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666호실 방문의 살짝 열린 틈 사이로 입가에 번진 립스틱과 헝클어진 머리를 미처 정리하지 못한 유소월이 하이힐만 손에 쥔 채 까치발을 하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전날 회사 워크숍에서 그녀의 세상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 친구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소월은 실연의 아픔을 두 잔의 술로 잊으려 했고, 취기를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다 방을 잘못 들어간 것이다.

방문을 열자마자 낯선 남자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 유소월이 당장 방을 나서려 했지만, 비틀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의 품 안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의 몸이 잠깐 경직된 것 같더니 이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턱을 살짝 움켜쥐고 입술을 뜨겁게 맞췄다.

유소월은 당장이라도 남자를 밀쳐내려 했지만, 입술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남자의 뜨거운 입술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취기와 슬픔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결국 남자의 따뜻한 품에 몸이 녹아 내릴 것만 같았던 그녀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말았다.

그녀의 허리를 움켜잡는 남자의 커다란 손과 함께 동시에 느껴지는 낯선 통증을 느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뜨거웠던 순간이 지나가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후회 막심했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유소월은 까치발을 하고 몰래 방을 빠져 나왔다.

굳게 닫힌 방문에 적힌 번호판을 확인한 유소월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낸 사람은 부서 총괄 관리자인 송이동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송이동은 여자관계가 복잡하기로 유명한 상사다. 여태껏 만나온 여자 친구는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기에 하룻밤의 관계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방이 워낙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유소월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고 기억조차 못 할 것이다.

유소월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유소월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몸 곳곳에 남은 지난밤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목이 높은 스웨터를 입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동료 주경하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월아, 빨리 문 열어. 큰일 났어. 빨리 나와봐."

주경하의 다급한 목소리에 유소월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와 송이동이 하룻밤을 보낸 사실이 벌써 소문난 걸까? 아직 날도 완전히 밝지 않았는데?'

송이동은 성세 그룹의 임원이지만, 그녀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턴에 불과했다.

설령 소문이 퍼진다 해도 바람둥이인 송이동은 어떤 타격도 받지 않겠지만, 유소월은 끝없는 뒷담화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고위 임원과 몸을 섞은 인턴. 회사에 적응하기도 전에 끝나버릴 것이다.

유소월은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잔뜩 흥분한 표정을 한 주경하는 유소월의 창백한 얼굴과 뻣뻣한 움직임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빨리 나와. 내가 엄청난 사람을 보여줄게. 누군지 알아? 우리 회사에서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사람이야. 안 대표님이 우리 워크숍에 나타났다니까!"

유소월은 비밀을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경하가 쉴 새 없이 떠드는 소리에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유소월은 그녀를 따라 유난히 시끄러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유소월은 베일에 싸인 대표 안성주를 면접 날에 한 번 본 적이 있다. 고작 한 번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의 강렬한 인상이 남아 있었다. 위험할 정도로 완벽하게 잘생긴 그의 몸에서 압도적인 위압감이 느껴졌다.

안성주는 파산 직전에 이른 회사를 혼자의 힘으로 7년 만에 완벽하게 일궈냈다.

면접을 볼 때, 안성주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유소월은 그의 매력에 단번에 빠져들고 말았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느껴지는 압도감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존경심이 피어 올랐다.

그런 안성주가 창가 옆자리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꼿꼿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완벽했고, 우아한 몸짓에서 권위가 느껴졌다.

유소월은 엄청난 매력과 자신감을 뿜어내는 안성주를 가만히 지켜봤다.

대부분의 여자 직원들은 일부러 안성주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그의 얼굴을 훔쳐보며 낮은 목소리로 의논했다.

"우리 대표님이 너무 잘생긴 것 같아요."

"대표님 목에 키스마크가 남아 있던데, 어젯밤에 대표님과 밤을 보낸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옆자리에서 또렷하게 들려오는 키스마크라는 단어에 유소월은 본능적으로 스웨터 옷깃을 더 잡아당겼다. 어젯밤에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짓을 떠올린 그녀는 안성주를 보고 느낀 설렘의 감정은 금세 사라졌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주경하는 안성주의 목에 남은 흔적을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유소월은 대꾸할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그때, 레스토랑에 오만하게 모습을 드러낸 송이동이 안성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표님, 잘 주무셨어요?" 송이동이 꽤나 건방진 말투로 물었다.

