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다음날 새벽 5시, 임하늘은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러닝화 끈을 묶은 그녀는 강변을 따라 달렸다.
조깅을 마쳤을 무렵 도시는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방송국으로 향해 8시 경제 뉴스를 진행했다.
방송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던 그녀는 강서은과 마주쳤다.
강서은은 품에 한 가득 붉은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하늘 언니."
강서은이 밝게 인사하자 임하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꽃다발을 힐끗 바라보았다.
"꽃이 예쁘네."
주위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강서은은 우월감에 젖어 턱을 치켜들고 미소 지었다.
"성훈이가 보내줬어요."
동료들 사이에서 경멸 섞인 비웃음과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갔다.
어제 저녁에 만난 투자자를 그녀는 바로 '성훈'이라 불렀다. 회사 동료들에게 대단한 스폰서를 낚았다고 선언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녀를 차갑게 무시해 버렸다.
다들 강서은의 유치한 자랑질에 맞장구를 쳐줄 시간이 없었을 뿐더러 그 스폰서가 언제 돌아 설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임하늘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한마디 대꾸했다.
"축하해."
"언니, 언니에 비하면 이 꽃은 아무 것도 아니죠."
강서은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가짜 웃음을 지었다.
"언니는 하룻밤 새로 이대표님을 구슬려서 2년치 광고계약을 따냈다면 서요? 역시 언니는 대단해요. 대체 어떻게 한 거에요?
이어 그녀는 임하늘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하지만 동작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전혀 작지 않았다.
"어젯밤 이 대표님을 확실하게 만족시켜 드렸나 봐요?"
임하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적 없어."
강서은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언니. 내숭 좀 그만 떨어요. 오늘 아침 일찍 팀장님이 알려 주던데요? 이 대표님이 광고 계약을 하셨다고요."
임하늘은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했다. 바로 그때, 장 탐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하늘 씨, 준비해요. 10분 후에 이 대표님을 만나러 갈 거니까."
임하늘은 멈칫하더니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서은은 팔짱을 끼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임하늘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잠자코 장팀장의 차에 올라 타 함께 강성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향했다.
장팀장은 환하게 웃으며 데스크 직원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이대표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미리 약속을 잡았으니 확인 부탁드려요."
임하늘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대표님? 이 검사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그가 절차를 밟는 동안, 임하늘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벽에 높이 걸린 <LM글로벌 테크놀로지> 로고를 올려다보았다.
LY 두 글자가 그녀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 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이니셜은 그녀가 대학2학년 때, 자습시간에 이서준과 함께 미래를 그리며 LY 두 글자를 공책에 휘갈겨 적었다. 그리고 나중에 시작 자금을 모으는 대로 함께 기술 스타트업 회사를 차리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3개월 후, 이서준은 사법고시를 통과해 강성시 검찰에 합격했고 즉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를 했다.
그녀는 그에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꿈이 무너져 내렸고 배신의 쓰라림이 그녀를 갉아 먹었지만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 들였다.
그때, 안내 데스크 직원이 장 팀장과 임하늘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확인해 주셨습니다. 곧 비서님이 두 분을 대표님 사무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이어 둘은 비서를 따라 이서준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창가에 서서 정통 런던식 영어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임하늘은 대학 3년차 때, 학교의 지원을 받아 해외로 유학을 갈 기회를 얻었고 그녀가 선택한 나라는 바로 영국이었다.
매끄러운 검은색 가죽 소파에 앉은 임하늘은 주위를 둘러봤다.
인테리어는 심플하면서 세련됐고, 깔끔한 선과 차가운 색조 등 모든 디테일이 이서준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서준은 몸에 딱 맞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최고급 양모가 빛을 받아 자연스런 광택을 뿜어냈고 우아한 기품이 흘러 넘쳤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임하늘에게 닿았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통화를 끝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는 자연스레 말하며 사무실을 가로질러 장 팀장과 임하늘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장 팀장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 대표님. 먼저 일 보십시오, 저희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려 100억짜리 계약이 아닙니까? 하루 종일 기다려도 괜찮습니다."
이서준은 무심하게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커피포트로 손을 뻗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우유만 넣어?"
임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그가 이미 집어 든 우유팩에 머물렀다. 그의 자연스럽고 익숙한 행동에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미 결정해 놓고 왜 물어 보는 거지?'
장 팀장은 그 팽팽한 침묵을 눈치채지 못한 채 급히 끼어들었다.
"뭐든 괜찮습니다. 저희는 까다롭지 않습니다."
갓 내린 커피 특유의 향기와 이서준이 애용하는 우드계열의 향수 냄새가 어우러져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익숙하고도 매혹적인 향기였다.
한때, 그녀는 그 향기에 취해 그의 곁에 3년간 머물렀다. 그 향기는 마치 마약처럼 그녀를 끌어 들였고 벗어 날 수 없었다.
이서준이 긴 손가락으로 커피 잔을 잡아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그러자 임하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이 대표님."
하지만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이어 얘기는 계약 위주로 흘러갔고 이서준이 조건을 제시했다.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방송국에서 앞으로 3일 동안 황금 시간대에 최근 TSL 전기차 화재 사건을 보도해 주십시오. 아직 미숙한 기술을 사용한 탓에 생긴 사고라는 점을 강조해 주시고 비슷한 사건들을 끌어 모아 같이 보도해 주시죠. 이 사건을 위해 코너를 하나 새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절대 거절 하지 못할 위압감이 담겨있었다.
기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임하늘은 AI 산업에도 흥미가 있었던 터라 TSL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전기차 브랜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금테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대표님, 그 TSL 전기차의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미성숙한 탓에 화재가 일어 났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요. 그런데 아직 검증도 되지 않은 보도를 함부로 했다가는 여론 조작의 혐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서준은 왼손을 소파 팔걸이에 느긋하게 걸친 채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
"2년 짜리 광고 계약과 사고사건 보도. 어느 쪽이 더 무게가 있는지 한번 제대로 생각해보지 그래?"
임하늘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LY글로벌 테크놀로지에서 당장 3일 뒤에 전기차를 출시 할거라는 건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LY의 회장이 이서준일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5년이 지났지만 전략가 다운 그의 면모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계획이 뒤따랐다.
이서준을 바라보는 임하늘의 눈빛이 싸늘해 졌다.
"이 대표님, 경제 채널은 당신이 이득을 취하기 위해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 도구가 아닙니다."
이서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임하늘, 지금 나를 거절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