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할래요?"

허연서는 말을 하면서 한쪽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감았다.

그녀는 문에 기대어 서있었다.

문 뒤편은 소란스러운 연회장이었고, 방과는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때, 허연서의 전 남자 친구는 새로운 연인과 연회장에서 약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남자의 두 눈에서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손목을 꽉 쥐어 부드러운 침대 위로 눕혔다.

남자는 허리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해."

베개 위로 허연서의 해초 같은 긴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고, 그녀는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려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

몸의 향기와 진한 술 향기가 뒤섞여 퍼져나갔다.

순간, 그의 숨이 멎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잠긴 듯 낮고 섹시한 목소리를 냈다.

"허연서,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내가 누구인지."

'누구지?'

짙은 취기 속에서 허연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남자의 얼굴은 고귀하고 단정했으며,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콧날, 정교한 이목구비는 흡사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남자 요정이라는 말이 괜히 떠오를 정도였다.

허연서는 뜨거운 숨을 내쉬며 다가갔다.

살짝 차가운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은..." 그녀의 목소리는 요염했다. "구시혁."

구시혁이었다.

경성의 이름난 난봉꾼이자, 어떤 여자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 연애의 고수였다.

그는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구씨 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남자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폭풍우처럼 진하고 맹렬하게 키스를 했다.

다음 날.

허연서는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깼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서 머리를 부여잡고 이불 속에 얼굴을 묻었다.

어젯밤 고선우가 약혼식에서 했던 말이 밤새 꿈속에서 그녀를 괴롭혔다.

"허연서는 자기 이모처럼 천성이 천박하니, 잠깐 장난으로 가지고 놀았으면 됐지, 내가 왜 그녀랑 결혼을 하겠어?"

결국 고선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했다.

허씨 가문이 무너진 뒤, 허연서는 고아가 되어 이모에게 맡겨졌다.

이모가 어린 그녀를 데리고 고씨 가문으로 시집가면서, 그녀는 고씨 가문의 이름 아래 명목상 양녀가 되었다.

그 동안 고선우는 계속 그녀를 쫓아다녔다.

이모 또한 그녀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면 시집 가라고 설득했다.

허연서는 고선우의 호의에 감동했고, 비록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선우의 입에서 그녀는 천박한 여인으로 전락했다.

어젯밤 들려왔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선명했다.

시큼한 감정이 밀려오며, 가슴속이 솜으로 채워진 듯 답답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허연서 씨."

이불 한쪽이 휙 걷히고 상쾌한 공기가 밀려들면서, 남자의 천박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허연서는 고개를 번쩍 들었고, 정교한 용모가 눈에 들어왔다.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로, 여우처럼 매혹적인 눈매가 반짝였다. 눈가에는 작고 또렷한 점이 하나 있었다.

'구시혁?'

멍하니 있는 그녀를 보며, 구시혁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희롱하듯 말했다.

"당신 모습이, 마치 제가 당신을 희롱한 것 같네요."

구시혁은 허연서의 얼굴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 넘겼다.

그의 손끝은 서늘했고, 그 냉기에 허연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구시혁의 목덜미에 남은 은근한 자국이 눈에 들어오자, 허연서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졌고 뺨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구시혁은 구씨 가문의 누구보다 제멋대로이며, 이름난 난봉꾼이었다.

게다가 그는… 고선우의 사촌 형님이었다.

그녀는 술김에 이성을 잃고 그와 밤을 함께했다.

허연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하얀 어깨 위로 떨어졌다.

어젯밤의 요염한 눈빛은 사라졌고, 술기운이 완전히 가신 지금의 그녀는 오히려 냉정하고 차가워 보였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그녀는 고선우와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일은 없었던 걸로 해요. 구시혁 씨."

허연서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

구시혁의 눈빛 또한 여우처럼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그의 눈은 웃는 듯, 웃지 않는 듯했고, 능글맞은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지금 장난해요?"

회차 2

구시혁의 목소리는 웃고 있었지만, 끝음이 살짝 올라간 그 어조와 달리 눈빛은 냉담했다.

허연서가 그의 감정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손을 거두며 손가락으로 목에 남은 키스마크를 천천히 문질렀다.

허연서는 본능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그 순간 어젯밤의 광란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잘게 쪼개진 남자의 입맞춤, 맹렬한 충돌, 뜨겁게 내려앉던 손바닥의 감촉까지…

그리고 맨 처음, 그녀가 먼저 물었던 말까지...

'할래요?'

그녀는 심지어 먼저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고, 두 번을 끝내고도 그의 목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말했다. "오빠, 정말 멋져요, 한 번 더 해요."

구시혁의 목에 있는 키스마크는 세 번째 할 때 생긴 것이었다.

허연서는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차갑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저는 당신에게 책임지라 하지 않을 거니까 당신은 손해 볼 일 없어요."

'이 여자, 막상 일 다 끝나니까 모른 체하네.'

물린 자리가 살짝 쓰라린 걸 느끼며 구시혁은 입가에 능글맞은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허연서 씨, 당신이 저를 책임져야 해요."

허연서는 놀란 듯 고개를 들었고, 그의 웃는 듯 웃지 않는 눈빛과 마주쳤다.

경성 사교계에서 구시혁은 가리지 않고 뭐든 해내는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평소엔 게으르고 한량처럼 보였지만, 사업에서는 천둥처럼 빠르고 거침없는 수단을 쓰는 남자였다.

그에게 죄를 지은 자들은 하나같이 그가 태연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처리해 버렸다.

그런 사람이 그녀에게 책임을 요구한다고?

