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오랜만에 함께 보낸 밤은 유난히 애틋하고 지독했다.
기서우가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욕실에서 오랜만에 물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누워 온몸이 녹초가 된 그녀는 남자가 욕실에서 나오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상반신을 드러낸 육지한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의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옥처럼 흰 피부는 매혹적인 생명력을 풍겼다.
그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고 기서우의 앞에 내밀었다.
"계약 종료야."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서류에 적힌 '스폰서 계약서'라는 글자를 보고 온몸이 멈추지 않고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계약 만료일까지 아직 3개월이나 남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안 돼요?"
그의 곁에서 지낸 몇 년 동안, 언젠가 이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더,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적어도, 시한부 6개월 진단을 받은 날은 아니었으면 했다.
길게 이어진 침묵은 그녀에게 가장 가혹한 대답을 안겨주었다.
"농담이에요!"
기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도 일찍 끝내고 싶었어요! 집에서 결혼을 재촉해서 다음 주에 선을 보러 가기로 했거든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아무렇지 않은 농담을 하는 것처럼, 최대한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머리를 닦던 육지한의 손이 멈칫하더니 기서우를 빤히 쳐다봤다.
"너, 선 본다고?"
기서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나무에 목맬 수는 없잖아요."
'이런 병든 몸으로 어떻게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그저 비참하게 가고 싶지 않을 뿐이다.'
육지한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머리를 닦던 수건을 신경질적으로 옆에 내던지고 반쯤 젖은 머리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스티븐이 너와 인수인계할 거야."
그의 차가운 목소리는 마치 그녀가 연인이 아니라, 질린 장난감을 처리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기서우는 그 순간 모든 희망을 내려놓았다.
육지한은 바닥에 찢겨 나간 셔츠의 참상을 흘깃 쳐다보더니, 도저히 몸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 내일 아침 스티븐이 올 때 새 옷을 가져올 거야."
기서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를 상기시켰다. "응급 피임약도 필요해요. 최근에 단기 피임약을 먹지 않았어요."
육지한은 손목시계를 차는 동작을 멈칫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입은 뒀다 뭐해?"
기서우의 얼굴에 억지로 지은 미소가 완전히 굳어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풀렸다.
다음 날 아침 10시, 육지한의 비서 강우진이 정확한 시간에 문 앞에 나타났다.
익숙한 약 한 알과 따뜻한 물 한 잔이 기서우의 앞에 놓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기 양."
육지한의 곁에서 지낸 3년 동안, 그녀는 단기 피임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강우진은 매번 직접 약을 가져와 그녀가 약을 삼키는 모습을 판에 박힌 미소로 지켜보곤 했다.
작은 알약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심장이 조금씩 차갑게 식어 내렸다.
"기 양, 일부러 미지근한 물로 가져왔으니 식기 전에 드세요."
말은 그녀를 위하는 척했지만, 기서우는 그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혹시라도 딴마음을 품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기서우도 싱긋 미소 지으며 약을 삼키고 물을 한 모금 크게 마신 뒤 빈 컵을 돌려줬다.
"따뜻한 물 고마워요. 전 얼음 넣은 게 더 좋은데."
강우진은 사무적으로 서류 뭉치를 꺼내 한 장씩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
"향정만 별장 한 채, 여화윤 대형 평수 아파트 한 채, 강지윤의..."
강우진이 쉴 새 없이 나열하는 동안, 기서우는 문득 다른 생각에 잠겼다.
처음 향정만에 갔던 건 재작년 그녀의 생일이었다. 그렇게 클 때까지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그녀가 말했었다.
미국 출장에서 막 돌아온 육지한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3시간 동안 차를 몰아, 자정이 되기 전에 그녀에게 바다 위 밤하늘의 별을 보여줬다.
그녀는 그날 밤의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 그리고 모래에 파묻혔던 긴 머리카락과 그녀의 귓가에 와 닿던 육지한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한 번, 또 한 번의 '서우야.'
그날 밤의 향정만은 그녀가 보낸 가장 로맨틱한 생일이었다.
회차 2
"대표님께서 스포츠카 수집 취미가 없으신 걸 감안해 3,000만 원의 현금 보상을 추가로 지급하기로 하셨습니다..
." "필요 없어요."
강우진은 갑작스러운 거절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요?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기서우는 말없이 가방에서 카드 지갑을 꺼내 강우진의 앞에 내밀었다.
"안에는 육지한 씨가 저한테 준 주카드와 서브카드 전부입니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으니 그분께 돌려주세요. 보상금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웃었다. "죄송하지만, 필요 없습니다."
강우진은 사무적인 말투로 기서우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서류는 대표님께서 변호사를 통해 공증을 받으신 것이니 함정 같은 건 없습니다. 대표님의 성품으로 보아 이 돈을 다시 돌려받으실 분도 아니니 안심하고 받으셔도 됩니다..."
보라, 이 순간까지도 그의 비서는 그녀를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여자라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성남 5호 3동, 비밀번호는 0921입니다."
기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 이상 강우진과 입씨름을 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 저녁 8시 전까지 모든 짐을 빼겠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방을 나섰다.
강우진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카드 지갑에 있던 해당 은행 매니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확신에 찬 대답에 강우진은 순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정말 3년 전, 대표님의 술에 취한 틈을 타 침대에 기어 올라갔던 그 소녀가 맞나? 고작 500만 원에 몸을 팔았던 걔가?!
잠시 망설이던 강우진은 결국 서류를 그대로 챙겨 회사로 향했다.
눈앞에 놓인 원상태 그대로인 서류와 기서우의 말을 강우진에게서 전해 들은 육지한은 메일에 답장하던 손을 멈칫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봉황의 눈매에 선천적인 위압감이 서렸고, 이내 그의 시선은 작지도 크지도 않은 카드 지갑에 멎었다.
