 한 번도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를 마주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애틋함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남은 건 상처 뿐이었다.
임하늘은 그 자리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준재를 멀리서 바라보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한 번이라도 그녀를 바라봐 줄까 기대했던 시간들. 그는 항상 거리를 두었지만, 지금의 그는 거리를 두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를 혐오하고 있었다. 왜 유독 자신에게만 이토록 차갑고 잔인한 걸까? 마치 그녀가 용서 받지 못할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말이다.
생각이 깊어질 틈도 없이, 이준재는 시계를 힐끗 보더니 불쾌한 듯 말했다.
"아침은 됐고, 점심 도시락이나 준비해서 사무실로 보내."
하지만 오늘, 임하늘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의 냉대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난 3년 동안은 묵묵히 참아 왔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이혼을 요구했고 심지어 아무 말 없이 자취를 감췄다.
점심, 이준재의 비서 최성훈이 점심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도시락을 흘깃 본 이준재는
임하늘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불평하지 않고 몇 숟갈 억지로 입에 넣었다.
솔직히 말해, 3년 동안 익숙해진 그녀의 음식이 아니면 입맛조차 돌지 않았다.
그렇게 기분 나쁜 점심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온 이준재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이혼 서류를 발견했다.
이준재의 굳은 얼굴을 본 최성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어젯밤, 그 사람이 대표님이었다는 걸 사모님께 말씀 안 하신 거죠?"
그 순간, 이준재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어젯밤의 기억이 스쳐갔다.
그는 갑작스럽게 그녀에게서 구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단지, 임하늘 때문에 얼굴에 먹칠 당하기 싫었던 그는 그녀를 구해주러 갔다. 하지만 도착해 마주한 임하늘은 그가 평소에 알던 임하늘이 아니었다. 술에 취한 채,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그의 품에 안겨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욕망이 치솟아 올랐고 그는 이성을 잃었다.
그녀의 술에 취한 모습이 너무 섹시했던 걸까? 아니면 오랜 시간의 금욕의 결과일까? 욕망에 지배당한 이준재는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밤새 동안 임하늘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실수 따위,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임하늘 같은 속물은 돈이면 충분히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혼이라...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이준재는 차갑게 웃으며 서류에 단번에 서명했다.
그리고 최성훈에게 서류를 던지듯 넘겼다. "직접, 임하늘에게 전해."
최성훈이 조용히 문을 나서려는 순간, 뭔가 생각이 떠오른 이준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알아봐. 어젯밤, 누가 임하늘을 그 호텔에 보낸 건지."
회차 3
임하늘은 하루 종일 병원에 머물렀다.
그녀에겐 쌍둥이 남동생 임효준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희귀한 신경 질환을 안고 태어난 그는 이제 스물넷이지만, 지능은 겨우 다섯 살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열여덟 살까지 임하늘은 행복한 가정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그대로 무너졌으며, 집안의 사업도 망했고 치료가 끊긴 동생은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하루아침에 무너진 가정의 짐은 모두 임하늘의 어깨 위에 떨어졌다. 그 몇 년간,
임하늘은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버텨야 했다. 한창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찼던 현실. 허리를 펼 여유조차 없이, 매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렇게 버티다 결혼한 사람이 이준재였다. 그와 함께라면 조금은 숨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희망마저 잃어버렸다.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르자, 임하늘의 눈가가 붉게 젖었다.
병실 밖의 저녁노을이 어둑하게 번져가고 있을 무렵, 어머니 윤명숙이 조용히 다가왔다. 윤명숙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동시에 임효준을 돌보고 있었다. "하늘아, 슬슬 집에 가야 하지 않겠니?"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서방 퇴근할 시간이잖아. 이제 그만 돌아가. 괜히 이서방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임하늘은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상관 없어. 엄마. …이준재 씨와 이혼하려고."
윤명숙은 순간 굳어버렸다.
"이서방이 이혼 하자고 하든?"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임하늘이 대답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어."
그녀가 더 이상 말하기 전에, 윤명숙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말을 끊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늘아! 어젯밤 그 일 이후로, 이서방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데. 왜 네가 이혼을 꺼내? 이씨처럼 큰 가문은 이미 큰 성공을 거뒀고 사업도 크게 하시잖아. 조금 거만한 게 무슨 대수겠니? 대단한 분인들 만큼 생각도 우리와는 달라. 그리고 당연히 실수 할 수도 있지. 안 그래?"
임하늘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윤명숙을 바라봤다.
"어젯밤 그일, 엄마는 어떻게 알았어?"
윤명숙은 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죄책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가슴 한 켠이 무너져 내렸지만, 차마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생각해 봐, 너 이혼하고 나면... 엄마는? 네 동생은 어떻게 해?"
대답은 듣지 않아도, 임하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젯밤, 모든 걸 계획한 사람은 이준재의 여동생, 이예원이었다. 늘 자신을 탐탁지 않아 했고, 기회만 있으면 트집을 잡는 시누이다. 윤명숙을 구슬려 자신을 설복시키는 것도 이예원의 수단이었다.
그녀의 수단은 비열하고 잔인했고 정확히 임하늘의 정곡을 찔렀다.
어머니의 떨리는 눈빛, 미안해서 어쩔 바를 모르는 표정을 바라보며 임하늘은 허탈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죽기 살기로 지켜온 이 집은… 나의 안식처가 아니었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어머니인 윤명숙을 향해 머리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려 했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더는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오직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한 임하늘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 순간, 윤명숙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하늘아… 네가 직장도 있고, 우리 둘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네 아버지는 어쩔 거니? 이씨 그룹의 도움이 없으면 그 누명, 절대 벗을 수 없어. 정말 감옥에서 25년을 살게 둘 거야…?"
임하늘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준재가 도울 마음이 있었으면, 진작에 도왔겠지."
사실, 그녀가 이준재와 결혼했던 이유는 단순한 사랑만은 아니었다. 이준재는 그녀가 절박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이준재는 그녀를 외면했고 심지어 혐오했다. 그래서 임하늘은 단 한 번도 그 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모든 걸 끝내려고 마음 먹은 지금, 그녀가 이준재에게 부탁할 리가 없었다.
임하늘의 결연한 눈빛을 본 윤명숙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조용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하늘아, 이씨 그룹이 어떤 사람들인 줄 알잖아. 그 사람들… 절대 만만치 않아. 경솔하게 굴지 마."
임하늘은 조용히 동생의 병실로 돌아가 침대 곁에 섰다. 임효준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돌아서서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
병원 출입문을 막 나서려던 그때, 문 앞에서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재의 비서 최성훈이었다.
그는 늘 그랬듯 단정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다가왔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이혼 서류에 서명하셨습니다."
임하늘은 멍하니 최성훈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서류를 건네 받았다.
그날 저녁, 이준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새로운 가정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하늘이 정성 들여 고른 듯한, 경험 많고 능숙한 중년 여성이었다.
하지만 이준재는 그녀를 바로 돌려보냈다.
그는 임하늘이 결국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서 굳이 새로운 사람에게 적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뒤, 그의 삶은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가 불편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공허함이 그를 점점 더 예민하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기분이 날카로울수록 회사 전체 분위기 역시 가라앉았다.
그런 어느 날, 이예원이 그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마침 이준재가 부하 직원에게 날카롭게 화를 내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오빠, 왜 이렇게 화를 내? 이러다 병들어."
하지만 이준재는 여동생에게조차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네가 여긴 왜 왔어?"
이예원의 눈동자가 반짝였고 교활한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오빠랑 임하늘… 요즘 사이 안 좋다면서? 정말 이혼하려는 거야?"
이준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 말, 누구한테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