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세상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임신이지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강시영은 축하 받을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임신 검사 결과 보고서를 쥔 채 진료실을 나섰다. 조금 전의 충격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두 다리는 쉴 새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난 주, 5년 사귄 남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첫날 밤에 남자 친구의 외도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휴대폰에는 강시영 몰래 만난 여자와 친밀하게 찍은 사진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엄청난 충격에 술로 고통을 달랜 그녀는 몽롱한 상태에서 호텔 방마저 잘못 들어갔고, 다음 날 아침 낯선 남자 옆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날 밤, 강시영은 하룻밤을 보낸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지만,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와 넓고 화려한 방에 당장이라도 잠식될 것 같은 기분을 느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당혹감과 부끄러운 마음에 강시영은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호텔 방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단 하룻밤의 실수로 낯선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한 강시영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발신자는 그녀의 남편 박용태였다.
"시영아, 지금 병원 앞에 도착했어. 기다리고 있을게."
강시영은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조용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며칠 동안 메스꺼움과 현기증이 계속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녀는 병원을 찾았고, 예상하지도 못한 임신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강시영은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건물 앞에 주차된 박용태의 검은색 벤츠를 발견했다.
자리에 우뚝 멈춰 선 그녀는 길게 심호흡한 뒤 빠르게 주차되어 있는 차로 향했다.
훤칠한 키와 다부진 몸매에 검은색 맞춤 정장까지 입고 운전석에서 내린 박용태가 직접 그녀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의사는 뭐래?" 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가벼운 위염이라네." 강시영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에 매운 음식만 그렇게 먹더니. 앞으로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는 게 좋겠어. 위염에도 좋지 않잖아."
강시영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고, 차에 탄 순간, 코끝에 은은하게 맴도는 향수 냄새를 맡았다.
평소 방향제도 사용하지 않는 박용태였기에 은은한 향수 냄새는 한 가지 사실밖에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차에 강세영이 아닌 다른 여자도 탄 적 있다는 것이다.
박용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집에 데려다 줄 테니 쉬고 있어. 난 다시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해."
"음."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서있는 동안, 박용태는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움직인 강시영은 부드러운 무언가가 손끝을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을 시트 아래로 뻗자 분홍색 실크 스카프가 손에 만져지는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익숙한 스카프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봤다. 박용태의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에서 본 적 있는 스카프였다.
통화를 마친 박용태는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회의 때문에 너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회사로..."
강시영은 스카프를 그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날카롭게 물었다. "이건 누구 거야?"
박용태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언뜻 스치더니 이내 싱긋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만난 고객님이 차에 두고 간 것 같아. 내일 돌려드려야겠네."
그가 스카프를 낚아채려 했으나, 강시영은 팔을 뒤로 숨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박용태, 우리 이혼하자."
박용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시영아, 그냥 스카프일 뿐이잖아. 왜 갑자기 과민 반응하는 거야? 이혼이라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릴 수 있어?"
그의 뻔뻔한 반응에 강시영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언제까지 날 속일 생각이야? 결혼 첫날 밤에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간 거,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넋을 잃은 눈빛으로 강시영을 바라보는 박용태의 얼굴에 드물게 혼란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네가 오해 한 거야. 그날 회의가 급하게 잡혀 회사에 다녀왔을 뿐이야."
강시영은 그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박용태는 그녀를 배신했고,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강시영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봐서라도,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그녀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서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핸들을 세게 움켜쥔 박용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핸들을 힘껏 내리쳤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강시영은 거실에 걸려 있는 결혼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거실 벽 바로 가운데 걸려 있는 액자 속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와 보니 우습기 그지없는 사진이었다.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마친 첫날 밤, 그녀는 박용태가 임신아와 함께 침대에서 노골적으로 뒹구는 사진을 받았다.
몇 장의 사진은 결혼식을 막 끝마친 강시영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5년간의 추억은 배신과 울분으로 변해 있었다.
강시영은 조여 오는 가슴을 움켜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억누르고 있던 괴로움과 서러움이 쏟아져 나왔고, 두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텅 빈 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몰려오는 건 공허함과 허탈함뿐이었다.
그날 밤, 박용태는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일찍이 침대에 누운 강시영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고, 박용태의 넓은 가슴이 등에 닿는 느낌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쌀쌀한 바깥 공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팔로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시영아, 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오늘 일은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약속 할게. 사랑해."
그의 스킨십이 역겨웠던 강시영은 일부러 몸을 움직여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낮게 웃음을 터뜨린 박용태는 잠옷을 벗더니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생리도 끝난 거 같으니, 첫날 밤에 못 한 거 마저 해야지."
회차 2
결혼식을 마치고 회사에 급한 회의가 잡혔다고 떠난 박용태는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날 밤, 그와의 관계를 피하고 싶었던 강시영은 생리 중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다. 박용태는 오늘 집에 돌아와 사과하면 자신이 바람 피운 일은 이대로 지나갈 줄 알았던 것이다.
