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요한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카슨의 차에 올랐다.
허벅지에 닿는 가죽 시트는 너무나 친숙한 감각이었고, 그녀의 피부에 새겨진 기억을 되살렸다.
하지만 카슨은 서둘러 시동을 걸지 않았다. 그는 여유롭게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요한나를 바라보았다.
"요한나, 담뱃불을 붙여 줘." 전에도 수없이 그랬듯이 그는 넌지시 눈짓을 했다.
요한나는 저도 몰래 침을 삼키며 메마른 목을 적셨다.
이젠 카슨과 분명 남남인데 요한나는 그의 말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컵 홀더에 놓인 라이터에 손을 뻗었다.
딸깍!
라이터의 불꽃이 일렁이며 그녀의 얼굴에 하늘거리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요한나가 담뱃불을 붙여주자 카슨은 깊이 들이마신 뒤,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연기를 내뿜었다.
얼굴을 감싼 담배연기 때문에 눈가가 따가웠지만 그녀는 전혀 피하지 않았다.
카슨의 요한나를 바라보며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3년 전,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삶에 찌들려 여기저기 치이던 그녀를 만났었다. 측은지심이었는지 뭔 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돌봐주었다.
그런데 계약을 마감하고 고작 2주가 지났는데 그녀는 또다시 수척해진 것 같았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 그녀의 피부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카슨의 마음속에는 연민과 욕망이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이 들끓었다.
솟구치는 충동을 억누르며 카슨의 시선은 그녀의 손으로 옮겨졌다. 그러자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떡하다 다친 거야?"
당황한 요한나는 자신의 상처를 흘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움켜쥐고 담담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조심하지 않아 다친 거예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러셀 씨."
그녀의 대답에 카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러셀 씨?" 그는 자세를 편히 고쳐 앉더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조롱 섞인 말투로 물었다. "새로운 남자가 생겼어? 이렇게 급히 나와 거리를 두는 걸 보니 아마도 그런 것 같네. 아니야?"
요한나는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글쎄요, 당신은 곧 결혼할 거잖아요.저한테서 멀어 지는 게 올바른 선택이 아닐 가요?"
카슨은 흥미로운 듯 몸을 가까이 기울이고 넌지시 물었다. "질투하는 거야?"
그녀는 바로 발끈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요!" 하지만 저도 몰래 튀어나온 반응이 너무나도 진솔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숨김없는 감정은 카슨을 즐겁게 했고,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맥박이 빨라졌고, 다가오는 카슨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놓친 카슨은 그녀 어깨 위에 걸쳐진 한 남자의 코트를 발견했다.
그는 코트를 무심코 뒷좌석으로 던졌다. 좀 전까지 솟구치던 욕망은 점차 사라졌고, 그의 기분은 찝찝하기만 했다.
"로버트가 널 많이 챙기는 것 같던데. 혹시 너희 둘이... ?" 그는 말끝을 흐리며 많은 것을 암시했다.
"아니요, 로버트는 그냥 제 상사일 뿐이에요." 요한나는 카슨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의 접근을 막으며 분명히 말했다.
"상사라니 얼마나 좋아. 로버트와 사귀게 되면 직장 생활도 훨씬 수월해질 텐데 말이야, 안 그래?" 카슨은 냉소를 머금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로버트는 꽤 괜찮은 남자야. 걔한테서 네가 원하는 걸 분명 얻을 수 있을 거야."
요한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카슨이 자신한테 주는 압박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요한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카슨의 말을 따라 대충 에둘렀다. "그러게요. 어머니께서도 그를 아주 좋아하시거든요."
카슨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갑자기 시동을 걸더니 액셀을 힘껏 밟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녀는 대시보드에 머리를 부딪혔고, 잠재우고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카슨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카슨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고 이에 체념한 요한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그들은 그녀의 아파트 건물 아래에 도착했다.
카슨은 눈살을 찌푸리며 오래된 건물을 살펴보았다. "내가 마련해 준 아파트는 왜 사용하지 않는 거야?"
그녀의 대답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그건 제 것이 아니잖아요."
"그 아파트는 네 명의로 돼 있어."
"러셀 씨, 그 아파트 소유권을 다시 당신의 이름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대화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카슨은 더 이상 이 문제로 그녀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얼른 가자. 집 앞까지 바래다 줄게."
하지만 요한나는 카슨의 배려가 따뜻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안했다.
그와 헤어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요한나는 이 남자의 늪에 다시 빠질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도 없고, 매 층마다 센서 등 하나로 계단을 밝혀야 하는 구식 아파트 7층으로 홀로 올라가자니 숨이 막혀왔다.
그녀는 현관에 도착하자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카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 미묘한 따뜻함에 요한나는 씁쓸하기만 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지독한 가스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요한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들어가 보니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가 보였다.
"엄마!" 그녀는 공포에 사로잡혀 소리쳤다. 어머니를 품에 끌어안고 창백한 얼굴을 매만지며 어쩔 줄 몰라 절망에 휩싸였다.
순간 카스한테 전화해서 도움을 청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단호하게 119에 전화했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것은 구급차가 아니라 카슨이었다.
요한나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충격과 안도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슨은 마치 그녀의 구세주마냥 긴박한 순간에 그녀 앞에 나타나 의식을 잃은 그녀의 어머니를 안아 들고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