안성주는 우아하게 아침을 먹으며 레스토랑을 가볍게 훑어봤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유소월에게 잠깐 시선을 고정한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괜찮았어." 안성주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바로 뜨거운 시선을 느낀 유소월은 당황한 듯 몸을 더욱 움츠리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송이동은 낮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대표님, 제 허락도 없이 제 방을 차지했으니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었겠죠. 저는 근처에 빈방이 없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이런 저를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여겨주세요."

성세 그룹 직원 모두가 호텔에 모여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남은 방이 없었다. 안성주가 갑자기 호텔에 나타난 탓에, 스위트 룸을 차지한 송이동이 그에게 방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안성주는 개의치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서 월급 인상 해줄게."

그 말을 듣고 송이동의 안색이 금세 밝아지더니 이내 허리를 굽실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회차 2

안성주의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은 유소월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조금도 엿듣지 못했다. 하여 그녀는 어젯밤 666호 방에서 밤을 보낸 남자가 안성주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송이동이 팔까지 연신 휘두르며 안성주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유소월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가슴을 꾹 움켜잡았다. 더욱이 송이동이 회사 대표 안성주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폭로라도 할까 봐 더 두려웠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그녀는 하루 종일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다행인 것은 별다른 사고 없이 워크숍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직원들을 모두 태울 수 있는 셔틀버스가 도착했을 때, 유소월은 자신이 한참 뒤처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날의 여파로 몸 곳곳이 뻐근한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어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 순서로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뒷자리에 앉은 주경하가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내저었다. "소월아, 여기!"

갑자기 조용해진 버스 공기를 가로질러 안성주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자리가 하나밖에 없나요?"

우뚝 자리에 멈춰 선 유소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봤다. '안성주 대표도 버스를 타고 회사에 돌아가려는 걸까?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 방금 나에게 짜증을 낸 걸까?'

그러나 회사 대표인 안성주는 인턴인 그녀가 어디에 앉는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직원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안성주의 옆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안성주의 무심한 행동은 여자 직원을 무시하는 게 틀림없었다.

유소월은 안성주가 자신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한껏 움츠린 여자 직원은 낮은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린 뒤 그녀의 앞을 가로질러 주경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주경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쏘아붙였다. "여기는 제 친구 자리에요."

그러자 여자 직원도 한껏 턱을 치켜 들고 비아냥거렸다. "뭐라고요? 의자에 친구 이름이라도 새겼어요? 회사에서 셔틀버스를 보내줬는데, 이 자리가 언제부터 당신 친구 자리로 지정되었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주경하는 옆에 앉은 직원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제 남은 자리는 안성주의 옆자리뿐이다. 찰나의 순간, 유소월은 셔틀버스에서 내려 그동안 모아둔 비상금을 털어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다.

이내 그녀를 쳐다보는 안성주의 눈빛이 그리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뭐합니까? 가는 내내 서 있을 겁니까?"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유소월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마 그녀가 자리에서 한참 머뭇거려 화를 내는 걸까?

남자 직원들의 동정심 가득한 눈빛과 여자 직원들의 질투심 가득한 눈빛 아래 유소월은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안성주의 옆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안성주의 낮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내가 그렇게 무서워요?"

유소월은 당장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지 못했다.

비록 안성주에게 존경심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날카로운 표정과 권위 가득한 눈빛은 주눅 들기 충분했다.

만약 그녀가 사실대로 말한다면, 수습기를 통과하기도 전에 잘릴지도 모른다.

유소월은 아첨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안성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닙니다, 대표님. 대표님의 곁에 앉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안성주는 그녀의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든 듯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감은 줄어들 줄 몰랐다.

유소월은 가는 길 내내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았다.

이번 워크숍은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참가한 워크숍에서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모자라 그동안 신념처럼 지켜온 순결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대표 옆자리에 당첨된 것도 모자라 정자세로 앉아서 가야 하다니. 유소월은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셔틀버스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린 유소월은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안성주의 옆자리에서 벗어난 지금, 공기가 유난히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주경하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소월아, 대표님의 옆자리에 앉아 오는 기분 어때?"