"내 방에서 당장 나가!" 곧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강시영은 쌀쌀맞은 태도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순식간에 욕구가 사라진 박용태는 짜증이 난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만 할 때도 됐잖아? 네가 몸이 아파서 예민한 건 알겠는데, 나도 계속 참아 줄 생각 없어.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 잊지 마."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내 방에서 꺼지라고!" 강시영은 여전히 찌푸려진 얼굴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박용태는 그런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일부러 나긋한 태도로 달래기 시작했다. "시영아, 우리 이미 결혼했어. 과거는 이제 그만 잊고 앞날만 생각하는 건 어때?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약속해."
불륜은 저지른 남자는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다.
강시영은 옆에 놓인 베개를 손에 쥐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난 객실에서 잘 거야."
박용태의 미간이 더욱 좁아 들었고, 심지어 그녀의 반응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과까지 했기에 강시영이 주제를 알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의 사과를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마음대로 해. 객실에서 자고 싶으면 그렇게 해."
강시영은 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휴대폰과 노트북을 손에 쥔 채 방문을 나서려 했다.
침대에서 몸을 뒤척인 박용태가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가족 연회가 있으니 나와 함께 본가에 다녀와. 우리 결혼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네가 참석하지 않으면 다들 비웃을 게 뻔해."
이후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은 박용태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베개를 바닥에 내던졌다.
강시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박씨 가문 연회에 참석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박용태와 함께 참석하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연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면, 박용태는 강씨 그룹을 헐값에 팔겠다고 위협하기 때문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순순히 가족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강씨 그룹은 강시영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물려준 회사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피땀을 흘려 일궜는지 모른다. 회사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어머니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끊임없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강씨 그룹은 어머니가 그녀에게 물려준 마지막 유산이기도 하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연회 시간에 맞춰 경성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가문인 박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박용태의 검은색 세단이 저택 마당에 들어서자 박씨 가문의 집사가 세단 앞을 막아서는 것이다. "여긴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빨리 나가세요!"
집사조차 박용태를 무시하는 모습에 강시영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 동안 이런 모습을 수도 없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없이 차에서 내려 한 켠에 묵묵히 서 있었다.
박용태도 박씨 성을 가졌지만, 박씨 가문에서는 줄곧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낙인 찍혔다. 그의 어머니는 박씨 가문 어르신 박관일이 밖에서 낳아 온 사생아인 데다, 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근본도 없는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이후 박관일은 박용태의 어머니를 가문에서 쫓아낸 뒤, 모든 관계를 끊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박용태에게 더 나은 미래를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어머니는 아이의 운명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확신 하나로 박용태를 박씨 가문에 보냈다. 이후 그에게 더 나은 기회가 있길 바라며 성마저 박씨로 바꿨다.
그러나 박용태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박씨 가문 사람들은 그가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혐오감과 경멸 어린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용태는 언젠가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박용태가 자부심처럼 여기는 회사 페리니아 그룹도 강시영의 투자로 시작된 것이다. 그녀가 그에게 선뜻 내어준 투자 비용 몇 천만 원과, 강씨 그룹의 지원 아래 페리니아 그룹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고 몇 년 도 안 된 사이, 사람들의 눈에 띄는 대규모 회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 강시영은 이 모든 투자가 부질없는 낭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잘못된 판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배신을 보상으로 받았으니 말이다.
박용태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차를 구석진 곳에 주차했지만, 집사는 여전히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결국 참다 못한 박용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집에서 주차도 마음대로 못 한다는 거야?"
집사는 오만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을 위한 자리를 미리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박용태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고, 당장 화를 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강시영은 잔뜩 주눅 된 그의 얼굴이 퍽 보기 좋았다.
바로 그때, 고급 세단 여러 대가 저택 마당으로 들어오자 집사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고, 긴장한 얼굴로 박용태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쳤다. "빨리 차 빼세요. 박성욱 대표님께서 돌아왔어요!"
박성욱, 박관일의 막내아들로 박씨 가문 후계자 순위 1위에 오른 사람이다. 경성의 모든 세력을 통합시킬 수 있는 인물로, 그의 이름만으로도 경성의 모든 세력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강시영은 고급 세단이 들어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공손한 자세로 빠르게 달려간 집사가 가운데 멈춰 선 세단의 차 문을 열자 박성욱이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다부진 체격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맞춤 정장과 윤이 나는 구두가 조명 아래서 화려하게 빛났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그녀는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의 엄청난 존재감은 주위에 있는 모두를 숨 막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강시영은 가로등 불빛 아래 유난히 반짝이는 반지를 발견하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유난히 눈에 익은 반지, 분명 그날 밤 호텔에서 본 적 있는 반지였다.
'그 남자가 어떻게...'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천천히 고개를 든 강시영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눈동자였다.
'그날 밤 호텔 방에 잘못 들어가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자가 작은 삼촌이라고?!'
회차 3
큰 키에 탄탄한 근육과 굴곡이 그대로 보이는 듯한 몸매를 가진 박성욱의 몸에서는 특유의 오만함과 강력한 기세가 풍겨 왔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두의 눈을 사로잡는 특유의 분위기를 가졌다.