허연서는 그가 농담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구시혁 씨, 제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맑고 시원한 소나무 향이 풍겨왔고, 구시혁은 다시 그녀의 정교한 턱을 잡았다.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식을 올려야죠."

허연서는 놀란 듯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시혁은 손을 놓고 침대 머리에 기대 앉아 허연서의 머리카락을 무심히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할아버지께서 혼인을 재촉하셔서요. 그분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릴 아내가 필요하거든요."

그의 목소리에는 이른 아침 특유의 잠긴 울림이 배어 있었다. 허연서는 조용히 그의 손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빼냈다.

가문의 격으로 따지면, 고아인 그녀는 구씨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외모로 따져도 그녀보다 예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더구나 구시혁에게 첫사랑이 있다는 건 사교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었다.

2년 전엔 그 첫사랑 문제로 구영호 어르신과 크게 다툰 일까지 있었다.

결혼을 하려면, 그의 첫사랑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허연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예요?"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듯, 그런 좋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구시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옅은 담배 향이 퍼져나가자 허연서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차가워 보이는 한편 귀여워 보였다.

그녀의 불만을 눈치챈 구시혁은 옅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물고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불어넣었다.

그녀가 기침을 연거푸 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제 아내가 되려면 그저 서로를 존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그는 잠시 멈췄다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어도, 침대 위의 당신은 저랑 아주 잘 맞거든요."

남자의 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허연서는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얼굴이 뜨거워지자 허연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망설였다.

이모는 늘 그녀가 부잣집에 시집가길 바랐고, 그녀도 혼인이 필요했다.

결혼을 해야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시혁이 내세운 이유는 솔직했고, 거절하기 힘들 만큼 매력적이었다.

만약 정말 안 되면 이혼할 수도 있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진퇴양난에 빠진 고씨 가문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허연서는 목소리가 살짝 잠긴 채 불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좋아요. 당신과 결혼하겠어요."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구시혁은 여유롭게 아름다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허연서 씨, 신중히 생각해요. 구씨 가문엔 이혼한 사람이 없으니까."

허연서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회차 3

구시혁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주한 허연서는 감추듯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알아요."

"그럼… 언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말을 하며 옷을 입었다.

비단 같은 치맛자락이 그녀의 매끄러운 곡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옷자락은 물결처럼 흔들렸다.

구시혁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연히 오늘이죠."

"오늘이요?" 허연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그가 오직 속옷만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직 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크다고?'

허연서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알겠어요. 우선 집에 가서 서류를 가져올게요. 오후에 봬요."

오후에 구청에 도착한 허연서는 멀리서 구시혁을 발견했다.

그는 용모가 수려하고, 눈빛이 차가웠다.

차 문에 기대어 서 있던 구시혁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와 익숙한 듯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가시죠, 구 사모님."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구시혁은 허연서를 "구 사모님"이라 불렀다.

허연서는 볼이 빨개지며 어색하게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 허연서의 손에는 혼인관계 증명서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문가에 서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결혼하게 되는구나.'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 그가 가장 바라던 건 바로 자신의 혼인이었다.

비록 고선우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결혼한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구시혁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구 사모님, 뭘 그리 생각하세요?"

남자의 무심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허연서는 고개를 들었고, 그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손을 이끌어 열쇠 꾸러미를 쥐여 주었다.

열쇠는 다소 차가웠고, 그녀는 무심코 꽉 움켜쥐었다.

"성남 빌라입니다." 구시혁이 말했다. "혼인 후 함께 지낼 집이에요. 이제 이곳이 우리의 집이기도 하죠."

'우리 집이라니.'

씁쓸함이 그녀의 뼛속 깊이 스며드는 듯했다.

이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모두가 그녀를 짐이라 여겼다.

어릴 적부터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그녀에게, 누군가가 '이곳이 네 집이다'라고 말해준 건 처음이었다.

"회사에 일이 남았어요." 구시혁은 여전히 여유롭게 가방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먼저 가볼게요."

그의 뒷모습은 훤칠하고 단정했다.

"구시혁 씨." 허연서는 잠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결혼 소식은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아 주세요."

그 사건 이후로... 언론은 끊임없이 허씨 가문을 물고 늘어졌다.

이 시기에 그녀는 언론의 추궁에 맞설 힘이 없었다.

게다가, 이모와 가족들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지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

구시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무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어요."

'이 여자, 정말 여우 같네.'

구시혁은 차에 올랐다.

그때 조수석에서 친구의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만족해? 날 부른 이유가 그저 운전을 시키려고 였어?"

구시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의 온화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운전이나 해."

그날 저녁.

허연서는 고씨 가문에 잠시 들렀다.

고선우와 사이가 좋지 않게 끝났으니, 어색하기도 했고 이사할 때가 되었다.

허연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막 캐리어를 열자마자, 뒤쪽에서 거슬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연서, 너 이제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어젯밤엔 대체 어디 갔어?"

그녀의 이모, 이미정이었다.

허연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모, 저는…"

"허연서! 네가 감히?!" 이미정의 높은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 솟구친 힘인지, 이미정은 그녀를 욕실 거울 앞으로 끌어당겼고, 그 힘에 그녀는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넌 이미 성인이고 여잔데, 어떻게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함부로 굴려? 어제는 또 어느 못된 남자랑 밤새 놀아난 거야?"

이모의 거친 꾸짖음 속에서, 허연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긴 머리가 흩날리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으며, 어렴풋이 드러난 옷깃 아래에는 키스마크가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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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이면서도 거친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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