"그 여자가 한 번도 쓴 적이 없다고?"
강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주요 은행에 모두 확인해 봤습니다만, 사용 내역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300만 원이 더 들어있었습니다."
육지한의 어두컴컴한 안색을 살핀 그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성남 5호 건입니다. 기서우 씨가 오늘 저녁 8시에 집을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육지한은 잠시 침묵하다가, 아무렇지 않은 막간의 해프닝이었다는 듯 다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처리해."
성남 5호를 떠난 기서우는 예전에 자신이 얻어 두었던 작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다행히 지난 3년간, 그녀는 자신이 성남 5호의 안주인이 될 것이라는 환상을 한 번도 품은 적이 없었고, 주기적으로 사람을 시켜 작은 아파트를 청소해 두었기에 지금 당장 들어가 살아도 문제가 없었다.
남은 시간은 혼자서 이별을 고하기에 딱 좋았다.
그렇게 평온한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기서우는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이곳은 성남 5호와 달리 회사에서 너무 멀어 아침밥도 거른 채 서둘러야 했고, 간신히 시간에 맞춰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 화면에 미리 작성해 둔 사직서를 보며, 제출 버튼 위에 올린 마우스 커서를 한참 동안 망설였다.
"얘들아, 들었어? 오늘 엄청난 거물이 오신대. 아침에 커피 가져다드리러 갔는데, 이사님이 화장을 하고 계시더라니까!"
기서우는 사직서의 마지막 문장을 지우고 문구를 다듬기 시작했다.
"헐! 우리 이사님, 스스로 고고한 꽃이라 자부하며 절대 미색으로 남을 섬기지 않는 분 아니었어? 이씨 가문 그 도련님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어도 눈길 한번 안 줬잖아. 대체 누구길래 이사님이 화장까지 하고 맞이한대?"
"듣자 하니 그분이 우리 이사님이랑 관계가 아주 깊은 사이래. 이씨 가문에서 계약을 빌미로 이사님을 계속 괴롭히니까, 일부러 뒤를 봐주러 오신 거래!"
"영웅이 미녀를 구하는 거네! 세상에, 이씨 가문도 벌벌 떨게 만드는 재벌이라니, 대체 어떤 인물일까?"
기서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우나리가 코웃음을 치며, 떠들어대는 동료들을 촌뜨기 보듯 쳐다봤다.
"그것도 몰라? 상류층에선 이미 파다한 소문인데. 우리 이사님을 속세로 내려오게 할 수 있는 분은, 당연히 그분이지.. ."
회차 3
기서우는 마우스를 움직여 예약 발송 버튼을 눌렀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기서우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날카롭게 잘생긴 이목구비, 맞춤 정장 아래로 탄탄한 근육이 드러난 몸은 어젯밤 그녀와 뜨겁게 얽혔던 그 남자였다.
'... 육성 그룹 유일한 후계자, 육지한 대표... 미친!'
육지한이 사무실에 나타난 순간, 사무실은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한아!"
기서우가 고개를 들자, 평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맹서이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항상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를 풀고 웨이브를 넣은 그녀는 평소의 차가운 이미지를 벗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맹서이의 화장한 얼굴을 본 기서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맹서이의 눈은 그녀와 많이 닮았고, 길게 뺀 아이라인은 눈매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맹서이는 평소 화장을 하지 않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반면 밝고 활기찬 성격에 외향적인 기서우는 두 사람이 닮았다는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공중에서 날아온 손바닥에 얼굴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 모든 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사무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사무실은 평소의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직원들의 대화 주제는 사무실에 있는 두 선남선녀를 벗어나지 못했다.
"헐, 저 육 대표님... 상류층에서도 톱클래스인데 우리 회사에 친히 왕림하시다니. 우리 이사님한테 정말 진심인 게 틀림없어."
"당연하지. 너 쟤네 무슨 사이인지 몰라?"
우나리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우나리는 일부러 잔뜩 무게를 잡으며 커피를 가져오게 하고 어깨를 주무르게 한 뒤,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우리 이사님이랑 육 대표, CC였대. 전설의 커플."
"근데 재벌가 재력이나 지위가 어디 보통이냐? 급이 다르지. 계약서 한 장으로 우리 커리어우먼 맹 이사님을 3년 전에 해외로 보내버렸잖아. 그때 둘이 안 좋게 끝났다고 들었는데, 오늘 분위기 보니까 쯧쯧, 아직 감정 남았네!"
기서우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3년 전, 맹서이가 해외로 떠난 날, 그녀는 우연히 육지한과 하룻밤을 보냈다. 3년 후, 맹서이가 귀국해 회사에 입사했고, 공교롭게도 그녀의 상사가 되어 진실을 엿보게 했다.
하늘도 영문도 모르는 이 가련한 피에로를 불쌍하게 여긴 것이 틀림없다. 3년 동안 그가 보여준 작은 호의들을 곱씹으며 사랑이라고 착각한 그녀를 완전히 깨어나게 하기 위해.
그녀는 그저 대역으로 위장한 피에로일 뿐이었다.
"기서우 씨!"
기서우가 고개를 들자 조 팀장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몇 번을 불렀는데?"
기서우는 머릿속에 가득 찬 잡생각을 떨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가 요새 몸이 좀 안 좋아서..."
정중히 사직서를 제출할 기회를 노리던 그녀의 손에 조 팀장이 서류 뭉치를 쥐여주었다.
"소회의실로 가. 이번 건 자네 담당이잖아. 이사님이 기다리셔!"
기서우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대답했다. "하지만 제 업무는 디자인뿐인데요... 이번 PT는 우나리 씨가..."
"걔 입은 떠드는 거 말고 뭘 할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