탄력 있는 근육을 감싼 검은색 맞춤 정장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섬세한 이목구비와 잘생긴 외모는 멀리서 보아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의 완벽함에 가까운 얼굴에 자리에 얼어붙은 강시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박성욱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자 강시영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도 시선이 빠르게 멀어졌고, 그는 일행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결국 박용태는 쓰레기장 근처에서 간신히 자리를 찾아 차를 밀어 넣듯이 주차해야만 했다.
"시영아, 우리도 이제 들어갈까?" 박용태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물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강시영은 입술을 비집고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혼자 들어갈 수 있어."
강시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박씨 가문에서 소란을 피울 수 없었기에 박용태는 꾹 참았다. "그래."
연회가 끝날 때까지 박성욱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강시영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만약 그가 연회에 참석했다면, 그녀는 어쩔 바를 몰라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연회 도중 그녀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정원으로 나왔다.
연회장은 시끄러운 음악 소리로 가득 찼지만, 정원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온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박씨 저택의 화려함은 일반 재벌 가문 수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다. 박용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박씨 가문에 돌아오려는 마음이 이해될 정도였다. 어느 누가 돈과 권력을 마다할 수 있을까?
정원 주위를 한참 동안이나 산책한 강시영은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연못 가까이에 도착한 그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두 명의 경호원이 한 남자의 팔을 끌고 연못에 머리를 쑤셔 넣는 것이다.
잔뜩 겁에 질린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맹세하고 있었다.
남자의 주위에 모여든 12명 이상의 경호원들은 마치 그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저승사자 같았다.
덤불 뒤로 몸을 숨긴 강시영은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움켜잡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경호원은 남자의 숨이 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연못에서 끌어내고 쓰레기처럼 바닥에 내팽개쳤다.
"대표님, 그날 대표님 방에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 저는 정말 모릅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경호원 중 한 명이 남자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아직도 모른다고 잡아떼는 거야?"
"저는 정말 모릅니다. 그날 너무 깊게 잠이 들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정말이에요!"
곧이어 남자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손마디가 부러지는 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발 밑에서부터 전해지는 오싹한 기운이 등골까지 전해진 강시영은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날 호텔 방에 있었던 남자가 박성욱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즉, 박성욱은 방을 잘못 찾은 여자가 강시영이라는 것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는 말이다.
강시영은 두려운 와중에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그녀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 눈앞에 두 명의 경호원이 나타났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연못을 향해 높은 소리로 외쳤다.
자리에 얼어붙은 강시영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변명했다. "저는 우연히 지나가는 중이었어요. 아무것도 못 봤어요. 맹세할게요!"
강시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심하게 살핀 고혁수는 박성욱에게 보고했다. "대표님, 박용태 씨 와이프입니다."
이후 침묵이 한참 이어지는 것 같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려와."
강시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경호원은 우악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아 끌고 앞으로 끌고 갔다. 충격에 자리에서 비틀거린 그녀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마른침을 삼킨 강시영은 두려움에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마저 없었다.
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박성욱은 검은색 V넥 티셔츠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경이로운 존재인 것만 같았다.
박성욱의 날카로운 눈빛이 강시영의 몸에 고정됐다. 가녀린 몸을 떨며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모든 움직임에서 겁에 질린 내색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나약함에 박성욱은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 나는 것을 느꼈다.
"얼굴 들어."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피스를 세게 움켜쥔 강시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지만 박성욱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왜 여기까지 왔지?"
"길, 길을 잃었어요. 일부러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요."
"길을 잃은 게 확실해? 아니면 박용태가 우리 말을 엿들으라고 시켰어?" 박성욱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니에요. 절대 엿듣지 않았어요!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요." 강시영은 맹세하듯 손을 들었지만, 그의 차갑게 식은 눈빛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박성욱은 그녀를 추궁할 생각 없는 듯, 손을 가볍게 움직여 경호원에게 그녀를 놓아주도록 손짓했다.
안도감을 느낀 강시영은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다.
박성욱이 누워 있는 바로 옆에 쓰레기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울렁거림과 함께 어지러움을 느낀 그녀가 몸을 휘청거리더니 그의 품에 쓰러졌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경호원들은 당장 그녀를 끌어내려 했다.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박성욱은 손을 들어 경호원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강시영은 메스꺼운 느낌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의 품에 안겨 몇 번 더 입을 막고 구역질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구역질만 했다.
박성욱은 곧바로 그녀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박용태가 나를 유혹하라고 시킨 거야?"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힘겹게 몸을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강시영은 무고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작은 삼촌, 죄송해요. 최근에 몸이 좋지 않아 민폐를 끼쳤어요. 정말 죄송해요."
박성욱은 그녀가 자신을 작은 삼촌이라고 부르는 호칭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는 겉모습은 어리숙해 보여도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지 잘 알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이 강시영의 정교한 얼굴을 비추자,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잔뜩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작은 삼촌 안녕히 계세요."
말을 마치고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돌아서 떠나려 할 때, 박성욱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낚아챘다.
그는 담담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강시영은 심장이 당장이라도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설마 나를 알아본 건 아니겠지? 아니면 그날 밤, 얼굴을 들키기라도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