유소월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양이 된 기분이야."

주경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양? 왜 양이 된 기분이야?"

유소월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참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의 기분을 느낀 것 같았으니까."

순간, 주경하의 얼굴에 순수한 동정심이 피어 오르더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유소월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다급하게 시선을 피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유소월이 주경하를 불러 세우려 할 때, 손에 쥔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며 카톡에 새로운 친구 요청 알림이 나타났다. 스팸이라고 확신한 그녀는 더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그러자 새로운 친구 요청 알림이 또 다시 울리더니 짧은 메시지가 함께 첨부되었다.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았어?]

유소월은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인지 기억해 내려고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리지 못했다.

이번에도 문자를 무시하려던 그녀의 두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설마 어젯밤 송이동의 방에 물건을 두고 온 건 아닐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새로운 친구 요청을 보내온 사람은 송이동일까?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수락을 누른 그녀는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원하는 게 뭐예요?]

10분이 지나서야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을 처리해야지.]

유소월은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송이동은 그녀가 안성주의 험담을 하는 말을 들은 걸까? 그제야 주경하가 왜 그렇게 다급하게 도망쳤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 것은 송이동의 낯선 말투였다. 어쩐지 안성주와 대화하는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그럴 리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어처구니없는 실소를 터뜨린 유소월은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비난했다.

그녀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송 본부장님, 어젯밤 일은 실수였어요. 없던 일로 하시고 앞으로 각자의 길을 가시죠?]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어쩐지 말투가 너무 직설적인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메시지를 삭제하고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송 본부장님, 제가 놓고 간 물건을 언제 다시 찾으러 가는 게 좋을까요?]

그 시각, 이미 대표 사무실에 올라온 안성주는 집무 책상 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유소월이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한 그의 안색이 확연히 굳어지더니 이내 빠르게 답장을 적었다. [날 송이동이라고 착각하는 거야?]

메시지를 확인한 유소월은 상대방이 화를 꾹 억누르고 답장을 보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송 본부장님이 아닌가요?]

꺼진 휴대폰 화면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설마 송이동은 방금 나를 시험하려 했는데, 내가 바로 알아차려서 화가 난 걸까?'

'고작 이런 일로 화를 내다니.' 꼭 화를 내야 한다면 오히려 그녀가 화를 내는 게 맞다.

하룻밤의 실수를 따지고 보면 손해를 보는 건 여자쪽이기 때문이다.

유소월에게 아주 작은 용기라도 남아 있다면, 당장 송이동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래봤자 직장을 잃는 것이니 대수롭지 않았겠지.

그러나 그녀에게는 추궁할 용기조차 없었다.

유소월은 자존심을 꾹 억누르고 다시 메시지를 입력했다. [송 본부장님,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제 물건을 돌려받고 싶어요.]

곧바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 [기다려.]

어처구니없는 답장에 유소월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기한도 없는 기다림이라니.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까?

워크숍도 끝났고 셔틀버스도 회사 건물 앞에 멈춰 서자 동료들은 빠르게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곁에 있던 주경하의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텅 빈 로비에 홀로 우뚝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소월은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송이동은 당장 나를 만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회차 3

어느새 하늘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유소월은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꺼진 휴대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송이동은 그녀가 잃어버린 물건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았고, 그녀의 메시지에 답장도 하지 않고 있다.

밤도 점점 깊어지고 있는데, 왜 아직까지 아무 소식도 없는 걸까? 설마 오늘도 그녀와 밤을 보내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어제 밤새 그녀를 괴롭힌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걸까?

유소월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불안감에 그러지 못했다.

성세 그룹은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회사였고, 인턴으로 채용된 것조차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상사인 송이동을 화나게 하는 것은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쪼그리고 앉은 유소월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형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려 했다.

결국 그녀는 현실에 타협해야만 했다. 그녀가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 선택은 오로지 송이동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최악인 것은, 어젯밤 유소월이 먼저 술에 취해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기에, 그녀가 경찰에 신고한다 해도 누가 그녀의 편에 서 주겠는가?

유소월이 넋이 나간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시계는 어느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텅 빈 로비에 무거운 발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왜 아직도 불이 켜져 있지? 설마 이 시간에 회사에 사람이 있는 걸까?" 동시에 송이동의 여유로우면서도 특유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소월은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송 본부장님, 드디어 오셨네요."

송이동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물었다. "날 기다렸어요?"

'알면서 왜 모른척이지?'

유소월이 화를 억누르고 정중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송이동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방금 무슨 말을 중얼거렸어요?"

송이동은 인턴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예쁘게 생긴 유소월을 처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다. 그러나 차도녀에 가까운 그녀의 차가운 매력에 줄곧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을 뿐더러, 그의 유혹에 조금도 넘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워크숍이 끝나자마자 왜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고 회사에 남아 있는 걸까?

"형법을 외우고 있었어요." 입술을 꼭 깨물고 딱딱하게 말을 뱉은 유소월은 당장이라도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송이동은 평소 여직원들에게 무척 친절한 상사인데, 유소월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유소월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는 동안, 복도 끝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얼굴을 하고 벽에 기대 서 있는 안성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조명 아래 큰 키와 특유의 오만한 얼굴에 선명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섬세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입가에 번진 거만한 미소에도 매력이 흐려지지 않았고 조각 같이 잘생긴 얼굴을 유지했다.

유소월은 심장이 그대로 철렁 내려앉은 듯했다. 안성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이 정화되는 것 같은 느낌에 남자를 판단하는 기준이 한 단계 승화된 것 같았다.

송이동은 유소월이 안성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회사에서 가까이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냉 미녀 유소월조차 그의 사촌 형님 안성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니. 형님의 잘생긴 얼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송이동의 콧방귀 소리에 유소월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회사의 최고권력자 안성주의 잘생긴 얼굴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마치 사춘기 소녀라도 된 것처럼 뻔뻔하게 안성주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잘리고 싶어 환장한 걸까?

유소월은 우선 송이동의 손에서 그녀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송 본부장님, 어젯밤에..."

유소월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안성주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공기를 가로질러 들려왔다. "송이동, 주차장에서 차 빼 와."

송이동은 안성주가 전문 기사를 고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캐묻지 못했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갈 뿐이다.

텅 빈 로비에 안성주와 단둘이 남게 된 유소월은 긴장감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안성주의 차가운 표정을 발견한 유소월은 그가 자신과 송이동의 실수를 알아차렸을지 궁금했다.

그때, 건물 앞에 차를 세운 송이동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자 친구의 호출에 그는 안성주와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르게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안성주는 송이동에게 눈길조차 건네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로비에 홀로 남게 된 유소월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제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나 집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안성주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유소월이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유소월이 자리에서 돌아서기도 전에, 안성주가 창문을 내리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집에 어떻게 가지?"

유소월은 애써 차분하게 대답하려 했다. "저는 버스 타고 가면 됩니다."

안성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유소월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고개까지 흔들었다. 회사 대표가 인턴을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버스 타면 바로예요."

자신의 거절에 대답도 하지 않고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안성주의 눈빛에 유소월은 등골이 오싹해 났다. 더 거절할 수 없었던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성주와 제일 멀리 떨어진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녀가 차에 앉기도 전에, 안성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 차가 택시인 것 같아?"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말투 속에 숨겨진 분노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말에 유소월은 바로 뒷좌석 차 문을 닫고 조수석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맸다.

집으로 가는 동안 유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성주는 굳은 얼굴로 운전에만 집중했다.

긴장감을 주체하지 못한 그녀가 가방을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마디마저 하얗게 질려 통제할 수 없이 떨렸다.

안성주와 나눈 몇 마디 대화 속에서 유소월은 그가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분도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마치 폭풍우의 구름과 같았다.

유소월은 앞으로 그와 더욱 거리를 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섰을 때, 안성주는 뭔가 할 말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유소월이 차에서 내릴 때까지 안성주의 얼굴에는 차가우면서도 경멸에 가까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

유소월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안성주에게 집까지 태워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왜 이렇게까지 그녀를 싫어하는 걸까?

하지만 그 불안감도 얼마 가지 못하고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소월의 전 남자 친구, 조지환이 그녀의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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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사람, 엇갈린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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